각진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전원생활의 고즈넉함을 꿈꾸며 전원주택이나 별장에 대한 둥근 로망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겼던 옛 선비들의 멋스러움이 마냥 부럽게 느껴진다.
정자는 우리네 풍류문화의 산실이자 거점이었다.
수려한 우리 강산의 풍치 좋은 곳이면 으레 정자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역사의 부침과 함께 숱한 이야기를 담은 애환들이 서려 있다.
순탄하게 관직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세도가문 선비들이 지은 것도 많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정자와 누각의 상당수는 사화나 당쟁의 와중에서 중앙정치 무대를 벗어나 은거한 선비들의 활동공간이었다.
정자와 누각 그리고 정원은 조금씩 그 속성의 차이가 있다.
누는 공적 이용공간의 성격이 강하고 정자는 주로 사적으로 활용된 공간이라 하겠다.
정원은 궁궐정원, 마을정원, 그리고 주택정원과 별서정원 등이 있다.
그 중 별서(別墅)정원이란 산천이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오늘날의 별장과 유사한 개념으로 주거의 기능을 갖추었다.
누정은 사방이 트여 있어 주변경관을 감상하기 용이한 점이 특징이라면 정원은 그 중심요소로 물을 이용하였으며, 기능적 측면이 강조되고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사상 등이 결합된 공간으로 자연경관을 자신의 정원으로 끌어들였다.
◆ 4백 년 세월의 은행나무와 경정(敬亭)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있는 ‘서석지’는 1613년(광해군 5년) 성균관 진사를 지낸 석문 정영방(1577년~1650년)이 조성한 별서정원이다.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은둔하면서 학문 정진하기 위해 그의 나이 36세 때 만든 연못(池塘)을 말한다.
연못 앞에 지은 정자 ‘경정(敬亭)’과 함께 지난 1979년 중요민속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서석지로 들어서는 마을입구에는 남이포(南怡浦)의 절벽과 높다란 선바위가 마주 보고 있고, 그 사이로 반변천과 청계천이 합수하여 맑게 흐르고 있다.
강변에는 새알 같은 참한 조약돌과 은빛 모래가 넓게 퍼져 있다.
누구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를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은 찍어야 마땅할 것 같은 아름다운 풍광이다.
이곳 남이포와 선바위에는 남이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조선 세조 때 이곳 연당리 부근에서 용의 아들임을 자처하는 아룡과 자룡 형제가 역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남이장군을 보내서 치열한 싸움 끝에 이들 형제의 난을 진압했다.
이때 장군이 암벽에 자신의 초상을 칼로 새긴 뒤 이곳을 ‘남이포’라고 하였다.
싸움이 끝나자 남이장군은 부근의 지형을 살펴보고 청계천의 물길을 돌려야만 다시는 반란을 꾀하는 무리가 나오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용마를 탄 채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
그때 마지막으로 칼을 벤 흔적이 바로 선바위라 한다.
서석지에 도착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노거수 은행나무의 위용이었다.
보호수인 엄청난 크기의 은행나무가 이곳의 오랜 연륜을 증명하듯 당당히 서 있다.
선비의 지조를 지키며 400년 세월을 서석지와 함께한 이 나무는 석문 선생의 부인이 이곳으로 올 때 가마 속에 작은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사대부들이 정원수로 은행나무를 심은 뜻은 공자사상을 흠모한 유학자들이 마음의 징표로 삼기 위함이었다.
희한한 점은 암수가 이웃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데 주변을 살펴봐도 수나무가 뵈지 않는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짝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설사의 말이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하나, 둘, 셋 까치집이 세 채 얹혀 있는 은행나무 밑으로 노란 은행잎이 융단처럼 수북 깔려있다.
돌담 고샅길 은행 알이 발에 밟혀 뽀드득 껍질 깨지는 소리가 구수하다.
◆ 언제나 열려있는 곳
서석지는 상시 개방되어 언제나 사람들을 따뜻이 맞이한다.
들어서면 왼편 서단에는 경정(敬亭)이 자리하고 있다.
경정은 넓은 6칸 대청과 방 2개로 되어 있는 큰 정자이다.
대청마루에 걸린 편액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서 수백 년 세월을 건너왔다.
이곳에서 공부와 강습을 하면서 시회도 갖고 불꽃 튀는 정치토론도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경(敬)은 단순한 공경의 뜻이 아니라 성리학과 퇴계학파에서 가장 중시하는 사상개념이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주변 것들에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곧 경이었다.
성리학을 신봉했던 조선사대부들은 그래서 경을 가장 중시했고, 정영방 역시 서석지에 은거하며 평생 받든 사상이었다.
신발을 벗고 누마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니 바람결에 연잎 스치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고 연꽃봉오리들 우뚝우뚝 솟아 초롱불 밝히는 모양을 상상하면서 한순간 이승임을 잊을 수도 있겠거늘 아쉽게도 계절이 계절인지라 사방은 적요하고 연못은 진창인 채 우울했다.
하지만 차를 마시며 독서하기에 이만한 별천지가 또 있을까 싶었다.
연당의 연꽃들이 봉오리를 터뜨리는 7월 중순께 다시 와야지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대신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게 잘 정돈되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온돌방이라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 누워보고 싶은 생각이 살짝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서 가끔 묵어가는 여행객도 있다고 들었다.
무릇 문화재란 그렇게 사람 체온이 가닿고 훈기를 스며들게 해야 잘 관리하는 것이리라.
