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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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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꿀뚝 스크랩 [남명연원 사숙인물고] 어적(漁適) 유중룡(柳仲龍)
으뜸빛 추천 0 조회 27 15.01.28 11: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명연원 사숙인물고]

어적(漁適) 유중룡(柳仲龍)

史   載   明
(경상대 강사)

 

   유중룡(柳仲龍: 1558∼1635)의 자는 여현(汝見)이고, 호는 어적(漁適)이며, 본관은 문화(文化)로 거창(居昌)에 거주하였다. 그는 무오년 12월 26일 거창의 무등에서 태어났으며, 그에 관한 자료는『어적집(漁適集)』3권1책이 전한다. 『어적집』에 보이는 「어적유선생세계(漁適柳先生世系)」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스승에게 급문(及門)한 것은 15세 때 가을이었다. 그는 덕계(德溪) 오건(吳健)선생을 뵙고, 스승으로 섬겼으며, 동문제현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마하였다. 다음 해 16세 때 가을에는 덕계선생으로부터 『중용(中庸)』을 배우고, 천하의 모든 이치가 모두 이 『중용』에 있음을 깨닫고는 일생동안 공부의 소재로 삼았다. 다음해 가을에 덕계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복시(服)하였다.

  그의 학문과정을 살펴보면, 7세 때 소학을 배운 것을 비롯하여 10-12세 때 강목(綱目)을 읽었으며, 덕계선생으로부터는『중용』을 배우고, 동문제현과는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8세 때『주역』을 공부하고, 26세 때에는『심경』,『근사록』등의 책을 읽었으며, 44세 때에는 제자에게『대학』을 가르치기도 하였고, 57세 때 군(郡)에서 제유(諸儒)가 『예기(禮記)』를 배우고자 청하는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과거(科擧)에 응시한 때는 24세  가을이었다. 당시 모계(茅谿) 문위(文緯), 권응거(權應擧) 등이 과거(科擧)는 우리가 유의(留意)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하여 과거를 일삼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노모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향시(鄕試)에 응하여 합격하였다. 다음해 25세 때 봄에는 사마시에 2등 제5인으로 합격하였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월간(月澗) 이전창(李전蒼), 창석(蒼石) 이준(李埈) 등은 모두 동년(同年)으로서 그후 서로 왕래하기도 하였다. 43세 때 봄에는 양과(兩科)에 제1인으로 급제하였으며, 67세 때 3월에는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그의 벼슬생활은 43세 때 성환찰방(成歡察訪)을 비롯하여 성현찰방(省峴察訪, 45세), 충청도사(忠淸道事, 47세 6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8월), 사예(司藝, 12월),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48세 4월), 예조정랑 천예빈시정(禮曹正郞 遷禮賓寺正, 50세),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55세), 금산군수(金山郡守, 56세), 홍문관수찬지제 교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弘文館修撰知製 敎兼 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67세), 홍문관교리지제 교겸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弘文館校理知製 敎兼 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69세), 70세 때 봄에 성균관사성겸춘추관편수관(成均館司成兼春秋館編修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는 생애동안 세 번에 걸친 혼인관계(婚姻關係)를 맺기도 하였는데, 첫 번째는 16세 때 봄으로 순천 박씨(참판 光後의 딸)를 첫부인으로 맞이하였으나 20세 때 11월 26일에 부인 박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22세 때 봄에 다시 도희령(都希齡)의 딸 팔거(八)를 맞이하였다. 그 후 31세 때 3월 4일 부인 도(都) 씨 또한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다음해 32세 때 봄에 인천(仁川) 이씨(李氏)(右尹衢의 딸)를 세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육(敎育)적 활동을 살펴보면, 30세 때 가을에 향유(鄕儒)와 더불어 사마재(司馬齋)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한 것과, 44세 때에는 추사(追士) 이승후(李承後)가 찾아와 집지(執贄)하고 배알하자 그는『대학(大學)』일부를 그에게 주고 교육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래하거나 교유(交遊)한 이들로는 죽유(竹) 오운(吳澐),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 창석(蒼石) 이준(李埈), 외재(畏齋) 이후경(李厚慶), 설계(雪溪) 문려(文勵), 윤경남(尹景男), 변혼(卞渾), 권치원(權致遠), 송군옥(宋君沃), 노경복(盧景福), 도촌(陶村) 조응인(曺應仁), 동계(桐溪) 정온(鄭蘊), 상사(上舍), 박분구(朴衢),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사호(思湖) 오장(吳長), 조계(釣溪) 박수종(朴壽宗) 등이 있었다.

