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因緣
<제8편 풀꽃>
②기인도정(奇人道程)-20
드디어 산역일이 끝나자, 묘 터는 불긋불긋한 흙빛과 파릇파릇한 잔디가 서로 어우러지어 새로운 생기가 돋아보이는 거였다.
잠시 새로 백골을 옮기어모신 묘 앞에서 간단한 제물을 배설하여놓고, 성분제를 지내고 있었다. 김순달을 비롯해서 그 또래의 사촌들, 그리고 전라도에서 왔다는 노인 몇 명이 제사에 참례하고 있었다. 그네는 독축도 없이 술을 따라 올리고, 분향재배하는 걸로 이내 철상하였다.
그러자 산역꾼들은 널따란 묘 앞의 제절에다 멍석을 길게 깔더니만, 반찬을 먼저 멍석바닥에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 다들 마주 앉아 앞앞에 놓이는 밥과 국을 받아서 점심들을 먹기 시작하였다.
천복은 따로 멍석을 깔아놓고, 정갈하게 밥상 하나를 차리어놓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는 산역꾼들 속에서 먹으려고 하였으나, 박 기자가 그의 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그리로 와서 앉게 되었다.
박 기자가 그와 겸상하였는데, 박노선이란 노인과 올라올 때에 맨 먼저 인사를 하던, 노인이 와서 끼어들어 넷이서 자리를 함께 하였다.
박 기자가 그의 맞은 편에 앉더니, 두 말 없이 술을 사발에 채워 권하는 거였다.
“요런 명당얼 공동지서 자르가 남았다니, 패총이서 진주럴 캔 격으제.”
맨 먼저 산을 내려와 인사하던,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 혼잣말처럼 감탄하고 있었다.
“아, 자네넌 모르잖은가. 나가 여그 선상님 재혈(裁穴)허고, 정좌헌디, 다 따르댕기문서 본겨, 보통 지사님이 아니랑게.”
박노인이 핀잔조로 말하고 있었다.
“아저씨, 지사님 외갓집이 바로 백암리랍니다. 지난겨울 돌아가신 박종국 씨가 외할아버지 되세요.”
박 기자가 말하자, 두 노인이 다 멀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려야!”
수염노인이 생경하다는 듯이 외치고 있었다.
“아, 그 분도 외손자인 여기 지사님이 길로 쌓인 눈 속에서 대명당자리를 가려 모신 겁니다. 오죽이면, 제가 신문에 특종기사까지 써서 발표했겠습니까.”
“그려야!”
이번에는 박노인이 감탄하고 있었다.
“그 뿐인 줄 아세요?”
“고러먼?”
수염 성성한 노인이 놀라면서 묻는 거였다.
“아, 육이오 때 총살당한 태곡리 막골네 남편이랑 솜리댁 남편 묘도 다 좋은 자리에 면례해서 금시발복하여 어린 아들들이 다들 벼락출세하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박 노인의 눈빛이 번짝거리고 있었다.
“옳거니, 막골네 아덜 형제넌 도청직원어로 들어가고이, 솜리댁 아덜덜언 재벌회사이 들어간지 월매 안된디, 과장이라덤시.”
그는 기여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천복은 오가는 말들을 듣자니, 민망하여 달갑지가 아니하였다. 그 이야기는 이미 박 기자의 입으로 신물 나게 들었고, 신문에 난 기사처럼 다 알리어진 이야기이었다. 그렇대서 그러한 건 아니지만, 그의 수다에 멀미가 나는 거였다.
그는 따라주는 술을 거푸거푸 마시면서 연신 밥술을 크게 떠서 입으로 우겨넣고 있었다.
“고럼, 박 기자가 순달이한티 지사님얼 소개헌겨?”
박노인이 묻고 있었다.
“일테면, 그렇지요. 하지만, 순달이 내가 말로 해서 들을 사람인가요? 이 일은 순전히 제가 성구어서 하게 된 겁니다.”
그는 사실대로 말하였다.
“자네가이 존 일혔네. 조부모 산소넌 손자이기 간단디. 고런 험지이다 모셔갖고, 집안이 잘 될 것이어? 앞으로넌 틀림없이 순달이가 가슴 펼 날이 올 것이어.”
박노인은 이렇게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조상의 묘를 좋은 자리에 모시고, 안 되는 집안이 없다는 그의 굳은 신념에서 나온 말일 거였다. 때문에 그러한 말이 그의 입에서 쉽게 나왔을 거라고, 천복은 믿어지었다.
그는 밥그릇을 비우자, 먼저 일어나는 거였다.
“박 기자님, 다음 읍내 나올 때 뵙겠습니다. 그리고 노인장들께서도 일 마치시고, 안녕들 가십시오.”
그러자 박 기자를 비롯하여 노인들이 몸을 일으키고는 허리를 깊숙이 굽히는 거였다. 그런데 박 기자는 배웅하려고 그러하였는지 발을 움찔거리었으나, 재빨리 묘 마당을 빠지어나가자, 멈칫하고 선 채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천복은 집으로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집에 돌아올 때는 참으로 오랜만인 듯이 생경하기만 하였다. 가족들 가운데 제일, 보고픈 이는 역시 경산이었다. 하기에 그는 점포로 들어서자,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 경산 앞에 앉았다. 경산은 마침 손님이 없는지라, 옷궤 앞에 베개에 머리를 묻고. 엎드리어있었다.
그러다 천복이 들어오자, 얼굴을 드는 거였다.
“할머니, 진지잡수셨어요?”
“난, 먹었다만, 넌, 점심도 안 먹고, 어딜 그리 쏘다니느냐?”
“저도 점심 먹었어요. 사진재료를 사러 나갔다가 오는 길이예요.”
천복은 주름살이 더 많이 늘어나 보이는 경산에게 문득 연민의 정이 느끼어지었고, 그래서 애처로움마저 울컥거리고 있었다.
첫댓글 천복이 이런 저런 일을 하고 다니는 동안 세월은 흘러 경산은 속절 없이 늙어가겠지요 ...
그러네요!
사정에 의해 이번 주동안 연재를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