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만드는 일들이 영화와 이야기들 속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실 점점 일인가족이 늘어가고 있는 세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잘 알고 있듯이 혼자라고 혼자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듯이 혼자서는 살기 어렵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이 있기는 하지만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홀로 남겨져 4년을 살다가 구출됩니다. 그것은 사고로 인한 홀로 살기입니다. 원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어 살고 있습니다. 때로 그런 생각을 합니다. 1인 가구가 늘어가고 있는데 결국은 모두가 늙어가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다면 다른 걱정 없이 자기 즐길거리 찾아다니며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밤에 홀로 방을 지키는 것은 어떠할지 궁금합니다. 물론 그렇게 이미 익숙해져 있다면 크게 상관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부부가 함께 있다가 혼자가 되어버리면 그 잠자리를 익숙하게 만드는데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미 1인 가구의 가장이라면 그다지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글쎄 1년 열두 달 외로움을 느끼는 때가 한 번도 없을까요? 그 사람도 낮에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냅니다.
‘오토’라는 이 남자 동네에도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까칠한 노인’으로 말이지요. 거의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입니다. 일어나는 시간, 동네 한 바퀴 도는 시간 등등. 그냥 돕니까? 이것저것 상관합니다. 눈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고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좀 편하게 삽시다,’ 아닙니까? 하나하나 원칙대로 살 수 있습니까? 규칙이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일일이 다 지켜집니까? 또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활에 큰 변화라도 생깁니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피해가 갑니까? 사소한 것들은 때로 그냥저냥 넘어가도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들 갑니다. 우리 또한 서로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사람도 그렇게 되어버린 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태어나서부터 까칠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사람은 천성보다 오히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과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조금은 서글서글하고 착하고 유한 성품의 젊은이였습니다. 방대한 꿈을 지닌 불타는 열정의 소유자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한 여인을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임신 6개월의 아내와 예쁜 추억이라도 만들려고 함께 여행을 다녀오던 길에 그만 사고로 아내가 장애인이 됩니다. 물론 뱃속의 아기도 잃고 다시는 아이를 갖지도 못합니다. 평범했던 삶이 망가지고 아마 성품도 변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내 외에는 적(?)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나의 인생은 흑백인데 아내는 천연색이었지. 덕에 나의 인생도 천연색이 되었던 거야. 그 아내가 얼마 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자기 주변을 정리합니다. 여보, 곧 갈게. 여기에는 미련이 없어. 당신 곁이 그리워. 그런데 이 땅에 올 때도 자기 의지로 온 것이 아니듯이 죽음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솔’이 말했습니다. 참 죽는 것도 소질이 없네. 몇 번의 시도를 하지만 빗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귀찮게(?) 구는 이웃이 생겨 때마다 연결이 됩니다. 어리숙한 남편과 함께 사는 마리솔은 딸이 둘에 임신 중입니다. 바로 옆으로 이사 왔습니다. 멕시코 출신이어서 두 가지 언어가 쏟아져 나옵니다.
비뚤어진 것은 가만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으로 인하여 오히려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불행한 일인지 불운한 일인지 자꾸 이웃과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특히 마리솔의 가족과는 원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친밀해지기도 합니다. 마리솔의 성품 또한 분위기를 화창하게 만듭니다.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 저 사람 차츰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을 하나씩 몰아내고 자기네 땅으로 만들려는 부동산업체 사람과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바로 이웃 친구네 집도 어느덧 자기네 땅으로 만들려는 작업을 해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 서류에 하자가 없는지 조사합니다.
그런 말이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에서든 통한다는 사실을 봅니다. ‘이웃사촌’이라고요. 먼 친척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 좋은 예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0 : 25 - 37)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이 될 만한 사람일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곧 내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병든 자, 이주민(이방인) 성소수자 등등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기에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깐깐한 꼰대가 너그러운 어른이 되어가며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오토라는 남자’(A Man Called Otto)를 보았습니다.
첫댓글 잘보고갑니다
멋진 영화속의 청사진을 그려보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복된 하루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