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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트럼프가 미군 2, 3명 전사했다고 이란 민간인을 무차별 공격을 하는 것은 인류 최대의 악행이다.
참전 2년이 안된 북한군의 우크라이나전 전사자가 2,200명이란다. 전서자가 한 달에100명 이상인 셈이다. 8년 6개월 월남전 희생자가 5,100명인데.....
60년 전 월남전 때 미국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동맹국 어느 나라도 코방귀를 뀌지 않을 때 한국군이 설레발을 치며 참전하자 "제네들 왜 그러지?"했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북한은 파병의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절실하게 필요한 식량과 경제 지원, 핵·미사일 프로그램과 관련된 첨단 무기 기술 제공을 받았을 것이다.
60년대 우리가 그랬듯이 북한이 상관도 없는 남의 나라 전쟁터에 젊은이들을 품팔이 보낸 것은 형편이 어려워서이다.
전쟁에 참전하는 병사들의 지상과제는 당연히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다. 더욱이 남의 나라 전쟁에서는.
자기 나라의 남자들이 징집을 피해서 도망을 가는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북한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니 60년 만에 반복되는 한반도의 역사가 한스럽기만하다.
1965년도 8월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맹호 부대가 월남 파병 부대로 결정 되었을 때 직업군인인 장교와 하사관들은 전 군에서 지원자 중 선발해서 뽑았지만 강제로 가야 하는 사병들은 하루에 20명씩 탈영을 하는 현상이 벌어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월남전에 지원 했던 1972년에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어서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가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에 가득이나 늦게간 군대에서 25살의 고령자로서 졸병생활이 지겨워 한국을 떠나고 싶었었다.
7일간 항해를 끝내고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번에는 공항으로 실려가 더블백을 어깨에 메고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기다리고 있는 쌍발 프로펠러 수송기의 활짝 열려 있는 뱃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30 분쯤 날아간 다음 활주로만 있는 야전비행장에 착륙했는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앞뒤에서 기관단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는 수십 대의 무장트럭이었다. 마치 소떼를 몰듯 정신없이 몰아치는 인솔 하사관들의 고함소리에 쫓겨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전속력으로 사막을 가로질러 달렸다. 얼마를 달려서 마치 영화에서 보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외인부대의 기지처럼 겹겹이 두른 철조망 담을 몇 개를 지나서 부대에 도착했을 때서야 처음으로 "살아서 돌아 갈 수 있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내가 파병되었던 때는 전쟁 막판이었기 때문에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시기였다.
더욱이 다행히도 나는 '운 보다 쎈 빽'으로 행정병으로 떨어졌다. 사단 사령부에 떨어져 낮에는 행정을 보고 밤에는 보초를 섰다. 초소 앞에는 " 이곳은 내가 살 곳이요, 죽을 곳이다."라는 심각한 팻말이 전혀 심각하지 않게 세워져 있었다.
드디어 1973년 1월 파리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철수를 하게되어 2개월 간 밤낮으로 죽을 고생을 해서 산더미 같은 컨테이너에 짐을 다 꾸리고 귀국 길에 올랐다. 나는 전사한 전우들도 있는데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도 감사해서 아무 것도 준비를 하지 않고 더블백만 달랑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갈 때는 인도양을 건너는 데 배로 일주일이 걸리던 길이 불과 4시간만에 오산 비행장에 도착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살이지만 미군들은 전사자의 시신을 깨끗이 원상복구와 이발까지 시켜 알미늄관에 방부 처리 하여 성조기를 덮어 본국 알링톤 국군묘지로 보냈지만 대부분의 한국군의 시신은 화장을 했다고 한다.
