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막간극
노정애
그녀의 삶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자꾸 내 지난 시간들이 끼어들어서다. 독일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Jenny Erpenbeck, 1967~)의 『모든 저녁이 저물 때 (Aller Tage Abend, The End of Days)』는 다섯 번의 삶과 죽음, 그리고 네 개의 막간극으로 구성되어있다. 1902년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8개월 때 유아 돌연사로 죽는다. 가족의 절망감은 극에 달하고 살아보지 못한 아이의 미래도 사라졌다. 남은 가족들의 붕괴된 삶을 보여주며 첫 권이 끝난다. 다음 짧은 막간극에서 ‘만약 예를 들어’로 시작해 아이에게 죽음이 덮치는 찰나의 순간을 피했다면 부모님은 건재하고 동생도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나온다. 2권은 죽음을 피한 17살 성인인 그녀의 시간이다. 삶은 순탄하지 않고 낯선 남자에게 살해당한다. 이어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면의 가정이 다시 나온다. 두 번째 막간극에서 살아난 그녀와 반대로 ‘그때 죽었다면?’인 나의 막간극이 떠올라 책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성인인 나. 작은 사무실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퇴근 후에는 재수 학원에 갔다. 대학진학에 실패해 부모님께 손 벌릴 면목이 없어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잠은 늘 부족했고 잦은 편두통으로 가방에는 제약사별 진통제가 한가득이었다. 일을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는 부모님의 권유도 못 들은 척했다.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친 탓에 고집을 부리면서 다녔다.
7월 어느 날, 그날은 아침부터 두통이 심했다. 진통제 양을 늘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 꼴로 일을 하고 학원까지 갔다. 잠을 자면 나을 것이라는 기대에 자정 전에 누웠지만 두통은 점점 심해졌다. 새벽에 안방 문을 두드렸다. 병원 응급실에서 처방해준 약은 더 강력한 진통제였다. 귀가 후에 통증은 더 심해져서 누워 있기도 힘들었다. 결국 신경외과 전문병원에 입원했다. 두통에 높은 고열까지 더했다. 어떤 약도 듣지 않았다. 척수검사며 온갖 검사를 하고서야 내린 진단명은 장티푸스였다. 나는 고열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비닐로 사방을 둘러싼 격리된 병실, 울고 있는 엄마, 치료약을 놓았으니 곧 좋아질 것이라는 의사의 호언장담을 간간이 들었다.
다음 날 오후 난 두통 없는 세상에서 눈을 떴다. 3일 만에 없어진 통증에 날아갈 것 같았다. 정말 장티푸스였나 보다 생각하는데 나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왼쪽 눈이 카멜레온의 눈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눈꺼풀이 덮여있지만 흉측한 몰골이었다. 병원에서는 당장 안과가 있는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종합병원에서의 진단은 안구염증이었다. 염증으로 고열과 두통이 동반되었다고 했다. “뇌와 가까운 곳이라 조금만 더 심했으면 머리에 문제가 생겼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어요. 큰일 치를 뻔했습니다.” 난 속으로 두통과 고열에 장티푸스를 진단한 돌팔이 의사에게 욕을 했다. 10여일을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에도 닫힌 눈꺼풀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기까지는 몇 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막간극에서 숙명적 우연을 거듭하며 생명을 이어간다. 작가는 ‘만약 그때 그랬다면’ ‘다른 선택을 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를 묻고 있다. 1차 세계대전, 굶주림, 볼셰비키, 나치즘, 파시스트, 스탈린 치하의 공포, 홀로코스트와 독일 통일에 이르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그녀의 외할머니와 같은 여인들의 고달픈 삶을 보여주며 죽음을 말한다. ‘하나의 삶에는 매번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전선戰線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그 모든 전투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라는 두 번째 삶에서의 말처럼 힘든 시대였다. 세 번째 삶에서 히틀러시대의 그녀는 스파이로 지목되어 처형당한다. 이어서 살았다면의 가정이 나온다. 나의 막간극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순간이다.
딸 둘의 엄마가 된 나. 남편은 부산에서 근무 중이었다. 다세대 주택 2층에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 학교에서 바자회가 열려 온종일 봉사활동을 했다. 파김치가 되어 아이들을 양쪽에 끼고 잠자리에 들었다. 단잠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눈을 떴을 때 흠칫 놀라는 듯한 낯선 눈동자가 코앞에 있었다. 쪼그려 앉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 목에 칼은 들이대고 한 손으로 내 입을 막는 중이었다. 양손으로 힘껏 놈을 밀었다. 발밑으로 떨어져 나간 그놈. “악~~~”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른 나. 빛의 속도로 사라진 그놈. 놀라서 깬 아이들을 달래는 나.
