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사자성어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준비하다가
딜레마, 그 주화입마에 빠졌습니다.
성서의 한자성어라는 단순한 글을 쓰기위해 탐사한 자료는
성서지대의 세계일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먼저 한글 성경이 한글 보급에 지대한 영양을 미쳤다는 말을 하기 위해
한글 창제 이후 한글 발전사를 모두 추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글 성서번역사를 연구하였고
개역과 개정의 문제를 차이점과 그 오역으로 탐구하였습니다.
개역은 직역에 중점을 두었고
개정은 이해하기 쉬운 의역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자속에 감추어진 성서의 비밀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성령의 영감으로 만들어진 한자의 비밀에 대한 의혹을 하였습니다.
성서적 의미를 담은 한자풀이를 하면서
한자를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영감적 언어라고 주장한다면 어불성설이요, 언어도단일 것입니다.
한자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의 표의문자로 해석하는 성서의 오류를 함께 연구하면서
알파벳을 가진 생활언어인 히브리어의 표음문자에 대한 이해를 하였습니다.
이 정도의 연구만 해도
평생을 두고 공부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책이나 논문이 아닌 카페의 글로
전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은 오히려 소통의 장벽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어 연구에 몰두하면
성서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공상의 블렉홀에 빠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한자의 성서 비밀을 성령의 영감으로 만들어진 한자로 이해한다면
본질과 현상에 대한 괴리는 불가지론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는 말씀은 무슨 언어로 말씀하셨을까?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아닌 바벨탑 이전의 구음이 하나일 때의 언어였을 것이요,
창세기의 저자에게 계시한 말씀은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로 이해한 모세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원본을 남겼을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기원은 아브라함 이후요,
아브라함과 그의 종들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의 수메르어나 아카디아어를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히브리 사람이라고 칭한 사람은 아브람이요,
그 다음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셉은 스스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라고 말하였고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에게 요셉을 시위대장의 종 히브리 소년이라고 고하였습니다.
그 후 애굽 사람과 요셉의 형제들을 구별할 때
요셉의 형제들을 히브리 사람이고 일반적으로 칭하였습니다.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은 히브리 사람이요,
애굽 땅에서 히브리 산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졌습니다.
당시 애굽은 성형문자를 사용하였고 수메르는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는대
애굽의 히브리 사람들이 히브리어를 사용하였는지는 고고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계시를 모세에게 하였다면
아담 이후,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은 엿새동안 창조한 창조의 말씀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이름을 알지 못하였고
여호와의 이름은 최초로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6:2-3)
고고학적으로 히브리어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서는
B.C 2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1947년도에 발견된 사해사본입니다.
모세오경의 원본이 히브리어로된 모세의 저작일 것이라고 믿는 것은
고고학적 증거로는 불가합니다.
다만 성서의 내적 주장 때문에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라고 믿습니다.
☞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출24:3-4)
엿새 동안의 창조 비밀은 모세 오경에만 기록된
모세에게 계시된 창조의 계시였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어를 표의문자로 이해하면
성서의 원어연구는 성령의 영감으로 계시된 한자라고 이해하는 수준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표의를 함축한 알파벳을 가진 표음문자요,
표의문자로만 이해한다면 이현령비현령의 문자 알레고리에 깊이 함몰될 것입니다.
글자의 뜻에 함몰되면 글의 의미는 상실되고
계시된 말씀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자의 계시와 기록의 계시는 동일하며
킹 제임스는 계시의 완성된 성경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성립합니다.
단순한 성경구절의 사자성어를 이해하는데도
이렇게도 복잡한 미로를 거쳐야하고 딜레마, 그 주화입마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사자성어의 단순한 이해는
성경 이해의 확대된 상식의 개념입니다.
