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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에게서 보이는 악의 평범성·확신성
'내란 세력은 어느 쪽일까' 질문을 넘어
“‘평범한 사람도 어떻게 악을 확신하게 될까?” 물어야
악을 내면화하는 3개 경로, ‘세뇌-습관-상식화’
‘현타-실익-소신화’ ‘폭력-공포-동일시’
어떤 경로이든 ‘근본 성찰 없음’이 악인 만들어
아이히만 최후 진술 닮은 윤석열과 변호인 ‘계몽령’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악의 평범성’ 개념이 있다. 독일 출신 미국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문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 나온다.
상당수 유대인 출신 지식인들은 1933년에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자 서둘러 미국 등지로 망명했다.
살기 위해서! 한나 아렌트도 그 중 하나였다. 유대인 등 600만 명을 학살한 나치 권력의 폭력은 물론 그에 동조한 평범한
국민들의 행태를 둘러싸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엔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 와중에 아렌트는 늘 이런 의문을 품었다. ‘과연 나치 학살자들은 어떤 존재이기에 그 무자비한 일을 저질렀을까?’
그 극악무도했던 히틀러도 1945년에 자살로 마감하고 2차 세계대전도 끝이 났다.
흔히 우리는 (개발론 내지 발전론의 시각에서) 폐허와 잿더미로부터 ‘라인강의 기적’이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관심을 갖지만,
아렌트는 학살자의 존재론을 물고 늘어졌다. 마침내 1961년에 (1945~46년 독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이어)
또 하나의 세기적 재판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렸다. 주인공(?)은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이었다.
아이히만. 나무위키
수백 만 유대인 학살한 '평범한 시민' 아이히만
과연 그는 누구인가? 그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중령)로 유대인 학살 실무를 총괄했다.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살기 위해 은둔의 삶을 택했다.
그는 독일 패전 뒤 전쟁포로로 심문을 받던 중 탈출해, 독일 북부 오지 마을에서 오토 헤닝거라는 이름으로 삶을 즐긴다.
그 뒤 1950년 6월엔 리카르도 클레멘트가 되어 아르헨티나로 갔다. 먼저 탈출해 은둔해 사는 전직 나치들이 ‘좋은 친구들’로
살고 있던 곳! 2년 뒤 아내와 아들 삼형제까지 합류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한적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 비밀정보국(모사드)의 집요한 추적으로, 마침내 1960년 5월 극적으로 체포됐고
약 2년여 검찰 조사, 법원 판결 끝에 사형됐다. 그 과정이 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에 잘 묘사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당시 한나 아렌트가 미국 교양지 <뉴요커>의 요청으로 이 예루살렘 전범 재판을 면밀히 관찰하고
보고하면서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제시한 것!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나는 히틀러가 만든 절멸 작동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며 학살 책임을 부인했다.
“그저 명령만 따랐을 뿐”이었다는 것, “지시 내용을 성실히 수행 않았다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란 말(?)!
아렌트의 눈에, 아이히만은 평범한 시민에 불과했지만, ‘조국’ ‘충성’ ‘영광’ ‘성실’ ‘복종’ 등 상투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일개 ‘조직인’으로 행동한 결과 끔찍한 학살도 죄책감 없이 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악의 평범성’이 탄생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명제다. 우리 주변에도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얼마든지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이들이 많다. 윤석열의 계엄(내란)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이 그 증거다.
나는 1987년 10월, 느지막이 군 입대 후 훈련소에 갔다. 난생 처음 받은 충격은 “절대 질문 하지 말라”는 조교의 말(?)이었다.
