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참된 예배인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2-24)
본문 중의 ‘영과 진리로’는 ‘영 안에서, 진리 안에서’라고 해야 맞다. 영과 진리 안에 들어가면 성경의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 그렇게 복잡하게 분리되고 흐려져 잘 보이지 않던 신앙의 지식들이 하나의 지혜로 모아지고 빛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예배가 하나의 초점으로 집중된다.
무지개는 수백만 가지의 색깔이 모여 일곱 가지 색깔로 보인 것이지만, 사실은 그 수백만의 빛깔도 하나의 빛깔에서 비롯되었다. 빛이 분사되어 나온 일곱 가지 색깔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하나의 빛에서 분사되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이 영 안으로, 진리 안으로 들어가 예배를 드리면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 그래서 확실하게 하나님으로부터 확증을 받게 되는 경이로움이 있다. 예배 안에는 찬양과 경배가 있고, 기도와 감사, 은혜와 사랑, 믿음과 소망, 평강과 기쁨, 그리고 하나 된 즐거움과 감동이 있고, 진리와 자유가 있고, 나아가 성령 그리스도의 역사와 능력에 힘입은 생명이 약동하며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합일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동안 지식적으로 알아왔고 깨달아왔던 모든 것들이 감추어지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만이 빛으로 드러나 역사하신다. 그래서 예배 안에는 죽음(낮아짐)과 부활(새 생명의 약동)이 있으며 예배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새로운 피조물만이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채워지는 역사가 이루어진다. 예배는 성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며 구원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때’이다. ‘이 때’라고 말씀하시던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때’와 ‘나의 때’가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물켜는 예배가 되고 만다. 성전의 마당만 밟다가 가는 어리석음이다.
성전 바깥마당만 짓밟는 자들이 누구인가? 악한 종의 인도를 받아 의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다. 이런 실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천사가 두 증인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하였다.
찢겨진 휘장을 젖히고 담대히 지성소 안 깊숙이 들어가 그 분과 ‘하나’ 되는 예배가 아니라면 그 예배는 죽은 예배이다. 지성소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예배는 실패한 예배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아니 계시고 오직 자신의 하늘 보좌가 있는 하나님의 처소 곧 지성소에만 좌정하여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지시한 곳 그 깊고 깊은 지성소에 들어가서 드리는 예배라야 한다.
성전 바깥마당만 밟고 가는 예배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어느 때에 어디에 서 있는가가 중요하다. 지금 ‘이 때라’ 하시는 ‘이 때’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일이 아니다)이 무엇인가를 먼저 깨닫는 것이 급선무이다. 나의 때와 하나님의 때가 ‘하나’로 만나서 그 분과 거룩한 입맞춤이 이루어진다면 그 예배는 성공하는 예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좌정하여 계신 지성소에 들어간 예배는 자연히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 이것은 나의 의지로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심령 너머에 좌정하여 계신 그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영과 진리가 베풀어진 그 안에서 우리는 진정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
아무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실지라도 성령 그리스도 하나님은 말씀이 없는 곳에는 임하지 않으신다. 말씀의 지혜(깨닫는 말씀)가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 분과 우리가 ‘하나’ 되는 감격이 있다. 그 감격이 우리로 하여금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드리게 한다. 바로 ‘이 때’를 갈망하는 자를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다. 영 안에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오늘도 사방천지에서 찾고 계신다. 영 안에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성경의 모든 비밀의 문들이 열리는 역사의 현장이다.
