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에 서유럽을 왔을 때는 런던에서 프랑스, 스위스를 거쳐서 이탈리아로 왔었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고타드 터널을 통과하면
곧바로 밀라노로 오게 된다.
그래서 밀라노에 들러서 하룻밤을 자면서 밀라도 대성당과 스포르차성, 스칼라극장을 밖에서만 을 밖에서만 보고 밀라노를 떠났
었는데 이번에는 외곽에서 잠만 자고 새벽에 스위스로 떠나게 된다.
밀라노도 역사적으로 오래된 도시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선언이 있었던 도시이기도 하므로 하루라도 머물면
서 돌아보고 갔으면 좋겠지만 일정에 없어서 아쉬워서 인터넷으로 구경이라도 하고 가기로 한다.(물론 여행기가 귀국하여 쓴 것
이니 후에 인터넷을 본 것이지만....)
이탈리아에서 밀라노의 위치...최북단의 도시로 알프스 산맥 아래에 있는 도시이다...로마에서 유럽으로 가거나 유럽에서 로마로
올 때 밀라노를 거치게 되어 있는 교통의 요지인 셈이다.
밀라노는 최초에 켈트족의 한 일파인 인수브레스족이 기원전 600년경 건설했던 도시였으나, 기원전 222년에 로마가 점령하여 기
원후 286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서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중요 선언인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곳으로 기독교역사에서는 중요한 도시이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곳은 여러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774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이었던 밀라노는 프랑크왕국에게
정복당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왕국에 속해 있다가 1499년 프랑스에 일시 속해 있기도 했으나
1535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 의해 1714년까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1859년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밀라노 도시 전경...위키 백과
밀라노는 유럽에서 이탈리아를 들어가는 관문에 있는 교통의 중심지로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하고 롬바르디아 평원의 포강의 비
옥한 평야를 끼고 있는 도시로 경제가 발전하였기 때문에 로마가 정치수도라고 한다면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경제수도라고 불리
운다고 한다.
밀라노를 이탈리아의 수도로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경제 부흥을 이루어 산업이 발달하고 1980년대에 밀라노의 몇몇 패션 업체들이 국제
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밀라노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로 인정받게 되는데 프라다, 아르마니, 돌체 앤 가바나, 발렌티노, 베르사
체, 에르메네질도 제냐, 보기 밀라노아르마니, 베르사체, 돌체 앤 가바나 등이 이곳의 패션 업체들이다.
패션뿐만 아니라 제조업들과 금융사들과 미디어기업들의 본사가 밀라노에 있을 정도로 산업의 중심도시이기도 하며 관광 산업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며 매년 2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고.
밀라노에는 밀라노 대성당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스포르체스코 성 스칼
라극장 등 가볼만한 곳이 너무나 많은 곳이기도 하다.
밀라노 대성당
성당 내부
2006년에 왔을 때 찍은 밀라노 성당 사진
2006년...쇼핑센타?
스칼라극장 ...오페라 극장으로 1778년에 지어진 극장으로 좌석이 3,200석이나 된다고.
2006년 스칼라좌 앞에서...그 때만 해도 젊었을 때이다.
스칼라극장 내부
스포르체스코성...이 궁전은 1450년 밀라노의 주인이었던 비스콘티 가문의 궁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성의 건축에는 브라만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거장들이 참여하여,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으로 화려하게 꾸몄으며, 성 안에는 르네상스 예술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서 인기가 높다. 특히 유명한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작품인 〈론다니니 피에타〉이다. 미켈란젤로는 죽기 3일 전
까지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미완성이다. 그 밖에 중세 시대의 가구와 골동품 등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브레다
탑에 오르면 밀라노 시내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기도 하다.(다음백과)
성 내부
2006년도 해질녁에 무슨 성인지도 모르고 찍은 사진이다.
다 빈치가 설계한 인공운하 Naviglio Grande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는 교회이다.
조감도...
최후의 만찬 그림과 열 두제자......예수를 배반했다는 가롯유다는 손에 음식을 들고 있으면서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유다의 얼
굴은 범죄자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이 범죄자의 얼굴을 찾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유명하다. 천사와 범죄자의 얼굴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그림의 인물에 대해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예수의 오른쪽에 있는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요
한이다. 이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여자의 얼굴이기 때문에 다빈치 코드의 저자는 이 인물의 얼굴을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이라고도
한다.
최후의 만찬이 유명한 것은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어서이기도 하지만 가롯유다의 배신에 대한 그림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그림의
중심인물은 가롯유다일 수도 있다.
가롯유다는 열두제자 중에 예수님이 가장 신임했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가롯유다는 로마에 속국이었던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던 열심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예수의 천국건설에 슬로건에 반해서 들어와서
제자가 된 사람이다.
예수님에게 책망도 당하지만 여려가지 면에서 예수의 신임을 받았었으며 제정을 담당했던 제자였었다.
제정을 담당할 정도가 되려면 예수가 가장 신임하고 능력을 인정했다는 증거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가롯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고 사탄이 가롯유다에 들어갔다는 단 한 구절밖에 없다.
가롯유다는 자기가 바라는 바가 스승인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지자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가롯유다가 자기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말씀을 많이 하시고 애를 쓰셨지만 그
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래도 유다가 마음을 돌리지 않자 차라리 너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구나 하는 책망의 말씀을 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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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전에 가롯 유다를 위한 변명이라는 글을 쓴 것이 있어서
내가 그 당시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를 합리적으로 추정으로 추정해 본 내용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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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롯 유다는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과 다른 목적으로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에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만 하더라도 어부로 배우지 못한 제자의 대명사로 불학무식(不學無識)한이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는 경우
가 많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자신의 조국인 유대나라가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독립운동에 가담을 하였던 열심당원(아니라
고 하는 사람도 있음)으로 소위 의식화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다.
한마디로 머리에 든 것도 있고 인생의 목표도 뚜렸했던 사람인 셈이다.
그가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다 기적도 행하는 능력도 있다고 하였으니 그런 능력이
라면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
아야 할 것이다.
물론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니 어디까지나 추측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조국의 독립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스승은 죽음을 면
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게 가롯유다는 자신의 스승이 과연 메시아인지를 의심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까?
만약 자신의 죽음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가롯유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그의 조국을 구할 수 있는 메시아가
메시아가 아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조국을 구하러 온 메시아가 그렇게 죽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확인하려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예수를 잡으러 온 로마병사나 유대의 관원들이 예수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
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잡혀가는 것은 가롯유다의 배신행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어차피 예수는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는 잡혀갔고 가롯유다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 자살한 이유가 스승을 배신했다는 자책감도 있었겠지만, 자신이 꿈꾸어 오
던 소망 곧 조국의 독립이 불가능하게 된 실망감과 자신이 메시아라고 믿어 왔던 사람이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실망감이 더 크지는
않았을까.....
최소한 은 30냥이 욕심이 나서 스승을 배반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그 때는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가롯유다는 메시아를 전지전능한 에이블(able) 맨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에이블
맨이 아닌 예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만약 그 때 가롯 유다가 메시아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알았더라면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았
거나 사도바울보다 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롯유다가 예수를 판 사건에 대해서 가롯유다가 왜 그랬을까를 후세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래서 성서에서 사탄에게 사주를 받았다는 내용과는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막달라 마리아 때문에 연적이었던 예수를 질투해서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사탄의 사주를 받았거나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보다는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첫댓글 세상은 넓고 ㅎ갈곳은 많넹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