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끝나지 않은 전쟁
신임 미 8군 사령관
나는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초에는 별을 네 개 달았다. 한국군으로서는 최초의 대장이었다. 개인적인 영광이랄 수 있었으나, 사실은 목숨을 바쳐 전선을 지탱한 이름 없는 장병들의 수고였다. 나는 그들을 대신해 대장이라는 자리에 올랐을 뿐이다. 참모총장 자리에 있으면서도 나는 수많은 고지전을 지켜봐야 했다. 대구의 육군본부에 앉아 전황판을 바라보면서 손에 땀을 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우리가 바라지 않던 형태의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휴전은 그저 휴전일 뿐이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약 2년 동안 한국 전선을 이끌면서 한국군의 자립과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던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퇴임을 지켜봐야 했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그 후임으로 왔던 사람이 맥스웰 테일러였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 101공수사단장을 역임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 땅 후방에 공수작전을 펼쳐 용맹을 떨쳤던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무인(武人)이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는 노련한 군정가(軍政家)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의 미 육군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았던 인물의 하나였다. 지금 미 육군의 토대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조지 마샬이었다. 그로부터 미 육군의 굵은 인맥이 대부분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조지 마샬에 버금갈 정도로 미 육군의 발전에 기여를 한 사람으로 맥스웰 테일러가 꼽힐 정도다.
신임 미 8군 사령관
나는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초에는 별을 네 개 달았다. 한국군으로서는 최초의 대장이었다. 개인적인 영광이랄 수 있었으나, 사실은 목숨을 바쳐 전선을 지탱한 이름 없는 장병들의 수고였다. 나는 그들을 대신해 대장이라는 자리에 올랐을 뿐이다. 참모총장 자리에 있으면서도 나는 수많은 고지전을 지켜봐야 했다. 대구의 육군본부에 앉아 전황판을 바라보면서 손에 땀을 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우리가 바라지 않던 형태의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휴전은 그저 휴전일 뿐이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약 2년 동안 한국 전선을 이끌면서 한국군의 자립과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던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퇴임을 지켜봐야 했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그 후임으로 왔던 사람이 맥스웰 테일러였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 101공수사단장을 역임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 땅 후방에 공수작전을 펼쳐 용맹을 떨쳤던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무인(武人)이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는 노련한 군정가(軍政家)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의 미 육군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았던 인물의 하나였다. 지금 미 육군의 토대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조지 마샬이었다. 그로부터 미 육군의 굵은 인맥이 대부분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조지 마샬에 버금갈 정도로 미 육군의 발전에 기여를 한 사람으로 맥스웰 테일러가 꼽힐 정도다.
- 1953년 2월 새 미 8군 사령관으로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한 맥스웰 테일러 장군(오른쪽 얼굴 보이는 이). 왼쪽은 전임인 밴 플리트 사령관이다/백선엽 장군
그의 첫 인상은 냉정하다 싶었다. 그의 평소 신념이 하나 있다. 지휘관은 어느 경우에서든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내용을 늘 말하곤 했다. “Commander never surprise”라고 말이다. 그는 휴전 뒤의 한국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군정가였다. 단순히 전선 관리를 위해 한국전선에 부임한 게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전후의 한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면밀하게 따지는 편이었다. 그런 테일러의 눈에 한국군은 미덥지 않게 비치는 적도 있었으리라 보인다.
육군참모총장의 통역
그는 나와 포병장교 진급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의 집념 덕분에 이미 한국군 포병은 착실히 발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각 사단에 속한 포병의 지휘관 계급이 너무 낮다는 점이 문제였다. 사단장은 소장이나 준장이었으나 예하의 포병 지휘관은 대개가 중령 정도였다. 현대전에 반드시 필요한 포병을 이해하지 못해 벌어지는 해프닝이 한 둘이 아니었다. 어느 사단장은 포병 지휘관에게 “사단에 가까이 와서 쏴라”는 엉뚱한 지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좌표와 사각(射角) 등으로 거리를 정밀하게 측정해 사격하는 현대 포병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병 지휘관의 계급을 올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나는 행정참모부장이었던 신응균 소장으로부터 포병 지휘관의 진급에 관한 계획을 보고받은 뒤 그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17개 포병대대를 육성해 각 사단에 배치한 뒤 보포(步砲) 협동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테일러는 그를 가로막고 나섰다. 보병 병과 대령 16명, 중령급 장교까지 포함한 30명을 선발해 광주의 포병학교에 입교시킨 뒤 교육을 거듭하던 무렵이었다. 이들의 진급 방안이 거의 성사단계에 이를 무렵 테일러 사령관이 내게 전화를 했다. <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