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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1권에서
삼천포에 가면
최서림
삼천포
삼천포
삼천포
세상 모든 벌거벗은 나무들이
들뜬 걸음으로, 봄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월,
늑골 깊숙이 숨어 있는 삼천포를
가만히 불러내어 본다
햇살처럼 투명한
해풍처럼 부드러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삼천포 내 사랑
삼천포
삼천포
삼천포
아침 햇살이
집집마다 균등하게
부족함이 없이 내리고 있을
잘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거칠게 부서져서 따사로워진 마음의 수면들 위로
넙치 빛 저녁 햇살이
16분 음표마냥 통, 통, 통 튀고 있을
삼천포에 가면
삼천포에 갈 수 있다면
충무, 마산, 진해
그 언저리에서 헤매다가
돌아오고 마는……
----최서림, [삼천포에 가면]({애지}, 2006년 봄호)전문
나는 아내가 있고 사랑하는 아들과 딸도 있다. 또한 나는 내가 해야 될 공부와 낙천주의 사상가로서 너무나도 분명한 역사 철학적인 목표가 있다. 나는 나의 아내와 나의 아들 딸들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또,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내가 해야 할 공부와 낙천주의 사상가로서 그 분명한 목표를 망각해본적도 없다. 나의 좌우명은 ‘애지’, 즉, ‘지혜사랑’이고, 그 ‘애지’의 이름으로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육성해보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세계적인 대사상가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너무나도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그런데도 가끔씩은 예쁜 여자를 보았거나, 혹은 어쩌다가 ‘표절의 대가들’의 양성소에 불과한 대한민국의 교육제도들을 생각하다가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그 어느 누구도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로 도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여성은 나의 이상적인 여성(아니마)이며, 내가 만나고 싶을 때는 언제, 어느 때나 만날 수가 있고,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절대로 전화 한 통도 하지 않는 그런 여성이다. 언제, 어느 때나 에로스의 향연으로 나의 욕구불만을 충족시켜주고, 또, 외롭고 고독한 낙천주의 사상가의 길을 다독여 주고, 이 세상의 모든 대중적인 취향의 반대방향에서, 고귀하고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의 길을 가르쳐 주는 애인이면서도 스승인 그런 여성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를 그처럼 사랑해줄 수 있는 여성은 없고, 나의 천재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언제, 어느 때나 현실적인 쪽박이나 두드려대는 나의 아내만이 있을 뿐이다. 나의 여성은 영원한 이상에 불과하며, 나는 그 이상적인 여성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여성과도 단 한 번의 연애를 해본 적도 없다. 나의 육체는 나의 아내의 몸종에 불과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삼천포’에 가 있는 것이다. 아내와 나, 애인과 나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판단력의 어릿광대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어릿광대들은 자아와 타자, 혹은 이 세계와 천국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상주의자들일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상이지, 구체적인 그녀(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낭만주의자이면서도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그 낭만주의와 이상주의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하여, 오직 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낙천주의는 나의 신전이며, 우리 인간들의 행복이 자라나는 비옥한 텃밭이다. 이 ‘반경환의 명시감상’은 그 낙천주의 사상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최서림(본명 최승호)은 19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3년 {현대시}를 통해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이서국으로 들어가다}와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과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그리고 {구멍} 등을 출간한 바가 있다. 이밖에도 학술저서로는 {한국 현대시와 동양적 생명사상}과 {한국적 서정의 본질 탐구} 등이 있으며, 현재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최서림 시인은 ‘구멍’이라는 역사 철학적인 주제를 통하여 무모순의 원리로서의 다양성과 일관성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구멍’은 너와 내가 숨쉬는 구멍이며 의사소통의 창구이고, 그리고 모든 만물들의 숨구멍이다. 자본의 기계, 이기주의의 기계, 독단주의의 기계,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금속성 뿐인 문명의 기계, 그리고 모든 미디어와 가전제품 뿐인 편의주의의 기계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숨을 쉬고 대화를 하며, 또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구멍‘이란 역사 철학적인 주제로 무장한 최서림 시인의 비판철학적인 질문의 요체인 것이다. 