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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1
#요한계시록 #Revelation 1:2-4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證據 곧 自己가 본 것을 다 證言하였느니라
who testifies to everything he saw--that is,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qui testimonium perhibuit verbo Dei, et testimonium Jesu Christi, quæcumque vidit.
ὃς ἐμαρτύρησεν 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ῦ καὶ τὴν μαρτυρία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ὅσα εἶδεν.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시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므로, 계시록에서 자신이 본 하나님의 말씀이란 단지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주신 예언과 율법과 복음 등의 말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창세 전부터 영원 전부터 하나님으로나 사람으로나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솔로몬에 의해서는 하나님의 지혜라고도 불리신다. 성자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연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시므로 그분의 존재와 사역과 가르침 모두가 바로 보이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증거하신다.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 자신의 존재와 그분의 사역 전체를 3년 동안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온 몸으로 체험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수십년 동안에는 다른 사도들은 전부 순교하였고 지금은 오로지 요한 사도만 남았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직접 나타나셔서 알려주셨고 요한 사도는 그분께로부터 받은 모든 예언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남겼다. 복음 사역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와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가르치며 전하는 것이며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다.
3 이 豫言의 말씀을 읽는 者와 듣는 者와 그 가운데에 記錄한 것을 지키는 者는 福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aloud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
Beatus qui legit, et audit verba prophetiæ hujus, et servat ea, quæ in ea scripta sunt : tempus enim prope est.
Μακάριος ὁ ἀναγινώσκων καὶ οἱ ἀκούοντες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καὶ τηροῦντες τὰ ἐν αὐτῇ γεγραμμένα· ὁ γὰρ καιρὸς ἐγγύς.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한 기록은 역사라 한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이므로 그 시대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사실이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한편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예언은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읽어도 들어도 헛소리로 치부될 뿐이고 그 예언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에 불과한 취급을 받을 뿐이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모든 예언에 대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읽지도 듣지도 행하지도 못하고 그리스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 예언의 말씀을 읽지도 듣지도 행하지도 않는다면 스스로 자기가 거짓 신자임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선포되어야 하므로 설교자는 이 말씀을 받아 큰 소리로 읽어야 했고 청중들은 설교자의 입에서 낭독되는 이 말씀을 들어야 했으며 읽는 설교자나 듣는 청중이나 이 예언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했다. 설교자가 이 말씀을 청중 앞에서 읽기는 읽어도 행함이 없으면 거짓 설교자이고 신자가 이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행하지 않는다면 거짓 신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가 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다면 거짓 교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언의 말씀 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읽고 듣고 행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은 믿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비방을 초래하게 되므로 힘들고 어렵고 고된 과정이다. 따라서 예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이를 읽고 듣고 지키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심판 이후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은 최종적으로 세상 끝날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강림하시면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나 그날이 대체 언제 올것이냐고 의심하는 자들에게나 교회와 성도들에게나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드러내는 증표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나라와 시대마다 유사한 내용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개별 교회와 성도 각자의 삶에서도 이 예언과 유사한 패턴을 반복해서 보여주신다.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敎會에 便紙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前에도 계셨고 將次 오실 이와 그의 寶座 앞에 있는 일곱 靈과
John, To the seven churches in the province of Asia: Grace and peace to you from him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and from the seven spirits before his throne,
Joannes septem ecclesiis, quæ sunt in Asia. Gratia vobis, et pax ab eo, qui est, et qui erat, et qui venturus est : et a septem spiritibus qui in conspectu throni ejus sunt :
Ἰωάνης ταῖς ἑπτὰ ἐκκλησίαις ταῖς ἐν τῇ Ἀσίᾳ· χάρι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 ἀπὸ ὁ ὢν καὶ ὁ ἦν καὶ ὁ ἐρχόμενος, καὶ ἀπὸ τῶν ἑπτὰ Πνευμάτων ἃ ἐνώπιον τοῦ θρόνου αὐτοῦ,
요한 사도가 교회들에 보내는 편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예언의 말씀이었으므로 때가 가까움으로 매우 급박하게 보내야 했을 것이다. 요한 사도가 보낸 예언의 편지의 1차 수신자들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시대와 지역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라 증거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므로 성육신 전 창세 전 영원 전에도 사람으로도 존재해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처럼 성육신 전 창세 전 영원 전부터도 그렇게 계셨었다. 하나님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실체가 일곱인 영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시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시고 성자와 연합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에 완전충만하게 거하시며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혼의 의지와 육신의 지시를 따라 행하신다.