‘아무 생각 말라’, ‘무조건 복종하라’! 1981년부터 1986년까지의 대학(원) 공부에서는 “질문을 많이 하라.”가 기본 태도였고
권장 방식이었다. 그런데 군대에서 경험한 바로 이 3무, 즉 무사고, 무질문, 무분별이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연결돼
무자비로 이어짐을 깨달은 건 한참 뒤다. 그리고 최근까지 이 아렌트 통찰의 탁월함에 무릎을 치곤했다.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확신성’ 찾아낸 후학 슈탕네트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근 들어 아렌트의 명제에 정면 반박하는 논리가 부각됐다.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슈탕네트(1966~)가 쓴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2011)이 바로 그것! 슈탕네트에 따르면,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 슈탕네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이 재판을 받을 당시, 그가 취한 자세, 태도, 발언 등은
모두 상식적인 사람, 평범한 사람, 일반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간교한 ‘위장술’, 즉 ‘쇼’였다.
그 근거로 슈탕네트는 재판 이전에 아이히만이 했던 발언들이나 기록물들을 끈질기게 추적, 분석했다.
그 결론은, 아이히만은 ‘평범인’이 아닌, ‘확신범’이었다는 것!
요컨대, ‘악의 확신성’ 명제다. 그렇다면 왜 그가 ‘확신범’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우선, 슈탕네트는 “무엇보다 아이히만 스스로 열심히 말하고 다니며 글을 썼다”고 했다.
아이히만과 관련된 문서와 기록, 진술서는 히틀러나 괴벨스를 포함한 나치 전범들 모두의 것보다 더 많다는 것!
더 중요한 점은, 바로 그런 아이히만의 과거 흔적들 속에 이미 반유대인주의 내지 인종주의적 신념이 일관되게 보인다는 것!
아르헨티나에서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아이히만은 매주일 ‘좋은 친구들’과 함께 ‘독일과 세계의 발전’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처럼 토론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과거에 대한 반성 내지 성찰은 전혀 없이,
모두 나치의 우월성과 대량학살의 정당성을 옹호하면서 새 시대의 전망을 모색했다. ‘확신범’ 확신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아이히만은 ‘인생 세탁’을 위해 자기 삶을 철저히 ‘평범화’했다.
즉,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낮에는 토끼 사육사로 일하고, 일과 후에는 바이올린 연주와 와인을 즐겼으며,
저녁 시간에는 독서와 집필에 미친 듯 몰두했다.
어쩌면 아이히만 등이 보인 이 ‘야누스의 얼굴’은 ‘평범인’의 전형이 아닌, ‘확신범’의 전형일지 모른다.
평범인이라면 인지 부조화 내지 언행 불일치 상황에서 수치심, 죄책감, 불편함을 느낀다.
그래서 침묵 속으로 숨거나 외면하려 한다. (엉터리이긴 하지만)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려 애를 쓴다.
그러나 ‘확신범’은 다르다. 양심이나 상식에 어긋나는 생각과 태도, 행동을 오히려 합리화, 정당화, 적극 옹호한다.
12.3 쿠데타 두 우두머리.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장관.
‘악의 확신성’과 ‘평범성’ 둘로 나뉘는 내란 세력들
최근 한국 상황에서 나온, “반국가세력 척결”을 위한 ‘계몽령’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에서는 좋은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평범한 척, 착한 척, 선행을 베푸는 척한다.
아이히만 역시 가축 돌봄 노동을 수행하고 음악을 즐기고 독서도 열심히 했다. 예루살렘의 재판정에서도
그는 ‘(저항 않는) 성실한 관료’로 위장했다. 그러나 그의 실상은 최후의 순간까지 나치즘을 신봉한 확신범이자
반성 없는 자기변호인(거짓말장이)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는 이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까지 동원하며 자기 정당화에 진력했다.
“나는 항상 칸트 철학의 애호가였으며,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칸트의 정언명령은 오히려 양심의 명령에 가깝지 파쇼의 명령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슈탕네트는 말한다. 아이히만에게 재판은 ‘자신과 세상을 감쪽같이 속인 가면극이자 냉소적인 기만극’이라고!
그리고 바로 그 가면극 내지 기만극에 관찰자 아렌트 역시 속았다고!
