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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통화에서 돌아오는 길
이로써 나의 이번의 주요여정은 끝이다. 이른 아침부터 통구를 돌아 본 나는 거의 녹초 상태다.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돈을 100위안을 건네자 그녀가 잘 가라는 웃음을 마지막으로 선사했다. 이를 본 옆에 택시기사들이 그녀에게 묻는 것 같았다. 한국인이라는 말은 분명히 들렸으니 짐작이 갔다. 말은 몰라도 알 것 같았다. 왜 자기들한테 소개를 해주지 않았느냐고 핀잔을 주는 것 같았다. 버스로는 20위안 밖에 안하는데 대절택시는 열배 가까이 되니 그들로서는 큰돈이다. 차는 다행히 30분 후쯤인 1시 반에 떠나는 게 있다. 나는 기차로 통화로 가는 4시 21분 기차를 포기했다. 너무 피곤해 차를 타고 잤으면 해서다. 차를 타고 1시간은 족히 잤다 싶다. 여전히 버스는 산과 산 사이를 비집고 산길을 누빈다. 고구려는 저 산과 돌로 나라의 근간을 세웠다. 통화를 지나야만 통구에 이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200m 높이의 수직 절벽 위에 쌓은 오녀산성은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끝까지 항전한 ‘마사다’를 연상시킨다 했는데 통구의 환도산성에 가기 위한 통화의 길목은 무용총 무사들의 활궁이 도사린 천연적 엄폐의 곳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싶다.
나는 통화 버스종점에 내렸다. 바로 앞이 기차역이란 말을 들어서다. 오늘 밤 용정을 갈 기차 타는 곳을 미리 봐두고 움직이는게 든든하다 싶었다. 점심도 귀찮아 슈퍼에서 카스테라 하나를 사 때웠는데 출출해진다. 나는 택시를 타고 市場이란 한자를 써보였다. 차는 강을 건너 통화로 향하던 방향으로 줄달음쳤다. 그러고 보니 통화는 물 수량도 풍부하고 물의 도시만 같다. 강을 사이에 두고 건물이 들어선 것이 우리나라 제천시 시내를 꼭 연상시킨다
'통화시'는 중국 길림성(지린성)과 요령성(랴오님성) 접경에 있는 대표적인 도시이다. ‘통화시’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그 산을 S자 모양으로 커다란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 운치가 있어 보였다. 바로 이 산은 ‘옥황산’이라 하고 이 산 주위를 휘감고 흐르는 강이 바로 ‘혼강’이다. 그러니까 오녀산성은 강의 상류쯤으로 그 혼강이 이곳까지 흐르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졸본(지금의 ‘환인’)에 수도를 세워 정착한 이듬해 비류수(지금의‘혼강)에서 채소 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사는 것을 인지하여 찾아가 보니 비류국 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이 비류국을 ‘송양’이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주몽과 송양. 그들은 두 왕이 나누어 다스리기에는 땅이 작으니 두 사람이 활쏘기를 겨루어 왕을 정하기로 하고 대결한 결과 주몽이 승리하여 이 비류국도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주몽 휘하의 소수의 병력으로 동부여 대소왕의 대 병력을 효과적으로 막는데 천혜의 요새인 졸본산성은 더 없이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주몽과 주몽의 잔존 세력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 주몽의 무리들을 완전히 뿌리 채 뽑으려던 동부여 대소왕의 전략도 결국 험준한 졸본산성으로 인해 포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급격한 팽창을 가져오게 된 원동력이 만들어진 것이 비로 송양이 다스리던 비류국을 손에 넣은 뒤부터로 바로 이 비류국이 지금의 ‘통화시’가 아닐까 싶다. 산과 강을 낀 분지가 흡사 통구도 닮아 그 옛날 나라 하나가 차지하고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시장 통에서 옹기종기 모인 그들 틈에 끼어 우육면을 사먹었다. 느끼하지만 그게 대수로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너무도 많이 남은 시간, 나는 식당주인에게 쇼핑 타운이란 말을 동원 해 어렵게 통화의 제일 번화가를 찾았다. 실컷 돌아다니다가 쉴 마땅한 장소를 발견했다. 돈을 넣으면 쇼파가 부르르 떨며 피로를 풀어준다. 나중에는 돈도 안 넣고 기대어 잠을 잤다. 어느덧 박은 깜깜한 반, 나는 서둘러 택시를 타고 통화 역으로 돌아왔다. 중국은 역 대기실이라는 게 표를 끊은 사람들만 들어 올 수 있게 되어 혼잡하지 않고 조용해 좋다. 나는 그곳에서도 또 한 잠 늘어지게 잤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 역무원이 차는 안타고 잠만 자니 이상했던 모양이다. 다가오더니 차표를 보자 한다. 그리고서도 또 졸다보니 누군가가 와서 툭 나를 건드렸다. 그 역무원이었다. 깊이 자면 안 된다고 시계를 보여준다. 