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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黃愼)1562년(명종 17)∼1617년(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시호: 문민(文敏) 勤學好問曰文 應事有功曰敏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한다.
큰일을 당하여 공을 세우는 것을 민(敏)이라 한다.
봉호: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정랑 대수(大受)의 아들이다. 우계 성혼(成渾)과 율곡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뒤 감찰‧음죽현감을 거쳐, 호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언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을 김제군수로 임명한 이산해(李山海)를 추론(追論)하고, 또 정여립의 옥사에 대하여 직언하지 않는 대신을 논박하다가 이듬해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 건저(建儲)문제가 일어나자 정철(鄭澈)의 일파로 몰려 파직당하였다.
1592년 다시 기용되어 사서‧병조좌랑‧정언이 되고, 다음해 지평으로 명나라 송경략(宋經略)을 접반하였다. 《대학강어(大學講語)》를 지어 정주학(程朱學)을 논의하고, 세자(世子: 뒤의 광해군)를 따라 남하하여 체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어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1596년 변방 백성들의 무완책(撫緩策)을 진달하여 절충장군이 되었으며, 통신사로 명나라의 사신 양방형(楊邦亨)‧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일본에 다녀오고, 화의가 결렬된 뒤 조정으로 하여금 명나라의 내원을 청하게 하여 가선대부에 승진하였다. 이어 위유사(慰諭使)‧찬획사(贊畵使)를 거쳐 전라감사가 되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남원의 복구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공조‧호조의 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이 되어 인재등용과 기강확립 등을 골자로 하는 12조의 시무차자(時務箚子)를 올리고, 또한 《소학》의 권장을 청하였다.
1601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문경호(文景虎)가 스승인 성혼을 비난하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당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는 도중 어양(漁陽)에 이르러 정인홍의 탄핵으로 삭탈관작당하였음을 듣고 강화로 돌아갔다.
1605년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1607년 복관(復官)되었으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시행하지 않아 부여에 가서 살았다.
1609년(광해군 1) 호조참판으로 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이어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재정의 절용과 민력(民力)을 아낄 것을 주청하였다.
1612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하여졌다.
이듬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죄수 정협(鄭浹)의 무고로 쫓겨나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가 옹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공주의 창강서원(滄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막부삼사수창록(幕府三槎酬唱錄)》‧《추포집》‧《대학강어》 등이 있다.
추포 선생(秋浦先生) 황공(黃公) 행장 명재(明齋) 윤증(尹拯) 찬
추포 황 선생 휘(諱) 신(愼)은 자(字)가 사숙(思叔)이고, 그 선조는 창원(昌原) 사람이다. 휘 석기(石奇)는 고려를 섬겨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공희(恭僖)인데, 이분이 비조(鼻祖)이다. 이분이 지평주사(知平州事) 창(昌)을 낳고, 지평주사가 대흥 현감(大興縣監) 선경(善慶)을 낳고, 현감이 선공감 정(繕工監正) 예헌(禮軒)을 낳고, 선공감 정이 공조 판서 장무공(莊武公) 형(衡)을 낳고, 판서가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 원(瑗)을 낳고, 별제가 공조 정랑 대수(大受)를 낳으니, 바로 선생의 고(考)이다. 뒤에 선생이 귀하게 되어 정랑공(正郞公)은 좌찬성에 증직(贈職)되었고, 별제공(別提公)은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정랑공은 기국(器局)이 남보다 뛰어나 선조(宣祖)가 왕통을 계승하던 때에 주서(注書)의 자리에 있으면서 변고에 잘 대처하여 명성이 있었으나 불행히 요절하여 크게 쓰이지는 못하였다. 비(妣) 곽씨(郭氏)는 내섬시 정(內贍寺正) 회영(懷英)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16)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책을 읽으면 몇 행을 한꺼번에 읽어 내렸다. 10세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곡하고 울기를 어른처럼 하니 조문(弔問)하는 사람들이 차마 그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였다. 곽 부인의 가르침에 엄히 법도가 있었으므로 성동(成童)이 되기도 전에 학문이 크게 진보하였다. 약관에 상상(上庠)에 오르니,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흠모하여 그와 사귀었다. 이때에 우계(牛溪) 선생의 문하에 제자로 들어가니, 우계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다. 당시에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도 문하에 있었는데, 선생과 더불어 성문(成門)의 두 선비라고 병칭(竝稱)되었다고 한다.
만력 무자년(1588, 선조21)에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당시에 선생의 명성이 자자했고 소인배들은 우계를 비방하고 있었으므로 이미 선생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있었다. 처음에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옮겼고 음죽 현감(陰竹縣監), 북도 평사(北道評事), 호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경인년(1590)이 되어서야 비로소 병조 좌랑으로서 삼자함(三字銜)을 겸대하였고, 얼마 안 있어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다. 당시에 정여립(鄭汝立)이 모반(謀叛)하여 복주(伏誅)되었는데, 선생이 전조(銓曹)가 일찍이 정여립을 김제 군수(金堤郡守)와 황해 도사에 의망하여 불의의 변고가 일어날 뻔했던 일을 논핵하고, 당시 전조의 관원이었던 자들을 파직하기를 청하였다. 체직되어 병조 좌랑으로 돌아왔다가 곧바로 다시 정언이 되었다.
처음 정여립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에 우상(右相) 정언신(鄭彦信)이 고변(告變)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훗날 상이 유생의 상소를 통해 그 일을 듣고 국청(鞫廳)에 힐문(詰問)하였다.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대사헌 홍공 성민(洪公聖民)이 계사를 올려 일의 곡절을 아뢰고 이어 이산해가 임금을 속이고 사실을 은폐한 정상을 지적하였다. 이산해는 아첨을 통해 평소 상에게 후대(厚待)를 받는 처지였으므로 홍공은 특지(特旨)로 체직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이 홍성민의 충직함을 힘써 아뢰었고, 다시 이산해의 죄를 논핵하려고 하자 이산해가 인혐(引嫌)하고 나오지 않으니, 상이 비답을 내려 하유하기를, “백방으로 경(卿)을 모해(謀害)하려는 행태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마침내 다시 특지로 선생을 파출(罷黜)하고 고산 현감(高山縣監)으로 삼았다.
이듬해 신묘년(1591, 선조24)에 이산해가 결국 후궁(後宮)을 통해 상에게 유언비어를 아뢰니, 당화(黨禍)가 크게 일어나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필두로 하여 홍공 이하의 조신(朝臣)들이 찬축(竄逐)되기도 하고 삭직(削職)되기도 하였다. 선생도 그 일로 파직되어 강화(江華)의 시골 전장(田莊)으로 물러나 거처하였다.