최서림 시인의 생의 철학은 비판철학이며, 그의 비판철학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동물, 그리고 인간과 인간들이 상호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생의 철학‘을 지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서림 시인의 [삼천포에 가면]은 현대문명 사회에서 그의 ‘숨구멍’을 찾아가고 있는 시이며, 그의 낭만주의와 이상주의가 마주쳐 빚어놓은 아름다운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낭만주의는 현실의 세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그 어딘가, 다른 세계를 동경하는 사상을 말하고, 이상주의는 모는 것이 가능하고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를 말한다. 이상주의의 물질적 토대는 낭만주의이며, 낭만주의의 존재의 근거는 이상주의이다. 낭만주의에 의해서 이상주의의 새싹이 자라나고, 이상주의에 의해서 낭만주의는 그 존재의 근거를 확보해나간다. 최서림 시인의 [삼천포에 가면]을 주제의 차원에서 분석해본다면, 그는 상호 의사소통의 숨구멍이 막혀 있는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서, “아침 햇살이/ 집집마다 균등하게/ 부족함이 없이 내리고 있을” 유토피아의 세계를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곧바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삼천포인가? 삼천포란 도대체 어디이며, 그 삼천포가 지시하고 있는 의미란 무엇인가? 삼천포란 경상남도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이며,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역으로 그 아름답고 빼어난 바다풍광을 자랑하고 있는 도시이다. “충무, 마산, 진해”의 근처에 있으며, 1995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사천시로 그 지명이 바뀌고, 이제는 옛날의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런 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삼천포인가? 그것은 “세상 모든 벌거벗은 나무들이/ 들뜬 걸음으로, 봄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월”의 고장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햇살처럼 투명한/ 해풍처럼 부드러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삼천포 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삼천포는 만물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현실의 세계에서 바라보면 따뜻한 남쪽 나라이며, 모든 것이 햇살처럼 투명하고, 해풍처럼 부드러운 내 마음 속의 유토피아이다. 삼천포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내 사랑이며, “아침 햇살이/ 집집마다 균등하게/ 부족함이 없이 내리고” 있는 곳이다. 일찍이 토마스 모어가 공산주의 경제 체제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완벽하게 결합된 {유토피아}를 제시한 바가 있듯이, 삼천포란 머나 먼 남쪽 나라의 이상적인 유토피아이며, 고귀하고 거룩하며 아름답고 행복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은 차디 찬 겨울도 없고, 쓰라리고 아픈 이별도 없다. 인간에 대한 차별도 없고,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어떤 율법도 없다. 부의 공정한 분배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소유의 개념도 없고,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도 없다. 도덕과 윤리를 파괴하는 파렴치한도 없고,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도 없다. 자유 속에는 책임이 저절로 자라나고, 부의 공정한 분배 속에는 근로의욕이 저절로 자라난다. 삼천포는 개인의 자유 속에 기초해 있고, 개인의 자유는 삼천포를 위해 존재한다. 악이 없기 때문에 선도 없고, 거짓이 없기 때문에 진실도 없다. 진리가 없기 때문에 허위도 없고, 질서가 없기 때문에 혼돈도 없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고, 이 모든 것이 자유 자재롭게 영원불멸의 삶을 향유하고 있다.
햇살처럼 투명한
해풍처럼 부드러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삼천포 내 사랑
삼천포
삼천포
삼천포
아침 햇살이
집집마다 균등하게
부족함이 없이 내리고 있을
잘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거칠게 부서져서 따사로워진 마음의 수면들 위로
넙치 빛 저녁 햇살이
16분 음표마냥 통, 통, 통 튀고 있을
삼천포에 가면
삼천포에 갈 수 있다면
하지만 삼천포의 반대방향에서, 지금--이곳은 아귀지옥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이 싸늘한 기계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의 기계가 씨앗을 뿌리면 이기주의의 기계가 자라나고, 이기주의의 기계가 씨앗을 뿌리면 독단주의의 기계가 자라난다. 독단주의의 기계가 씨앗을 뿌리면 모든 숨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문명의 기계가 자라나고, 문명의 기계가 씨앗을 뿌리면 상호 의사소통의 숨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편의주의의 기계가 자라난다. 자유도 없고, 책임도 없다. 평등도 없고, 사랑도 없다. 따뜻한 봄도 없고, 어떠한 출구도 없다. 선도 없고, 질서도 없다. 신도 없고, 인간도 없고, 행복도 없다.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더욱 더 많은 이익을 생산해내는 싸늘한 기계들과 그 기계들을 움직이고 있는 ‘이기주의’이라는 악마들 뿐인 것이다.
