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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곳곳에 깃든 '호암'의 이름과 자취
용인특례시 곳곳에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호암 이병철, 1910~1987)의 신념과 의지가 숨 쉬고 있다.
호암의 묘소는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산12-8번지(에버랜드로 562번길38)에 있는 호암미술관 관내에 있다.
호암의 묘소가 이곳으로 정해진 것은 에버랜드에 대한 호암의 애착이 깊었기 때문이라고 삼성 측에서 밝힌 바 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호(號)에서 이름을 따온 용인 호암미술관은 호암이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미술품 1천2백여 점을 바탕으로 1982년에 개관한 미술관이다.
이곳은 화강암만으로 된 석조건물로 중후한 느낌이 있다.
미술관 건물과 함께 전통 정원인 '희원'이 조성되어 있다.
희원에 심어진 수목(樹木)과 조경(造景)은 에버랜드에서 가꿔낸 '자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희원의 동문(東門)인 읍청문(揖靑門) 너머의 녹지 공간에 호암 묘소가 위치한다.
'읍청'은 동쪽의 푸르름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새날을 맞이하는 문이라는 의미다.
용인자연농원, 헐벗은 국토의 푸른 '대전환'
에버랜드의 전신인 용인자연농원은 이병철 회장이 소신껏 공을 들여 성공을 이끌어낸 독창적인 '공원'이라 할 수 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은 해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문 밖에 펼쳐진 한국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우리 산들은 유난히 헐벗었군.'
호암은 유럽 여행 때 들른 스위스를 떠올린다.
그곳은 우리나라 땅의 절반밖에 안 되는 면적이며 더구나 산속에 있는 나라인데, 그 불리한 입지조건을 극복해
산지를 농지와 목축용지로 바꿨던데...우리는 그보다는 유리한 조건이지 않은가.
호암은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돌아오는 답은 시원치 않았다.
'우리나라는 토질이 좋지 않습니다.
비도 적게 오고요.
수목이 잘 자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지요.'
그는 물었다.
'고려시대엔 산림이 울창했다는 기록이 있던데, 그건 어찌 된 겁니까.
옛 건물을 보면 아름드리 나무가 많이 쓰였던데, 그건 어디서 구한걸까요.'
한 학자가 말했다.
'글쎄요, 그건 옛날 얘기죠.'
호암은 현신규 박사(서울대 농과대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현 박사는 답했다.
'기업 하시는 분이, 나무에 관해 궁금해하시는 까닭이 무엇인지요.'
'이나라고 스위스처럼 자연환 일경을 극복하고 선진국이 되는 데에 제가 일조를 할 수 있었으면 큰 보람이 되지 않을까 하여.'
현 박사는 호암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광릉에 다녀오시지요.
답이 보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광릉으로 향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내뿜는 생명력을 느껴지는 곳이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풍ㄱ여입니다.
어떻게 이런 굵은 나무가 자랄 수 있었을까요?'
현 박사가 말했다.
'우리나라 토질이 좋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보십시요.
이건 반사토라고 합니다.
한국에선 흔한 흙입니다.
나무가 잘 자라죠.
자연조건은, 일본보다 우리가 훨씬 좋습니다.'
이후 호암은 세계 각국의 조림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산림전문가들에게 사업 타당성에 관해 질문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땅의 60%가 산지인 나라입니다.
그중 4분의 1은 개발이 가능하죠.'
호암은 60%의 4분의 1을 계산해 본다.
나라 전체로 따져보면 158억제곱미터를 개발할 수 있다!
농지, 목축용지, 과수원으로 개발하면 식량의 자급자족은 물론이고 소득 증대와 국토확장이라는 일석이조가 가능하지 않은가.
1968년 자연농원 조성에 도전케 한 대화
1968년 자연농원 조성사업이 시작된 것은, 그 깨달음의 결과였다.
토질과 강우량, 온습도가 국내 평균치인 곳은 어디일까.
사범사업인 셈이니 많은 이들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할 만한 곳은?
