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나라에게 무릎을 꿇은 뒤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끌려가 그곳에서 만난 아담샬과의 인연 등으로 서구 선진문물에 눈을 뜨게 된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청나라와 화친하여 서구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소현세자의 행동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은 것을 최대의 치욕이라 생각하고 있는 아버지 인조와 수구적인 조선의 대소신료들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 아우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어 인조가 승하한 뒤에 조선 17대 임금 효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헌데 소현세자는 물론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까지 비극의 죽음에 이르게 된 데에는 인조의 총애를 받던 조소용이란 후궁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하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한번 주목하고픈 인물이 있다. 바로 인조의 계비(繼妃)인 장렬왕후 조씨다. 인조의 정비(正妃)였던 인렬왕후가 세상을 떠나고(1635)년 이듬해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인조는 1638년 44세의 나이로 15세의 어린 중전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장렬왕후 조씨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조소용이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때라 어린 중전은 그다지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된다.
조소용의 치마폭에 휩싸여 말년을 혼미하게 보냈던 인조는 1649년 세상을 떠나고, 앞서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된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라 17대 효종이 된다. 한편 소현세자와 강빈을 모함하고 독살했던 조소용과 김자점의 세력은 효종 2년에 모두 철저하게 몰락하게 된다.
헌데 15세에 인조의 계비가 되고 효종이 즉위하자 어린 나이에 대비가 된 장렬왕후는 정작 효종이 죽고 난 뒤에 조선시대 최악의 정쟁사안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것도 어쩌면 본인 의사와는 별 상관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이른바 상복을 몇 년 입는 게 가한가 하는 문제로 현종의 치세 15년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소위 ‘예송논쟁’이다.
예송논쟁의 핵심은 아들이 죽었을 때, 또는 며느리가 죽었을 때 그 어머니 혹은 시어머니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주자가례에 의하면 장남이 죽었을 때는 3년, 차남이 죽었을 때는 1년을 입어야하고, 큰 며느리가 죽었을 때는 1년, 둘째 며느리가 죽었을 때는 9개월을 입어야 한다. 헌데 효종을 임금의 장자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정작 효종이 죽고 난 뒤에 그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효종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똑같은 논쟁이 반복된다.
사실 효종을 장자(長子)로 보아야 하는가 차자(次子)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벌어졌던 것은 결국 그 뿌리가 인조시대 후반부에 있었던 소현세자의 비극에 있다. 소현세자가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세자에서 폐위된 아들일진대, 그 소현세자를 적통으로 인정할 수 없고 효종과 인선왕후를 장자(長子) 혹은 장자부(長子婦)로 보아 3년(효종)과 1년(효종비 인선왕후) 상복을 자의대비가 입어야 한다는 것이 남인측의 주장이었고, 소현세자를 적통으로 보고 효종과 인선왕후는 차자(次子)와 차자부(次子婦)니 1년(효종)과 9개월(인선왕후)만 입어도 된다는 것이 서인측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임금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 어머니가 또는 며느리가 죽었는데 시어머니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죽기 살기로 싸웠으니 참 밥 먹고 할 짓 없는 한심한 조상들이었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인조에게서 아들로 인정을 못 받고 비운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이니 그를 적통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된 심각하고 민감한 정치 사안이 될 수 있는 문제니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논란이 오간 속사정을 이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달리 생각해보고자 하는 인물이 바로 그 예송논쟁에서 논란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장렬왕후다. 인조의 계비가 되었던 시절엔 어린 나이로 후궁(조소용)의 위세와 견제에 눌려 제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처지였고, 소현세자가 죽고 인조의 차남인 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땐 대비의 자리에 있다가 그가 죽은 뒤 자신이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대신들이 죽기 살기로 싸웠던 그 시절을 지켜본 당사자인 장렬왕후의 심정은 정작 어땠었을까 하는 문제다.
장렬왕후는 비운의 인물이다. 15세의 나이에 29살 많은 인조의 계비가 되어 후궁의 기세에 눌려 제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숨죽여 살았고, 인조의 차남인 효종이 죽은 뒤에는 정작 효종에게 계모가 되는 자신이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대신들이 죽기 살기로 싸웠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인조 후반부부터 효종 그리고 현종시절 있었던 예송논쟁까지 정작 장렬왕후 당사자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벌어진 일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