한자에 시국의 옷을 입혀 친중반중의 의미를 새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성경의 상식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말 성경에 기독(基督)이란 말이 없는데
기독교의 정착은 한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원어에 가장 가까운 한자의 음역이 기독(基督)이고
그것을 중국어로는 찌뚜(jídù)라고 발음을 하고 우리는 기독이라고 읽습니다.
뿐만 아니라 법궤를 만든 재로로 사용된 싯딤나무를 대부분의 영역본은 아카시아로 번역하였고
개역과 개정은 조각목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조각목은 중국어 성경의 조각자 나무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중국의 기독교는 당나라 때 전래되었으며
경교라는 종교요, 기독교의 소종파인 네스토리우스교였습니다.
안티오키아학파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總大主敎) 네스토리우스는
이성설(二性說)과 비성모설을 주장하다가 에베소 공의회(431) 때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중국의 기독교 전래와 한자의 발전은 연관성이 있을 것이나
성령의 영감으로 계시된 한자라는 억측은 사막의 모래늪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식으로 공유된 정보가운데
모든 정보를 신지식으로 다 수용하면 혼동과 공허의 메아리가 될 것입니다.
개역한글을 개정한 개역개정은
개역한글의 어려운 단어를 쉽게 풀이하였습니다.
성경구절의 한자 성어에 관해서
간단하게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개역한글의 진실무망을 개역개정은 단순히 질실로 고쳤고
개역한글의 재덕겸전을 개역개정은 능력있는 자로 의역하였습니다.
개역한글의 공덕완전을 개역개정은 하신 일이 완전하고라고 하였고
개역한글의 상천하지를 개역개정은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개역한글의 여출일구를 개역개정은 하나같이라고 하였고
개역한글의 전신갑주를 개역개정은 전신 갑주 이렇게 띄어 썼습니다.
한글의 우수성은 모든 면에서 한자를 능가하기 때문에
한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굳이 한자로 환언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자성어는 사자성어로 논어나 맹자나 주역이나 불경에서 유래한 고사성어인 만큼
성경구절과 유사한 말은 있을지라도 같은 의미는 없다고 봐야합니다.
그러므로 성경구절의 한자성어는
한자를 한글로 쓰는 우리의 일상을 위한 상식적 이해일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의 말씀을 한자성어로 액자를 만들면
온고지신의 현판이 위대한 가훈의 장식이 될 것입니다.
유망칙희(有望則喜),조난칙인(遭難則忍),항어기도(恒於祈禱)
☞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12:12)
그리고 살전5:16-18절 말씀의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당상희락(當常喜樂), 기도불이(祈禱不已) 범사감사(凡事感謝)입니다.
또한 야고보서 1:15절의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은
욕잉생악(慾孕生惡), 악성생사(惡成生死) 입니다.
성서 구절에는 없는데 일상화된 사자성어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만세반석(萬歲磐石), 청심유복(淸心有福),
복락강수(福樂江水) , 산상수훈 (山上垂訓), 삼위일체(三位一體),
영원무궁(永遠無窮), 신천신지(新天新地), 무소부재 (無所不在),
산상팔복(山上八福), 이신득의(以信得義), 영생복락(永生福樂), 성령충만(聖靈充滿)등이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사자성어로 성경구절을 이해하는 것은
한글의 우수성에 역행 하는 것이나 상식으로 알아두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가 될 것입니다.
잠언이나 시편의 중국어 성경은
그 자체가 사자성어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중국어 성경을 읽으면서 한자 공부를 하는 것은
중국 선교사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글자와 글 등 언어에 대한 공부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역사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할 것입니다.
성경구절의 700여개를 한자성어로 연구한 책은
한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에게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혀 사용되지 않는 단어가
사실상 개역한글에는 많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성경의 지력을 갖기 위한 필수 관문일 것입니다.
글자 하나라도 익히는 것은 글을 깨우치기 위한
한 줌의 흙이요, 한 홉의 물이요, 한 올의 실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갖기까지
수 많은 난공불락의 장벽을 넘고 또 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