여타 종교인들을 비롯해서 특별히 기독교 문화권에 몸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원초적으로나 제도적 관행을 통해서나 ‘예배’ 없는 신앙이란 상상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예배’는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의 바탕 위에 굳게 세워져 있고 또한 가장 신성한 의식으로 가치화되면서 가히 신성불가침한 성역으로 굳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 각기 각 곳에서 천태만상의 형태로 치러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 없는 신앙이란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새삼 ‘어떤 것이 참된 예배인가?’라고 묻는 것은 아주 무식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잠꼬대 같은 물음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요한복음 4장을 통해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지적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새롭게 제시하는 예배의 참 본질에 접근해 있는지 확인해보아야 마땅하다.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서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의 대화를 통해서 예배의 허와 실을 살펴보자. 오늘날의 의식적인 예배가 결코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밝혀지게 될 것이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예배는 목마름에서 비롯된다. 목마름이란 채워져야 할 그 무엇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내‧외부적 현상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목마름으로 다람쥐 쳇바퀴 맴돌 듯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어서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모든 미봉책이 동원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예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자. 바꾸어 말하면 내가 주는 물을 먹기 전에는, 그리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전에는 영원히 목마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말씀에 너무 쉽게 ‘아멘’ 하고 넘어가버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말씀에 예수를 믿어서 해결되었다든지, 훌륭한 목사님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있다든지 갖가지 목사 자랑과 교회 자랑만 무성할 뿐 본문의 뜻의 겉도 핥지 못하고 넘어가고 만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목마른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목마른가? 적어도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자의 목마름은 물리적인 목마름 때문에 예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여자의 목마름과 같은 목마름을 느낄 때에만 또 하나의 목마른 분 곧 예수를 만나게 된다(요 19:28; 시 69:21).
우리는 예수는 주리거나 목마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 역시 주리고 목마르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마 25:35)
마태복음 25장의 오른 편의 양들(의인)은 이 목마른 자 예수를 공감하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성경의 기본 구도가 그렇고, 요한복음 4장 역시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이어져 있다. 야곱의 우물과 샘물, 남편, 예배, 추수, 신하의 아들이 살아나는(부활) 문제는 하나님의 핵심, 즉 ‘양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예배의 대상과 장소 문제가 밖을 지향하고 있으면서 밖에서만 진행되거나 아니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의 예배관만 가지고 있다면 모두 실격이거나 미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
예수의 말씀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아는 것을 예배하는 예배가 있다는 지적이다. 우선 아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 구원이며 또 이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씀으로, 밖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던 여자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내고 있는 것이다. 예배의 목적은 한시적인 목마름의 해갈을 위한 밖에서의 끝없는 방황을 끝장내고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의 초대가 성경이 말하는 진정이고 참된 구원의 뜻이며, 이 구원은 예수가 소개하는 어떤 유형의 유대인들의 예배(섬김 봉사의 사역)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이다.
한 번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예수께 무엇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마 20:20-28). 무엇을 원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단호히 이 예배를 통해서 제자들이 구하고자 했던 것을 일거에 폭로시켰다. 이런 경우가 예수 자신과는 상관없이 제자들에 의해 예수가 세상 왕으로 둔갑하여 거래의 대상으로 탈바꿈하는 사례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한다는 것이 사실은 자기의 정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거래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실상은 사탄에게 꼬리를 흔들며 절하는 형국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오직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성령이지(요 4:10; 눅 11:13)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이런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탄은 이 때 그 사역자의 마음에 가라지를 뿌리고 이 가라지는 사역자의 마음에서 누룩으로 승화되어 나온다. 성경은 ‘이 때’를 더럽다고 하고 악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고 하였다.
우리의 예배는 과연 누구를 위한 예배이며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는 앞에서 언급한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게 하고 오락가락하며 갈팡질팡하게 했던 가이사의 글과 형상의 모든 요소들이 온전히 청산된 후에 찾아올, 아는 것을 예배하는 자들이 넘어선 세계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예수의 불세례가 필연적으로 먼저 있다. 우리 속에 먼저 뿌려진 가라지의 쭉정이가 꺼지지 않는 불(사랑)에 타져야 비로소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제대로 보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마 5:8).
그 전에는 보는 것이 아니고, 보지 않아야 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나(마 4:8) 사람들이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만 볼 수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막 8:24). 그래서 다시 예수의 두 번째 안수로서 만물을 밝히 보는 때가 이 즈음이다(막 8:25).
이때에야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로 하나가 된다. 영은 생명의 기운이며 이 생명의 기운은 사랑에 의해서만 창조되는 피곤하지 않는 에너지다. 사랑은 보이는 세계와 인간 실존의 모든 한계를 넘어선 곳에만 존재하는 유일함이다.
성경적 죄인이란 이 초월적 사랑과 하나 되지 못한 것을 일컬음이며 또한 이윽고 이 사람과 함께 가슴으로 마주칠 때만 비로소 실존적 죄인으로 드러난다. 사랑은 사랑과 함께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어 하고 서로를 호흡하며 흡족히 느끼고 싶어 한다.
