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정은 오후 1시부터. 점심을 먹고 대회장에 들어가야 하죠. 대회장 안에서도 이런 저런 먹거리를 팔기는 하지만, 허접한 샌드위치 정도나 있어서, 아예 저녁 식사 거리도 사가지고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예전에 파리에서 살 때 자주 가던 단골 일본 식당에 갔다가 대회장에 도착하니, 벌써 2시가 가까워가는군요. 어제보다 자리가 역시 안 좋긴하군요. 이번에는 제2테이블 쪽입니다. 하지만 탁구대를 옆쪽에서 보는 위치라, 이번 대회 내내, 선수들이 탁구대와 거리를 얼마만큼 조정하고, 공을 치는 타이밍을 어떻게 잡는가에 관심을 가지기로 한 저로서는 어제 위치보다 좋아보입니다. 사진 찍는 재미로 온 제 아내가 불만이죠.
어제는 이렇게 제1테이블을 코앞에서 보았는데,
오늘은 제2테이블을 이렇게 봅니다(저 멀리 제1테이블)
오후 일정은 네 명씩 짜여진 조 예선전의 마지막 경기들입니다. 늦게 도착하니, 왕하오-크리스토프 르구 경기는 방금 끝나고, 주세혁-탕펭 경기가 막바지이더군요. 별 이변없이 왕하오와 주세혁이 8강에 안착합니다. 하나 둘 경기가 진행되고, 장지케, 옵차로프, 미즈타니 준, 아드리앙 마트네가 8강 진출에 성공합니다. 어제 삼소노프와 츄앙치위엔을 연달아 꺽고 8강에 들은 아드리앙 마트네 때문에 경기장 분위기가 아주 들썩들썩 합니다. 어제까지 2패만을 기록한 오상은이 세이야 키시카와를 상대로 한 마지막 경기를 이기는군요. 계산해보니 3전 전승을 기록한 티모 볼 외의 나머지 세 명 모두 1승2패의 기록입니다. 잠시 후 장내 아나운서가 오상은이 C조 2위로 8강에 진출한다는 방송을 합니다.
연이은 8강 대진표 추첨. 왕하오-디미트리 옵차로프, 미즈타니 준-오상은, 주세혁-티모 볼, 장지케-아드리앙 마트네.
아내가 묻습니다.
- 오상은과 주세혁, 중국 선수들 피했으면 준결승 진출 가능성이 높아진 것 아니야?
- 뭐, 저 선수들 수준에서야 누군들 쉬운 상대가 있겠어? 누구 하나라도 준결승에 가면 내일 플래카드 하나 만들어오자. 그나저나 아드리앙 마트네가 바로 장지케를 만나네... 4대0을 면하려나 모르겠다.
- 오빠, 주세혁에 오상은까지 준준결승에 갔는데, 내일 준결승에 올라간다는 보장도 없고... 플래카드 오늘 만들자.
- 지금?
- 응, 어제 박수치는 모습 보니까 아무래도 여기 한국 사람이나 한국 선수 응원하는 사람은 오빠 한 명인 것 같은데... 어쨌건 재밌잖아?
가만히 관중석에 앉아서 사가지고 온 저녁 먹고 책 좀 읽으며 느긋하게 저녁 경기 일정을 기다리려했던 계획을 바로 수정합니다. 둘이서 부랴부랴 대회장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종합상가가 하나 있군요. 문방구가 눈에 띕니다. 그런데 플래카드를 어떻게 만든담?
문방구집 아저씨에게서 얻은 박스 상자에 큰 종이 앞뒤로 붙이고, 한 면에는 태극기를, 다른 면에는 "OH, JOO, 화이팅"이라고 적습니다. 대회장에 돌아와 저희들 자리에 앉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면서 한 두 마디씩 말을 건넵니다.
(셋째날 대회장을 다녀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쓰다만 글을 마무리합니다.)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제 아내입니다. 옆에 있는 '모르는' 아저씨는 우리따라 덩달아 주세혁을 응원하셨죠. 나중에 아내가 그러는데, 주세혁의 경기를 보는 내내 '와, 멋지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시더랍니다.)
저녁 요기를 하며 왕하오와 옵차로프의 경기를 봅니다. 어렵지 않게 왕하오 승리.
드디어 주세혁과 티모 볼의 경기. 입장하는 때부터 관중의 편애가 드러납니다. 월드컵 우승을 넘볼만한 유럽의 유일한 선수. 티모 볼을 연호하는 군중들 사이로 저희 내외 "OH, JOO, 화이팅"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흔듭니다. 제 아내 옆에 앉은 아저씨가 그러시는군요. "오! 주세혁 선수 당신들 플래카드 봤어요!"