새벽 4시. 112에 신고를 했다.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내 고함에 놀라서 오고, 10여 분 후 경찰이 왔다. 20대 후반의 짧은 머리에 크지 않은 키, 등산 조끼를 입은 단단한 체격의 도둑은 도시 가스 배관을 타고 2층의 반 이상을 감싼 베란다의 창문 중 단 하나의 고장 난 창문을 잘도 알고 들어왔다. 언제 들어왔는지 공부방 책장의 책 위에는 안방에 있던 지갑과 액세서리를 모아두는 보관함이 놓여있고 바닥에 깔아둔 카펫 위에는 오줌도 한 바가지 싸고 갔다. 가짜 보석들은 그대로고 지갑에서 현금만 꺼내갔다. 내 목에 칼이 닿았던 붉은 실금과 입술에 생긴 약간의 상처는 며칠 뒤 없어졌지만 놀라서 지른 고함에 쉬어버린 목소리는 일주일을 넘겨서야 겨우 돌아왔다.
현금을 챙겼으면 그냥 가지 왜 나를 깨우려고 했을까? 현금이 적어서? 찾아낸 액세서리에 금붙이가 없어서? 손목에 차고 있던 얇은 금팔찌가 탐이 났나? 그놈이 내 가슴팍에 앉지도 않았는데 왜 태산이라도 올려놓은 듯 숨도 못 쉬게 답답했을까? 그놈의 계획에 따라 입을 막고 칼을 들이미는 상황에 처했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들이 내 곁을 지나간 것이다.
소설가로 성공한 그녀는 60세에 난간에서 발을 헛디뎌 죽는다. 허무한 죽음이다. ‘그러니까 죽음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친 전선戰線 같은 것일까?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 당장 이 세상 밖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세상 밖으로 추락하는 걸까?’ 작가는 세상 밖으로의 추락을 이렇게 허무하게 저물 수도 있음을 말하고 싶었나 보다. 그녀의 성대한 장례식 풍경이 자꾸 쓸쓸하게 느껴졌던 것은 내가 없는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나?를 생각해서였다.
45살의 나. 지인 부부와 강원도로 1박2일 골프를 갔다. 현충일을 낀 연휴라 차가 많이 밀렸다. 여유 있게 출발했는데도 도착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골프장이 보이자 안도하며 언덕길을 오르는 순간 오른쪽으로 굽은 길이 나왔다. 남편이 급히 핸들을 돌렸지만 차는 경계석을 박고 하늘을 날았다. 에어백이 터지고 차는 뒤집혀 옹벽 옆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 남편의 목소리에 깼을 때 안전벨트에 묶여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겨우 차문을 열고 기어서 나왔다. 차는 눌린 찐빵처럼 납작했다. 목적지가 가까워 안전벨트 풀고 있던 뒷좌석의 지인 부부도 핸들에 가슴을 부딪쳐서 숨을 몰아쉬는 남편도 풀밭에 반쯤 누워 서로에게 괜찮은지를 묻고 있었다.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다. 다행이 지인 부부도 우리도 몸 여기저기에 타박상만 있을 뿐 큰 부상은 없었다. 다음 날 골프를 치고 집으로 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전날 그곳에는 비가 내렸다고 했다. 차가 떨어진 옹벽 옆에는 꽤 많은 물이 흘렀으며 6월의 풀들은 한껏 자라 무성했고 주변 흙들은 부드러웠다. 조금만 더 속도를 올렸다면 옹벽으로 돌진할 수도 있었다. 타박상은 오래갔다. 모든 이들이 기적이라고 했다.
네 번째 막간극에서 조금만 천천히 계단을 살피며 내려왔다면이 그녀를 살려낸다. 이렇게 모든 우연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제 5권에서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호프만 부인’이 나온다. 그녀로만 나왔는데 드디어 이름을 가진 것이다. 앞서 네 번의 삶과 죽음을 맞고 만약에, 라는 가정으로 살아났던 그녀들은 우리 모두의 시간이리라. 관계와 인연, 사회적 상황과 환경적 요인 그리고 주변의 물건들까지 쉽게 지나치기 힘든 그것들이 모두 모여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있다. 90세의 호프만 부인의 죽음으로 소설은 끝난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는 독특한 형식에 간결한 문장과 치밀한 묘사가 돋보였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이 많았다. 옮긴이 배수아의 말도 좋았다. 그러나 분절된 이야기 구조, 죽음으로 향하는 무거운 주제, 암울한 역사, 여인들의 비극적 삶과 죽음, 남겨진 사람들의 삶, 중간 중간 끼어드는 나의 시간들까지 더해져 조금 힘들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한 사람이 저문다고 해서 세상이 저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녀의 자녀로, 형제로, 이웃으로 이어지며 남겨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현제의 시간이 애틋해졌다. 죽음도 삶의 일부니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막간극을 맞이할까? 죽음에 가까웠던 만약에의 순간을 넘겨 이렇게 있는 것은 기적이리라. 지금 나는 기적의 시간을 살고 있다.
한국산문 2023년 3월
노정애
부산 출생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 문학상 수상
남촌문학상 수상
수필집 《나의 소확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