나는 30분 후 시각 ㅇ시 22분에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한 번도 안 일어나고 6시까지 쭉 잠을 잤다. 그런데 가만보니 이 기차는 올 때 보다 빠른 것이 쉬는 역이 좀 줄어들어 있다. 9시도 채 안 돼 나는 용정에 도착했다. 오늘은 특별히 따로 기획한 것이 없다. 나는 숙소에서 한잠을 더 자고 연길시내관광에 나섰다. 맨 처음 향한 곳은 민박집에서 아주 가까운 연변예술극장이란 곳이다. 그곳은 연길감옥이 있었던 자리로 연길감옥 항일 투쟁 기념비가 서 있다. 연길감옥은 1924년에 건설 되었다는데 회색벽돌로 된 높은 담장이 둘러있었고 전기철조망까지 가설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9 18사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앞서 장춘에서 본 그 9월 18일을 말한다. 즉 이는 만주 사변(滿洲事變) 혹은 9·18 사변은 일본 제국이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9.18”사변 후 일제통치시기 이곳은 “연길모범감옥”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당시 연길감옥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과 혁명가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1935년 6월 김명주ㆍ이태근ㆍ이춘영 3인을 비롯한 결사대 17명의 파옥지휘부가 주도하여 49인이 탈출에 성공을 하였다.당시 “간도신보”에서 는 “감옥장, 간수장을 학살, 수인 49명이 탈옥, 무기탄약을 탈취하고 도주, 연길감옥이 전율”이라고 대서특필했다. 탈옥에 성공한 30여명의 옥중전우들은 천신만고 끝에 인민혁명군 혁명부대에 참가하였다. 지금도 연변박물관에는 당시 김정길 열사가 감옥에서 뜬 이불보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연변 시 박물관으로 갔다. 생각보다 아담한 곳은 연길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안내 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중국 조선족은 조선반도로부터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한 근로하고 지혜로운 천입민족이다. 중국조선족의 이주는 17세기 초의 명말청 초기부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수천 수만의 조선인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광활한 조선족 집거루를 형성함으로써 황폐하고 망망한 동북의 흑토를 벼 향기가 차 넘치고 물산이 풍요로운 고장으로 변모시켰다. 중국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돕고 고락을 같이 하며 피흘리며 항쟁해온 과정이기도 하며 ㄲ또한 아름다운 삶을 개척하고 찬란한 중화문화를 수용하여 중화민족 대가정에 융합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솔직히 뒤편에 마음에 안 드는 문구로 나는 식상했지만 이는 또 어쩔 수 없는 남의 나라 땅이 아닌가. 내가 곳에서 놀랍게 받아들인 것은 조선족 농악무에 대한 설명과 이의 계승발전 그리고 분포상황을 상세히 설명한 자료에 대한 것이었다. 비록 조국을 떠났지만 마치 조국을 잊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연변조선족자치주 혁명 열사표’ 란 전시물을 보고 정말 놀랐다. 그 표에 열거한 열사들, 용정은 4,180. 화룡은 2,717, 연길은 2,711,왕칭(汪淸)은 2,363, 훈춘은 1,869...이런 식으로 하여 도합 17,735명의 열사 분포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연 용정은 독립의 주 무대였다 싶고 많은 동포가 이에 가담했다는 게 찐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런데 어딘지도 모르는 동네이름이 곳에 들어가 있다. 왕칭(汪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안 사실이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1920)와 함께 마땅히 한국독립군의 3대 대첩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대전자령(大甸子嶺, 다덴츠링) 전투, 대전자령은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汪淸)현 일대의 고개를 말한다. 높이는 해발 800여 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꾸불꾸불한 계곡길이 5km 정도 이어지고 고갯길 양쪽 길가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진 천연의 매복지였다. 1933년 6월 28일, 총사령 이청천(본명 지청천, 1888~1957)이 이끄는 5백여 명의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이란 이름의 중국 항일의용군 2천여 명과 함께 1300여 명의 일본군 정규군(간도파견군)을 매복 공격했다. 