다시 이듬해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나 대가(大駕)가 창졸간에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니, 선생은 샛길을 통해 행재소로 달려갔다. 가는 길이 이천(伊川)을 경유하였는데, 마침 광해군이 감국(監國)과 무군(撫軍)의 명(命)을 받고서 본현(本縣)에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광해군이 선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에 제수하니, 선생은 어긋난 것을 보필하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 일마다 과감히 간언(諫言)하였다. 광해군도 선생을 더욱 공경하고 중히 여겨 하루라도 곁에 없을까 두려워하였으니, 사람들이 선생을 육경여(陸敬輿)에 비견하였다. 얼마 안 있어 정언과 병조 좌랑으로 옮겼는데, 시강원의 직책은 전처럼 겸대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26) 봄에 천조(天朝)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행조(行朝)에 자문(咨文)을 보내 문학하는 선비를 정선(精選)하여 함께 강론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선생과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그 선발에 응하여 경략의 막하에서 반년을 머물렀다. 경략은 육씨(陸氏)의 학문을 주장하였는데, 《대학》을 강하면서 정자와 주자의 학설을 인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시비를 변석(辨析)하여 총 수십 편의 학설을 지으니, 경략이 선생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나중에 감군 어사(監軍御史) 주유한(周維翰)이 오자 경략이 그와 함께 통군정(統軍亭) 위에서 주연을 열면서 선생과 이공을 불러 참석하게 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사에게 고하기를, “이 사람들은 모두 춘방(春坊)의 학사들입니다. 동국(東國)의 학문은 정자와 주자를 존숭합니다.” 하니, 어사가 칭찬하였다. 경략이 돌아가자 사헌부 지평이 되어 행재소에 돌아왔다. 이어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도성으로 돌아와 체직되었다가 직강(直講)에 제수되었고 원접사(遠接使) 이공 항복(李公恒福)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광해군이 황제의 칙명으로 장차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로 남하(南下)하려고 할 때에 반드시 선생과 함께 가고자 하였으므로 마침내 종사관을 그만두고 사서(司書)의 직책으로 따라갔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광해군이 북쪽으로 돌아가자 남아서 체찰사(體察使) 윤공 두수(尹公斗壽)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병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을미년(1595)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고 얼마 안 있어 중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어전 통사(御前通事)에 차임되었고, 사섬시 정(司贍寺正)에 제수되었다가 문학(文學)으로 옮겼다. 당시 황제가 칙서를 통해 적당한 배신(陪臣)을 차출하여 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왜영(倭營)에 가서 철군(撤軍)하는 것을 살피게 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당시의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공을 추천하여 선발에 들었다. 일찍이 선생이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을 위해 초안(草案)한, 군사를 일으키는 격문(檄文)에, “묘당이 화친을 주장하니, 진회(秦檜)의 고기를 먹을 만하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것은 유상(柳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이때에 이르러 그에게 걸려든 것이다.
선생이 명을 받고 즉시 출발하여 4월에 웅천(熊川)에 가서 천장(天將)을 접반(接伴)하고 왜추(倭酋)를 응대하였는데, 모든 행동이 사리에 들어맞았고 홀로 충심으로 신의를 지키니, 비록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이라도 심복(心服)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적장(賊將)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연회를 열어 심유경을 초청하고 이어 심유경을 통해 선생을 아울러 초청하였다. 선생은 재삼 거절하다가 강권을 받고서야 갔다. 당시에 천장이 주벽(主壁)에 앉았고 소서행장은 서쪽에 자리하였으며 선생의 자리는 동쪽에 배설되었는데, 왜승(倭僧) 현소(玄蘇)가 그 윗자리를 차지하니 선생이 앉지 않고 물러나 서 있었다. 천장이 그 까닭을 묻자 선생이 답하기를, “화상(和尙)이 윗자리에 있어 나란히 앉기가 싫습니다.” 하였다. 천장이 즉시 왜승을 서쪽으로 옮겨 앉게 하자, 선생이 조용히 자리에 나아가 앉았는데, 안색에 변화가 없자, 추하고 사나운 왜적들이 기가 질렸다.
당시에 왜추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천조(天朝)에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봉(封)해 달라고 청하자 천조가 허락하였다. 그래서 심유경이 우리나라에 함께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할 것을 청하니, 선생이 치계(馳啓)하여 헌의(獻議)하기를, “적의 정세가 오락가락하니 화친하는 일은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설령 화친이 성사되더라도 우리의 대의(大義)는 이미 훼손된 것이니, 또한 우리 측에서 이유 없이 원수인 왜적에게 통신사를 보낼 수 없습니다. 청컨대 먼저 세 가지 사항을 요구하소서. 첫째는 변방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철수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포로가 된 사람들을 모두 송환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관백(關白)으로 하여금 먼저 서신을 보내 사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이것을 거부한다면 우리나라도 구실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조정이 이 헌의를 수용하지 못하였다. 연이어 군자감 정(軍資監正)과 사섬시 정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병신년(1596, 선조29) 봄에 입조하니, 상이 인견하고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어 묻기를, “지금 배신(陪臣)을 보낸다면 적이 철수하고 돌아가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망녕된 생각으로는 손해만 볼 뿐 이익을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특명으로 자급(資級)을 더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리자 선생이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비답에, “국사(國事)로 인하여 오랫동안 호랑이와 이리의 소굴에 머무르면서 고생이 심했을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4월에 다시 왜영(倭營)에 갔다. 당시 천조가 왜를 봉하였는데, 상사(上使) 이종성(李宗誠)이 부산(釜山)의 왜영에 있다가 야밤에 부절(符節)을 버리고 도망간 일이 발생하자 원근이 놀라 동요하며 왜적이 다시 준동(蠢動)할 것이라고 하였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영남에 체찰부(體察府)를 열고 막 병사를 조발하여 대비하고 있었는데, 선생이 둘러보고 말하기를, “왕인(王人)의 일은 본래 심병(心病)의 소치입니다. 내가 만약 왜영에 다시 간다면 왜적들이 반드시 준동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고는 패문(牌文)을 내어 바로 달려가니, 왜노(倭奴)들도 모두 놀라고 탄복하였다. 나중에 성이민(成以敏)이 선생을 대신하여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는데 왜적에게 겁을 먹고 몸을 빼어 달아나는 일이 있자 사람들이 선생의 담력에 새삼 감탄하였다고 한다.