한국군은 영현중대에서 화장해서 유골함에 넣어 십자성부대 불광사에 얼마간 안치하였다가 사이공(현 호치민시) 탄소누트공항에서 본국으로 향하는 휴가자 비행기에 실어서 오산비행장을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영현중대는 주월 한국군의 군수부대인 십자성부대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십자성 부대에서 근무하던 전우들에 의하면 맨살이 드러낸 황토 바닥에 음침한 건물이 서 있고 높이 솟은 굴뚝에서는 가끔 검은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고 한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일지라도, 우기 철이 되어 살갗이 아프도록 내리꽂는 빗줄기 속에서도 주검을 한 줌의 재로 만들기 위해 분주히 헬기들이 오르내렸다고 한다.
아래는 해병대 사령관 출신 전도봉 장군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영현중대에서 화장을 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본국으로 주검 자체를 봉송하는 일도 있었다. 이때는 미군들처럼 영현 위에 태극기가 덮여지고 정중하게 장병들이 도열하여 거수경례로 그들을 환송했다. 그런데 문제는 김포공항에서이었다. 국립묘지에서 환영 나온 장교들의 안내를 받아 곧장 비행기의 화물 하역장으로 갔다.
호송할 헌병들과 영현을 봉송할 차량들이 줄을 서있었다. 경건하고 정중하게 영현들이 옮겨졌다. 그런데 태극기를 덮은 영현들은 내가 처음 퀴논비행장에서 인계받은 것 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이상하다. 자꾸만 태극기를 덮은 영혼들이 줄을 이어 옮겨졌다. 나는 묵묵히 지켜봤다.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안치소로 향했다. 차량들이 헌병의 호송을 받으며 불을 번쩍이며 줄지어 이동해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동작동에 도착한 차량대열은 두 갈래로 나누어져 들어갔다. 태극기를 덮은 것이 모두 영현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안내 장교에게 저 쪽 차량에 실은 영현들은 왜 이곳에 함께 오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몹시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다른 짐이라고만 짧게 말하고 자리를 피했다. 나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또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전우들의 고귀한 죽음을 이용해서 부정하게 돈을 빼돌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50 여년 전에 월남에서 참전군인이 받은 돈이 쌈지돈이었다면 받아야 할 돈은 뭉치돈이다. 아마도 세계역사에서 가장 큰 삥땅으로 기록될 이 돈은 지금쯤은 추측컨데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서 이자를 늘리고 있을 것이다.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달나라에 몇 번 왔다 갔다 할 정도는 될 것이다.
전쟁의 끝은 돈이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배상금을 물리기는 커녕 오히려 돈을 퍼부어서 자기 수족을 만들고 월남에서는 지고도 지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한국은 월남전에 참전하여 국가재건에 필요한 용돈을 벌었으나 막상 참전한 군인들이 인건비는 떼어먹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횡령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박정희 개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떼어먹힌 돈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빚쟁이들의 문제인 것이다. 돈 떼어 먹은 범인이 범인이 박정희인데, 아직도 박정희를 추앙하고 있으니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국가와 정권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박정희가 삥땅 친 것은 묻지 않고 단순히 국가를 위해서 희생했으니 국가가 배상하라고 요구 한다. 정권에 의해서 갈취 당한 것을 국가가 갈취했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퍼부은 돈이 총 1조 110억 달러인데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받아온 총액은 10억 3600만 달러였다. 병력은 10%를 채워주고 돈은 0.1%를 얻어온 것이다. 여기에서 똑바로 직시해야 할 사실은 미국이 밝힌 액수가 아니고 한국은행 통계에 잡힌 액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에서 받은 돈 중에 국고로 들어오지 않고 중간에 흘러나간 돈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러는 오늘날처럼 온라인 시대가 아니어서 매달 미군사고문단(MAC-V)을 통하여 현금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주월사령부에서 수령한 달러의 일부를 장교귀국박스(A Box)담아 C-46 수송기 편으로 빼돌려 서울공항으로 보냈다는 주월사 수송병이었던 고 장성관 전우의 증언이 있었다. 그 후 돈의 향방은 전후 미국 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밝혀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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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에서와 같이 월남전에서도 처음에는 무공훈장은 적 사살자의 수를 기준으로 삼았었다. 결과적으로 양민의 희생이 따르는 부작용이 심해지자 훈장 수여 기준에 무기의 노획 수를 적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수품을 팔아 그 돈으로 월남군이나 민병대로부터 소총 등 각종무기를 구입해서 노획무기라고 전투상황을 꾸며 보고하는 또 다른 병폐가 생겨났다. 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의 공명심에 사로잡힌 지나친 경쟁이 가져온 허위전과보고는 사령부를 골치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이 보다 더욱 골치가 아픈 문제가 있었으니 한국군이 전사했을 경우이다. 전공에 따른 훈장이야 한국 정부가 주는 것이지만 한국군이 전사하면 보상은 미국에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돈으로 싸우는 기묘한 전쟁에서는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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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전으로 유명한 1972년 안캐패스 전투에서 월맹군의 포격을 당하여 아군의 피해가 심했다.
