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47
12월22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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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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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m6h-ErgJQE (박형준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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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봇물 터지듯이>
구세사란 큰 무대에 비중 있는 조연 역할에 충실했던 두 여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상봉 장면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정말 희극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처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외관상으로 마리아는 미혼모였습니다. 물론 ‘말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누구에겐가 탁 털어놓고 속 시원히 이야기 할 상대도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또 누구였습니까?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엘리사벳이 지나가면 뒤돌아서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야,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저 나이에 그게 가능한 일이냐구?” 이런 두 여인이 극적인 상봉을 합니다. 그간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간 얼마나 털어놓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에게나 털어놓았다가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껏 털어놔도 아무 문제없는 대상을 만난 것입니다. 만나자 마자 두 여인의 입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봇물 터지듯이 말이 터져 나오는데, 그 말은 다름 아닌 아름다운 노래였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칭송하는 찬미가가 되었습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놀라운 업적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자동으로 우리 입이 ‘쩍’ 벌어지는 시기입니다.
대림 시기는 부족하고 비참한 나란 존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한 나머지 우리 입에서 자동으로 찬미의 송가가 터져 나와야 하는 시기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느님께 바쳐드린 아름다운 선율의 찬미가였습니다.
오늘 루카복음사가가 전하는 ‘마리아의 노래’ ‘성모 찬가’에는 성모님의 삶과 신앙, 좌우명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그녀의 한평생은 하느님을 찬미했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기쁨에 찬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녀는 앉으나 서나, 길을 걸으나 늘 하느님께서 온전히 자신을 동행하고 계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지금은 뚜렷하지 않으나 언젠가 반드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고, 그 날이 오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도 마리아의 노래처럼 기쁨과 감사의 찬미가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에서 악담과 저주와 거짓된 말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업적을 기리는 감사의 찬미가가 하루 종일 흘러나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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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l4POGF_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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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기쁨의 노래, 마니피캇을 노래합니다. 이 노래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잉태하셨을 때, 혹은 낳으셨을 때, 혹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셨을 때가 가장 기쁘셨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때도 기쁘셨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신 것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입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성모님의 참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쁨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기쁨은 존재론적 기쁨입니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없고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것만큼 큰 고통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를 찾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려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평화가 오게 만드는 것은 부모가 주는 사랑의 증거, 곧 사랑의 선물입니다.
저는 저의 부모가 나의 참 부모임을 믿으려 할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주는 사랑의 증거들, 예를 들면 나를 위해 일하셨을 부모의 발에 박인 굳은살을 볼 때 참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때가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잃고 무덤에 홀로 앉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기쁨에 찼습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기쁘지 않습니다. 다른 기쁜 무엇을 찾아도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계시고 나의 창조자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원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50회에 기괴한 장면이 나왔었습니다. 바로 엄마가 아이 둘을 쌍 수유하는 장면입니다. 여섯 살 딸과 모유를 먹어야 하는 갓난아기 동생을 동시에 모유 수유를 하는 것입니다. 여섯 살 아이는 분명 애정 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 사랑을 느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엄마의 모유를 원합니다.
