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을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최초”, “한국 최고” 등으로 불리지만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이름값을 못한다고 말하지요. 이스라엘, 유다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選民)이고, 그래서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리는 성민(聖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값을 못하여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고,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된 것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자리에 있어야 할 성소(聖所)의 돌이 길거리에 널려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1절). 귀하디귀한 순금 같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토기장이의 손에 빚어지는 질항아리 같이 여김을 받고 있는지 한탄합니다(2절). 들개조차 자기 새끼에게 젖을 물리지만, 유다 백성은 마치 광야의 타조 같다고 한탄합니다(3절). 타조는 자기가 낳은 알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동물이라고 여겨서 자기의 자식들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참혹한 상황을 타조에 빗댄 것입니다. 실제로는 타조가 그렇지 않으나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젖먹이와 어린아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4절에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평탄하게 지냈던 자들, 호사(豪奢)를 누렸던 자들도 몰락해 버린 처참함을 한탄합니다(5절).
심지어 유다의 멸망에 대해 소돔(Sodom)이 죄악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무너진 것과 빗대었습니다(6절). 대표적인 죄악의 도시로 거론되는 소돔의 죄악보다 유다의 죄악이 더 무겁다고 탄식합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의해 파멸되고 몰락하게 된 것은 유다 백성의 죄악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 고귀한 신분, 풍성한 삶의 자리에 있어도 그 자리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지 못하면 여지없이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져 몰락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7절과 8절에서도 그러한 몰락을 경험하고 있는 유다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모습이어서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珊瑚, Coral)보다 붉고, 그 윤택함이 청옥(靑玉)처럼 빛났는데, 이제는 숯처럼 검어지고, 살갗이 뼈에 붙어 막대기 같은 비루한 모습으로 변한 유다 백성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산호는 히브리어로 “페니님”(פָנִין)인데, 보통 산호로 번역하지만, 영어성경인 KJV나 NIV에서는 루비(Ruby)라고 번역하기도 하였고, 청옥은 히브리어로 “사피르”(סַפִּיר)로 영어성경인 KJV에서는 사파이어(Sapphire)로, NASB에서는 “Lapis lazuli”(청금석, 靑金石)로 번역하였습니다. 보석과 같이 빛나던 존재가 형편없는 모습으로 바뀌었음을 피부로 느끼도록 묘사한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지 전쟁 중에 칼에 죽은 자뿐만 아니라,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자들이 늘어만 갔고(9절), 심지어 자기의 자녀들을 삶아 먹을 정도로 말할 수 없는 비참하고 처참한 상황을 겪게 되었다고 한탄합니다(10절). 어쩌면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잠시 귀 기울이지 않고, 잠시 우상에게 마음을 두었다고 해서 이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니 어떻게 해서든 기본적인 삶은 유지될 것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메시지를 전하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 선민(選民), 성민(聖民)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살아가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처참하게 파멸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십자가를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을 은혜로 구원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존귀한 이름으로 일컬어 주시고, 성도(聖徒)라고 불러주셨는데 그 이름값을 못하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수치스럽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