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묘역(11.3)
아침 10시50분에 전철3호선 일원역 2번출구에서 만나기로 했서 부리나케 준비를 하고 갔는데도 시간이 조금 늦었다.
동네 아파트 김밥집에서 김밥 3줄을 사고 마을버스 5-1번을 타고 11-3번을 타고 갔다.
가는 도중에 차가 잘 빠져서 과천을 넘어 대공원까지는 잘 갔는데 그 이후로는 아마도 고속도로를 타는 차량에 막힌 것같았다.
겨우 빠져 나와서 양재역에서 시간이 넘어가기에 택시를 탔다.
택시에서 광나루님에게 전화를 해서 택시타고 가는데 길이 막혀서 시간이 조금 늦을 것같다고 하니 광나루님도 가는중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택시에서 내리니 2번출구가 아니고 1번 출구이다.
1번출구에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서 2번 출구를 찾아갔는데 거리가 조금 되는 것같았다.
도착하고 보니 우리가 제일 늦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모이셔서 광나루님을 따라갔다.
미리 연락을 해 놓으셔서 광평대군묘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 올라간 곳은 광평대군의 묘였다.
광평대군은 세종대왕의 5남이나 20살에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이 옆에 묘가 있는 영순군이다.
그리고 그 옆 무안대군 방번의 묘가 있는데 아시는 바와 같이 방번은 태조의 7번째 아들인데 왕자의 난 때 방석과 함께 태종에게 죽었다.
세종대왕이 광평대군을 방번의 후사를 이어주기 위해 양자로 입양시켜 그 인연으로 이 묘역에 같이 있는 것같았다.
광평대군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 후손들은 상당히 번창을 한 것으로 이 묘역이 상당히 넓다는데서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큰 길을 나가서 버스타고 가면서 보니 길가에도 묘역이 있었다.
버스에 타고 가면서 생각을 해보니 예전에 81년경으로 기억되는데 같이 근무하셨던 이 00 선생님이 광평대군파라고 하신 것같았다.
그 당시에는 별로 유명한 조상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가장 번성한 파중의 하나가 된 것같았다.
그 분이 29년생 정도 되셨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여주분이셨고 나중에 들으니 작고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같다.
여주에 농사를 많이 짓고 있어 거기서 쌀을 가져다 먹고 퇴직후에도 여주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있다.
어쩌면 이런 것도 인연일지 모르겠다.
헌인릉으로 가기 위해 광평대군묘역을 나오게 되었다.
아래내용은 강남구청 홈페이지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광평대군묘역 일원(廣平大君墓域 一圓)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8호
수서동 산 10-1 소재
1981년 2월 5일 지정
이 묘역 일원은 현재 서울 근교에 있는 왕손의 묘역 중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궁말 혹은 궁촌이라 불렸던 수서동 대모산(大母山)에 자리잡고 있다.
총면적 125,237평의 산에 광평대군 내외의 묘소를 비롯한 그 종문 700여기의 묘소가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고, 종가재실의 고옥도 함께 있는 공동묘역이다.
광평대군 장의공(章懿公) 이 여(李璵)는 1425년(세종 7년)에 태어나서 1432년에 광평대군으로 봉하여졌고,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44년(세종 26년)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다.
광평대군의 묘소는 본래 지금의 삼성동 선릉 부근인 광주 학당현(學堂峴)에 있었으나, 이곳에 성종의 능인 선릉이 들어서게 되자 연산군(燕山君) 원년인 1495년 3월 이곳 묘역으로 이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버지 세종(世宗)이 생존했을 당시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그 규모나 규범이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묘역에는 광평대군, 무안대군, 영순군(永順君), 혜정공(惠定公), 이현응(李顯應), 이 회(李廻)의 신도비(神道碑)를 비롯하여 혼유석, 석등, 석인상 등이 규례대로 갖추어져 있다. 신도비는 훨씬 후대에 세워진 것으로, 중종에서 선조시대의 인물인 손암(巽庵) 심의겸(沈義謙)이 비문을 찬하였고 두전(頭篆)은 박염(朴簾)의 솜씨이다. 특히, 1695년에 조사한 분묘의 소재와 위치를 기록해 건립한 세장기비(世葬紀碑)는 가족묘에 대한 특유한 기록을 담고 있는 비석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이곳에는 광평대군의 사당(祠堂)이 있어, 광평대군과 그 부인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을 비롯하여 무안대군(撫安大君) 내외와 영순군(永順君) 보(溥) 내외 등 3세대의 제사를 함께 받들었다. 이 사당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되었다. 사당은 지금의 성북구 안암동 궁말이란 마을에 있던 광평대군의 집에 따로 세운 사당인 사우(祠宇)를 지어 제사하던 것을 1911년 10월에 현재의 위치인 무안대군 묘 아래로 옮긴 것이다.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아들(1425~1444)로 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 1432년에 광평대군에 봉해지고, 1436년에 신자수(申自守)의 딸과 혼인하였다. 1437년 무안대군 방번에 입양되어 후사가 되었다.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학문에 힘써 효경(孝經)·소학(小學)·사서삼경(四書三經)·좌전(左傳) 등에 능통했고, 국어·음률·산수에도 밝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용모가 풍미하며, 서예와 격구에도 능하였다.