#20210201
#민수기 #Numbers 33:50-56
가나안 땅을 제비 뽑아 나누다
50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5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52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53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54 너희의 종족을 따라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 뽑은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조상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받을 것이니라
55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56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모세는 사역을 마치고 죽을 날이 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명령을 주셔서 행여나 모세가 해이해지지 않도록 하시고 백성들이 끝까지 모세를 여호와의 사자로 공경하게 하셨다. 이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 부름받은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가 아닌 이상 개인적인 사유로 사역을 그만두거나 저버리거나 해서는 안되며 스스로 한계를 지정하지 말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항상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렇다고 이것은 소위 교회의 담임목사들의 정년을 무시해도 된다는 근거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모세의 경우에는 여호와께서 특별히 부르셔서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이기 직전까지 40년 동안 80세부터 120세까지 그 고령의 허약한 육신을 쇠하지 않게 보존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식의 특별한 보존은 하시지 않으시므로 목사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나이에 따른 육신의 노화의 정도에 따라 사역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육신의 건강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어떤 자들이 탐심 때문에 교회를 죽을 때까지 점유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교회법으로 목회 정년을 지정한 것이므로 이를 준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명하신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모든 가나안 족속을 남김없이 몰아내고 저들의 모든 우상을 남김없이 부수라는 것이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로 약속하신 분은 여호와이시나 실제로 저들을 몰아내는 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의 몫이고 책임이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것들을 몰아내고 차지할 능력을 주셨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성들의 게으름이나 탐심이나 의지부족 때문이며, 이로 인해 몰아내지 않아 남은 이방 족속들로 인해서 여호와의 재앙과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성도들 각자마다 세상에서의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하셨는데 그것을 차지하고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와 성도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는다면서 삶의 영역에서 가나안 족속과 같은 사탄의 세력을 남긴다거나 죄악의 요소들을 남겨 놓는다면 그로 인한 유혹과 시험과 범죄로 인한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하는 두 극단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모든 것을 불변하게 작정하시고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므로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이나 죄악들에 일말의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예정을 믿느다고 하면서 성령께서 자기들에게 감동을 안주셔서 자기들이 범죄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자기 죄책을 가볍게 여긴다. 이는 참으로 간교하고 간교한 사탄의 속삭임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신자가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결국 신자의 의지에 전적으로 달린 것이므로 내주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부인하고 사람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예정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교부 시대에는 펠라기우스주의로, 중세 신앙개혁 시대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불변하나 그것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신자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감동을 주셔서 신자가 자기 자신의 의지로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악을 행할 때는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죄악에 물든 의지로 성령의 소욕을 죽이고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차지할 가나안 땅은 중생 이후 성도의 인생 자체로도 볼 수 있다. 중생 전 신자의 삶은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를 헤매듯이 복음 안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다가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중생하게 되는 순간 생명이 가나안 땅과 같은 신자의 영혼에 침투하게 된다. 그러면 이후에는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된 신자의 심령이 그동안 죄악이 거주한 자기 몸과 영혼을 점진적으로 조금씩 점령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치열하게 싸우면서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게 되더라도 성도의 영혼은 성령을 힘입어 우리에게 거하는 죄악들을 조금씩 내어 쫓으며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게 되고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에야 완전히 몰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활의 때에 우리 몸과 영혼이 새롭게 되어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200201
#창세기 #Genesis 28장.