군수물자를 잔뜩 싣고 이동하고 있던 일본군 이즈카(飯塚) 부대는 4시간 만에 거의 궤멸되었다.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 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의 항일전 사상 최대의 승전이다. 이전까지 주로 만주국군을 상대로 싸웠으나 이 전투는 정규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대규모 작전이었다. 총사령관 이청천은 구한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가 강제병합 뒤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이니 그는 일본 육사에서 배운 대로 일본군을 궤멸시킨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은 군수품 2백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천여 정 등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분배관계로 독립군과 중국군 부대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면서 뒤이어 심각한 불협화음이 야기되긴 했으나 독립운동사에서 이 전투의 의의는 자못 크다. 승전 뒤 관동군이 증강되고, 국내 군자금 공급 루트가 차단되면서 무장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이는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가는 단초가 되었다. 대전자령 전투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목표와 성과가 임정으로 본격 수렴되기 시작했다. 백범의 제의에 따라 이청천·오광선·공진원 등 독립군 간부들이 이듬해(1934) 개설된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 분교에서 한인특별반의 군사훈련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문득 명동학교에서 본 기념탑이 생각났다. 3.13기념비, 1919년 2월 27일 중국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지린(吉林)성의 여준(1862∼1932) 집에 비밀리에 모였다. 이들은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이하 의군부)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름 그대로 무력을 행사하는 결사대였다. 의군부는 파리강화회의 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급조한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그 위상은 만만찮았다. 만주 독립운동의 주축 세력이 모처럼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의군부를 대표하는 정령(正領·총재) 여준은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교장 출신으로 서간도 일대에서 명망을 얻고 있는 선각자였다. 군무(軍務)를 책임진 김좌진(1889∼1930)은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의 부사령(만주 지역 책임자)으로 활동하는 열혈 투사였다. 게다가 비밀독립단 동제사의 요원 조소앙, 박찬익, 정원택 등도 합세했다. 그만큼 결속력과 실천력이 강했다. 의군부는 즉시 만주 지역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키로 했다. 선언서 작성에는 대동단결선언의 주역인 조소앙이 기초(起草)를 하고, 정원택은 선언서의 인쇄 및 발송을 맡기로 했다.(정원택, ‘지산외유일지’) 마침내 대한독립선언서가 완성됐다. ‘단군기원 4252년(1919년) 2월 일’ 날짜가 명기되고, 모두 39인의 서명이 기재된 선언서였다. 세칭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이 선언서는 일본을 사기강박(詐欺强迫), 불법무도(不法無道), 무력폭행(武力暴行)을 일삼는 ‘악마적’ 존재로 규정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육탄혈전’을 독립 쟁취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국내 3·1독립선언서가 평화주의를 주창한 것과 달리 만주의 대한독립선언서는 처음부터 무력을 내세웠다. 대한독립선언서가 작성된 지린시를 떠나 선언서가 선포된 곳은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의 허룽(和龍)시다. 바로 허룽의 대종교총본사가 대한독립선언서 선포가 이뤄진 곳이다. 대종교를 이끈 홍암 나철(1863∼1916), 무원 김교헌(1868∼1923), 백포 서일(1881∼1921) 등 3인은 민족운동가이자 항일지사로 활약했다.