천조가 부사(副使) 양방형(楊邦亨)을 승진시켜 정사(正使)로 삼고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곧바로 일본에 가게 하니, 왜장 소서행장이 다시 우리나라에 통신사를 청하기를, “조선에서 사신을 보내지 않는다면 이것은 단지 천조와 화친하는 것일 뿐입니다. 반드시 조선의 사신이 있고 나서야 큰일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심유경도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누차 자문(咨文)을 보내왔는데, 우리나라 조정이 모호하게 대답하니 선생이 치계하기를, “만약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면 확실하게 끊어서 결코 보낼 이치가 없다는 뜻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양단간에 모호한 자세를 취한다면 만에 하나 사태가 급박해졌을 때 필시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재상이 선생을 사신에 충원하고 싶었으나 선생이 혼자 고생하는 것이 또한 꺼려져서 이리저리 시일을 끌다가 왜적이 화가 났다는 말을 듣고서야 짐짓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아뢰기를, “사정이 이미 급박하니, 반드시 적의 정세를 잘 아는 사람을 구해야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황신(黃愼)은 명민하고 담력과 지략이 있으며,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변치 않는 절개가 있으니, 황신을 보내소서.” 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곤란해하다가 다시 아뢰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당시에 선생이 왜적의 군영(軍營)에 있은 지가 이미 2년이었는데, 다시 이러한 사행(使行)이 있게 되자 조야(朝野)가 기막혀 하였다. 상이 교서를 내려 하유하기를, “이번 사행은 국가의 안위(安危)와 관계된 일이므로 그대를 차견(差遣)하는 것이다. 다만 해를 넘겨 적진(賊陣)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하였는데, 지금 다시 멀리 험한 바다를 건너 적의 소굴로 들어가게 되어 집에 계신 노모도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나는 이 점을 매우 측은히 여긴다.” 하고는 다시 명하여 대부인에게 매달 식물(食物)을 지급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황신은 이미 나라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으니 본래 수고로움을 꺼리는 마음이 없습니다만, 조정이 아랫사람을 헤아리는 도리로 볼 때 마땅히 자급을 올려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황신을 가자(加資)하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가자를 하게 되면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경(卿)이 된다. 경을 차임하여 들여보내는 것은 지나치다.” 하여,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되었다.
8월에 국서(國書)를 받들고 바다를 건넜다. 사행을 앞두고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대장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 丈夫不怕死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대장부가 아니로다 / 怕死非丈夫
내 원하는 바는 지조를 온전히 함이니 / 所願全吾節
어찌 내 몸을 온전히 할 수 있으랴 / 安得全吾軀
하였다. 또한 우계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이별을 아뢰기를, “감히 살기를 탐하고 왕명을 욕되게 하여 사우(師友)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였고, 글을 지어 해신(海神)에게 맹세하니, 이를 들은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일본에 도착하니, 관추(關酋)가 사신의 관직이 낮고 또 두 왕자(王子)를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를 내면서 통신(通信)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한 장차 구류하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왜장 조신(調信)이라는 자가 사사로이 사람을 보내와서 그 사연을 알려 주고, 인하여 심 부사(沈副使)에게 화해를 구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조신과 심 부사가 화친하는 일을 자임했던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내가 부산을 떠나올 때에 이미 세 가지의 계획을 세웠다. 일이 만약 순조롭게 성사된다면 천사(天使)를 수행하여 갔다가 돌아오겠다는 것이 한 가지 계획이었고, 일이 만약 성사되지 않고 저들이 구류하려고 한다면 1년이고 10년이고 구류하는 대로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한 가지 계획이었으며, 만약 크게 노여움을 부려 나를 죽이더라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것이 한 가지 계획이었다. 오래전부터 이러한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으므로 이젠 괴이할 것도 없다. 저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둘 뿐이다.” 하였다. 관추가 봉작(封爵)을 받으면서도 끝내 우리 사신을 만나 보지 않았다. 선생이 천사를 따라 국서를 받들고 환국하려는데, 왜인들 사이에서 떠들썩하게 말하기를, “관추가 사신들의 배가 어느 곳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모두 죽이려고 한다.” 하였다. 일행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줄 몰랐으나 선생이 태연하게 대처하니, 왜노들이 끝내 감히 위해를 가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니 도추(島酋) 평의지(平義智)가 사신들을 위해 연회를 준비하여 초청하였는데, 선생이 가지 않고 말하기를, “관백에게 왕명을 전하지도 못했으면서 어찌 도주(島主)의 연회에 사사로이 달려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평의지가 천사에게 부탁하여 다시 초청하였으나 선생이 끝내 가려고 하지 않으니, 평의지는 연회를 성대히 차려 놓고 기다리다가 끝내 낙담하고 파하였다.
11월에 바다를 건너 복명(復命)하자 상이 인견하여 고생에 대한 위로의 말씀을 극진히 하였고, 그다음 날에 특명으로 가선대부에 승진시켰다. 사간원의 유영경(柳永慶)과 이필형(李必亨) 등이 사명(使命)을 완수하지 못하였으니 공은 없고 죄만 있다는 이유로 선생을 탄핵하여 새로 내린 자급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엄한 비답을 내려 물리치기를, “나는 그가 홀로 고생했기에 상을 준 것이지, 일을 잘 처리했는지의 여부는 물어야 할 바가 아니었다.” 하였는데, 상의 뜻은 화의가 성립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선생도 상소를 올려 사양하기를, “신도 이번 사행이 명분이 없다는 것을 본디 알고 있었으나, 다만 우리의 형세가 매우 위태로웠으므로 구차하지만 이를 통해 다급한 형세를 조금이라도 늦춰 보려는 것이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는 본의(本意)였기 때문에 감히 난리에 임하여 그 일을 사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이 현명하지 못한 것이 여기에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적이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고 교통(交通)하여 우호하는 예도 이미 폐하였으므로 당초에 한마디 말도 서로 나눈 적이 없었고 또 사신을 접대하는 통상적인 의례(儀禮)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당초 만나기를 요구할 수도 없었고 또한 글로 의사를 알리는 것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한 처지에서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왕명을 온전하게 하여 돌아오는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신이 머물게 해 달라고 애걸하고 만나 달라고 요구하여 일이 성사되기를 기필했다면 일은 혹시 성사되었을지 모르지만 욕됨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신이 왕명을 받들고 갔다가 헛되이 돌아온 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 적과 우리나라는 실로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원수로서 혈기가 있는 자라면 다 같이 분통해하는 바인데, 신은 적과 함께 거처하며 해를 넘겨 세월을 보내면서 수치스러운 마음을 품고 모욕을 참았을 뿐 바로 죽지는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아, 선생이 이 사행에서 온갖 위험과 고초를 겪었으나, 순수한 충심과 굳센 절개는 참으로 왜노들을 크게 탄복시켰다. 그들이 매번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선생의 안부를 묻고 칭송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 뒤 화친을 청할 때의 서계(書契)에, “황신과 같은 통신사가 오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저 소인배들은 처음에는 선생을 승냥이와 호랑이의 소굴에 던져 넣으려고 하여 선생이 어떠한 경우에도 변치 않는 절개가 있다고 칭찬하다가, 절개를 온전히 하여 돌아오자 다시 흉적(凶賊)을 두려워하였다고 모함하니, 저들의 마음은 매우 음험하다고 할 수 있으며 더욱이 왜노만도 못한 것이다.