◆ 군자의 면모 지닌 연꽃 심어
약 460평 규모인 자그마한 별서정원 서석지의 핵심은 역시 연당이다.
평지에 연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 돌을 배치하여 연을 심었다.
사대부들이 연꽃을 애호했던 이유는 연꽃이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의 면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그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칭송했고, 잔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은 것을 상찬했다.
멀리 있을수록 향기 깊음을 좋아했고, 우뚝이 깨끗하게 서 있어 멀찌감치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는 군자의 자태를 사랑했다.
연못의 연꽃은 조선유학자들에겐 감정이입의 대상이었고, 정영방 자신도 저 연못 속 연꽃처럼 여기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경정보다 먼저 지은 주일재가 있고, 경정 뒤편에는 수직사(守直舍) 2동을 부설하여 별서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20평 규모의 사각형 연못은 북쪽으로 사우단을 조성했으니 전체 모양은 凹자 형태이다.
그리 큰 규모라 할 수는 없으나 벼슬을 헌 갓처럼 내버리고 떠나온 사람이 가지기엔 제법 큰 정원이다.
3칸 서재인 주일재 앞 사우단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를 심어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고 있다.
사군자 가운데 난 대신 소나무를 두었다.
주일재(主一齋)는 한 가지 뜻을 받드는 서재란 뜻이다.
사대부들이 정원수로 사군자를 즐겨 심은 데는 외적인 미보다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닮고자 한 것이니, 사우단과 벗한 삶 속에서 그 마음을 잇고자 함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기상, 잔설 속에서도 꽃 피우는 청빈과 은일, 이러한 자태를 사랑하여 그들을 정원수로 삼았던 것이다.
연못은 사우단을 감싸는 U자 형태로 연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 ‘읍청거’를 내었고, 반대편의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인 ‘토예거’를 만들었다.
서석지의 하이라이트는 연못 안 90여 개에 달하는 많은 돌들이다.
서석군(瑞石群)이라 불리는 돌들이야말로 이 공간의 주역이다.
연둣빛 수생식물들이 표면을 덮은 물 사이로 솟아있는 저 돌들은 하나하나가 산이고 바위며 섬이다.
작은 다도해를 연못 안에 구현했다고나 할까. 연꽃과 조화를 이루는 저 다채로운 돌들의 모습이 서석지의 모든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읍청거 쪽 90여 개의 서석들이 수위에 따라 물속에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여 사소하고 미묘한 변화를 바라보며 ‘경’의 마음을 다잡는다.
더욱이 정영방은 자신이 조물주라도 된 양 솟아있는 작은 암반 하나하나에 제각기 이름을 붙였다.
서석지라는 이름부터 연못을 팔 때 땅속에서 상서로운 모양의 돌(瑞石)이 나왔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신선이 노니는 선유석(仙遊石), 선계로 통하는 다리 통진교(通眞橋), 바둑 두는 돌 기평석(棋坪石), 낚싯줄을 드리우는 수륜석(垂綸石), 물고기 형상의 어상석(漁狀石), 별이 떨어져 형성된 돌인 낙성석(落星石), 상서로운 구름같이 생긴 돌 상운석(祥雲石) 등, 이러한 명칭은 그 자체로 정영방의 시라 해도 무방하며, 서석지와 주변산천 경개의 정수를 굴절 없이 노래한 절창이라 하겠다.
이처럼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본질을 생성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도 그랬듯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름을 붙이면 내게 그건 특별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저 못 속의 돌들은 가히 그가 배치하여 창조한 소우주였다.
우리나라 3대 개인 정원의 하나 서석지
돌에 낀 푸른 이끼나, 돌 위에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에서 깊고 오묘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비가 와서 돌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보고 넓고 깊은 산수자연의 풍경을 본다.
이렇듯 괴석은 자연에 귀의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쳐 일으키고 상상력을 발휘케 하여 대자연 속으로 끌어들이는 기능을 한다.
작은 돌 하나가 내 마음의 산이요, 저 연못 하나가 내 마음의 우주가 되는 것이다.
그걸 알아보지 못한다면 서석군의 저 돌들은 하나같이 우물가의 빨래판처럼 보일 뿐이다.
자연은 감상자의 심정적 소유물이 되면서 인문화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석지는 그저 완상만 하는 정원이 아니라 읽고 사색하는 정원이라야 한다.
많은 이들이 보길도의 세연정, 담양 소쇄원과 더불어 서석지를 우리나라 3대 정원이라고 말하는 진정한 이유를 알겠다.
수학적으로 계측된 규모가 아닌 그런 확장된 사유의 폭이 고려된 기준이었을 것이다.
들입의 남이포와 선바위 사이로 흐르는 강물은 물론이고, 연못에서 직선거리로 십리쯤 되는 영양군 유일의 국보 봉감모전오층석탑이 있는 들판까지를 외원(外苑)으로 삼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면 2만5천여 평이나 되는 보길도 윤선도 원림이나, 1천4백여 평의 소쇄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정원이 아닌가. 그래서 서석지는 자연과 인간의 합일사상을 토대로 만든 조선시대 대표적 문화유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원의 모든 볼거리들은 정원을 조성한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 철학이나 욕망 등의 내용을 은밀히 누설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시각적으로만 반응하는 잘못된 습관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옛 정원을 바라본다면 우리나라 정신문화와 풍류문화의 진면목을 능히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있으리라.
권순진
시인 ·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