1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2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5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이삭은 비록 야곱이 자기를 속여 에서에게 줄 축복을 가로채는 불손한 짓을 저질렀어도 분노하여 그 축복을 거두고 저주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마저도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하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야곱을 에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결혼이라는 이유를 들었어도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도하여 주실 기회로 삼는다. 그리하여 이삭은 이미 야곱에게 충분한 축복을 했어도 이에 그치지 않고 그를 라반에게로 떠나보내는 마당에 다시 한 번 더 축복을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이삭의 축복은 아버지로서 혈육의 정으로써 바라는 소망이 아니다. 이 축복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내리신 첫 지상 명령이었고 사람의 죄악이 이 땅에 관영하여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모든 사람과 짐승을 쓸어버리신 후 노아에게 주신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이 복된 명령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의 자손들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였다. 이삭은 그렇게 하나님의 지상 명령과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을 따라 야곱을 축복한 것이었다. 이삭의 축복은 그저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이 땅에서 육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차지하는 것만 바라고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아브라함과 같이 먼 훗날 자기 자손으로 태어나시고 구속사역을 이루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삭의 축복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육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더라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연합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이삭의 축복을 복음의 관점이 아니라 단순히 이 땅의 육적인 부귀영화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신자라면 마땅히 많은 자손과 재물을 소유해야 된다는 번영신학의 시각을 갖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이삭의 축복 뿐만 아니라 구약의 선진들이 누린 이 땅의 복을 지금도 받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신다면 자기들에게 이러한 부귀영화를 당연히 주셔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녀를 위해서도 건강과 학엄과 취업과 결혼 등등에 촛점을 두고 아주 열심히 기도한다. 교회에서의 간증은 물질적인 성공에 대한 내용이 전부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주고 받아야 할 축복은 그런 땅의 것들이 아니라 복음을 알고 기뻐하며 감사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으로 말미암은 상상 불가한 상급이 하늘에서 주어질 것을 믿고 소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의 복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는 믿음의 선진들도 사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에서가 다른 아내를 맞이하다
6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잠언의 지혜자는 미련한 자를 절구에 넣어 찧어도 그의 미련함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에서가 딱 그러하다. 여기에서도 에서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어리석음이 찬란하게 빛난다. 자기의 미련함으로 장자의 명분도 이삭의 축복도 빼앗기고 나서야 야곱이 어떻게 하는지 아버지 이삭이 어떻게 하는지를 볼 수 있게 된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에서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고 가나안 여인이 아니라 친족 중에서 아내를 맞으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두 이방인 아내들이 자기 부모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것을 그제서야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삼는 미련한 결정을 내린다. 자기 딴에는 이스마엘은 아버지 이삭의 이복 형이기도 하니까 친족이라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에서의 결정에는 몇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이스마엘이 비록 혈육으로는 이삭의 이복 형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난 자였으므로 영적으로는 이방인과 다름 없었으므로 마할랏을 아내로 들이는 것은 보통 이방인보다 더 안좋은 애굽 여인을 들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의 어미나 아내나 모두 저주 받은 함의 자손 애굽 여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서는 자기 아내를 구하는 일에 이삭의 지시도 축복도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였다. 자기의 미련함을 이삭의 지혜보다 일곱 배나 더 지혜롭다고 여겼기 때문에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에게 어떤 조언도 듣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에서는 라멕처럼 이미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일부이처제의 범죄를 저지른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명의 아내를 들인다는 것은 자기 죄를 추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가 정말 부모를 섬길 마음이 있었다면 새로 아내를 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혼한 두 아내에게 시부모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뒤늦게라도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어 부모로부터 다시 처음부터 신앙의 도를 배웠어야 했는데 에서에게는 그럴만한 겸손함도 능력도 지혜도 없었기 때문에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더러운 오물 구덩이에 다시 뒹구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러한 에서의 미련하고 망령된 짓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교회의 명운이 달린 절체절명의 중대사와 문제를 두고도 이를 신앙적으로 성경적으로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계획하고 진행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드러난 것들에만 온 신경이 팔려서 주먹구구식으로 언 발에 오줌 누듯이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점점 일은 꼬이고 사태는 악화되어 교회 이미지는 실추될대로 실추되고 교인들이 떠나고 교역자들이 쫓겨나고 급기야는 담임목사가 교회를 버리는 일까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 교회는 그저 눈에 보이는 분위기만 쇄신하는데서 머무르지 말고 교회의 회복을 가로막는 족쇄와 같은 지난 날의 과오와 범죄들을 진정한 회개로 깨끗이 치우고 잘라내는 것이 절실하다.