편하고 부드럽게 서로를 애무하고 완전한 하나로 합일되기를 원한다. 바람이 임의로 붊이요 성령의 소욕이기도 하며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난 사람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그러므로 사랑의 예배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아니고 불편한 것도 아니며 더구나 엄숙한 관계도 아니고, 뻣뻣한 경건도 아니다. 정해진 것도 아니고, 계약도 아니며, 집착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며, 폭력도 아니고, 거래는 더더욱 아니다. 사랑을 학문적 의미로나 지식의 통용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먼저는 ‘때의 문제’이고 오직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만 아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5-26)
메시아를 대망하던 여자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초라한 모습의 한 남자 예수를 통해서 드디어 메시아를 만났고, 야곱의 우물(종교가의 강론, 설교 상징)에서 길어 왔던 물동이를 팽개치고 또 다른 세계로의 전환을 시작한다.
2천 년 전의 이 여자는 참으로 우연하게도 목말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수고대하던 메시아를 영접했다. 삭개오가 그랬고, 향유로 예수의 발을 적신 마리아가 그랬고, 심지어 수레 타고 가던 에디오피아 내기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 기독교인들은 목사가 주는 물만 마실 뿐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물은 마시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의 그리스도는 구름을 타고 오게 되어 있고 번개가 동편에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이 있다(마 24:30; 막 9:7; 계 1:7). 구름을 통해서 비가 내리고 번쩍임을 통해서 어둠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은혜의 문제로 돌릴 수밖에 없고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알 수밖에 없다.
외부적인 접촉을 통해서는 혹세무민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나는 하나님의 참 종이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는 말씀은 사실 이 인자의 임함이 논해지는 교회에서 야기될 말씀들이지 저기 우상이나 섬기는 무지한 사람들을 향해서 이르시는 경계의 말씀이 아니다.
‘인자의 임함’을 주제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 24장은 주제와 아울러 부제로서 미혹에 대한 여러 가지 상황적 모습들과 상징적 묘사들을 그려내면서 아주 심각한 분위기로 점철되어 있다. 24장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 유형의 종들의 문제를 노출시키며 인자의 임함과 미혹이 이 두 종들을 통해서 어떻게 전재될 지를 잘 암시해 주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44-51)
예수가 먼저 가리키고 있는 악한 종 역시 말씀(내 이름으로 와서) 세계의 종이다. 지금 예수가 심각한 모습으로 경계하는 악한 종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종이 아니다. 어느 쪽에서 보면 대단한 깨달음의 경지에 있고 그 파워 면에 있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미혹의 소지가 크고 많을뿐더러 또한 그에 따르는 심각성을 염두에 두기에 아주 조심스럽게 경계하는 예수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읽어나가야 할 터이다. 성경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악한 것이 섞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마 15:18-19).
왜 이렇게 되는가? 창세기 6장 1~4절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체가 되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늘의 씨를 낼 수 있는 우리의 속사람의 속성들이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겉 사람과 겉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정과 욕심’의 속성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 겉 사람이 ‘정과 욕심’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먹혀버린 것이다. 에덴동산 사건이 그렇고, 가인과 아벨 역시 마찬가지다. 가인 역시 우리 겉 사람이며 아벨은 우리의 속사람이다. 이스마엘과 에서가 그랬듯이 이들 역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수 없는 ‘정과 욕심’의 그릇으로 전락하고 자연히 그들 속에서 에덴동산은 불타버리고 생수는 마르게 된다.
성경은 이런 상태의 존재를 ‘육체’라고 한다. 이 육체의 씨들에게 어쩔 수 없이 홍수 심판이 있게 되고 그 후에도 어쩔 수 없는 그들 나름대로의 생명력으로 인해 또 바벨탑 사건을 가져온다. 사실 이런 때의 종들은 어떤 형태로든 푹 쉬어야 한다. 아직은 사랑도 아니고 사랑이 아니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고전 13:2-3 참조).
육의 소욕은 반드시 육체의 소욕을 행하려 한다. 육의 속성상 어쩔 수 없기도 하고 이미 천하만국의 영광의 꿀 같은 맛에 취해 있는 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프로그램이나 사이클은 정과 욕심에 맞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씨로서의 강한 원초적 배설 욕구에 의해서지만 이때에 나오는 것은 아무리 기가 막힌 깨달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누룩이 섞인 술인 나오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가이사의 글과 형상은 ‘누가 크냐?’라는 속성과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강한 욕구가 원형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듣는 이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때를 따라 돕는 섞어찌개를 만들어 진설한다.