정유년(1597, 선조30) 1월에 위유사(慰諭使)가 되어 남하하였다. 당시에 왜적들이 바야흐로 다시 침범하려고 모의하고 있었으나,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이중간첩을 놓아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하다는 거짓 정보를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에게 몰래 알리면서 말하기를, “이번의 화의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가등청정이 실제로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람을 제거한다면 우리의 한이 풀릴 것이고, 귀국의 우환도 제거될 것이다. 모월 모일에 적장 청정이 아무 섬에서 숙박할 것이니, 귀국이 만약 수군(水軍)을 잠복시키고 기다린다면 결박하여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응서가 이 사실을 보고하니, 상이 비국(備局)의 대신(大臣)과 선생을 급히 불러 이 일을 논의하였다. 상이 묻기를, “소서행장과 가등청정 두 적장은 정말 사이가 그러한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두 적장 사이에 비록 틈이 좀 있다고 하지만, 신은 예부터 기발하고 비밀스러운 계책이 적에게서 나왔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유상 성룡(柳相成龍)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말은 참으로 옳다.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좌우의 신하들이 선생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그 계책이 혹시나 성사되지 않을까 기대하였으므로 이어 선생을 파견하여 가게 하자고 청하였다. 선생이 막 해외에서 돌아와 미처 모친을 뵙기도 전이었으므로 상이 공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경을 파견하여 가게 하고자 하는데, 오랫동안 수고해서 어찌하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군부(君父)께서 내리신 명에 대해 만에 하나라도 일을 성취할 수 있다면 신이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당일로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제군(諸軍)을 위무(慰撫)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지만 실제로는 계책을 설행하여 적장 청정을 사로잡도록 한 것이었다. 선생이 이순신에게 은밀하게 그 계책을 알려 주니, 이순신이 말하기를, “바닷길이 험난한데 많은 함선(艦船)을 끌고 간다면 적들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고, 함선의 수를 줄인다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가지 않았다. 이날 적장 청정이 과연 이 섬에 왔는데, 실제로는 소서행장과 모의하여 군대를 허약하게 보이도록 위장함으로써 우리를 꾀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오히려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잡아다 추고(推考)하고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하였는데, 수군이 패하고서야 사람들이 비로소 선생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공을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하여 찬획사(贊畫使)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심 천사(沈天使)의 접반사로 임명을 받고 호남에 갔다. 이것은 심 천사가 첩문(帖文)을 보내 선생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으므로 이광정(李光庭)을 체직하고 선생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7월에 왜적이 다시 흉계를 부려 원균이 패하여 죽었고, 적의 선봉이 세 갈래 길로 나뉘어 열흘 사이에 호남과 영남을 두루 장악하니 중전(中殿)이 서로(西路)로 나가 피란하였고 경사(京師)에는 계엄령(戒嚴令)이 내렸다. 묘당이 다시 선생을 추천하여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로 삼고, 남하하여 적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선생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지경에 도착하니, 남원(南原)이 이미 함락되고 전주(全州)도 연이어 무너져 열읍(列邑)이 와해되었으며 조정의 명령이 두절된 상황이었다. 선생이 필마(匹馬)로 분주히 다니면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하고 흩어진 병사를 불러 모아 적의 출몰에 따라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니 군정(軍政)과 민사(民事)가 순차적으로 수습되었다. 그리고 천조가 다시 대군(大軍)을 조발하여 남쪽을 토벌하자 선생이 고갈된 곡식을 애써 모아 군량(軍糧)을 제대로 마련해 주니, 천장(天將)이 누차 자문을 보내 선생의 충성과 근면함을 서술하였다. 마침내 흉적을 소탕하여 한 지역을 정화한 것은 선생의 공이었다.
이듬해 무술년(1598, 선조31)에 상소를 올려 실정(實情)을 아뢰고 모친을 모셔다 봉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니, 상이 특명으로 모친을 모셔 오게 하였다. 임기가 차자 조정이 선생을 잉임(仍任)시켰다.