그의 지시에 직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군데 농원 부지 후보 중에 눈에 띄는 곳이 경기도 용인이었다.
그러나 당장 어려움에 봉착했다.
용인의 땅 주인들이 대부분 영세해서 2000여 명의 동의가 필요했다.
게다가 묘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반발이 터져 나왔다.
'부모님 묻히신 곳에 돼디를 키우겠다고요?'
'개발이란 게 산을 망치는 것 아닙니까?'
'놀리동산이라니...돈을 쓰라고 부추기는 싯ㄹ을 만든단 말입니까?'
사람들의 불신과 불만이 쏟아지고 기업 내부에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시국에 레저산업에 투자하다니...중공업에나 투재해야 하는 것 이닐까요?'
호암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위해 애쓰던 때였지만, 국민들의 휴식처를 한군데 정도는 마련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또 본래 취지는 농업발전이라는 점을 눈여겨봐달라고 호소했다.
자연학습장과 레저활동의 명소, 세대를 넘어 모두가 즐기고 누릴 수 있는 공간과 시설을 만들겠다는 의지에 대해 꾸준히 설명했다.
그떄만 해도 몹시 낯설었던 '자연농원'은 그 열정적인 설득과 함께 이뤄졌다.
'실패'의 원인을 제거하라
호암은 이 사업이 실패할 수 있는 원인들을 찾아 하나 하나씩 검토하면서 해법을 찾아냈다.
그간 산림개발리 실패한 이유는, 수종에 대한 과학적 검토가 없었기 떄문이라고 보았다.
토양과 기후에 맞는 품종, 호두나무나 살구나무처럼 ㅅㄱ량자원이나 가공식품의 원료가 될 수 있는 수종, 세계적으로 희귀한 나무 등
1200여 종을 심었다.
'경사도가 15도 미만인 평평한 곳에는 묘목을 길러서 자연학습장으로 공개합시다.
30도 미만인 낮은 구릉엔 수익성과 효율성이 좋은 호도와 살구, 그리고 밤을 심읍시다.
급경사 지대나 고지대에는 목재조성용 나무를 심어 장기간 기르는 것으로 합시다.
소나무나 오동나무, 은행나무 같은 것을!'
호암은 이쯤에서 뜻밖의 제안을 했다.
'땅이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엔 거름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양돈단지를 만듭시다.'
퇴비를 공급하면서 수익을 얻는 일석이조의 방법이다.
그는 비행기 3대를 동원해 개량용 씨돼지 600마리를 수입한다.
자연농원은 하나의 단지에서 돼지 5만 마리를 기르는 기업양돈을 국내 최초로 시도한다.
자연농원이 개장한 건 1976년이다 입장료는 성인 600원, 어린이 300원, 지금 값으로 따지면 3만원 정도의 가격이다.
자연농원은 국내 농업발전에 기여했고 레저시설로도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다.
부근에 호암미술관을 갖췄고, 첨단 놀이기구들도 속속 들어선다.
'식물은 속일 수 없다. 유럽에 가서 배워오자'
1986년 호암은 용인자연농원에서 임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물이나 식물은 사람과 달라서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이론과 실제를 알고 항상 연구하고 개선해야지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필요하다면 일본뿐 아니라 유럽에도 가서 배우도록 합시다.
우리는 실패율을 낮추고 더 빨리 성장해야 합니다.
열심히 하면 이곳은 정년퇴직도 없고 평생 일할 수 있는 곳입니다.
또 기술을 배워 자영할 수도 있습니다.
책임지고 끝까지 잘될 수 있도록 모든 담당자들이 최선을 다합시다.'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인 1996년 자연농원은 세계 10대 테마파크에 선정된다.
국민 레저공원 에버랜드, 에버랜드로 가는 길 '에버라인'
용인자연농원(현재 의 에버랜드)은 용인특례시 행수산자락에 있는 테마파크, 워터파크, 동물원을 갖춘 대형리조트다.
1976년 4월17일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레저공원이 문을 연다.