재밌는 것은 엄마가 때가 지난 아이에게 모유를 수유하면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엄마로 자녀에게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게 기쁩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끊지 못합니다. 사실 아이보다 엄마가 더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엄마도 부모로부터 애정 결핍의 감정이 있고 자녀에게 애정을 듬뿍 주면서 그 결핍을 채우려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117회에서는 더 기괴한 장면이 나옵니다. 모유 수유와 변을 닦아주는 것은 물론이요, 여섯 살 짜리 딸을 엄마가 업고 다닙니다. 엄마는 젖을 떼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도 엄마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애정 결핍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았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보아 주지 않은 상처를 자녀에게 주지 않으려는 행동입니다. 자녀는 엄마에게 업히고 젖을 먹으며 편안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에는 불안함에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참 기쁨은 부모로부터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랑 받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친교를 이루고 선교 할 때 더 완성된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 안에서 관상까지 도달하여 주님의 사랑을 느낀들 무엇 하겠습니까? 그것이 이웃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은 불안함에 휩싸입니다. 결국 내가 느낀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부모의 사랑을 가장 확신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니 자녀에게도 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젖을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와 같은 짐승들은 때가 되면 단호하게 젖을 떼게 합니다. 더 큰 기쁨으로 새끼들을 보낼 줄 아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 그 기쁨을 전하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기쁨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기도만 하는 것보다 그 기도한 것을 전할 때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인사를 건넸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하였고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었습니다. 곧 성모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셨을 때 가장 기쁘셨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을 때보다, 성령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였을 때 가장 기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것보다 성령을 흐르게 할 때 기쁨이 완성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 뜻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기쁨으로 충만하고 다른 이를 성령으로 기쁘게 한다면 그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울증에 자살 직전이었던 어떤 자매가 마더 데레사에게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그 여인에게 상담해 주지 않고 자신의 봉사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달 만에 우울증이 가셨습니다. 성령님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힘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느끼는 기쁨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닉 부이치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우울증은 타인을 기쁘게 해 줌으로써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요한복음 9장을 읽으면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태생 소경이 다 하느님 뜻이 있어서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이유가 있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령을 받아들이고 그 성령의 기쁨을 타인에게 전할 때 기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배우고 가야 할 유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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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관행(慣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어도, 더러 잘못된 점이 있어도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니 그냥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병환자,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중풍병자, 세리, 창녀, 이방인은 그렇게 태어났으니 불평하지 말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서 그리 된 것이라고 체념하고 살라고 합니다. 천동설은 당연한 관행이었습니다. 아침에 태양이 뜨는 것을 보고, 저녁이면 태양이 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태양은 지구보다 훨씬 작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관행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 관행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단죄를 받았습니다. 관행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재물을 가진 사람에게는, 명예를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행은 가난한 이에게는, 아픈 이에게는, 이방인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드는 족쇄였습니다.
‘관습(慣習)’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제게 관습이라는 말이 강하게 다가왔을 때가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행정수도를 옮기는 문제가 쟁점이 된 적이 있습니다. 행정수도를 옮기려는 정부의 의지가 있었고, 행정수도를 옮기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2004년 헌법재판소는 행정수도를 옮기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리고 판결의 주된 이유는 ‘관습헌법’이었습니다. 서울이 행정수도인 것은 관습헌법이라고 하였고, 헌법에 그리 되어있으니 옮길 수 없다는 판결이었습니다. 수도권에 전 국민의 50%가 넘게 살고 있습니다.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시설이 수도권에 몰려있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수도권으로 몰리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교구를 분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동이 적었던 농촌시대와 중세시대에는 합리적인 분할입니다. 그러나 교통이 발전하고, 사람의 이동이 빈번한 현대사회에서는 속지주의라는 관습은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굽어 살피시고 저희를 구원하시려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구세주의 강생을 경축하며 마침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 생명에게 주어지는 관행입니다. 관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관행과 관습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죽음이라는 관행을 따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관행, 관습, 율법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서 위선과 가식을 일삼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비난하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의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관행과 관습을 버리고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나 관행과 관습이 나의 기득권을 지키는 보호막이라면, 그러한 관행과 관습이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이방인에게 족쇄가 된다면 기꺼이 버려야 합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성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는 관행과 관습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따를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이방인들에게 족쇄가 되는 관행과 관습을 버릴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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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하느님 찬미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뛰니”(47절) 마리아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 영혼과 마음으로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48절). 이 말은 마리아의 겸손을 나타낸다. 그리고 자신이 온갖 복을 받은 것은 은총이라는 것이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49절) 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겸손을 굽어보셨고, 전능하신 분께서 그 여인에게 큰일을 하셨고,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50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는 말이다. 대대로라는 말은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리스도를 믿게 될 모든 나라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51절) 당신 팔로는 당신의 힘을 쓰신다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힘으로 통치자들,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교만함을 흩으시고 그들이 율법의 포로로 만든 이들을 당신 나라에 받아들이셨다. 이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힘이 필요하지 않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3절) 굶주리는 이는 겸손하고, 가난한 이다. 부유한 자는 교만하고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54-55절)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그분이 거두신 이스라엘은 허울뿐인 교만해진 육에 따른 이스라엘이 아니라, 당신의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믿고, 약속과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된 이들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고, 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는(창세 22,18 참조) 약속을 이루어 주셨다. 이 약속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시어,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셨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는 석 달 정도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며, 요한이 탄생한 다음 엘리사벳을 위해 봉사하시고 집으로 가셨다. 그리스도를 낳아주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성탄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바로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즉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로 낳아줄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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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를 소개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면,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칭송에 노래 형식으로 응답합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역사를 찬양하면서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주님을 향한 찬송으로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송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큰일을 완성하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당신의 강함을 보여 주시려고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를 누리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셨으며, 부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는 낮은 이들을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는 자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리라고 예언합니다.
