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산악회 제7호 회보와
엔도(遠藤孝一)와 오쿠노(奧野正亥)의 금강산 세존봉 동북릉 종주기
글·번역 : 조장빈
일제강점기 조선산악회는 연회지로 『朝鮮山岳』, 계간 회보를 발간하였으며 회에서 출간한 서적으로는 이이야마 다츠오(飯山達雄)의 『朝鮮の山』(1943년)이 있다. 이 중에 연회지 4권과 『朝鮮の山』이 전하는데 계간 회보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작년에 새로 발굴한 조선산악회 회보는 A4 용지 정도 크기의 3장(6쪽)으로 된 인쇄물이다. 회보의 발간 비용과 원고 문제로 『朝鮮山岳』 형태의 연회지가 발간되지 못하고 이 형태의 회보만 발간된 것으로 여겨진다. 발간일은 1938년 12월 4일이고 당시 경성제대 교수인 다케나카(竹中要)가 회장이다. 첫 쪽 우측 상단에 제호에 “第2年 第3號(7號)”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와같은 회보가 발간된지 2년차이며 1937년에 4회가 발간되었고 1938년에 세번째 발간된 것으로 당시 총 7호가 발간된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김정태가 말하는 계간 회보로 추정된다.
대략 내용을 살펴보면, 경성제대의 몽강 탐험 일지가 와 대원 명단이 실려있으며 다케나카(竹中要, 등산반장), 이즈미 세이이치(泉靖一, 후반 의료반장) 그리고 이이야마(飯山達雄, 보도주임)가 대원으로 참여했다. 탐험에 참가한 핫토리(服部敏)가 “グレッチヤ- ベ-ル(glacier veil)”이 탐험 당시 유용하게 쓰였다고 짧은글이 실려 있다. 당시 가모(加茂進, 함북 종성)는 신입회원으로 115번의 회원번호가 부여되었고 탈퇴자로 회원번호 68번인 黃白達은 조선인으로 여겨진다. 신착 도서 목록에는 일본산악회 75~79호, 대만산악회, 와세다대학교 회지 등이고 9월 소집회에 포태산(함북), 관모산, 부전고원 그리고 설악산을 양양쪽에서 등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산악회의 월례회는 매월 첫째주 화요일에 京城俱樂部에서 열렸다.
조선산악회 회보 제7호의 목차
목차 | 쪽 | 세부내용 |
제호 | 1 | 회의 명칭, 발간일, 발간제호 |
사진 | 1 | 대행(大行)산맥 북면 경관 |
京城帝國大學蒙疆學術探險行程略誌 | 1~3 | 경성제대몽강탐험 일정과 대원 명단 -일정 개요 : 3. 23 ~ 9. 11 -대원명단 : 단장 경성제대 尾高朝雄 교수 외 16명 |
グレッチヤ- ベ-ル | 3~4 | 핫토리(服部敏) |
世尊峯東北稜縱走(金剛山) | 4~5 | 엔도(遠藤孝一), 오쿠노(奧野正亥) 세존봉동북릉 등반기 및 세존봉 사진과 등반 개념도 |
위원회, 소집회 | 6 | 회무보고 |
가도야 광고 | 6 | 광고 |
신입회원, 퇴회자 | 6 | 회원보고 |
신착도서 목록 | 6 | 신착도서 목록 |
판권 | 6 | 인쇄일, 발행일, 편집·발행인, 발행처, 인쇄소 |
조선산악회 회원이라 기록된 엔도(遠藤孝一)와 오쿠노(奧野正亥)의 금강산 세존봉 동북릉 종주기는 다음과 같다.
“산이 험준하다는 것은 등반하는 사람에게 큰 매력이지만 그에 더해 전인미답의 산이라고 한다면 더 한층 큰 마력으로 등반하는 사람을 유혹한다. 이 글은 올해 여름 세존봉에서 보낸 이틀간의 작은 산행 기록이지만, 우리들은 깍아지른 암릉에 매달려 몇 개의 첨봉을 등반했고 그것에 만족했다. 왜냐하면 세존봉의 암릉과 첨봉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등반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며, 날씨가 좋지 않았던 일도 지금은 하나의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28일 아침 온정리를 출발하였고 동석동에는 구름이 낮게 끼어 있어 세존 주봉의 안부에 이르러 우리 무릎 아래는 이슬에 흠뻑 젖어 버렸다. 마지막 샘터에서 점심을 먹고 안부 위쪽에 도착한 것은 1시30분이었다. 구름은 계속 끼었고 습기는 바위 표면에 닿아 이따금 느닷없이 가랑비를 떨군다. 우리는 날씨가 나빠질 경우를 고려해서 예정을 변경하고 2~3봉 부근의 안부에서 비박하기로 하였다.