가실리와 전대리 일대에 조성된 이 공원은, 호암이 10년 앞을 내다보고 추진했다는 '국민의 산 교육장'이다.
총 66만1157m2(20만여 평) 규모의 자연식물우너은 1973년부터 착수해 프라워센터(Flower Center),
로즈가든(Rose Garden), 썬큰가든(Sunken Garden)을 1975년 조성했다.
지형을 살려 온실 식물원이 아닌 노천 식물원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유원지 개념을 넘어 휴식처인 동시에 산 교육장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자연동물원도 아예 고정관념을 바꿨다.
갇힌 동물이 아닌, 자연의 동물과 인간이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5만여 평의 공간에 사자사파리, 사슴방목장, 열대동물사, 원숭이 동산, 산양방목장이 있었고
한 가운데는 어린이동물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사자사파리의 경우 당시 아시아권에서 최초였다.
1976년 4월1인당 국민소득이 818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의 풍경이다.
18일 일반에게 공개된 첫날, 2만5000여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1인당 국민소득이 818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의 풍경이다.
1968년 대한민국에 나무 심기 운동이 시작된 이후 8년 뒤에 용인 자연공원이 개원된 것이다.
1985년 6월 용인자연농원에서는 국민들에게 꽃을 매개로 한 여가 문화를 처음 선보였다.
꽃이 단순히 '볼거리'라는 선압견을 넘어 음악.공연 등과 함께 즐길 거리로 선사한 것이다.
용인자연농원의 후신인 에버랜드 또한 '숲 가꾸기' 운동의 연장이었다.
제트열차 등 놀이기구 9개로 시작한 에버랜드는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얻지 못했다.
개장 이듬해인 1977년 1월20일 하루 이용객이 딱 2명이었다.
호암은, '나무 한 그루, 돌맹이 하나에 온갖 정성을 쏟은 자연농원이 산지 개발의 시범장으로서 후세에 남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얺는다'고 역설했다.
장미축제가 시작된 이후, 1970년대 연간100만명에 미치지 못했던 입장객은 80년대 말 한해 300만~400만명 수준이 됐다.
장미축제에 이어 튤립축제(1992년), 국화축제(1993년) 등 에버랜드의 꽃 축제는 사계절 이어졌고,
이후 국내 주요 기업 및 지자체들의 벤체마킹 대상이 되며 전국 꽃축제 붐을 일으켰다.
에벌내드는 1985년 장미축제와 함께 야간 개장도 처음 도입했다.
자동차 보급이 일반화 돼가는 추세와 맞물려 에버랜드 야간개장은 부족했던 가족들의 여가 문화를 야간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40돌을 맞은 2026년 장미축제는 5월 16일 개막해 6월15일까지 한 달간 이어졌다.
720품종 300만 송이의 화려한 장미와 함께 다채로운 즐길 거리를 경험할 수 있는 '로즈가든 로열 하이티
(Rose Garden Royal High Tea.로로티)란 주제로 펼쳐진다.
2013년 4월 26일 용인 경전철이 개통됐다.
'에버라인'으로 불리는 이 경전철은 기흥역에서 전대.에버랜드 역까지 연결되는 노선이었다.
경전철 명칭에 '에버랜드로 가는 열차(ever-line)'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반도체=산업의 쌀!...요인을 택한 호암 안목
'반도체는 산업의 쌀' 호암 선견지명, 용인이 입증하다
호암이 1969년 전자사업을 시작하면서 터를 잡은 곳은 수원시 영통구 매탄동이었다.
이 땅이 삼성디지털시티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983년 호암을 반도체 사업 진출 을 선언하며 새로운 부지를 찾아 나섰다.
그때 선택된 땅이 용인 기흥구 농서동(당시 행정구역상 기흥읍)이었다.
이때 용인을 택한 이유에 대해, 삼성전자 내부자료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공기가 깨끗하고 산업용수가 풍부하며 소음과 진동이 없다.