따라서 슈탕네트의 ‘악의 확신성’ 개념 역시 타당하게 보인다.
알고 보니, 윤석열과 김용현, 김건희와 노상원, 일부 국힘당 의원이나 극렬 종교인 등, 계엄 주도 세력들은
이 명제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 같다. 한편, 상당수 장군들과 국무위원들, 상당수 고위공직자들과 국힘 추종자들은
‘악의 평범성’ 명제를 입증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체로 마음속으로는 ‘아닌데…’ 하면서도 거부하기 힘든 ‘VIP의 의지’ 때문에, ‘눈 밖에 나기 두려워’,
‘보복을 당할까 겁이 나서’ 등의 이유로 반신반의하는 상태에서 끌려갔기 때문이다.
‘평범’도 ‘확신’도 넘어서는 질문 “어떻게 악이 내면화 될까?”
여기서 나는 묻는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도, 슈탕네트의 ‘악의 확신범’도, 나름 일리가 있다면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해서 평범한 사람조차 악을 확신하게 되는가'라는 것이다.
요컨대, ‘악의 내면화’가 문제다. 이에 대한 내 나름의 사유 결과는 이렇다.
첫째, 가장 쉬운 설명은 ‘세뇌 효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어릴 때부터 사람의 두뇌와 생각을 국가 내지 특정 세력(교육, 언론, 종교)이 조작하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칭송하는 독일의 킨더가르텐(유치원) 제도는 ‘원래’ 나치 시절에 국가가 (그리고 자본이) 아이들을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시도에서 시작됐다. 거칠게 압축하면, ‘아이들을 부모의 오염된 가치관으로부터
보호하고 순수한 아리아족의 위대함을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만3세 아동부터의 킨더가르텐 제도다.
또,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의 혼을 개조하기 위해 ‘국민학교’를 세우고 그들이 만든 교과서로 국민교육을 해온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세뇌 교육의 수단은 ‘당근과 채찍’이다. 말 잘 들으면 당근을 주고, 아니면 채찍으로 때린다.
국가나 어른이 원하는 일을 반복하며 당근으로 보상을 거듭 받게 되면 그런 생각, 느낌, 태도, 행동은 습관이 된다.
세뇌의 결과 낯선 규범이 습관으로, 나아가 그것이 상식으로 신념화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일정 시점에서 ‘근본적 성찰’의 계기를 갖지 못하면 세뇌된 상태로,
그것이 옳다는 확신으로 살아간다. ‘악의 내면화’는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아이히만은 1957년 9월, 한 ‘원탁 모임’에서 “우리가 1030만 명 유대인 중 (600만이 아닌) 1030만을 죽였다면
매우 만족스러웠을 것이고 (…) 우리 피와 민족에 대한, 또 민족의 자유에 대한 우리 의무를 완수했을 것”이라 했다.
이런 신념을 그는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
‘근본 성찰’ 없이 ‘세뇌-습관-상식화’ 경로로 ‘어른 아이’ 되는 사람들
이 모든 과정에서 아무 ‘근본 성찰’의 기회가 없다면 ‘악의 내면화’는 일사천리다.
그런데 독일의 경우 그런 근본 성찰은 ‘유럽의 68 혁명’을 계기로, 한국의 경우엔 ‘대학 신입생 시각 교정’을 계기로
상당 정도 이뤄졌다. 물론, 지금의 일상에서도 교양도서나 꾸준한 인문학 모임을 통해 그런 ‘근본 성찰’은 얼마든 가능하다.
반면, 이 근본 성찰의 기회가 없다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른 아이’가 된다.
인생 마지막 순간에도 인생의 의미조차 모르기 일쑤다. 그저 생존했고, 재산을 모았으며, 국가에 충성했고, 내 새끼 남기고 갈 뿐!
요컨대, ‘세뇌-습관-상식화’의 경로가 ‘악의 내면화’를 낳는다.
둘째, 이해관계 내지 이해득실 계산법에 따른 ‘악의 내면화’다.