하느님의 최종 목적은 세상의 권세와 부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권세에 취하여 교만하고 부유한 이들이 당신의 구원 계획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을 낮은 위치에 두고자 하십니다. 자신을 비천한 종으로 낮추신 마리아께서 하느님께 순종하시어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를 통하여 실현된 ‘역전’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하느님 체험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낮은 이가 되어 하느님의 위대함과 자비를 찬양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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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저를 구하신 주님 생각으로 제 마음은 울렁거리나이다!>
예수님을 잉태한 처녀 마리아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서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천사의 말을 기억하고 걸음을 서둘러서 '아인카림'이라는 유다 산골 마을로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나는 내용이 어제의 복음 말씀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며 성령을 받아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엘리사벳의 칭송을 받은 마리아는 자신에게 내린 하느님의 은총을 확신하게 되었고 말 할 수 없는 감격에 겨워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가를 불러 드립니다. 바로 오늘 복음 내용이지요. 우리는 이 마리아의 노래를 '마니피캇(MAGNIFICAT 찬양하다)'이라고도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
마리아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들은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마음 설레인 적이 있으신지요? 옛날 연애하던 시절에 상대방을 생각하며 설레였던 적은 있어도ㅈ하느님을 생각하며 설레인 때는 그리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알게되면 마음이 설레입니다. 성체 앞에서 기도하고 또 묵상하면서 하느님을 알아 가는 그 기쁨은 사람과 만남에서 체험할 수 있는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깊은 고요와 더불어 머리 속을 꿰뚫는 상쾌한 충만감에 젖게 되지요.
루카 복음서에는 이렇게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 드리는 찬미가들이 등장하는데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 "시메온의 노래"(루카 2,29-32)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 찬송"(루카 1,46-55)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이 노래들을 매일같이 기도 속에 담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의 입에서는 뭔가를 해 달라는 요구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감사하다는 말밖에 나올 수가 없지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 달라고 하느님을 보챕니다.
어느 신부님의 강론에서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제목의 인용 글을 보았습니다.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라면 하느님은 구세주를 위대한 과학자로 보냈을 것이다. 우리가 최고로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 쾌락이라면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가수나 코미디언 같은 연예인을 보냈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라면 하느님은 메시아로 위대한 경제학자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용서이다. 인간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통해서이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아픔과 보복에서 건져주실 우리의 허물을 대신 짊어지실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느님께 이것저것을 청하며 졸라대지만 실상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청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얼마나 깊고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곧 없어지게 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더 이상 청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큰 은총을 깨달은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청하는 내용들은 일신상의 안위와 복을 청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너무나도 설레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리아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희망을 지니고 살 수 있기를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성모찬가를 보면서 다음 몇 가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루카 1,51) 하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힘겹게 살고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힘겹기만 한 것일까요? 왜 그 누구도 예외가 없이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이런 상황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인지 의문이 들지요. 이에 대한 대답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보시니 참 좋게"만드셨지만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이 세상을 힘들고 어려운 혼돈의 장으로 만들고 말았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조상의 죄를 대물림 받고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교만의 죄가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가 하면 하느님보다도 더 커지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도 지속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학과 재물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줄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넘쳐나고 있지요.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보고자 했던 그 교만의 결과가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인간 제일주의의 사고는 혼란과 고통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사랑과 평화의 가치는 점점 땅에 떨어지고 끝없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한 갈증 속에 인간은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나만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이는 자신의 힘만을 믿고 싶어한 우리 인간이 스스로 지은 교만이라는 죄의 대가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 때 이 혼란과 두려움은 극복될 것입니다.
오늘 성모 마리아는 "주님께서 교만한 자를 흩으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 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성모님은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루카 1,52)라고 노래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권력 있는 자들을 흩어 버리신다는 내용이지요.
