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미국서 체포된 소련 간첩의 구명 위해 최선 다한 변호사 그린 '스파이 브릿지'
反共무드의 절정기에 '인간 존엄' 위해 몸을 던진 소신파 법조인의 행동, 잔잔한 울림
영화 ‘스파이 브릿지(Bridge of Spies)’를 본 느낌을 음식에 비유하면 햄버거나 낚지볶음을 먹다가 30년 전통 맛집의 비빔밥 한 그룻을 비운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자극적인 양념 맛에 기대지 않으면서 영화의 ‘기본’들이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로 어울려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연출에 톰 행크스의 주연만으로도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데, 코엔 형제가 각본까지 썼으니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스필버그의 오랜 파트너인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의 영상들은 영화라는 장르가 빛과 그림자와 색채를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했습니다.
- 적국인 소련의 스파이를 변호하게 된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왼쪽에서 두 번째)은 언론의 집중적 관심을 받게 된다. 재판을 마치고 법정에서 나온 그를 놓고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동·서 양 진영이 치열하게 대립했던 이른바 냉전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영화의 배경인 1957년 미국에서는 핵전쟁의 공포가 최고조에 올라 있었습니다. 1953년엔 원자폭탄 제조 기술을 소련에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은 전기기술자 로젠버그 부부가 간첩죄로 사형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공공연히 “소련 빨갱이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고 하던 시절, 미국의 기밀을 염탐한 소련 스파이에 대한 대중들의 감정이란 공개처형이라도 시킬 기세였습니다.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은 그런 반(反)공산주의 무드의 절정기에 ’빨갱이‘ 아벨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소련의 스파이를 변호한다는 것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위협받는 일이었습니다.
- '스파이 브릿지'에서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오른쪽 사람)은 검거된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을 법정에서 변호하는 변호사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소련에서 붙잡힌 미국 첩보원과 아벨의 맞교환 협상 에까지 나서게 되면서 도노반은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진다.
도노반의 행동 반경은 법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때마침 미국 CIA 첩보기 조종사가 소련에서 붙잡히자 도노반은 미국·소련 스파이의 맞교환이라는 유례없는 비밀협상에까지 나서게 됩니다. 예일대 학생이 동독에 억류되는 일까지 겹치자 두 미국인을 동시에 풀려나게 하려고 도노반은 최선을 다합니다. 영화 후반은 분단 독일의 옛 국경 지역이었던 포츠담의 글리에니케 다리에서 진행되는 미국·소련 스파이 교환의 긴장감이 스크린을 채웁니다. 글리에니케 다리가 바로 영화 제목인 ‘스파이 브릿지’입니다.
소련 스파이를 적극 변호하는 도노반의 모습은 얼른 보면 좌편향적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간단히 말하면 ”한 인간은 누구든 존엄하며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는 것 아니냐“하는 아주 원초적인 가치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정체모를 돌팔매가 한밤 집 유리창을 부수는 충격적 테러나, ”빨갱이를 도우려는 건가“ 라는 미 정보당국의 은근한 위협도 이 변호사를 말리지 못합니다.
- 소련의 스파이 루돌프 아벨(마크 라일런스)은 그를 변호하는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이 정말로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일종의 경의까지 느끼게 된다. 둘은 이념과 국경을 넘어 친구처럼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어 간다.
이 영화 속 소련 첩보기관 관계자들 모습은 미군 첩보원을 고문하려 드는 거친 모습으로 묘사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스파이 브릿지‘는 냉전시대 미 정부의 행태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의 시선을 보여줍니다.송환 대상인 두 미국인 중 미국 정보당국이 첩보기 조종사 쪽에만 관심을 쏟는 것부터가 그렇습니다. 조종사의 인권을 더 존중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조종사가 자칫 소련에게 미국 군사 비밀을 털어놓으면 큰일이라는 ‘계산’ 때문이니까요. 특정 이념을 편들지 않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생각하는 이 영화에서 스필버그의 성숙함이 느껴집니다.
스필버그는 하필이면 다른 소재 다 놓아두고 반세기도 더 된 냉전 시대의 이야기를 선택했을까요. 여러 진영끼리 이리 갈리고 저리 나누어져 물고뜯고 싸우는 오늘의 지구촌 모습이 너무 한심해 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어느 나라 보다도, 이른바 ‘진영(陣營)논리’가 판치며 자기 편 사람이 저지른 일이면 명백한 잘못도 감싸는 혼돈스런 풍경이 예사로 펼쳐지는 오늘의 한국에게 이 영화가 특히 의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