20세에 외아들을 두고 아버지인 세종보다 먼저 죽었지만, 그 아들 영순군 이후로 자손이 번창하여 이씨왕족 중에서도 후손이 많기로 유명하다.
영순군(永順君)
광평대군의 아들로 이름은 부(溥)라 하고 자는 준지(俊之), 호는 명신당(明新堂), 아명은 수복(壽福)이었다.
1449년(세종 31)에 태어났는데 6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니, 세종임금은 유모를 구하여 기르게 하는 한편 명이 길라고 아명을 수복이라 지어주었다. 1451년(문종원년)에 영순군에 봉하고 1466년(세조 12) 18세에 등준시(登俊試)에서 5등으로 급제하여 1468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그해에 온양행궁(溫陽行宮)에서의 증시(增試)에 장원으로 뽑혔다.
1469년에 적개익대공신(敵愾翊戴功臣)에 올랐다. 학문을 즐기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여 궁중에서 10여 년을 근무하는 동안에도 간섭하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이렇듯 언행이 단정하며 총명활달하여 비록 부귀가 극에 달했으나 조금도 교만한 기색이 없었고, 문장을 지으매 붓 가는 대로 휘둘러 생각을 하지 않고서도 훌륭한 문장을 이루었다.
이에 예종(睿宗) 임금이 명하여 계감(戒鑑)의 편수를 맡게 하였고 성종임금은 육전(六典)의 편찬을 맡겼다.
광평대군은 일찍 죽었기에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서 안평대군(安平大君)·금성대군(錦城大君)이 비명에 갈 때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타고난 천재의 자질도 아깝게 30세 이전에 요절하였으나 그 후손은 크게 번성하였다.
강남구 수서동 산 10번지 1호 광수산(光秀山) 남쪽 371,000㎡의 넓은 임야의 광평대군묘역에 영순군과 그 부인의 묘가 있다.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름은 방번(芳蕃)으로 조선 태조의 일곱째아들(1381~1398)이며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소생이다. 부인은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1392년 조선의 개창으로 무안군에 책봉되어 의홍친군위절제사·의홍삼군부좌군절제사를 지내며 태조를 보좌하였다. 처음에 세조로 책봉될 예정이었으나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정도전 등의 반대로 세자위가 방석(芳碩)에게 넘어갔고, 1398년 방원(芳遠)이 주동한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되었다.
1437년 세종의 배려로 광평대군 여(廣平大君 璵)를 후사로 정하였으며, 1680년 영춘추관사 김수항(金壽恒)의 상소로 무안대군에 추증되었다.
묘는 처음에 도진능동(道津陵洞)에 있다가 광주 학당리 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474년 다시 광수산(光秀山:강남구 수서동)으로 옮겨져 광평대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시효는 장혜(章惠)이다.
첫댓글 저에게 특별하게 귀한 자료이군요. 전주이씨 광평대군 후손입니다. 이렇게 조상님의 흔적을 만나다니요. 50이상을 살아 오면서 광평대군 후손을 한분 만났었지요. 카톨릭 원주교구 이규영신부님이셨습니다. 귀중한 자료 올려주심에 감사드리면서 이자료 친정 조카들에게 두루 알리겠습니다. 설악산님 감사합니다.
한번 다녀오셔요. 세종대왕 자손중에서 가장 번창한 자손들 같더군요. ^^
어이쿠~~ 저의 동네에 다녀 가셨군요. 그 동네에서 십 몇년을 살았어도 광평대군 묘역에 들어 가지를 못하였는데 용케도 들어 가셨군요. 진작 일면식이 있었드라면 함께 하였을텐데 하는 아쉬움 지녀봅니다.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가까우면 가시기 더 쉬울 것입니다. 이 가을이 가기전에 한번 다녀오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