예수님 시대에 로마의 권력층과 또 그 로마의 권력에 빌붙어 기생했던 이스라엘의 지배층들은 백성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면서 마치 그들이 승리하는 것 같은 세상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흩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여준 권력이 영원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지만 그것을 잠시일 뿐 결국 하느님께서는 부정과 불의에 물든 자들을 내치시고 고통 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불러 위로해주실 것이라고 성모님은 노래하고 계십니다. 또 성모님은 세 번째로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3)고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자신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자만하고,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더욱 욕심을 부리며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헐벗음과 굶주림 끝에 병들어 죽어가고 있지요.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불의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어 주실 것을 하느님께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실은 이것은 성모 마리아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핍박받고 힘겨웠던 모든 사람들의 간구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살아보려는 것은 그 삶을 끝없는 고통과 갈증으로 내모는 것이며, 권력과 재물을 이용하여 가난한 이웃을 착취하는 것 또한 하느님께서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너무나도 큰 특은을 입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며칠 뒤에 오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 또한 같은 이유입니다.
나의 이기적인 소원을 채워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호의호식해서도 안 되며, 하느님 안에서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고 불의한 사회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들 안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면 그것이 주님이 오시는 성탄이고, 그곳이 성모님의 찬미가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성탄은 나의 욕심을 채우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고 또 하실 일들을 우리가 대신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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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정용 안토니오 신부님]
교회 안팎의 현대 여성들, 특히 한국의 여성들은 오늘날 누구보다도 큰 변화를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전통적인 여성상(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가부장적인 구조에 익숙한 여성상)이나 가치관과는 사뭇 다른 여성상과 가치관이 삶 속에 차츰 관철되고 있다는 것은 비단 젊은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 여성들의 변화 과정을 민감하게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여성들에게 여성으로서 마리아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것은 그 뜻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가 현대 여성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참으로 풍요합니다. 마리아는 많은 평범한 여성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이른바 ‘화려한 공주과’의 여성이 아닙니다.
한때 한국 여성들의 집단적 현상이기도 했던 ‘공주병’은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정신적 성형수술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많은 여성이 자신의 내적·외적 가치와 변화를 사회적으로 상품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으로 성취하려고 하지만 그 끝은 마치 성형수술의 부작용처럼 나타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비천한 신세’인 마리아는 장차 굴절되고 성형된 사회적 가치를 전복시키실 예수님의 길을 온몸과 마음에 품고 따름으로써 하느님께서 큰일을 이루실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마리아는 보잘것없고 배고픈 이들의 자리에서 주님의 자비와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았던 희망의 여성이었으며 부요한 이들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교만을 꺾으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했던 믿음의 여성이기도 합니다.
보잘것없고 비천하며 겸손한 시골 처녀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 5,1-12 참조)와 지상설교(루카 6,20-26 참조)를 다시 한번 새롭게 듣는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 여성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모든 시대 안에서 자유·평등·평화·인권을 진지하게 추구했던 선구자적인 모든 여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리아의 삶은 모든 시대, 모든 여성에게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며 마침내 온 백성과 온 여성이 마리아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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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재현 베드로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던 마리아를 찬양하며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자, 마리아는 기쁨에 넘쳐 전능하신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감사하며 찬미가를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찬미가는 ‘마리아의 노래’ 또는 ‘마니피캇’이라고도 하는데, 이 노래는 과거에 이스라엘 안에서 보여 준 하느님의 위업을 제시하며 그분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니피캇은 종말론적인 찬미가라 할 수 있으며, 신약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감사의 찬가를 읽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누구나 마리아와 더불어 기뻐 용약하도록 초대받게 되는데, 일찍부터 이 찬미가는 서방교회 성무일도의 저녁기도와 동방교회 아침기도 안에 도입되었고, 마르틴 루터는 마니피캇 주석에서 마리아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하느님 경외심의 표본이라고 찬미하기도 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의 저자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체험한 마리아의 찬미 기도를 우리에게 전해주면서, 그리스도 교 신앙인은 누구나 하느님의 위업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마리아와 같이,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느끼고 믿도록 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마리아의 노래 첫 부분에서는 하느님을 ‘주님, 나의 구원자, 전능하신 분, 거룩한 이름을 지닌 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이해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종합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찬양하는 하느님은 한마디로 ‘구원의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결코 저 멀리 떨어져 사는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로 향하는 분이시고, 힘과 권능으로 가득 찬 살아 계신 하느님입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을 굽어 살피시는 아주 인격적인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 앞에 비천한 존재요, 종이며, 그분을 두려워해야 할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의지해야 하는 동시에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깨닫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한 태도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자만이 하느님의 충만함에 희망을 걸고 그분이 이루는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권세 부리는 자들과 부요한 자들은 아쉬움을 모르기에 하느님을 찾아나서지 않고, 무엇을 희망하기가 어렵게 됨을 마리아는 두 번째 부분에서 알려줍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마리아의 노래 세 번째 