세존봉의 최고점인 1,160m는 탐승로의 종점이다. 이곳을 지나 짙은 가스 속으로 루트를 찾아가면서 1봉의 안부로 내려섰다. 제2봉의 벽등반은 아쉽게도 미루고 그 왼쪽을 돌아 작은 립을 등반하여 2봉과 3봉의 안부로 나오는 짧은 바위를 올라 2봉의 정상에 선 것은 4시였다. 생각 탓인지 날씨가 점차 호전되는 듯하여 기분이 좋아졌다. 점차 구름이 위로 올라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있던 동북릉의 톱니처럼 이어진 날카로운 암릉과 송곳 같은 첨봉군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우리는 그곳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햇살이 비추이자 구름은 점차 아래로 내리기 시작하여 날씨가 좋아질 가능성이 희미해져 갔다. 하지만 우리들은 깎아지른 정상에 앉아 막막하게 아득히 이어진 운해에 두둥실 떠 있는 오봉산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제 아무런 불안도 없는 그저 산에 오르는 사람만 아는 감격을 가슴 가득히 느낄 뿐이었다.
누울 여지도 없는 작은 바위 그늘에서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몸이 곱을 듯한 새벽의 한기에 침낭을 나와 불을 피웠다. 언뜻 보니 암회색의 운해에 무지개가 걸려 있다, 순식간에 구름은 자줏빛으로 물들어 간다. 불편한 자세와 한기에 온몸이 뻣뻣했던 우리들은 따뜻한 햇살을 받는 순간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것은 7시 30분이었다.
제2봉을 나와서 구름바다 위로 오르기 전에 제2봉의 덤불 사이로 벽을 내려갔다, 덤불은 물 속처럼 매우 습하여 십 미터도 내리지 않아서 온몸이 흠뻑 젖었다. 발이 미끄러져 덤불에 빠져들면서 2~3봉의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제4봉의 암릉을 올랐다. 제3봉의 능선은 구룡연 쪽과 비교하면 훨씬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제4봉의 암릉을 다 올라서 갭에 도착했다. 그때그때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한여름 태양은 외금강 일대를 쨍쨍 내리쬐기 시작했다.
제4봉은 두 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5봉 쪽이 높은 것 같았기 때문에, 우측 봉우리로 올라가려다, 어려운 구간을 극복하고 절정에 서서 보니 좌측봉(제3봉)쪽이 약간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쉽게도 왼쪽봉우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른쪽 봉우리에 명함을 놓고 현수하강으로 내렸다. 오래간만의 푸른 하늘 아래서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쬔다. 4~5봉의 골짜기를 목표로 하여 덤불을 헤치며, 걸핏하면 다리에 달라붙는 풀을 떼어내며 갔다. 콜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등산화 속까지 물이 차서 칠적거려 매우 불편했다. 가스가 맹렬히 덮쳐왔다. 제5봉의 등반은 상당히 어렵게 생각되었으나 그다지 고생하지도 않았고 점점 올라 5번봉 정상에 섰다. 완전히 시야를 가린 가스는 뜨뜻미지근해서 기분이 언짢았지만 추위를 잊고 오히려 따스함을 느꼈다.
제5봉은 중간 피크를 위아래로 하여 5~6봉의 갭으로 진행되는 25m의 수직벽이다. 예정은 하고 있었지만 이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일은 비에 젖었지만 전혀 미끄러지지 않았다. 갭으로부터 제5봉의 벽의 좌우로 루트를 찾으며 올라가, 잠시 후 정상에 이를 수 있었다. 정오 오분 전이다. 드디어 어제부터 가스와 덤불을 헤치는 여려움을 겪고 그렇게 바라던 1,120m(극락봉에서 보는) 세존봉에 이를 수 있었다. 이윽고 온정리 사이렌이 울려왔다. 우리들도 허기져 소금기로 짠 식빵을 씹었다. 물통의 물은 가스 때문인지 의외로 남아 있었다. 온화한 가스가 온몸에 감싸 돌면서 무상의 바위에 낀 이끼를 벗겨 내고 있었다. 오랜 소망이 이루어져 무엇인가 안도감이 들었다“
이후 폭우속에서 좁은 꿀르와르를 현수하강하여 동석동 계곡으로 내려 법기암까지 3시간 반에 걸쳐 어려운 하산을 한다. 이 등반기는 1938년 9월 22일에 쓴 기록을 회보에 실은 것으로 등반기의 “한여름 태양”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7월 28~29일 등반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태는 <등산>(1970년 9월호) 「韓國의 山과 登山」의 금강산 암벽등반 초록에서 1938년 10월 世尊峰 東岩稜 全連峰順登을 奧野正亥(金剛山協會), 渡部泰造의 초등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세존봉 동북릉 코스를 1938년 7월 28~29일에 걸쳐 조선산악회원인 엔도(遠藤孝一)와 오쿠노(奧野正亥)가 초등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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