외각인지라 지반 진동이 적었고, 수지저수지와 한강 수계에서 용수 확보가 가능했으며, 개발이 덜 된 농지들인지라
넓은 부지를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수출의 핵심이자 기술경쟁력의 상징이 된 반도체 산업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철빌잠에는 한 기업가의 비전 제시가 있었다.
삼성 이병차ㅓㄹ 회장은 1980년대 들어 이런 말을 했다.
'반도체는 미래 산업의 쌀입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통찰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무렵 한국경제의 주력 산업은 섬유나 신발, 가전 조립과 같은 노동 집약 산업이었다.
반도체는 미국과 일본 기업이 독점하고 있었다.
삼성의 반도체 진출을, 당시 많은 이들이 무모한 도박이라고 비웃었다.
1983년 호암은 이렇게 밝혔다.
'내 나이 73세이지만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전력투구해야 할 떄가 왔습니다.'
삼성의 반도체 시장 진출을 공식화했던 1983년 도교선언은 이렇게 시작됐다.
인텔은 이 선언에 대해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웃고, 일본 미쓰비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5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냈다.
삼성이 64K D램 개발 성공을 전격발표한 것은 그해 12월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10년 걸렸던 기술을 6개월 만에 따라잡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일은 그냥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상준, 이종길 등 재미 학자들과 삼성엔지니어들이 용인 기흥의 맨땅에 천막을 치고 밤낮없아 매달린 겨로가였다.
삼성반도체의 탄생지인 용인 기흥의 기적이다.
1998년 1월 한국은 IMF 구제금융 사태로 온 나라가 고통의 터널로 들어가 있었다.
그떄 경기도 용인 기흥읍 농서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직원 최모씨(26세 여성)는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자칫 한 눈을 파는 사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생긴다.
우리의 앞선 기술이 세계시장을 누빈다는 생각을 하면, 고된 작업에도 힘든 줄 모른다.
정주영 회장 '호암의 최대공로는 기흥 반도체를 일으킨 것'
1992년 당시 한 언론은,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호장을 인터뷰했다.
정주영은 자신보다 다섯 살이 위였고 라이벌이었던 이병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가장 큰 공은 반도체 산업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내게도 그는 '흙을 아무리 파고 산을 아무리 허물어도 돈이 남더냐'면서 반도체 산업을 권했지요.
그가 살아계실 떄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해 경제계의 방풍림 노릇을 했는데, 지금은 제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매년 용인의 산소에 가보게 됩니다.'
199년, 호암의 뜻을 살핀 삼성은 '나라는 IMF 관리체제에 있어도, 반도체만은 다시 일어서겠다'면서 투자 베팅을 단행한다.
이후 삼성은 일본 도시바, NEC 등 반도체 공룡들을 제치고 치킨게임의 승자로 올라섰다.
'반도체 산업도시' 용인을 키운 미래산업의 쌀
반도체가 산업의 쌀이라던 그의 예언은 지금 현실이 되어 있다.
반도체는 거의 모든 산업의 핵심 부품이다.
스마트폰, 자동차, 인공지능 서버, 데이터센터, 가전제품까지 반도체가 없다면 핵심산업들이 존재할 수도 없는 시대다.
또 다른 변화는 반도체 산업이 공장 중심 구조가 아니라 산업도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개발, 생산, 소재, 부품, 장비 기업들이 한 지역에 모여 산업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변화가 극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곳이 경기도 용인특례시다.
호암이 부르짖는은 '미래 산업의 쌀'은 이제, 용인에서 현실로 구현되는 중이다.
호암은 '반도체 신념'을 용인에 심었다.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과 기흥캠퍼스를 비롯해, SK하이닉스 일반산단 등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프로젝트가 동시에 꽃이 피듯 진행되고 있다.
호암의 부르짖음은 이제 세계 최고의 반도체 메카로 돋아오르는 용인의 현실로 구체화되고 있다.
용인에 살아 숨쉬는 가장 생생한 호암의 자취는, 단연 '반도체 신염'일 것이다. 용인소식 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