9월에 천장 제독(提督) 유정(劉綎)을 따라 진격하여 순천(順天)의 왜교(倭橋)에서 왜적을 포위하고 밤낮으로 대치하니 군복을 벗지 못한 기간이 모두 3개월이었다. 적이 물러나자 비로소 군대를 풀고 돌아왔다. 적이 처음 후퇴할 때에 선생이 상소를 올려 대마도의 적을 토벌하여 국가의 위엄을 떨칠 것을 청하였으며, 또 몸소 선봉이 될 것을 청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에, “임진왜란은 실제로 이 적들이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왕 풍신수길(豐臣秀吉)을 효수(梟首)하지 못하였고 보면, 차라리 이 적들을 모조리 죽여 씨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조금이나마 이 통분을 푸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이 연전에 사명을 받들었을 때 이 섬을 경유하면서 그 산천의 형세를 자세히 살펴 마음속으로 기억해 두었습니다. 이 섬의 둘레는 수백 리에 불과하지만 중간에 배를 정박할 곳이 많이 있고, 육로는 비록 험하고 좁지만 사면을 모두 넘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대군(大軍)이 남쪽 바다에 있으니, 만약 지금 절강성(浙江省)의 병사 7, 8천 명을 선발하여 우리 수군과 합세하여 일거에 바다를 건너게 한 뒤에 적들이 대비하지 않는 때를 틈타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10년 동안 무사하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지만, 이때를 놓치고 도모하지 않는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통상(通商)하고 쌀을 지급해 달라는 요청이 올 것입니다.” 하였는데, 조정에서 곤란하다는 의견이 나와 끝내 수용되지 못하였다. 겨울에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사직하니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기해년(1599, 선조32) 2월에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호조로 옮겼다. 여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신축년(1601)에 복제(服制)를 마치고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었다가 대사간으로 옮겼다. 동료들과 상차(上箚)하여 시무(時務)를 아뢰었는데, 큰 요지 다섯 가지는, 첫째 먼저 큰 뜻을 세움으로써 중흥의 대업을 회복(恢復)할 것, 둘째 신린(臣隣)을 불러 접견함으로써 상하의 마음을 소통시킬 것, 셋째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백관이 공적을 발휘하게 할 것, 넷째 인심을 수습함으로써 유신(維新)의 천명(天命)을 맞이할 것, 다섯째 기강을 확장시킴으로써 오랫동안 쇠락한 국세를 진작할 것이었고, 급무(急務) 일곱 가지는, 첫째 전제(田制)를 바로잡을 것, 둘째 호구(戶口)를 조사하여 호적을 만들 것, 셋째 사전(祀典)을 정할 것, 넷째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것, 다섯째 공안(貢案)을 개정할 것, 여섯째 군정(軍政)을 정비할 것, 일곱째 학교를 세울 것이었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당시에 상이 이미 정무(政務)에 지쳐 조정은 날로 어지러워졌고 언로는 막혀 끊어졌으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선생이 시무를 두루 아뢰었는데, 궁중의 기강이 엄하지 않은 것과 왕자(王子)의 방자한 전횡(專橫), 조사(朝士)의 사사로운 헌상(獻上)에 대하여 더욱 곧바로 지적하여 말하고 피하지 않으니, 사림이 선생을 칭송하였다.
왜추(倭酋) 평조신(平調信)과 평의지(平義智) 등이 서계(書契)를 보내 화친을 청하자, 2품 이상의 관원에게 헌의(獻議)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화친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오(吳)나라에 화친을 청하면서 자신을 신하로 삼고 처를 첩으로 삼기를 구하였으니, 그 치욕은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에 복수를 잘 한 자를 거론할 때 반드시 구천을 첫째로 꼽는 것은 종국에는 실제적인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목전의 위급만을 구하려 하고 끝내 잘 처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대의(大義)를 내세워 저들을 끊어 버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8월에 제주(濟州)의 역적 길운절(吉云節)의 국청(鞫廳)에 참여한 공로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가자되었다. 당시에 국(局)을 설치하여 경서(經書)의 언해(諺解)를 찬정(撰定)하도록 명하고 당대의 문학하는 선비를 엄선하여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선생도 선발된 당상(堂上)에 끼었는데, 어느 날 주강(晝講)에서 아뢰기를, “전란 뒤에 서책이 모두 유실되어 학교의 정사가 정비되지 못하고 교육의 방도가 밝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소학(小學)》이라는 책은 어린 선비들의 가장 첫 번째 과정(科程)이니, 내외에 간행, 배포하여 선비들을 권장하고 책려함으로써 인재를 모아 배양하는 방도를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10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정유년(1597, 선조30)에 정인홍(鄭仁弘)의 무리인 박성(朴惺)이 상소를 올려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여 죽인 책임을 우계(牛溪) 선생에게 전가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인홍이 다시 그 무리인 문경호(文景虎)를 사주하여 박성이 했던 말을 다시 서술하게 하였고, 임금을 저버린 죄목(罪目)을 첨가하였다. 무술년(1598) 이래로 소인배들이 정권을 다투어 분란이 더욱 심해지자 상이 양쪽을 다 물리치고 사류(士類)를 등용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대해 소인배들이 다시 최영경을 가탁(假託)하여 명분으로 삼고 사류를 일망타진할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선생이 인피(引避)하며 그것이 무함이라는 것을 속속들이 지적하였으나, 상이 자신의 스승에게 아부한다고 여기고 체직하니, 곧바로 교외로 나가 대명(待命)하였다. 기자헌(奇自獻)이 선생을 대신하여 도헌(都憲)이 되었는데, 선비를 죽인 명목을 군부(君父)에게 돌린 일을 들추어 상의 노여움을 격동시켰다.
이듬해 임인년(1602, 선조35) 1월에 사은사(謝恩使)로 차임되어 연경(燕京)에 갔는데, 소인배들이 우계 선생의 관작을 논핵하여 삭탈한 뒤에 이어서 선생에게까지 그 손길을 미쳤다. 정인홍이 헌장(憲長)이 되자 마침내 군부를 속이고 사당(私黨)을 비호했다고 아뢰어 선생의 관작을 삭탈하였던 것이다. 9월에 천조(天朝)에서 돌아왔으나, 감히 복명하지 못하고 강화(江華)의 시골 전장(田莊)으로 돌아갔다.
을사년(1605)에 호성 선무 원종(扈聖宣武原從) 1등에 녹훈되어 직첩(職牒)을 돌려주도록 명하였으나, 당시 재상이었던 유영경(柳永慶)이 중지시켜 시행되지 않았다.
정미년(1607)에 부여(扶餘)의 촌사(村舍)로 옮겨 우거하였다. 벗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새 거처가 푸른 물가와 가까워 굽어보고 침 뱉으면 닿을 거리인지라 아침저녁으로 낚시나 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생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전후로 폐기되어 물러나 있은 지가 모두 7년이었는데, 향리에 거처할 때에는 복건(幅巾)을 쓰고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날마다 농부, 어부와 함께 거닐었으니 쓸쓸하기가 마치 애초부터 이름이나 지위가 없었던 사람 같았다. 향인(鄕人) 가운데 노인이 있으면 반드시 공손하게 대하였고, 물고기나 채소를 보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답례하였다. 평상시 거처할 때면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엄숙하게 서적에 침잠하여 이치와 의미를 음미하였다. 그리고 주서(朱書) 한 질을 항상 책상에서 떼어 놓지 않았고, 수업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소학》과 《논어(論語)》를 읽도록 권하였으며, 자상하게 개도(開導)하면서도 지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해 5월에 삼공(三公)이 올린 한재(旱災)를 구제하는 내용의 계사(啓辭)로 인해 직첩을 돌려주라는 명이 내리고 이어 호군(護軍)에 제수되자 도성에 들어가 사은하고 돌아왔다.