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 선포 이후 독립 만세의 함성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울려 퍼졌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의 3·1운동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한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옌볜조선족자치주의 룽징(龍井)의 장날인 3월 13일 옌지(延吉), 허룽, 투먼(圖們) 등지에서 3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룽징의 벌판(瑞甸大野)에 가득 모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악명 높은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관으로 행진했다. 명동학교 학생 등이 태극기를 들고 앞장섰다. 그러나 시위 과정에 1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북간도 최대 규모의 만세시위운동은 유혈로 낭자했다.중국 지방 군벌인 맹부덕 부대와 일제 군경의 야만적인 진압 행위에 분노한 한국인들은 각 도시와 농촌에서 일제히 시위에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무장 투쟁론이 전면으로 부상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육탄혈전주의는 이후 만주 독립운동의 쾌거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이어진다. 누가 감히 조선족을 비하하여 말을 할 텐가. 나부터서도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용정시 우리 동포이고 연길의 우리동포 들이다 싶다. 나는 그날 오후 한 나절 연길 야시장까지 두루 살피며 맴돌고 그 다음날도 새벽시장을 쫓아나가 꿀도 사고 말린 조선 명태도 사기는 했지만 지난 번 연길을 들를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생긴다. 연길은 단지 조선족이 많이 사는 동네가 아닌 것이다. 나라는 버려도 조국은 어쩌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말인가. 압록강을 건너간 사람들, 읽어본 대로 국가가 어느 국면이냐에 따라 백성의 삶은 사뭇 달랐다. 그동안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많은 국가들을 찾았다. 중국만 해도 열 번 가량 갔으니 여행사 광고에 나오는 웬만한 곳은 다 가본 셈이다. 운남성에서 심양까지 그야말로 중국의 끝과 끝을 누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느 여행지와는 다른 느낌이 드는 심양이고 연길이다. 내가 곳을 가고자 한 데는 우리의 역사와 너무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중국이 아무리 우겨도 그곳은 우리의 역사의 한 페이지며 우리 역사 속에서 한도 맺히고 빛도 나는 곳이다. 언제 한족들이 곳을 거들떠나 보았던가. 내 땅을 내가 찾는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국가와 조국, 어느 여행지에서도 그런 느낌이 든 적은 없다. 내 국가가 내 조국이지 또 따로 성립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생각해보자면 누군들 이 땅에 살게 될 줄 알고 태어났던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먹고 사는 게 늘 문제다. 솔직히 인간은 어디에 살든 어디에 속하든 등 따뜻하고 편하고 즐거우면 그만이 아니던가. 인간이 인간답다는 최소의 속성은 거기에 연유한다. 국가의 의미는 어쩌면 백성의 입장에서는 그리 소중하지도 않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지배신분으로서 국가가 등장한다. 해준 게 없는데 왜 내가 부역을 바쳐야 하는가. 그 위태로운 지경에서 공자가 등장한 것은 아닐까. 공자는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구조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지배자인 군주와 피지배자인 백성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설명하려 했고 군주를 훈육시켰다. 군주는 백성을 보살피고 지키며, 백성은 그런 군주를 온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백성이란 나약한 대상이고 객체일 뿐 늘 폭군들은 백성을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 폭군들은 너무나 많다. 아무튼 그 이래로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명분을 받잡고 국가는 볼모 잡힌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과 교류하고 이동하고 수 틀리면 전쟁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고대, 특히 이 만주 땅을 생각해 보자면 너무도 많은 국가들이 존멸을 거듭했다. 