삼천포는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고, 지금--이곳은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은 곳이다. 삼천포는 유토피아이고 지금--이곳은 아귀지옥(디스토피아)이다. 따라서 “삼천포에 가면“ ”아침 햇살이/ 집집마다 균등하게/ 부족함이 없이 내리고“, 또한 ”삼천포에 가면“ ”잘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거칠게 부서져서 따사로워진 마음의 수면들 위로/ 넙치 빛 저녁 햇살이/ 16분 음표마냥 통, 통, 통 튀고“ 있게 될 것이다. ”아침 햇살이/ 집집마다 균등하게/ 부족함이 없이 내리고 있을“이라는 시구는 모든 것이 가능한 유토피아를 뜻하고, ”잘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거칠게 부서져서 따사로워진 마음의 수면들 위로/ 넙치 빛 저녁 햇살이/ 16분 음표마냥 통, 통, 통 튀고 있을“이라는 시구는 이 세상에서 상처입은 마음들이 삼천포의 바다에 의해서 맑고 깨끗하게 정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잘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는 실제의 바다가 잔잔하고 조용하다는 것을 뜻하고, ”거칠게 부서져서 따사로워진 마음의 수면들 위로“는 이 세상의 세파 속에서 부서진 마음이지만, 그러나 삼천포의 바다에 의해서 따사로워진 마음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거칠게 부서진 마음이 삼천포의 바다에 의해서 정화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삼천포 바다에는 ”넙치 빛 저녁 햇살이/ 16분 음표마냥 통, 통, 통 튀고“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왜 최서림 시인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그 삼천포에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왜, 그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삼천포 내 사랑”을 그처럼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있으면서도, “충무, 마산, 진해/ 그 언저리에서 헤매다가/ 돌아오고 마는” 것일까? 그것은 삼천포는 유토피아이면서도 동시에는 아귀지옥이기 때문이다. 삼천포는 하나의 기호(이상)로서의 유토피아이지, 실제의 유토피아가 아니다. 경상남도의 바닷가에 존재하고 있는 삼천포에 가게 되면, 그 삼천포에 대한 신기루는 순식간에 걷혀 버리게 되고, 오직 이기주의라는 악마들만이 서로간의 멱살을 움켜쥔 채 이전투구를 벌이게 될 것이다. 삼천포는 따뜻한 남쪽도 아니며, 모든 것이 햇살처럼 투명한 곳도 아니다. 또한 삼천포는 아침마다 햇살이 균등하게 내려 쪼이는 곳도 아니며, 넙치 빛 저녁 햇살이 16분 음표마냥 통, 통, 통 튀고 있는 곳도 아니다. 최서림 시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을 배운 시인이며, 그 유토피아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토록 삼천포에 가고 싶어 하면서도 그 삼천포에 가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은 그 유토피아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면서도, 그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려고 꿈꾸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삼천포는 그의 가슴(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지, 실제의 경상남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의 가슴(마음) 속에 존재하는 유토피아는 왜, 하필이면, 경상남도에 존재하고 있는 삼천포란 말인가? 최서림 시인은 국문학자이자 언어의 사제인 제일급의 시인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속담에는 ‘삼천포로 빠지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일의 의도에 반하여 전혀 엉뚱하게 샛길로 빠져버렸다는 뜻이 될 것이다. ‘삼천포로 빠지다’라는 말에는 세 가지의 속설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옛날에 어떤 장사꾼이 장사가 잘 되는 진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장사가 잘 안 되는 삼천포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해의 해군기지의 사병들이 휴가를 나갔다가 삼랑진에서 진해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지 못하고 삼천포로 빠져버렸다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부산에서 출발하는 열차가 계양역에 닿게되면 진주행과 삼천포행의 객차로 분리하게 되는데, 그 안내방송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진주행의 손님들이 삼천포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천포로 빠지다’라는 말은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그르치게 되었다는 나쁜 말이며, 최서림 시인이 [삼천포에 가면]을 쓰게 된 동기는 그 속담과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삼천포는 내 마음 속의 유토피아이지, 실제로 그가 그 삼천포로 가게 되면 그 마음 속의 유토피아마저도 잃어버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은 실제로 삼천포에는 가지를 않고,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그 삼천포(유토피아)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를 동경하고, 이상주의자는 그 다른 세계를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품고서 언제, 어느 때나 살아가게 된다.
최서림 시인의 [삼천포에 가면]은 제일급의 시로서 세 개의 어법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데, 반복법과 점층법과 역설법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첫째 연의 “삼천포// 삼천포// 삼천포”는 반복법으로서의 그의 그리움과 사랑의 외침이 되고, 넷째 연의 “삼천포// 삼천포// 삼천포”는 첫째 연의 반복법을 포함한 점층법으로서의 삼천포의 지명과 그 의미를 점점 더 고조시키고, 그리고 마침내 그 절정(클라이맥스)에서 삼천포는 모는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이상 세계라고 역설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그 반복법과 점층법에 의해서 그토록 미화되고 찬양되던 삼천포는,
충무, 마산, 진해
그 언저리에서 헤매다가
돌아오고 마는……
이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역설법에 의하여 그 존재론적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삼천포는 갈 수 있는 곳인 동시에 갈 수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역설법이란 일반적으로 진리라고 인정되는 것에 대한 반대말이면서도, 오히려, 거꾸로, 또다른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삼천포는 유토피아이면서도 아귀지옥인 것이다. 그 양극단을 이어주는 세 개의 기둥이 반복법과 점층법과 역설법인 것이다. 삼천포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내 사랑이고, 삼천포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유토피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삼천포는 내가 영원히 갈 수 없는 그런 곳이다.
오오, 삼천포 내 사랑이여!
오오, 내 마음 속의 유토피아여!
--반경환 명시감상 제1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