무신년(1608, 선조41) 2월에 선조가 승하하니, 즉시 국상(國喪)에 달려가 임하였다. 광해군 즉위 초의 정사에서 호조 참판에 제수되자 죽은 스승이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6월에 인산(因山)의 기일이 임박하여 들어가 사은하니, 바로 진주 부사(陳奏副使)에 차임되어 연경에 갔다. 그곳에 도착해서는 임금의 상중이라는 이유로 의례적인 연회도 받지 않았다.
12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복명하고 아뢰기를, “신들이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명나라 조정에서 노추(奴酋)를 근심거리로 여긴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도로에서 듣자니, 모두들 하는 말이 이 적들이 요양(遼陽)과 광녕(廣寧)에 근심을 끼치고 있는데, 다음은 우리나라에까지 근심이 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가한 때에 맞추어 지세가 험한 요충지를 정비하고 군사들이 들어가 지킬 계책을 세우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굶주린 백성이 떠돌아다니는 형편인지라 관서(關西) 지방은 백성들이 기대어 살 수가 없으니, 참으로 이 일을 갑자기 벌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미리 강정(講定)하여 형세를 살피고 가려서 보루(堡壘)의 터를 정한 뒤에 상황을 보아 가며 잘 조치하여 훗날에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면할 수 있기를 기약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수용하지 못하였다. 그 뒤 무오년(1618, 광해군10)에 과연 요양이 함락되었고 다시 10년이 지나 정묘호란이 일어났으며 다시 10년이 지나 병자호란이 일어났으니, 선생의 심원한 염려가 대개 이와 같았다고 한다.
기유년(1609) 1월에 사행(使行)의 공로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자되고 공조 판서에 제수되어 체찰 부사(體察副使)를 겸대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호조 판서로 옮겼고 진휼사(賑恤使)에 차임되었다. 당시에 대례(大禮)가 빈번하여 경비가 날로 불어났고, 더하여 태감(太監)이 천사(天使)로 와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었으므로 재정이 크게 모자랐다. 선생이 상황에 맞게 짐작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였으며,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사사로운 청탁을 막으니 간악한 자들이 자취를 감추고 묵은 병폐가 일시에 제거되었다.
전 병사(兵使) 곽재우(郭再祐)는 정인홍의 당인(黨人)이었는데, 상소를 올려 우계를 배척하고 간인(奸人)이라고 지목하니, 선생이 다시 상소를 올려 그것이 무함이라고 극력 변론하였다. 그리고 스승의 원통함이 풀리지 않아 의리상 종사(從仕)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면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으며 이르기를, “경의 매우 간절한 심정을 잘 알았다. 다만 이 일이 선조(先朝) 때에 결정된 일인지라 내가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경은 필시 나의 심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경이 죽은 스승이 아직 신원(伸冤)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사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직무를 수행하여 국사(國事)를 보좌하라.” 하였다. 선생이 인혐(引嫌)하고 들어간 지 한 달이 넘도록 광해군이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출사하여 또 탑전에서 거듭 청하기를, “사대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명예와 절개입니다. 신은 선조(先朝) 때에 임금을 저버리고 당인을 비호한다는 죄를 입었고, 지금 현재에도 성혼(成渾)은 죄적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의 죄는 아직도 신의 몸에 있는 것이니, 어찌 구차하게 직명(職名)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광해군이 답하기를, “나의 뜻은 전에 이미 유시(諭示)하였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선생이 이미 조정을 떠날 수 없게 되자 이어서 진언하여 민력을 아끼고 재화를 절약할 것과 궁중을 엄숙히 하고 요행의 문로(門路)를 막을 것을 청하였다. 당시에 광해군이 사치를 매우 좋아하여 복식과 의물(儀物)이 화려하고 풍족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풍정(豐呈)의 기녀와 악공의 의복도 관청에서 갖추어 지급하였는데 모두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이 엄숙하지 않고 요행의 문로가 크게 열려 민간의 미천한 자들이 궁첩과 결탁하여 밖으로는 상언(上言)하고 안으로는 은밀히 청탁하였으므로 무릇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사소한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먹은 바를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선생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힘을 다해 아뢰었고 다시 조도 낭관(調度郎官)을 별도로 두어 있고 없는 물품을 무역하도록 청하였는데, 시중(市中)에서는 편리하게 여겼으나 세도가와 모리배들은 매우 언짢아하였다. 다시 상방(尙方)과 내국(內局)이 연경의 시장에서 사오는 물품을 줄이도록 청하였고, 다시 여섯 조목의 계사를 아뢰었는데, 첫째는 양전(量田)을 개정함으로써 부역(賦役)을 균등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공안(貢案)을 개정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작미(作米)나 작포(作布)를 하게 함으로써 방납(防納)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고, 넷째는 어량(魚梁)과 염전(鹽田)을 거두어들여 사사로이 점유하는 폐단을 없애는 것이고, 다섯째는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 재력을 축적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해당 관원을 구임(久任)시켜 성과를 책임 지우는 것이었다. 또 아뢰어 연경에 가는 사신이 여비를 사사로이 요구하는 폐단을 막도록 청하였고, 또 양전사(量田使)를 파견하여 경계(經界)를 한번 바로잡도록 청하였으나, 모두 시행되지 않았다.