부분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하신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노래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며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땅과 후손과 이스라엘 대대로 당신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고 하신 그 약속과 자비를 영원히 지속시키는 하느님이심을 마리아는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깊이 생각하고 큰 의미를 헤아려 보는 사람은 마리아처럼 자연스럽게 경탄의 찬미가를 부르게 되고, 그럴 때 내 삶 전체를 그분께 맡기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약하기에 전능하신 하느님께 의지해야 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닐 때 하느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약하고 비천하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오늘도 나의 하느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앞길을 인도해주심을 믿으며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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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신비>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
그때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신비>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당신 편이 되려는
사람의 편이
되어주시고
어떻게든
당신을 제 편
삼으려는 사람을
끝내 당신 편으로
만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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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리아의 노래>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되었고 엘리사벳의 칭송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열어 전능하신 분을 찬양합니다. 이 마리아의 노래를 ‘마니피캇’ (magnificat) 이라고도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 하고 시작합니다. 은총에 대한 감사가 무엇보다도 앞서고 있습니다.
비천한 여종이 목숨 걸고 순명했을 때 세상은 그를 복된 여인이라고, 거룩하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비천한 마리아를 돌보시는 것과 같이 오늘 우리의 비천함도 돌보십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주님, 제 마음 다하여 찬송하며 당신의 기적들을 낱낱이 이야기하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시편 9,2-3)
사무엘 상권2장1절을 보면 한나가 기도합니다. “제 마음이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제 이마가 주님 안에서 높이 들립니다. 제 입이 원수들을 비웃으니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고(루카 2,20) 치유 받은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깔고 있던 요를 걷어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루카 5,25)
사도들도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께 경배하며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날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루카 24,51-53)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이들은 무엇보다도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엘리사벳도 젊은 날에 아이를 배지 못하는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지만, 주님께서 그 부끄러움을 벗겨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주님께서 여인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그리고 마리아는 겸손하게 말합니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전능하신 분께서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50) 하며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분의 자비가 구체적으로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통치자를 끌어 내리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내치십니다. 그리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십니다. 또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55)
하늘의 법이 이뤄집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나에게도 그분의 자비가 여전히 주어집니다. 우리가 요구할 자격이 없을 때에도 하느님은 자비는 여전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게 찬양 제물을 바치고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네 서원을 채워 드려라”(사람이 하느님께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입니다.)(시편50,14)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 3,17) 마리아의 겸손과 감사를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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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젊은 청년이 카페에 들어갔다가 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 노트북에 푹 빠져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분명히 노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보다 더 빠른 속도에 감탄하였지요. ‘무엇을 하시나?’ 하고 노트북 화면을 보니, 요즘 유행하는 최신 게임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게임 실력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감탄한 청년은 이 노인과 이렇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가 아까부터 어르신을 지켜봤는데 컴퓨터를 정말 잘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
“그거야 하루에 12시간 이상 게임을 한 덕분이죠. 밖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게임만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요.”
“굉장하세요. 그 나이에 정정하신데도 기계도 그렇게 잘 다루시다뇨. 실례가 안 된다면 연세를 여쭤봐도 될까요?”
“스물여덟인데요?”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여기에는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행동이 결과를 결정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바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자기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행동보다 좋은 결과만을 생각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를 만나시고, 성무일도에서 늘 바치고 있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이 노래의 한가운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라고 고백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 잉태는 처녀의 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무시무시한 간음법에 거부하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전능하신 분의 큰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런 행동이 바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게 된 것이고, 더불어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을 잘 떠올려 보십시오. 결과만을 바라보는 삶이 아닌, 자기 행동이 옳을 수 있도록 늘 성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히 좋은 결과가 따라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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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감사를 넘어 찬미하는>
오늘 복음의 마리아 찬가는, 어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엘리사벳의 마리아 칭송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찬가에서 마리아는 자기의 기쁨을 감추지 않고 토로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리아를 보면서 우리도 기쁨 찬미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탄을 앞둔 우리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기뻐할 일도 찬미할 일도 없다면, 그리고 기쁘더라도 그 기쁨이 그리 크지 않다면 우린 불쌍하고 대림절을 잘못 살고 무엇보다 한 해를 잘못 산 것일 겁니다.