경기 내용은 말씀 드리지 않아도, 다 아시죠? 편집된 하이라이트 말고 경기 전체를 다 봐야합니다. 저희도 방금 마지막 세트만 itTV 동영상으로 보았는데... 역시 현장에서 선수와 관중들과 숨을 죽이고 함께 호흡하던 긴장감과 흥분만큼만은 (천분의 일만큼도) 못하더군요. 탁구의 탁자도 모르는 아내도, "동영상으로 보니까, 주세혁의 라켓을 떠나 공기를 유유히 가르며 네트를 스치듯 지나간 후에 상대방 테이블에 살며시 내려앉는 그 공의 느낌이 전해오질 않는다"고 하는군요. 공 하나 하나가 정말 예.술.이.었.습.니.다.
(세트스코어 3대3, 마지막 세트 10대9 상황, 매치포인트가 된 공을 서브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숨을 어떻게 쉬었는지도 모르게 긴장하면서 보고 있는데, 제 아내는 사진을 찍었더군요^^;)
경기가 끝나고 주세혁이 저희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 itTV 동영상 마지막 부분에 그 장면이 저희 내외 플래카드 들고 박수치는 모습과 함께 카메라에 잡혔더군요. 카메라맨이 제법 센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셋째날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 제 아내 옆에 앉은 아저씨께서 말씀해주셔서 알았어요. 저희 플래카드가 경기를 중계한 유로스포츠 채널에 나왔다고요.)
동영상과 함께 나오는 itTV 중계 해설자 맨트가 저희를 웃게 만들었습니다. "한국 국기가 하늘 높이 펄럭입니다(The Korean flag is flying high)." 종이 박스에 종이 덧붙여 그렸는데, '깃발(flag)'이랍니다^^ 퍼덕 퍼덕 흔들어댔는데, '하늘 높이 펄럭인다(flying high)'고 합니다. 엎어치면 어떻고, 매치면 어떻습니까? 저희가 응원한 주세혁 선수가 아주 멋진 경기 내용과 함께 승리했는데요!
(itTV의 동영상 마지막 부분에 주세혁 선수가 저희를 보고 손을 흔들 때 카메라맨이 잡아준 장면입니다. 가만히 보니 아내와 저보다, 저희따라 덩달아 주세혁을 웅원해준 아내 옆과 뒤 아저씨분들이 더욱 즐거워하는군요^^)
오상은 선수도 함께 준결승에 진출했으면 좋았을텐데요. 세트 스코어 2대3 상황에서 2대8까지 밀렸을 때, '아, 이렇게 허무하게 지는구나'했는데... 7대10까지 가서 미즈타니 준의 매치 포인트를 하나 하나씩 지워갈 때는 가슴속 스트레스가 하나 하나씩 사라져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이 6세트를 12대10으로 마감할 때, '와, 이기겠구나' 했습니다. 하지만, 6세트에서 따라잡힌 심리적 압박감을 '그리 쉽게'(라고 말은 하지만 정작 미즈타니 준 자신은 얼마나 긴장했을까요?) 이겨내고 마지막 세트에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미즈타니 준 선수가 대단하긴 대단했습니다.
가끔 이곳에서 '오상은 선수가 너무 성의없이 설렁설렁 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요. 이런 말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버리기로 했습니다. 겉보기에 설렁설렁 치는 듯한 그의 백핸드 드라이브에 오상은 선수의 혼신의 힘을 다한 집중력이 담겨져 있더군요. 툭툭 성의없이 치는 듯한 포핸드 플릭에는, '얼마나 연습을 했으면 저런 리듬감을 몸에 배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하게 만들고요.
(오상은 선수의 '설렁설렁 대는 듯'하나 혼신의 힘을 다하는 백핸드 블록. 이것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 사람은 오상은 선수 험담 절대로 못 할 겁니다.)
극적으로 이겨낸 주세혁 선수나, 극적으로 마지막 세트까지 갔으나 일본의 천재적인 선수에게 아깝게 진 오상은 선수, 제겐 둘 모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주 좋은 경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솔직히, 한 번 지면 어떻고 한 번 이기면 어떻습니까? 둘 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티모 볼과 미즈타니 준까지 네 명으로 하죠), 관중으로 참가한 제 생애 처음의 일류 대회에서, 제 생애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긴장감 넘치는 경기로, 기억에 오래 남을 추억거리를 만들어주었는데요.
