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전북 정읍 한영석의 발효연구소에서 전통누룩으로 빚은 ‘하향주’ ‘청명주’. 술병 아래 하얀 알갱이는 햇볕에 건조 중인 누룩이다. 정읍=현진 기자
[우리 술 답사기] (32) 전북 정읍 ‘한영석의 발효연구소’
전통 누룩 잘 만들기로 정평 명주로 불리는 ‘청명주’ 선봬
찹쌀로 두번 빚어 발효·숙성 4가지 누룩 활용…맛·향 달라
‘무릇 술 맛이 좋고 나쁨은 누룩을 잘 만드는가 여부에 달렸다.’
1760년대 농서(農書)인 <증보산림경제>에는 술 빚을 때 쓰는 누룩의 중요성이 강조돼 있다. 흔히 술보다 누룩 만드는 게 더 어렵다고들 한다. 우리 술을 빚는 양조장 가운데서 자가누룩(자신이 만드는 누룩)을 쓰는 곳을 알아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북 정읍에 있는 ‘한영석의 발효연구소’는 원래부터 전통 누룩을 잘 만들기로 이름난 곳이다. 정읍으로 귀촌한 지 5년차인 한영석 대표(52)는 누룩을 만드는데 왜 술은 내질 않느냐는 주변 성화에 못 이겨 지난달 <청명주(13.8도)>를 출시했다. 올해 안에 ‘하향주’ ‘동정춘’ ‘호산춘’ ‘백수환동주’ 등 고문헌에 나오는 명주도 선보일 작정이다.
발효연구소는 7600㎡(2300평) 넓은 부지에 양조장·발효공방을 갖췄다. 연구소에 가면 술보다 누룩이 먼저 손님을 반긴다. 마당에 법제(술 빚기 전에 햇볕에 말려 살균하는 과정) 중인 누룩, 실험 중인 누룩 등이 널려 있다. 한 대표는 원래 의류회사에 다녔다. 그러다 척수염을 앓으면서 발효 식품에 관심을 두게 됐고 2010년 식초 만들기를 시작으로 2011년 술 빚기, 누룩 만드는 방법 등을 익혔다.
한영석 대표가 누룩방에서 쌀누룩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좋은 식초를 만들 수 있어야 좋은 술이 나올 수 있고,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좋은 누룩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차근차근 연구 단계를 올려가다가 때가 됐다 싶어 일을 그만두고 발효 식품 연구에 매진했죠. <청명주>는 술 빚기 인생 12년 만에 처음으로 제품화한 술이에요.”
<청명주>는 조상들이 24절기 가운데 하나인 청명(淸明)에 담가 먹었던 술인데 찹쌀로 두번 빚는 이양주다. 조선후기 성리학자인 이익이 <성호사설>에 “나는 평생 청명주를 가장 좋아한다”는 내용과 함께 만드는 법도 써놨을 정도로 맛있는 약주다.
<청명주>는 맑은 산미(신맛)가 특징이다. 연노랑 빛 맑은 술은 입에 댄 순간 기분 좋은 신맛이 느껴진다. 찹쌀 술인데도 무거운 느낌 없이 산뜻하고 가볍다. 이 술을 만들 땐 물·찹쌀·누룩만 들어간다. 두번 빚은 술을 60일 정도 저온발효하고 30일 동안 숙성시켜 낸다. 맛의 비결은 술 빚는 과정 가운데 하나인 ‘산장법’에서 나온다. 고두밥을 찌기 전에 쌀을 물에 오래 불리고, 불렸던 물을 버린 다음 쌀만 찌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술에 깔끔한 산미가 생긴다. 한 대표는 처음에 술이 시큼하길래 잘못된 줄로 알았다고 했다.
“청명주 제조법대로 술을 빚었는데, 신 술이 나온 거예요. ‘오염이 생겼나’ 하고 발효실을 열심히 살균한 후 다시 빚었죠. 몇번을 빚어도 산미가 강한 술이 나오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죠. ‘청명주는 원래 산미로 마시는 술이구나’라고요.”
또 다른 매력은 4가지 누룩을 번갈아 쓴다는 데 있다. 병 라벨을 보면 보름달같이 생긴 누룩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어떤 누룩을 사용해 빚었는지 알 수 있다. 사진 속 라벨은 ‘쌀누룩’이다. 이밖에도 ‘향미주곡(찹쌀+녹두)’ ‘향온곡(밀+보리+녹두)’ ‘녹두곡(녹두+찹쌀)’이 쓰인다. 향미주곡보다 녹두곡이 녹두 비율이 높다. 누룩이 다르면 산미는 유지하면서 맛·향을 달리할 수 있다.
한 대표는 우리 대통령이 직접 외국 손님에게 그가 만든 술을 소개할 날을 꿈꾼다. “돈을 좇고자 하면 이 일은 시작도 못했겠죠. 누구나 맛있게 마시는 우리 술을 전통 누룩으로 진실하게 빚겠습니다.”
<청명주>는 375㎖ 기준 2만6000원이다. <청명주>에 이어 <하향주(13.8도)>도 올여름에 낼 예정이다. ‘막걸리 학교’와 크라우드펀딩 형식으로 판매가 진행된다. <하향주>는 꽃향, 바닐라향이 나는 약주다. 예상 가격은 2만원대.
출처 농민신문 정읍=박준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