아무런 기쁨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표시이고, 한 것이 있어도,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에게 기쁜 일이 있다면, 우리는 그 기쁨을 감추거나 누르지 말고 마리아처럼 감사와 찬미로 토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고, 기쁨을 사유화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은 한해의 기쁨이 자기가 이룬 기쁨이거나 기껏해야 이웃과 함께 이룬 기쁨이지 하느님께서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이룬 기쁨이고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기쁨이라면 이 기쁨은 반드시 감사와 찬미로 이어지고 표출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기쁨 중에 이기주의적인 기쁨이 얼마나 많습니까? 같이 이룬 것을 자기가 다 이룬 것인 양 열매를 혼자 다 따먹고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자랑은 하지만 감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이룬 것이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덕이 있는 사람이 감사한다면 신앙이 있는 사람은 찬미할 것입니다.
찬미는 하느님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에 이루신 선과
나와 우리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신 선이 다 하느님 덕분이라고 감사드리는 것이요 감사를 넘어서 칭송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먼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큰일 곧 구원을 찬미한 다음 자기에게 베푸신 자비가 자기를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침을 찬미합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있다면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고, 우리끼리 이룬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협력을 통해 이루신 것이며, 공동체를 통해 내게 이루신 것이요 나를 통해 공동체에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미는 마리아의 찬미처럼
개인의 구원과 공동체의 구원을 모두 찬미하는 노래가 되어야겠습니다.
내일과 모레는 강론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25일 성탄 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남은 대림 시기 잘 보내시어 기쁜 성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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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빈자(貧者;아나뷤anawim)의 영성>
- 시의 힘, 노래의 힘 -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가 갈망하는 이여,
두벽을 맞붙이는 모퉁이돌 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대림2부 여섯째 날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O gentium)”로 시작되는 M후렴이자 복음 환호송이 은혜롭습니다. 어제 ‘명상의 힘’이란 좋은 글을 보았습니다. 오늘 강론 “빈자(貧者;아나뷤anawim)의 영성-시의 힘, 노래의 힘-”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입니다. 내적 마음의 치유와 위로의 구원에 명상의 힘, 시의 힘, 노래의 힘은 큰 역할을 합니다. ‘자신을 느끼세요, 판단하지 마세요!’라는 제하의 끝부분입니다.
“자신에 대해 판단하지 마세요. 뭘하든 ‘나’라는 존재는 다 옳습니다. 명상을 통해 순간순간 존재하는 자신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명상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제가 호흡에 맞춰 “마라나타-오소서, 주 예수님!” 성구를 되뇌이며 바치도록 권유하는 명상기도가 바로 이런 명상의 진리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명상의 힘과 더불어 시의 힘, 노래의 힘 역시 내적 상처의 치유에 아주 효과적이니,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이어 계속되는 행복기도문은 고백성사 보속으로 소리내어 읽게 하고 자주 기도로 바치도록 기도문도 꼭 나눠주곤 합니다. 또 보속으로 가끔 가톨릭 성가를 고백하는 마음으로 소리내어 부르게도 합니다. 내적 상처를 치유하는 시의 힘, 노래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아침 산책때마다 자주 부르는 ‘바다’와 ‘푸른잔디’ 동요 외에 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젊은이들의 애국가와 같았던 ‘아침이슬’을 때 늦은 나이지만 너무 좋아해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배밭 사이 산책 시 아무도 없을 때 부끄러운줄 모르고 열창熱昌하곤 합니다.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하느님만을 찾는 우리 광야 수도승들의 정서에도 잘 드러맞는 시이자 노래임을 늦게서야 깨닫습니다. 가난한 민초(民草;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지닌 백성을 일컫는 말)들이 즐겨 부른 노래가 숱한 민요와 가요들입니다. 바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뷤anawim’ 빈자貧者들이 즐겨부른 노래가 바로 오늘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아나뷤을 대표한다 하겠습니다. 믿을 것이라곤 하느님뿐이 없는 가난한 사람인 마리아가 부른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시작되는 마리아의 노래는 정말 혁명적 성격의 노래입니다. 하느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가난한 이들을 들어 높으시고 교만한 권력자들을 뒤엎으시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하느님을 고백하며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불편한 시요 노래입니다. 아마 독재자들이 들으면 금지시켰을 성격의 노래입니다.