강역사(疆域史)에 몰두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국가 간에 접촉면은 상흔이 유독 깊으며 백성들의 희생, 특히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과 고통은 대대손손 되 물림 하고 그 끝이 없었다. 그와 더불어 기나긴 여정의 역사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도 있다. 동북아 문명 건설에서의 동이족, 삼조선과 삼한의 변화 과정, 고조선 수도와 한사군의 위치, 부여족 남하와 철제 왕국 가야와의 관계, 요서백제와 대륙백제 그리고 왜의 역할, 초원대국 고구려의 강역과 해양강국 백제와의 관계, 몽골의 기원과 고구려, 여진족의 기원과 신라 등등 모두 치열한 논쟁을 유발하는 사안들로 이곳 만주와 유관하다. 저 멀리 일본조차도 광개토대왕 비문을 훼손하며 고대 이래 끼어들기를 자청하고 있다. 그 복잡다단한 논쟁의 한복판에는 바로 국가가 있다. 역사는 국가를 배경으로 집필되며 결국 나중에는 애국이 곧 애족으로 동일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국가가 망했다고 해서 백성이 살던 천지를 버리고 산산이 흩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고대국가의 씨족 개념으로서 강제이주는 어떠하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대대로 그 땅에서 살아야 했다. 조국은 바로 그런 생존으의 본류이다. 핏줄에 스며드는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먹거리 풍속은 쉬이 달라지지 않는다. 핏줄이고 숙명이며 조상의 땅이며 자기 삶의 근원지인 것이다. 국가를 배제하고 백성 입장에서 보자면 참 기 막히고 억울한 노릇이다. 어느 한 때 군주에게 백성이 대상이고 객체이듯 백성들에게도 군주니 나라니 하는 것은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저 대대로 살아온 땅이기에, 그리고 앞으로 자손들도 살아가야 할 땅이기에, 그 땅을 잃지 않고자 지배자의 요구에 순응해 왔을 따름이다. 전쟁이 나더라도 해를 입지 않도록 안전한 곳으로 몸부터 피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고, 피할 수 없다면 새로운 지배자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몸조심하는 것이 차선일 것이다. 그렇게 백성들은 핏빛으로 물든 역사의 격랑을 헤치며 이 땅에서 수천 년을 살아올 수밖에는 없었다. 이는 바로 선조들이 살아온 땅 조국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째서 국가인가? 어째서 군주인가? 기막힌 배반과 수모를 감수하며 백성들은 조상들의 땅을 지킨 것이다. 전쟁을 피해 도망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전쟁을 대비한다며 부역에, 군역에, 농사지어 먹고 사는 것마저 못하게 막았다. 어제까지 이웃해 살던 이들이 무기를 겨누고 서로 대치하는 기막힌 운명을 감수하며 살았다. 군역을 피해 도망쳤던 이들의 손에 죽어간 이들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군역을 살고 있는 다른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누가 그들로 하여금 서로를 죽이게 하는가? 바로 그 원칙적인 이유를 들려주는 것이 지배자의 '통치기술'이었을 것이다. 신의 이름을 빌리고, 압도적인 폭력과 공포를 보여주고, 혹은 은혜를 베풀어 마음을 사고, 드물게 논리로써 설득하여 납득시키고 종묘사직을 늘 말했다. 위엄과 땅의 주인 사직을 불러 조상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그러기에 작은 나라에서 추구하는 왕도는 실로 어렵다.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의 위기에 스스로 발 벗고 나서게 해야 하지만 백성들이란 영악해서 그리 쉽게 넘어가주지 않는다. 공자시대 살기 싫으면 나라를 이탈하여 다른 나라에 재상이 되는 게 빈번했다. 공자만해도 그러했다. 작은 나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헤쳐 나아갔다. 나는 그런 측면에서 한 핏줄이라는 게 정말 무서운 족쇄이며 생명 줄이란 생각을 갖는다. 특히 한민족은 그런 유대가 강하다. 바로 심양에 중국동포는 바로 그런 억척의 사람들이다. 마치 한글이 그 생명 줄이라도 되는 듯이 서툰 말이라도 서슴치 않으며 용감하다. 왜 그들은 우리말을 잃지 않으려 하는가. 비록 애국 애족이 동일 시 되지 않지만 애족으로 버텨온 숫한 시간의 역사처럼 먼 훗날에도 한민족 문화는 그렇게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제도화된 국가관에서 지구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국가란 의미를 벗어나기 어렵다. 패스포트라는 국가적인 신분이 없으면 마음대로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처지들이다. 어쩔 수없이 우리는 부모가 선택 사양이 아니었듯 국가 또한 불가분의 똑같은 아이덴티를 갖는 천부적인 멍에로서 그 짐을 져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명실공이 4대 의무를 챙겨 주었다. 