이전의 전투처럼 총알이나 적이 설치한 지뢰 때문에 전사를 해도 비교적 신체가 온전히 보존된 상태로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대규모 공격이 벌어졌던 안캐패스 전투에서는 온 몸이 조각이 나서 전사하는 경우가 생겼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한국군이 전사자 숫자를 부풀릴 우려가 있다가 보고 훼손되지 않은 시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 지옥 같은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전우들이 전사자들의 시신을 조립하기 위해서 이미 날라 가버린 팔 다리, 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월남군의 시신을 야전삽으로 찍어서 숫자를 맞추는 지옥의 곱빼기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생사가 갈리는 것 이상 의미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터이지만 한국군에게 월남전은 돈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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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월남전에 다른 국가의 군인들이 참전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미국인이 월남전의 사상자들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월남에서 죽은 58,000여 명의 미국인뿐이고 어쩌다 한 번씩 이야기되는 그룹은 그 전쟁에서 죽은 수 십만 명의 월남인들이다. 미국인에게는 5099명이전사한 한국인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존슨 행정부로서는 한국군을 고용하는 것은 미국에게 ‘피와 재화의 상당량’을 절약하게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미군 병사 한 명을 파월할 때 일 년에 13,000$을 써야 했지만 한국군으로 대신할 때는 5,000$에서 7,800$만 지불하면 되었던 것이다.
개인의 삶이나 국제관계나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의 세상 이치는 동일하다.
2차 대전 패전으로 쪽박을 찾던 일본이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 큰 도움이 되었고 한국의 경제부흥에 월남전 특수경기 덕을 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개인적으로도 인생의 가장 큰 변수는 전쟁이었다. 6.25로 고아 아닌 고아 신세가 되어 성장과정이 고달팠지만 늦은 나이에 입대한 군대생활이 고달파서 월남전에 지원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국가유공자가 되어 노년에 여러가지 혜택을 받고 현충원에 예약까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아직 받지 못했다. 즉 박정희에게 월남에서 떼어먹힌 월급이다. 이 돈은 결코 포기 할 수는 없어 다음 세대에서라도 받을 수 있도록 악이라도 써야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들 참전군인 말고 돈을 달라는 사람들이 또 있다. 민간인 피해를 주장하는 월남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월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80여 차례 벌어졌다고 한다.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군사용어가 있다. 전쟁 당사자들은 전쟁 중에 일어나는 민간인의 죽음과 사회기반시설 파괴를 ‘부수적’이라고 표현하지만, 당한 사람들에게는 천추의 한이 맺힐 일이다. 그러나 생사가 한 순간에 달린 전투에 참전한 병사들은 월남인의 안전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밥을 먹다가 길을 가다가 아니면 휴식 중에 앉아 있는 돌멩이에도 부비트랩이 매설되어 있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학살이란 무고한 사람을 악의적으로 살해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희생이란 불가피하게 일어난 사고다. 그러므로 민간인 피해를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로 단정하거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전쟁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