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광주, 그 영원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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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20:11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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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그 영원한 도시
광산(광주의 옛 이름)은 전라도의 거읍(居邑)이다.
신숙주의 희경루(喜慶樓) 기문에 “광주는 서쪽으로 나주와 통하고 풍토와 기후가 넓고 시원하여 예로부터 경치가 이름난 마을이 많고, 또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도 많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광주시는 인구수로는 남한 도시 중 다섯 번째이며, 부산과 더불어 한반도의 남쪽을 지탱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광주가 원래부터 전라도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큰 도시였던 것은 아니다.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와 나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전라도’라는 이름을 지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1896년에 전국 13도제가 실시되고 나주에 있던 전라남도청이 이곳으로 옮겨오기 전까지만 해도 광주는 나주의 행정 그늘에 묻혀 있었다.
백제 때는 무진주로, 남북국시대 때는 무주(武州)로 불렸던 광주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 태조 때인 940년부터였다. 광주가 나주에 밀려 조선 말기까지도 전라남도 지역을 대표하지 못했던 것은 나주가 수운이 편리하고 그 언저리에 넓은 농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주는 고려 태조의 처가가 있는 곳이었고 태조가 나라를 세우는 데에 도움을 받았던 지방인 데 반해, 광주는 한때 후백제의 견훤이 자리한 도읍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진산은 무등이다. ······무등산1) 꼭대기에 줄바위 수십 개가 있는데, 삐죽하게 선 것이 높이가 백여 자나 된다. 그 산이 오래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마가 개려고 할 때에는 우레 같은 소리가 자주 나는데 수십 리 밖까지 들린다”라고 기록된 광주의 당시 호수는 860호였다. 인구는 4,182명이며, 군정은 시위군이 75명, 영진군이 269명, 선군이 571명, 수성군이 8명이고 “땅이 메마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광주는 나주 못지않은 큰 고을이었으니, 정조 13년(1789)에 실시한 호구조사에 따르면 나주 인구는 5,638명이었고, 광주 인구는 그에 버금가는 5,525명이었다.
고려 때의 문장가인 김극기는 자신의 시에서 “모든 봉우리가 거듭 겹쳐 있고, 모든 골짜기는 구불구불하다”라고 하였고, 이집은 자신의 문집 『둔촌잡영(遁村雜詠)』에서 “광주는 남부 지방의 가장 웅장한 진영이며, 옛날의 풍류가 지금까지도 남아 즐기고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김상헌이 “글 읽는 소리가 성대하니 유학을 숭상하는 기풍이다. 뛰어난 인재와 훌륭한 선비들이 명분과 행실을 힘써 닦는다”라고 노래한 광주가 전라도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대륙 침공과 자원 반출을 위해 광주 대신 항구 도시인 목포를 더 많이 개발하고 이용했기 때문이다. 호남선이 광주를 비켜 송정리를 거쳐 목포로 이어졌고, 목포가 1910년에 이미 부로 승격한 데 비해 광주는 1935년에야 비로소 부가 되었다.
광주는 광복 후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고, 도청소재지답게 행정과 상업이 제구실을 찾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때 육군 훈련 부대가 상무동의 상무대에 자리한 뒤로 광주는 전라남도의 행정, 상업, 교육의 확고부동한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경전선 철길과 호남고속도로가 여수와 순천, 진주 쪽으로 이어지고, 호남선이 목포 쪽으로 이어졌다.
광주는 전라남도에서 큰 도시일 뿐 아니라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다. 그것은 인구 규모뿐 아니라 호남의 문화를 지켜가는 데에도 큰 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광주는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와 더불어 호남 지방의 문화를 지켜가는 중심축을 이루고 있으며, 느긋하고 구성진 전라도의 노랫가락에서 짐작되듯 독특한 지방 문화의 풍류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고, 그래서 문화 수도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는 중이다.
증심사 일주문
광주는 전라남도에서 큰 도시일 뿐 아니라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다. 그것은 인구 규모뿐 아니라 호남의 문화를 지켜가는 데에도 큰 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무등산 일주문.
한편 광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의에 맞서 일어서는 저항 정신일 것이다.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에 4천여 명의 광주 사람이 참여했고, 국권피탈 후 항일활동기에는 1919년에 일어난 3ㆍ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한 저항 정신이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929년 6월 26일 광주고보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하학하는 사태가 일어난 그날, 통학 열차가 운암역을 통과할 때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인은 야만스럽다”라고 한 말이 도화선이 되어 일본인 중학생들과 광주고보 학생들의 충돌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광주 지역의 학생들 간에 대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던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반, 광주발 통학 열차가 나주에 도착하여 학생들이 집찰구를 걸어 나올 때였다.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여고보 학생인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롱을 하였다. 그때 역에서 나오던 박기옥의 사촌동생이며 광주고보 학생인 박준채 등이 격분하여 그들과 격돌하면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였다.
11월 1일 광주역 사건으로 사태는 급진전되었고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시가전 양상을 띠고 확대되었다. 일본 경찰은 조선인 학생들에게만 책임을 지워서 잡아들였으므로 이에 광주의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잡혀간 학생들의 석방과 더불어 민족 차별 철폐, 약소민족 해방,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ㆍ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항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학생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나가 시위운동에 참가한 학생이 전국에 걸쳐 194개 학교 5만 4천여 명에 이르렀고, 퇴학 처분된 학생이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가 1,642명이었다.
국립광주박물관
최대의 민족 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학생항일운동과 1980년 5ㆍ18민주화운동까지, 광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의에 맞서 일어서는 저항정신일 것이다.
그러나 광주의 역사에서 1980년 5월에 일어난 5ㆍ18민주화운동만큼 엄청난 사건은 없었을 듯하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으로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출옥 후 작고한 김남주 시인이 그의 시 「학살 2」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 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않았으리
김남주 시인이 피울음처럼 토해낸 시 속의 광주를 김준태 시인은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 하고 노래하였다. 인구 70만 명의 도시가 온통 항쟁에 휘말렸고 그 충격이 온 나라의 정치와 사회를 소용돌이치게 한 점에서 광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나라 전체 역사에서도 드물었던 거대한 사건이었다.
“호남 50고을 경치는 내 고향을 꼽는다네. 산은 높은 누각과 멀리 대하였고, 연못엔 좋은 달빛 잠겼더라. 대숲 깊은데 뜰은 고요하고, 꽃 가까우니 술잔도 향기롭구나. 물건마다 시흥을 돋우니 어찌 봄날이 긴 줄을 알랴” 하는 성임의 시 속에 남아 있는 광주의 지리를 고려 때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광주의 지리는 삼면이 모두 산이오. 다만 북쪽만이 평탄하게 멀리 틔어 있으며, 남산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둘이 있는데, 물의 근원이 또한 멀다. 그러므로 그것이 합류하면 그 형세가 더 클 것은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매년 한여름에 장마가 들면 세차게 흐르는 급류가 사납게 쏠려 가옥을 파괴하고 전답을 깎아서 백성의 피해가 적지 않다.
광주에서 너릿재를 넘으면 화순에 이른다.
광주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진산은 무등이다. ······ 무등산 꼭대기에 줄바위 수십 개가 있는데, 삐죽하게 선 것이 높이가 백여자나 된다. 그 산이 오래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마 개려고 할 때에는 우레 같은 소리가 자주 나는데 수십 리까지 들린다”라고 기록돼 있다. 광주는 남부지방의 가장 웅장한 진영이며 뛰어난 인재와 훌륭한 선비들이 명분과 행실을 힘써 닦는다는 평을 받아왔다. 이곳이 전라도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주, 그 영원한 도시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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