누룩(술)은 반드시 받아들이는 이에겐 누룩의 위력에 홀딱 빠지게 되어 있다(취한다). 술을 빚을 때 술밥에 누룩을 섞어서 항아리에 넣어두면 발효되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소위 박수부대가 주도하는 팬클럽이 형성될 수밖에 없고 그 중에서 우등생들이나 어여뻐 보이는 추종자들이(술친구) 핵심이 되어 모임(조직)을 알게 모르게 이끌어가게 된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어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48-51)
성경이 말하는 누룩은 ‘술’이다. 혼잡 즉 ‘섞인 말씀’(고후 2:17)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수많은 종들은 적어도 조직적 율법이란 무시무시하고 엄격한 주인이 계셔서 내놓고 술친구들과 술이나 마시고 폭력이나 휘두르는 망나니 같은 종들은 구조적으로 없게 되어 있다.
밥줄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고 무리들의 거센 항변이나 따가운 시선들을 의식해서이기도 하다. 옷 벗을 각오로 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감히 그런 생각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당연히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요 지옥의 문이 왔다 갔다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악한 종처럼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칠푼이 짓은 절대 하지 않게 되어 있다. 여기 악한 종과 술친구들의 특징은 성경을 갖고 장난한다. 이미 어떤 과정을 거친 터라 전후 사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성경을 어디에서는 육체대로 풀고 또 어디에서는 영으로 푼다.
대표적인 사례가 육신의 생각은 사망(롬 8:6)이라는 족쇄를 채워서 꼼짝 못하게 하고 노아시대의 사람들을 들먹여가면서 세상 짐을 내려놓으라고 성화다. 이때 일부 순진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생계의 수단까지 포기하고 지식의 부요한 부자들의 대열에 끼어든다. 그나마 시간차가 있을 뿐이며 어중간한 사람들은 항상 깊은 고민에 빠져서 그런 유형의 말씀을 들을 때면 주눅이 들어 이럴까 저럴까 하면서 방황하고 헤맨다. 그도 아니면 괜찮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업에 물질로 동참한다는 구실로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면서 겨우 체면 유지는 해나간다(이런 때가 동무들을 때리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누룩이 빚어낸 육신의 생각이고 누룩 섞인 떡과 술을 먹고 마시면서 장가들고 시집가는(간음) 본인들의 현주소인 줄이야 어찌 알 수 있으랴. 집주인이 그들 속에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방탕의 현장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심지 않을 수 없다. 부자요, 부유한 자들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배팅이다. 이들도 역시 씨의 속성상 심겨지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다. 그동안 머리에 쌓아온 바벨탑이 얼마나 크고 높은데 그것을 자랑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결과는 썩어질 것들만 거둔다. 혈과 육으로만 된 썩어짐이 종노릇하는 자들만 우수수 거두어지고 있을 뿐이다.
어찌하랴! 오늘도 바벨론 성에서는 잔뜩 취한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이 때리고 맞으면서 쾌락을 즐기는 깨달음의 축제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많은 기독교인들이 악한 종들의 술(설교)에 취하여 있을 뿐, 성경을 읽어서 말씀의 물에 잠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물세례의 영적 의미는 말씀의 물에 잠기는 것인데 말씀의 물에 잠기지 아니하고 악한 종이 빚은 술에 잠겨 있으니 무슨 수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니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으므로 여전히 혼합한 술(설교)을 구하러 다니는 것이다. 그것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말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는 다 함께 망하리라.”(사 66:17)고 경고 하셨고, 잠언 저자는 그들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교리, 주석)에 잠긴 자(교사)에게 있고 혼합한 술(설교)을 구하러 다니는 자(듣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잠 23:29-35)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상태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고 사는 수많은 장사꾼들이 서로를 향하여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25-26)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하는 일은 주인의 집 사람들을 맡아 양식을 나눠주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양식의 기본 출처는 ‘씨’에 있다. ‘씨’는 좋은 씨와 가라지로 나누어진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른다.’고 했다(렘 31:27). 지금 교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사 6:13)고 했다. 좋은 씨나 사람의 씨나 거룩한 씨는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씨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도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악한 종의 설교)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고 외친다.