세뇌되어 성장한 사람조차 일정 계기에 직면해 ‘국가에 속았다’, ‘언론에 속았다’ 또는 ‘사람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현타=현실 자각 타임), 결국 ‘돈이 최고’라 느끼게 된다.
크게 보면 이것은 ‘등가법칙의 효과’다. 즉, 인간적 유대감에 기초한 공동체가 해체될수록,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이 상품-화폐 교환(등가법칙)에 지배될수록, 이런 실리주의가 팽배하게 된다.
왼쪽부터 김용현, 이진우, 여인형, 조태용.
악의 확신범 만드는 ‘현타-실익-소신화’라는 또 하나의 경로
대체로 우리는 부모의 품을 떠나 살게 될수록 ‘가혹한’ 현실을 경험한다.
돈이 없으면 세상은 매우 비참하다. 방 한 칸 얻는 것도 돈이요, 지하철 하나 타는 것도 돈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돈이 많으면 사람처럼 살겠는데, 돈이 없으면 노숙자나 거지가 된다!
그리하여, 세상에 믿을 건 하나도 없는데, 심지어 부모조차 믿기 어려운데,
(밖에 나가면) 오로지 돈만이 힘이고 권력이고 말빨(!)임을 반복 경험, 체험한다. 상품, 화폐,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러한 경험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평범한 현실, 일상의 법칙이 된다.
이제부턴 삶의 의미나 존재, 인간관계, 자연관계 같은 건 위선이나 사치에 불과하고 오로지 ‘돈 되는’ 것만 가치 있게 보인다.
그리하여 특정 종교나 집단이 ‘돈 되는’ (밥 주는) 주장을 한다면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간다.
한두 번, 그리고 두세 번 ‘실제로 돈 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면 ‘이것!’이란 확신을 한다.
최근 독일 총선에서 극우파 정당(AfD)이 20% 이상 득표한 것도 이런 맥락이며,
한국에서 극우 종교, 극우 언론, 극우 정치의 동맹체가 출현하고 있는 현상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컨대, 이는 ‘현타-실익-소신화’의 경로다.
그 결과 자신도 모르게 ‘악의 내면화’가 이뤄지고 (백골단 부활이나 법원 폭동, 헌재 폭파 주장에서 드러나듯) ‘악의 확신범’이 된다.
살아남기 위해 저항을 포기하는 ‘폭력-공포-동일시’ 경로
셋째, 이와 연관되면서도 좀 다른 측면에서 ‘악의 내면화’를 볼 수 있다.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폭력을 반복 경험한 결과 ‘트라우마’에 찌든 사람들이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강자동일시’ 심리를 수용한 결과라는 것!
앞에서 국가나 자본은 아이들을 일찍부터 세뇌하려 함을 보았다. 그러나 성장하는 아이들이 늘 순종하는 건 아니다.
일탈 내지 저항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이 한두 차례 저항을 했다가도 거듭 패배하고 좌절하면
결국엔 죽음, 배제, 탈락, 낙인의 두려움(공포)을 감당하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주체성과 저항을 포기한다.
체제 전반의 차원이건 개인적 차원이건 ‘강자동일시’가 일어난다.
비판자나 저항자들을 척결하면서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일한 것으로 여기거나,
자기가 아는 성공자, 출세자를 마치 자신과 한 몸처럼 여기는 것이 모두 ‘강자동일시’다. 그 한 결과가 ‘악의 내면화’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이 돈벌이를 위해 얼마나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사람과 자연에) 폭력을 행사하는지 묻지 않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만 기억하며 오로지 주류 체제 안에서 인정받고 성공, 출세하려 한다.
그러다 보면, 아래로 갈구고 위로 비벼대는 ‘갈비 법칙’조차 지극히 당연한 규범으로 된다.
그런 규범이나 지시가 못마땅하면 ‘나가라’, 그리고 살아남아 계속 먹고살려면 ‘복종하라’는 가치관이 퍼진다.