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꾸다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아마도 야곱이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에게로 갈 때에는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찾으러 바리바리 싸들고 간 것과는 달리 그저 홀홀단신으로 급하게 떠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에서가 속임수를 쓴 야곱을 잡아 죽이려고 살기등등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가 저물어 잠을 잘 때도 푹신한 베개가 아니라 근처의 적당한 돌덩어리 하나를 가지고 베개를 삼을 정도로 빈 몸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급하게 정신없이 집을 빠져나왔으면 돌베개의 불편함과 광야에서의 한 밤의 추위와 걱정과 근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머리를 대자마자 바로 잠에 곯아 떨어진다. 그런데 야곱은 꿈속에서 하나님과 천사들의 환상을 보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위로가 되는 계시 언약을 받게 된다. 야곱은 여호와께서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 위에 서 계신 것을 보았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영광의 인성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신성만이었으면 그분이 서 계셨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야곱은 꿈에서 본 그 환상과 계시와 언약으로 인해 자기가 누운 곳이 하나님께 특별한 장소임을 알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 벧엘이라 명명한다. '벧/벳'은 집을 의미하고 '엘'은 하나님을 뜻한다. 참고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이다. 그동안 아무런 경황없던 야곱은 그제서야 하나님의 위로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서원하게 된다. 그가 단지 하나님께 원했던 것은 그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갈 길과 먹을 것과 입을 것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신 때는 야곱이 평안할 때가 아니라 아주 밑바닥까지 침체되었을 때였다. 이는 자기 아버지 이삭과 조부 아브라함에게도 그러하셨다. 오늘날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이처럼 무언가 신령한 환상 체험을 매우 원하기도 하는데, 구약의 원리대로라면 이는 절대로 우리가 평안한 때에는 불가하고 도리어 사방에서 욱여쌈을 당해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을 절체절명의 상태여야 한다. 이는 비단 구약 뿐만 아니라 신약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도 그러한데, 사도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으므로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온갖 신령한 이적적인 은사와 셋째 하늘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처럼 남들에게 더 자랑하려는 심산으로 그런 신령한 체험을 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평범한 일상이 주어졌으면 평범하게 말씀과 기도와 선행에 힘쓰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앙의 방식이다.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이신 멜기세덱에게 노략물의 십일조를 드린 것처럼 야곱은 하나님께 자기 소유의 십일조를 서원한다. 이로써 십일조는 단지 폐기된 구약의 옛 율법 계명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예배 모범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를 마치 율법처럼 여겨 기계적으로 드려서는 자기에게 아무런 신앙의 유익이 없으므로 반드시 자원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 십계명의 원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듯이, 십일조의 원리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이웃을 구제하는 것이다. 이는 십일조를 둘로 나눠 절반은 교회에 절반은 구제에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십일조와 구제를 위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만 십일조 하는 것은 '고르반'과 같고 구제의 십일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이다. 신앙이 미약한 자는 처음부터 십일조를 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신앙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기다리며 조금씩 십일조만큼 늘려가도록 지도해야 하고 신앙이 장성한 자는 자기 생활에 지장이 없는 한에서 십일조 이상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족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과도하게 헌금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금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