여기도 썩어질 씨는 우리 육신의 부모로 물려받아서 나온 이 고깃덩어리 씨가 아니고, ‘육체의 일’(갈 6:19-20)을 하는 자들로부터 받았던 가라지 씨와 쭉정이적인 요소를 말한다. 사도 바울은 지혜 있고 충성된 종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하나님의 열심’은 예수의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과 일치한다(요 2:17). 오직 ‘지성소’만이 ‘주의 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결한 처녀란 이제까지 거쳐 간 뭇 남정네들의 씨를 정화시키고 승화시킨 상태를 일컬음이다. 그곳에 그리스도의 씨는 거룩한 입맞춤을 통해서 유일한 독생자를 낳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예수를 만난 이 수가 동네 여자도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고백하기까지 수많은 ‘씨들(남편)’로부터 망가질 대로 망가진 간음의 신세로 예수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유대인의 왕 예수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이 같은 상태와 처지의 여자들을 위하여 이 섬김을 위한 예배의 사역을 한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 그 ‘유대인’(요 4:22)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악한 종)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3-5)
창세기 6장의 육체가 된 하나님의 아들들과는 대조적이다. 즉 자기 부인이란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대인들이 그 사랑의 능력으로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갈 4:19).
그리고 마침내 여자(제자들)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한다(요 16:21).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48-51)
창조주이신 하나님이계심을 두려워하라 !
보라 ! 들으라 ! 때가 가까이 왔음이라 ! 우리가..죽기전에...잠깐은... 한번쯤...생각해보고...가자 ! 2000년이 넘고넘어....그리도...기다리는 사랑이...있는지를....! 창조주앞에...까불지말라 ! 너희가...영원히...죽을까하노라 ! 너희가...별을...따랴 ! 너희가...달을...만들것이냐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개나 소,돼지에게 성경책을 주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짐승들에게 먹을것을 주면 짐승들은 주인을 좋아라한다 ! 너희가....짐승이냐 ? 이제...너희와 약속된...용서의... 기다림의 시간이 다가왔음이라 !
창조주앞에.... 바짝...업드려... 두려움을...생각하고...참회하라 ! 그리고..지금도 기다리시는... 주님꼐...돌아오라 !
어찌하여 말벌의 침과 전갈의 독침은 두려워하면서 너의 영혼을 잡아 먹는 사탄은 두려워하지 않느냐 ! 너의 눈은 멀었으며 너의 귀는 어두워졌으며 너의 마음의 빛은 꺼져 사탄의 어둠에 갖혀있음이라 ! 인간의 썪어질...육체는... 인간의 삶의 ...목표도...목적도...전부...아니다 인간이 어찌하여... 개나...돼지나...닭이나..소처럼.... 저차원의 동물로 남아...사단과 악마의 자식으로..살려하는가! 숨어 살아있는....영원한...다음세상이 있음을...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빛의길로 가라 ! 죽은후에는...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사후에는 잠든 너의 영을 깨울수도 없으며 너의 영은 거듭날수도 없다 !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빛의길 영생의 길로 가라 ! 그길로 가는 법은...오직한길... 창조주 하나님이...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게 주신... 생명의 성경 말씀...뿐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너희가 사탄의 자식이되어 영원히 죽을까 하노라 !
창조주... 하나님은 반드시 계신다 ! 어리석은 자들아....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혜어보라 ! 그...끝도없이...많은 별들을... 만드신이는 석가도...마호메트도...교황도...목사도...신부도 성황당 고목나무도...돌부처도...돌아가신...내부모도... 하느님도..하늘님도 아니며...하날님도 아니라 ! 모두 ..아니다 !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 사람의 말을 믿는자는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감이다 !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성경말씀)만을 믿고 빛의 영원한 생명길로 나아가라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창조주는..오직...한분! 하나님 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그들도...모두..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며, 죄인이다 ! 못 알아 듣는자는....짐승이다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신은
오직 한분...창조주...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의 무한하신 참사랑으로 돌아오라 ! 어찌하여.... 보아도...보지못하며 들어도... 듣지못하고... 살다가 죽어가는 자야 !
너의영은 사단의 영에 매인자요 ! 사단에 잡혀 먹힌자 이니라 ! 너의 육이 죽은후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너는 사단의 자식이니라 ! 아름다운영혼 http://blog.daum.net/happyhousein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