선생이 누차 병을 이유로 사직하는 정고(呈告)를 올리거나 차자를 올린 것이 전후로 서너 번이었는데, 광해군이 매번 타일러 만류하였다. 또 임진년(1592, 선조25) 난리에 호종(扈從)한 공로를 녹훈(錄勳)하여 위성 공신(衛聖功臣)이라고 칭했는데, 선생이 2등 공신에 책훈되어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에 봉해지자 차자를 올려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계축년(1613, 광해군5) 여름에 박응서(朴應犀)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박응서 등이 애초에 강도죄로 수감되자 옥중에서 글을 올려 죽음에서 살아나 보려는 계책을 꾸몄는데, 이이첨(李爾瞻)의 꾐으로 옥사가 뒤집혀 역옥(逆獄)이 되었던 것이다. 무인(武人) 정협(鄭浹)이 북쪽에서 잡혀 오게 되자 이이첨이 다시 사람을 시켜 길에서 기다리게 하였다가 정협으로 하여금 명신(名臣)들을 널리 끌어대어 한쪽 편 사람들을 일망타진하도록 사주하였다. 선생이 마침내 이공 정귀(李公廷龜), 김공 상용(金公尙容) 등 10여 인과 함께 동시에 체포되었고, 형구(刑具)로 조정이 가득 차자 도성 전체가 두려워하고 놀랐다. 광해군이 공사(供辭)를 보고 말하기를, “경들은 모두 내가 의지하고 친근히 여기는 신하들인데, 어찌 역적을 편들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역적의 입에 언급되었으므로 심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공초를 보건대, 그 실정이 과연 생각한 대로이니, 모두 즉시 풀어 주라.” 하였다. 선생이 도성을 나가 성서(城西)에 우거하니, 양사가 합계(合啓)하여 관작을 삭탈하기를 청하였고, 정인홍은 상소를 올려 역모를 다스리는 형전을 한번 거행하여 뿌리까지 통렬히 끊도록 청하였다. 이에 양사가 합계하여 선생을 원찬(遠竄)할 것을 청하였는데, 광해군이 평소에 선생을 소중히 여기던 터라 답하기를, “황신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강직한 데다 훈구 중신(勳舊重臣)이니, 어찌 원찬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또 이르기를, “반드시 용서해 줄 만한 공훈이 있는 반면에 몸소 저지른 죄악은 없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가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에 과감하게 간언하여 나를 보도(輔導)했던 경우가 많았다. 어찌 지금에 이르러 8살 난 어린아이를 위해 흉역(凶逆)에 동참했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양사에서 끝까지 간쟁을 멈추지 않으니, 그제야 중도부처(中道付處)하여 옹진현(甕津縣)에 유배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이이첨이 원천군(原川君)에게 수업(受業)하였는데, 원천군은 바로 선생의 장인이었다. 그래서 선생이 사위가 되었을 때부터 서로 교유하였는데, 얼마 뒤 산방(山房)에 함께 기숙하면서 그의 심술(心術)이 사특함을 간파하고는 다시 그와 왕래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즉위한 초기에 선생이 광해군의 신망을 받자, 의주 부윤(義州府尹)에서 소환된 이이첨이 선생과 친분을 맺고 싶어 재빨리 와서 문안하였는데, 아첨하는 웃음과 꾸미는 표정을 하고 친근함을 표시하니, 선생이 더욱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마침 선생의 동료 중에 높고 낮은 지위의 재신(宰臣)이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이첨이 간장(諫長)에 의망(擬望)되기를 구하자, 그들이 모두 선생에게 와서 자문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이이첨이 그 소식을 듣고 말과 표정에 불쾌함을 드러내니, 자제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선생에게 한번 만나 보고 해명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평소부터 알고 있었다. 가서 만나 보려 해도 마음은 억지로 할 수 없구나.” 하고는 마침내 그와 절교하였다. 이로 인해 이이첨이 크게 원한을 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큰 옥사를 빚어냈던 것이다. 이미 적도(賊徒)들을 몰래 사주하여 선생을 무함하고 끌어들인 뒤에 다시 사냥매나 사냥개와도 같은 자신의 심복을 시켜 죄목을 날조하게 하여 반드시 원한을 풀고자 하였다. 만약 광해군이 시종일관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선생은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이이첨이 선생에 대한 광해군의 믿음이 두텁다는 것을 알고서 선생이 혹시라도 다시 기용될까 근심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선생의 명성과 행실을 흠모하여 반드시 자신을 의탁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논계(論啓)하였고 한편으로는 자주 사람을 보내 완곡하게 말하기를, “그대가 비록 나를 저버려도 나는 그대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상께서 황신이 정말로 이러한 죄가 있는지를 자주 나에게 하문하시는데, 이것은 생사(生死)와 영욕(榮辱)이 달린 문제입니다. 그대가 지금부터 나와 일을 함께한다면 내가 상께 아뢰어 해명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견책을 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작(官爵)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선생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구제해 주려는 옛 친구의 마음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죄(死罪)에 처한 몸이니, 어찌 감히 다시 세상사에 뜻을 두고 살기를 바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이익을 탐하고 구차히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옛 친구께서도 천하게 여기는 바일 것입니다.” 하였고, 또 그 사람에게 이르기를, “나는 생사를 치지도외(置之度外)한 지 오래입니다. 어찌 내 평생의 뜻을 버리고 그대를 따르겠습니까.” 하였다. 이이첨이 다시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자제를 보낸다면 재앙을 풀도록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자제들이 울면서 가기를 청하였는데, 선생이 번번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우리 집안의 자제들로 하여금 어찌 간인(奸人)의 집 문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겠는가.” 하였다. 이이첨이 크게 화가 나서 반드시 선생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광해군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감사 신익량(申翊亮)이 항상 말하기를, “계축년의 옥사는 화변(禍變)이 갑자기 발생하여 생사의 문제가 바로 눈앞에 닥쳐왔으므로 비록 넓은 국량을 지니신 백부조차도 평상시의 태도에서 조금 변하지 않을 수 없으셨는데, 추포공(秋浦公)만은 말하고 웃는 것이 태연하여 평소와 다름이 없으셨으니, 참으로 철석(鐵石)같은 마음을 지니신 분이다.” 하였는데, 신익량은 바로 상촌(象村)의 조카이다.
적소(謫所)에서 생활한 지 5년 동안 문밖을 나가지 않으니, 고을 사람 중에 선생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타고난 체질이 허약하여 풍토에 적응하지 못했는데, 끝내 정사년(1617, 광해군9) 3월 14일에 배소에서 별세하니 향년 56세였다. 부음을 들은 중외(中外)의 사람들 모두가 애통해하였고, 피차를 막론하고 모두들 “올바른 분이 돌아가셨다.”라고 하였으며, 평소 선생을 공격하던 자들조차도 “황공처럼 강직한 사람을 우리들이 일찍이 논핵하여 훗날 사림에게 죄를 얻게 되었으니,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광해군도 놀라고 슬퍼하였으며, 즉시 복관(復官)하고 증작(贈爵)하며 예장(禮葬)하라고 명하였다. 양주(楊州) 서산(西山)의 선영 모향(某向)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는데, 현헌(玄軒) 신공 흠(申公欽), 월사(月沙) 이공 정귀(李公廷龜), 수몽(守夢) 정공 엽(鄭公曄), 청음(淸陰) 김공 상헌(金公尙憲) 모두가 제문을 지어 와서 제사하였다.