이제는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면 국민 된 자로써 마땅히 나서서 그를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은 하나로서 공동운명체다. 물론 이 뒤에 한 가지가 더 붙는다. 국가를 대표하는 지배자는 곧 국가와 동일하며, 따라서 지배자의 요구는 국민의 요구일 수밖에 없다라는 과거와 달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가 존재한다. 바로 공자가 지향하던 바일 것이다. 비로소 국가와 국민은 수평적으로 수직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국가로부터 받는 만큼 마땅히 자발적으로 징집되어 국가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목숨까지 내걸고 싸워야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준비일 텐데도 오히려 그것을 원망하고 반발하여 심지어 같은 처지의 병사마저 죽이고 만다. 심지어 적이 쳐들어오자 그 원망을 돌려 침략자의 편에 선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국가의 개념도 백성들의 마음도. 이제는 국가와 나 한 몸체로 공생공존을 이루어야 한다. 국가는 필요한 재정을 계산해서 예산을 세우고, 그에 맞춰 세금을 매기고, 거두어진 세금을 통합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그것이 가능해진 것이 장구한 역사속에서 따져보면 불과 얼마 전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재정은 실로 중요하다. 백성을 모아 전쟁에 강제로 나서도록 할 수도 없으며 따로 직업군인들을 두어 방비를 하는 시대가 도래 하였다. 고구려는 이미 국가를 위해 이를 철저히 시행하였었다. 나는 그 시대처럼 애국심과 애족의 마음이 강했던 때가 있었던가 싶다. 국가가 쓰러지려는 때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려 한 것은 바로 국가의 재정 때문이었다. 근대가 싹 틀 무렵 원칙적으로 양반에게도 군역과 세금이 부과되었었다. 그런데 향교와 서원에서 유학을 배우는 선비의 경우는 예외로 인정되고 있었다. 군역과 세금을 기피하려는 사대부들이 너도나도 서원에 이름을 올리면서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서원이란 나라의 재정을 좀먹는 부정의 온상처럼 되어 버렸다. 대원군이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들에게서도 군포를 거두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보다 일찍 이루어졌어야 할 개혁이었지만 누구도 여론을 주도하는 집단인 서원의 선비들과 척을 지려 하지 않았기에 조선의 재정난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화될 뿐이었다. 사실 방법이 없어서 못하는 것뿐이지 지금도 아마 할 수만 있다면 병역이며 세금이며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상위 층 아니 요직에 선 내노라고 하는 사람조차도 군대도 안 가고 국가관도 충실하지 않다. 그뿐인가 내 조국을 버리고 멀리 출산을 떠나 출생국가도 바꾸는 현실이다. 또한 인기에 영합하려 권리를 타협하려는 이를 테면 ‘포퓰리즘’이라는 얄팍한 시도도 넘쳐 난다. 백성을 위한답시고 세금을 낮춘 것은 좋은데, 정작 나라를 운영할 예산까지 부족해서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아쉽게 현세가 그렇고 이는 쇠퇴를 자초하는 지름길이며 옛 그대로 적용되는 엄연한 룰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동포라는 큰 울타리를 에둘러 저 송화강까지 넓게 펼쳐야 한다는 믿음을 얻었다. 그들이 한족을 북방으로 신장으로 급파하듯이 우리도 이제는 동족이라는 누구도 거부 할 수없는 핏줄에 대한 연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싶다. 굳이 국가가 아니더라도 수천 년을 이어온 동족이라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포섭이며 당연한 논리다. '인민을 위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이다.'라는 심양의 시청사에 걸린 구호가 참 마음에 닿는다. 국가가 건실하여야 광대한 꿈도 가능하고 애족도 변함없으며 그 의미도 날로 용이 승천하듯 번성하고 발전한다. 백성은 언제든 또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 최고라 한다면 고구려 고토 수복도 훨씬 쉬어지리라는 확신을 갖는다. 동족은 피를 나눈 형제이고 애족은 어쩔 수없는 삶의 필연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구려가 늘 그립다. 활을 잘 쏜 민족 동이족, 그들의 후예 예맥족은 쏜살같이 요동을 달렸으며 이제 우리가 광활한 대지를 보란 듯이 달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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