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은 어떤 사람인가
조선시대 왕세자에서 폐위되어 방탕한 삶을 살았던 양녕대군(讓寧大君). 흔히 동생인 충녕대군(세종)의 현명함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며 왕위를 양보했다는 ‘성덕(盛德) 전설’은 맞는 것일까? 그러면 사료에 기록된 그의 실제 모습을 살펴보자.
왕세자가 되기 전부터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었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세 아들이 잇따라 요절해 큰 상심을 겪은 뒤에야 어렵게 4남인 양녕대군을 얻었기 때문에, 그가 형들처럼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더욱 애틋하게 돌보았다.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8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그중 성년까지 살아남은 이는 4남 양녕대군, 5남 효령대군, 6남 충녕대군(세종) 이렇게 세 명뿐이었다.
그 뒤 태종과 원경왕후가 낳은 아들들도 모두 건강하게 자라 어릴 때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이는 앞서 잃은 아들들에 대한 사랑의 보상작용이라 할 만하다. 양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된 후 여러 문제를 일으켰을 때도 태종은 그를 곧바로 세자 자리에서 제거하지 못했다. 이는 과거 젊은 시절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장자 상속에 집착한 측면도 있으나,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깊이 사랑했던 아들들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양녕대군 때문에 태종이 속상해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던 기록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아버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양녕에게 ‘제(禔)’라는 이름을 내려주었고,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원자가 되었으며 1404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노는 것을 좋아해 태종의 골치를 썩였지만, 태종은 세자를 함부로 교체할 수 없었기에 그저 타이르기만 했다. 그럼에도 세자가 계속해서 말썽을 부리자 우빈객 이래가 “세자궁을 대궐 가까이에 지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자주 살피라”라고 권했지만, 태종은 “다 큰 부자지간에 그렇게 간섭하면 반드시 서로 사이가 나빠진다”며 듣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 서열을 무시하고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세워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던 경험을 생각하면, 태종으로서는 장자인 양녕대군에게 피를 보지 않고 왕위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에 세자 이제는 부왕의 명으로 1412년부터 1413년까지 1년간 대리청정을 맡았다.
그러나 세자인 그는 궐을 나가 놀거나, 전 중추원부사 곽선(郭璇)의 첩인 ‘어리’를 납치해 궐로 데려오는 등 큰 사건 이전에도 숱하게 말썽을 부리고 공부를 게을리해 태종과 원경왕후를 속 터지게 했다. 양녕은 유부녀인 그녀를 궁으로 몰래 불러들여 아이까지 갖게 했다. 태종이 이를 꾸짖자 양녕은 오히려 “아버지는 첩이 많으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십니까?”라는 요지의 편지를 올려 부왕의 분노를 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이 조말생을 은밀히 불러, 세자가 공부를 하지 않고 놀기만 하며 황음(荒淫)하는 것이 심하다고 한탄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양녕대군은 자신을 지지해 주고 돌봐주었던 외가(민씨 가문)를 배신하는 냉혹함을 보였다. 태종이 외가인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숙청하려 할 때, 세자였던 양녕은 오히려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자신의 외삼촌들을 죽이는 데 앞장선 것은 훗날 “동생을 위해 자리를 양보했다”는 자애로운 인물상과는 정반대되는, 권력의 흐름에 민감하고 비정한 인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자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의 비행은 멈추지 않았다. 충녕대군이 왕(세종)이 된 후, 세종은 형을 극진히 대접했으나 양녕은 끊임없이 사고를 쳤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는 자신의 아들인 이혜(順成君)의 첩을 빼앗아 간음한 일이다. 이는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상상하기 힘든 패륜이었으며, 이 일로 인해 아들은 화병을 얻어 요절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양녕대군은 폐세자 이후에도 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고, 남의 첩을 빼앗으려 하는 등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 고기, 베를 자주 내리고 강화도에 100칸짜리 대저택을 지어주었다. 보다 못한 신하들이 그를 궐에 못 들어오게 하라고 항의하자, 태종은 양녕대군을 신하들의 눈길을 피해 몰래 불러서 얼굴을 보기도 하고 매까지 하사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다. 이쯤 되면 아들 바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또 양녕은 세종이 자신을 타이르려고 보낸 편지에 “계속 막으면 다시는 주상을 안 봅니다”라는 식의 답장을 보낸 적도 있었다. 비록 세종이 동생이며 그 편지도 명령보다는 부탁에 가까운 편지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세종은 왕이다. 태상왕, 대왕대비조차 왕에게 존댓말을 하는데 큰형이라고 해도 왕에게 개겨대는 건 절대 허용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막말로 저 편지로 세종의 권위를 해쳤다는 핑계를 대서 역모죄로 죽여버려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세종은 조선의 왕이고 양녕대군은 종친이므로 최소한 왕의 말을 들으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왕의 편지에 대놓고 “내 말 안 들어주면 너랑 안 놀 줄 알아”라고 으름장으로 답한 것이다.
양녕대군의 행적 중 가장 비판받는 또 한 부분은 노년기에 보여준 단종 처형 주장이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카인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이때 양녕대군은 종친의 어른으로서 단종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조에게 “단종과 안평대군을 죽여야 후환이 없다”라고 수차례 간청했다.
“대계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끊으소서. 노산군(단종)을 그대로 두면 나라에 화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세조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으며, 결국 어린 조카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양녕대군을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비운의 천재’로 묘사하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문학적 허구에 가깝다. 실제 역사 속의 그는 방탕함과 패륜적 행동, 권력 지향성의 인물이었다. 공적인 책임보다는 사적인 쾌락을 우선시하고, 유부녀 겁탈과 아들의 첩 취득 등 도덕적 결함에 빠져있었고, 외삼촌과 조카를 죽여서라도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려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결국 양녕대군은 ‘양보’를 한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비행과 자질 부족으로 인해 ‘퇴출’당한 것이다. 그가 세종이라는 성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결과가 된 것은 역사의 다행스러운 일이나, 그 과정에 양녕대군의 숭고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