인조 원년(1623)에 광해군 때의 훈봉(勳封)과 추증(追贈)을 으레 혁파하였으나, 선생에게는 특별히 우의정을 추증하고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단정하고 중후했으며 기국(器局)이 준수하였다. 집에 거처할 때에는 효성과 우애가 천성에서 발현되어, 편모를 섬길 때에는 임금이 내려 주신 녹봉이나 친구가 보내 준 물품을 모두 모친께 보내 형제와 자질(子姪)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일임하였으며, 대대로 전해 오는 종들을 과부가 된 제수에게 모두 주고 털끝만큼도 간여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교유할 때에는 성심이 충만하였고 담론할 때에는 번득이는 기지가 흘러 넘쳤다. 조정에 서서는 정직하여 흔들리지 않았으며, 강직하고 방정해서 남을 인정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올바른 사람이 아니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귀인(貴人)이더라도 바로 보지 않았다. 일을 담당해서는 절대로 주저하거나 구차히 하지 않고서 의(義)에 맞게 할 따름이고, 이해와 화복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산해(李山海)를 거스른 일로 배척되어 외읍(外邑)에 보임되었고, 중간에는 유상 성룡(柳相成龍)을 거스른 일로 연이어 사지(死地)에 빠졌으며, 마지막에는 이이첨(李爾瞻)을 거슬러 화를 입은 것이 더욱 혹독하였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선생이 이상 원익(李相元翼)에게 이르기를, “즉위 초의 정사가 이러하니, 국사를 알 만합니다. 앞으로의 근심을 예측할 수 없으니, 우리들은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는데, 이상(李相)이 훗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황공의 선견지명과 높은 식견은 우리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하였다. 신공 흠(申公欽)이 선생을 논하기를, “명석한 식견과 결단하는 재능, 빼앗을 수 없는 절개와 홀로 우뚝한 지조를 가졌으니, 급박한 상황을 당해서도 어긋난 행보(行步)가 없었고 위급한 상황에 임해서도 잘못된 언사(言辭)가 없었으며, 아첨하고 우유부단한 면이 마음속에 일지 않았고 구차하고 연약한 모습이 밖으로 보이지 않았다. 임금의 잘잘못을 직언하여 잘 보필한 것은 육경여(陸敬輿)와 같았고, 일에 임하여 앞을 내다본 것은 여헌가(呂獻可)와 같았으며,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은 것은 부언국(富彦國)과 같았다.” 하였다. 그 뒤에 정승이 되어서도 항상 말하기를, “우리 벗들 가운데 백사(白沙)와 추포(秋浦) 두 공의 풍모는 사람들이 절로 미칠 수 없다. 백사는 인걸로서 풍류가 진대(晉代)의 사람과 매우 흡사하고, 충성스럽고 정직하면서 정사에 뛰어난 인재로는 추포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추포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마땅히 나보다 앞서 정승이 되었을 것이고, 그 업적도 필시 볼만했을 것이다.” 하였고,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지은 뇌사(誄詞)에는,
천지간의 빼어난 기운 중에서 / 天地間氣
그대가 바른 것을 얻었나니 / 子得其正
사람의 성품에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있는데 / 稟有剛柔
그대는 순수하게 강한 성품을 얻었으며 / 子得純剛
사람의 행실에는 방정함과 원만함이 있는데 / 行有方圓
그대는 방정한 행실을 실천했으며 / 子蹈其方
사람의 지조에는 맑음과 탁함이 있는데 / 操有淸濁
그대는 맑은 지조를 지녔어라 / 子揭其淸
그러므로 우뚝이 설 수 있어서 / 故能卓立
곤액 속에서도 늘 뜻을 지켰으니 / 困而長貞
마치 쇠의 정밀함이 / 如金之精
백번 단련할수록 더욱 견고한 격이로다 / 百鍊愈堅
무릇 그대가 성취한 것을 보면 / 凡子成就
모두 학문에서 미루어 간 것이니 / 皆學之推
사우의 전수를 이은 학문이 / 師友之傳
우리의 도에 부끄럽지 않도다 / 不媿斯文
하였으니, 선배들이 선생을 높이 존모하고 인정했던 것이 이러했다.
문장은 성리(性理)에 근본을 두었고 보지 않은 책이 없었으니, 인구에 회자되는 변려문(騈儷文)은 다만 그 나머지일 뿐이다. 시문 약간 권이 남아 있고, 《대학강어(大學講語)》와 《막부삼사수창록(幕府三槎酬唱錄)》 등의 책은 병자호란 때에 모두 일실(逸失)되었다.
부인 이씨(李氏)는 종실 원천군(原川君) 이휘(李徽)의 따님이다. 원천군은 독실한 행실과 밝은 경술로 세상에 칭송을 받았는데, 외동딸의 배필을 정할 때에 공의 명성을 듣고 출가시켰다.
아들을 두지 못해 동생 척(惕)의 아들 일호(一皓)로 후사를 삼았고, 외동딸은 사인(舍人) 심광세(沈光世)에게 출가했다. 측실에게서 딸 둘을 두었는데, 큰딸은 송흥국(宋興國)의 처가 되었고, 작은딸은 김태극(金太極)의 첩이 되었다.
일호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이르렀다. 병자년(1636, 인조14) 뒤에 그 고을의 백성인 최효일(崔孝一)이 자신의 처자식을 배에 태우고 중국에 들어가니, 부윤이 그 뜻을 슬퍼하여 그 종족들을 보살펴 주었다가 오랑캐에게 해를 입었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감 윤(玧), 숙(琡), 참봉 진(璡)이고, 사위는 진사 신경(申炅), 참판 이민적(李敏迪), 부사(府使) 이선(李選), 판서 김석주(金錫冑)이다. 심 사인(沈舍人)의 4남은 진사 급(), 서윤(庶尹) 억(檍), 부사 헌(櫶), 부윤(府尹) 총(棇)이고, 2녀는 판서 임담(林墰)과 군수 이집(李)에게 출가하였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선생이 별세한 지 이제 거의 한 갑자(甲子)가 흘렀다. 처음에 상촌(象村) 신공 흠이 비명(碑銘)을 지었으나 광해군 때에 지었으므로 내용 중에 숨긴 것이 많았으며, 심 사인이 가장(家狀)을 짓고 이월사(李月沙)가 시장(諡狀)을 지었으나 혹자는 그 소략함을 단점으로 여겼다. 근자에 이군 선(李君選)이 《계년록(繫年錄)》 2권을 지으니, 선생의 손자 윤이 나로 하여금 행장을 짓게 하였다. 내가 사양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삼가 여러 분이 지은 글을 가져다 모은 뒤에 합쳐서 한 통(通)의 행장을 지었으니, 후세로 하여금 고증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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