감사시편의 전통적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시편의 찬미가는 예수님 어머니의 개인적 감사의 마음을(46-50절), 그리고 계약의 약속을 이행하신 데 대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집단적인 감사의 마음을 노래(51-55절)합니다.
아나뷤의 역사는 자못 깊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우리의 민중신학은 바로 여기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삶에 기초하며 민초로도 표현합니다. 민초들에게 민요가 있었듯이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들에겐 찬미와 감사의 시편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의 어머니 또한 전형적인 아나뷤의 민초입니다. 엘리에게 사무엘을 위탁하는 어머니 한나의 믿음도 감동적입니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고, 이어 즉시 아나뵘인 한나의 입에서 터져나온 감동적 찬미가(사무엘 상2,1-10)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들이 한나가 노래한 감사와 찬양의 시편이요, 마리아의 노래 역시 여기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한나, 엘리사벳, 마리아 모두가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나뷤 어머니들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이요 이는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을 봐도 담박 드러납니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들은 강합니다. 남자는 아무리 나이 먹어도 어머니의 철부지 아이들같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천하무적의 아나뷤 어머니들입니다. 자녀들 역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분은 하느님이기에 이들 어머니의 시편 노래는 간절할 수 뿐이 없습니다.
시의 힘, 노래의 힘은 우리가 매일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기도의 교과서와도 같은 성서의 시편은 아나뷤의 노래집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가톨릭 교회의 수도자들이나 신자들은 아나뷤의 후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 아나뷤이 되어 시편을 노래합니다.
한맺힌 민요나 가요가 아니라 빛과 생명, 희망이 넘치는 치유와 위로의 구원을 선사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노래가 시의 힘, 노래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바로 시편의 시의 힘, 노래의 힘은 하느님의 힘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노래기도로 바침으로 살아 계신 주님께 치유와 위로의 구원을 받고 기쁨과 평화를 선물로 받습니다.
이래서 가톨릭 교회나 수도원은 명실공히 힐링 센터가 되곤 합니다. 세상에 빛과 생명, 희망이 넘치는 아나뷤의 노래인 찬미와 감사의 시편보다 더 좋은 시나 노래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아나뷤 성모 마리아 어머니가 부른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 가톨릭 교회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날마다 저녁기도때 마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영적 아나뷤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는 저녁 시편 성무일도 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영적 아나뷤인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선물하신 하느님 최고의 시, 둘은 '예수님'이자 이 거룩한 '미사'라 고백하고 싶습니다. 날마다 가난한 아나뷤인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미사잔치입니다. 세상에 영육의 전인적 힐링에 미사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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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9)
<마리아의 기쁨!>
오늘 복음(루카1,39-45)은 친척 엘리사벳으로부터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된 여인으로 칭송을 받은 마리아가 그에게 화답한 노래입니다. 곧 마리아의 기쁨을 노래한 '성모찬가(Magnificat)'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9)
마리아는 자신을 비천한 종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자신을 굽어보신 구원자 하느님께 기쁨의 찬가를 드립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찬가를 통해 하느님의 신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 곧 그분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이것이 바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일이며, 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향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는 곧 우리가 향해 있어야 할 마음이기도 합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님, 어서 오세요!"
구세주의 성탄이 정말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구세주께서 태어나실 마음의 구유는 잘 준비되었는지?'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처럼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을 품어 안을 겸손과 비움의 구유는 잘 준비되었는지?' '큰 아픔 속에 있는 이들, 특히 세월호 가족들과 10.29 이태원 참사 가족들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마음 안에서 깊이 있게 성찰해 보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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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9H-ke8NyU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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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
전능하신 분께서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공들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최고의 순간입니다.
이미
이 모든 것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큰일입니다.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 순간 모두가
가장 큰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체온을
먼저
나누십니다.
비천한 마음을
견디어 낸
우리를
당신의 체온으로
건져올리십니다.
사람들 속에서
큰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는
은총의
주님이십니다.
비천함이 은총이
되는 순간은
뜨겁습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비천함과
굶주림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엎드린 이들을
위로하시며
역사를 바꾸십니다.
작고 큰일도
모두
주님께서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믿음이 은총이
되는 큰일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은총 아닌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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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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