요컨대, ‘폭력-공포-동일시’의 경로다.
즉, 죽음, 배제, 탈락, 낙인의 두려움(공포)이 ‘강자동일시’ 심리를 낳고 이것이 ‘악의 내면화’까지 낳는다.
자기 책임 회피인가, ‘희생양 찾기’인가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개념을 내세우며 대량학살(홀로코스트)을 수행한 아이히만이
‘별 생각 없이’ 국가와 조직에 충성하고 복종했으며 성실했을 뿐이라 했다.
반면, 아렌트보다 60년이나 젊은 베티나 슈탕네트는 ‘악의 확신성’ 가설을 제시,
아이히만이 인종주의 내지 반유대주의를 상식화, 소신화, 신념화했다고 본다.
아렌트에게 키워드는 ‘무사유’ 즉, 생각 없음 내지 피해의식의 위험함이다.
피해의식 뒤로 숨는 ‘피해자(희생자) 코스프레’는 무사유 외에 무책임을 드러낸다.
이는 최종적으로 무자비한 행동을 정당화한다. ‘~척 하는’ 피해자가 책임 전가를 통해 가해자로 둔갑하기 때문!
아이히만도 사형 직전의 법정 최후 진술에서 “나 역시 일개 희생자”라 했다.
원래 국가 폭력의 희생자조차 (어느 순간엔) 양심적 거부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되기도 한다.
그 어떤 악도 내면의 영혼까지 지배하긴 어렵기 때문!
그러나 늘 피해의식으로 충만한 피해자 코스프레는 그런 능동성 내지 주체성조차 스스로 부정한다. 자기책임 회피를 위해서다.
반면, 슈탕네트에게 키워드는 ‘신념화’ 즉, 외적 가치의 내재화다.
그야말로 일반인이 보기에 비인간적이고 반민주적인 것(예, 인종주의나 이기주의)도 이들에겐 소신 내지 행동 규범이 된다.
외적 가치를 내적 가치로 내재화한 상태이기에, 이 둘 사이의 경계가 더 이상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이들 논리 안으로 들어가 보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오히려 책임의 주체
(예, 유대인이나 굼뜬 자는 사회의 장애물)로 둔갑한다. 그리하여, ‘희생자 나무라기’ 또는 ‘희생양 찾아내기’가 예사로 행해진다.
‘정보사 체포조’가 선관위 직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준비했던 송곳, 안대, 포승줄, 케이블타이, 야구방망이, 망치 등.
평범이든, 확신이든, 악은 ‘성찰 없음’에서 나온다
일단 겉으로는 이 두 학자들의 명제가 서로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두 명제 모두 ‘성찰의 부재’란 공통점을 내포한다.
악의 평범성도, 악의 확신성도, 성찰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성찰이 없다면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쉽게 악인이 된다.
성찰, 그것도 ‘근본 성찰’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최근 한국의 계엄 사태와 관련해서도, 또, 지금의 전 지구적 기후위기와 관련해서도,
나는 이 근본 성찰의 부재가 존속하는 한 특정 개인(들)의 죽음은 물론, 한 나라, 한 사회, 나아가 지구 전반의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 본다.
특히, 나치 파쇼주의나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반공주의, 흑백논리, 가부장주의, 생산력주의, 능력지상주의, 성장지상주의를
체계적으로 부채질하는 자본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절박하고도 긴요한 시점이다.
아이히만은 죽기 전 이스라엘 감옥에서 자신을 “계몽주의와 세계주의를 갈망하는 평범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포장했다.
최근 12‧3 비상계엄과 관련, 윤석열은 “(야당인) 민주당의 폭주를 알리기 위한 경고성 계엄”이라 하며
‘계몽령’이란 말까지 간접 창조했고, 김계리 변호사는 “나는 계몽 되었다”고 했다.
이들의 최후 진술과 아이히만의 최후 진술 사이에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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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