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도행전 21 : 17-26)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이튿날 동역자들과 함께 야고보와 장로들을 방문했습니다. 물론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헤롯의 박해로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당시 그는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로서 성도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19절)
본문 19절에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방 선교사역에 대하여 소상하게 보고하되 그는 “내가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하였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이렇게 일을 하였다”라고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일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한 가지 큰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또 우리는 대개 그렇게 말합니다. 말하자면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내가 이렇게 하였으니 자기를 좀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자기와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은 비록 내가 그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주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사역을 돕는 ‘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나서도 겸손한 모습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내가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할 때 문제가 생기고 복음이 왜곡됩니다.
‘종’은 아무리 훌륭하게 일을 했을지라도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종이 주인이 맡긴 일에 충성해야 하듯이,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익한 종’으로서의 신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심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에 오직 맡겨진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큰 영광 받으시고 우리도 높여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누가복음 23장 47절에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요한계시록 7장 12절에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신앙인은 “5기”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기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좋은 일을 기억하고, 기뻤던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해야합니다.
둘째는 “기대”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기대하는 것마저 접어서는 안 됩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힘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기대 곧 소망은 현실을 뛰어넘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호흡을 해야 육체가 사는 것 같이 영도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는 영의 호흡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넷째는 “기다림”입니다.
인내한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손을 바라며 기다려야 합니다. 나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기적”입니다.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며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약속을 기억하고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기억, 기대, 기도, 기다림,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인의 복이고 은혜이고 특권입니다.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은 기도는 꼭 응답된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외면하거나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에 민감해야 합니다.
2. 열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20절)
그런데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은 바울에게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는데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 였습니다.
어디에 열심을 내야 했습니까?
율법에 열심을 내야 했습니까?
아니면 복음에 열심을 내야 했습니까?
여러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이 아닌 율법에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열왕기하 19장 31절에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에스겔 39장 25절에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
예수님은 “두세사람이 내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던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에 소속 성도가 4천3백66명으로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스펄전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열 두 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천3백66 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성도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두명세명이라도 좋습니다.
3. 실족하지 않게 할려고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23절)
그런데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은 사도 바울을 향해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고 충고합니다.
이것은 시시각각 전해 오는 사도 바울에 대한 '유대인 성도들이 오해할 만한 소식'을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이 가볍게 듣지 않고 나름대로의 대책을 세워놓았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사랑하듯 그렇게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충고는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별다른 항변을 하지 않고 순순히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서원한 사람들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율법의 규정을 따라 결례를 행했습니다(26절).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죽을 각오도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로마의 천부장과 같은 사람은 물론, 총독과 왕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만큼 담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그 어떤 권력자들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한 복음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할 만큼 복음에 대해 단호했던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장로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율법의 규례를 따랐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형제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려는 '성숙한 배려'였습니다.
또 사실, 바울은 지나치게 형식적인 율법의 규례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을 뿐, 율법을 지키지 말라거나 폐지를 주장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율법의 규례에 따라 결례를 행했던 바울의 모습은 그의 나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자존심도 꺾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증거가 됩니다.
잠언 22장 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이사야 29장 19절에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잠언 11장 2절에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여러분, 이처럼 진정한 믿음은 믿음의 형제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하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더할 나위없이 담대합니다.
메시야를 작곡하기 이전, 헨델(Handel, 1685-1759년) 은 여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헨델이 작곡한 몇 편의 오페라가 거듭 실패한 동안 ‘헨델은 이제 끝났다.’ 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 〔 메시야 〕였습니다. 헨델은 기도하다가 작곡하고, 작곡하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불과 23일만에 그 대작을 완성시켰습니다.
합창곡 44번 ‘할렐루야’ 의 작곡을 마쳤을 때 헨델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 내 앞에 영광스러운 천국이 나타나는 것과 나의 위대하신 여호와를 보았노라!”
런던에서 황제 죠지 2세의 참석 아래에서 〔 메시야 〕의 첫 공연을 가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영광에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드디어 ‘할렐루야’ 의 합창이 나오자 황제는 그 감사와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일이 오늘날까지 관례가 되어 ‘할렐루야’ 를 들을 때에는 누구든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세요.
열성을 가지고 주님을 향하는 뜨거운 사랑을 보이세요.
실족하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승리교회 온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