첫댓글 열정적인 응원때문에 극적으로 주세혁이 티모볼을 이겼나 봅니다...
감기 기운에 목이 아픈데도 "주세혁 화이팅", "오상은 화이팅", "힘내라", "괜찮다" 등을 외쳤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신기한듯, 재미있는듯 저를 쳐다보았죠.
제가 혼자 외친 것은 아니고요... 아내가 "주세혁 화이팅 한 번 해"나 "오상은 힘내라 한 번 해", 하는 코칭이 떨어질 때마다 했습니다^^
정말 재미있으시겠어요~! 으악
정말 정말 (곱하기 만 배) 재미있었어요!
하하하하~부부가 같이 하시면 재미가 배가되지요 님들의 열성때문에 세계적인 강자 티선수를 극적으로 이겼나 봅니다하하하하
뜨개질 제 가방에 넣어달라고 해서 온 제 아내, 뜨개질 거리 꺼내보지도 않았습니다! 정말 우리 없었으면 주세혁 선수가 티모 볼을 이기지 못했을까요^^? 그럼, 저희로 인한 부담감에 오상은 선수가 진건가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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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는 내일중에 쓸게요. 저녁 먹을 시간이라...
경기 화면에서 본 것 같습니다, 주선수에게 정말 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경기 화면에 여러 번 나온 모양이죠? 이거 재미들겠네요^^;
저도 경기 화면에서 봤어요. "OH, JOO 화이팅"~~ 수고하셨어요*^^*
수고는요. 어런 수고는 표값(에 교통비까지)내면서도 합니다!
저도 경기 화면에서 봤어요..태극기 그린 분도 계시고 오 주라고 쓰신 분도 있던데..님이셨네요 ㅎㅎ
같은 플래카드에요. 태극기(나중에 가만히 보니 건곤감리 중에 곤과 감의 위치를 바꾸어 그렸더군요--;)는 앞쪽에 '오, 주, 화이팅'은 뒤쪽이에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경기장에 있을 때는 전광판의 중계 화면이나 느린 재생 화면에는 눈도 안 가더군요. 선수들과 관중들과 같이 시간을 즐기는 것에 그런 것에는 신경도 안 쓰여요.
경기 매너로 치면, 주세혁 선수도 티모 볼 못지 않더군요. 하여간 주세혁-티모 볼, 오상은-미즈타니 준의 8강전 두 경기는, 그야말로 경기 내용도 톱, 경기 매너도 톱이었습니다. 이런 경기 일 년에 한 두 경기 있다더라도, 쫓아다니면서 볼 것 같아요.
이제 만 40이니 여전히 젊죠? (아직도 길거리에서 30대 초반으로 봐준다는...쿨럭.) 최근에 저보고 잘 생겼다는 말을 해준 사람은 제 아내빼고 올림피아님이 유일하시군요. 꾸벅.
저도 동영상에서 태극기를 보고, 아 그분이겠구나 싶었습니다. ^^ 주세혁 선수의 경기는 역시 현장에서 봐야 제맛이죠. 저도 일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본 적이 있는데, 국적을 떠나 모든 관중들을 집중하고 열광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그렇죠? 모든 관중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면이 있더군요.
이거 봤읍니다 ittv에서 ㅋㅋㅋ
저희도 조만간 시간 내서 전편을 좀 봐야겠군요^^
열성적으로 응원한 보람이 월드컵대회 3회라는 좋은 성적을 낸것 같으네요...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의 반대가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네요. 오상은 선수의 8강 진출, 주세혁 선수의 3위 입상이 저희의 응원을 보람있게 만든 것이겠죠^^
시간절약을 위해.. ㅋㅋ 몇분쯤에 등장하시나요 ㅎ
저도 잘 몰라요. 주세혁-티모 볼 경기 끝에 승리한 주세혁 선수가 저희 쪽을 향해 손을 흔들 때 나오는 것 빼고는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아내 분의 말씀이 정말 와닿았습니다. 정말 좋으셨겠어요.
그렇죠? 주세혁 선수의 라켓을 떠나 공이 유유히 날아가는 동안, '저 공이 상대편 테이블에 떨어질까?'하는 생각이 공을 따라 함께 공기를 가릅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탁구때문에 가셨는지...겸사 겸사 가셨는지... 좌우당간에 ...헉~~~~
지난 2월에 표 사서 비행기 표 예약하고 일부러 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