  45세 때 7월에는 장락원(掌樂院)에서『동도회(同道會)』를 만들어 다음과 같은 인명록을 작성하였다.

정곤수(鄭崑壽, 居 星州), 이호민(李好閔, 居 君威), 강신(姜紳, 居 尙州), 강연(姜, 居 尙州), 윤엽(尹曄, 居 尙州), 박응립(朴應立, 居 寧海), 신지제(申之悌, 居 義城), 강타(姜, 居 尙州), 김택룡(金澤龍, 居 禮安), 권경호(權景虎, 居 咸昌), 유중룡(柳仲龍, 居 居昌), 전우(全雨, 居 草溪), 오극성(吳克成, 居 寧海), 이홍발(李弘發, 居 居昌), 권세인(權世仁, 居 丹城), 박광선(朴光先, 居 高靈), 권순(權淳, 居 咸昌), 권주(權澍, 居 咸昌), 김○(金○, 居 尙州), 노도형(盧道亨, 居 尙州), 이민성(李民宬, 居 君威), 권제(權濟, 居 丹城), 신경익(申景翼, 居 尙州), 이민환(李民奐, 居 君威), 조정(趙靖, 居 尙州), 조우인(曺友仁, 居 咸昌), 남복규(南復圭, 居 安東), (『漁適集』, 卷3, 「同道會題名錄」).

  여기에 기록된 이들은 지역적으로는 상주, 함창, 군위, 단성, 등에 거주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52세 때 봄에 가숙(家塾)을 만들고 편(扁)하기를 양정재(養正齋)라 하였으며, 61세 때 가을에 용산(龍山)에 올라「구월회(九日會)」를 만들기도 하였다.

  51세 때 만든「우인동화록(友人同話錄)」은 유호(柳湖) 유세온(柳世溫)과 모헌(暮軒) 하혼(河渾)의 양 문집에서 적출하여(『漁適集』, 卷3, 「友人同話錄」)기록한 인명록인데, 이는 다음과 같다.

이정(李瀞, 居 晋州), 박제인(朴齊仁, 居 咸安), 하응도(河應圖, 居 晋州), 성여신(成汝信, 居 晋州), 안극가(安克家, 居 草溪), 이대기(李大期, 居 草溪), 정온(鄭蘊, 居 安陰), 유중룡(柳仲龍, 居 居昌), 박정번(朴廷, 居 高靈), 유세온(柳世溫, 居 草溪), 전우(全雨, 居 草溪), 배응곤(裵應袞, 居 丹城), 하혼(河渾, 居 陜川), 오여은(吳汝, 居 高靈), 문경호(文景虎, 居 陜川), 곽근(郭, 居 玄風), 李○, 宋光○, 金○○, 河○, ○○○, 강인(姜), 강익문(姜翼文, 居 陜川), 이익수(李益守, 居 草溪), 권협(權浹).

  이들 역시 초계, 진주, 합천, 고령, 기타 지역에 거주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55세 때「동도계회록(同道契會錄)」를 수정하고 평생 막역(莫逆)의 바탕으로 삼았는데, 여기에 기록된 이들은 다음과 같다(『漁適集』, 卷3, 「同道契會錄」).

박이장(朴而章, 居 高靈), 윤선(尹銑, 居 三嘉), 박사제(朴思齊, 居 三嘉), 이대기(李大期, 居 草溪), 김응성(金應成, 居 高靈),  유중룡(柳仲龍, 居 居昌), 강익문(姜翼文, 居 陜川), 손린(孫, 居 大邱), 이종문(李宗文, 居 大邱), 유세온(柳世溫, 居 草溪).

  한편, 그는 산수유람을 즐기곤 하였는데, 29세 때 가을의 구월산(九月山)과 54세 때 봄에 진사(進士) 이승후(李承後)와 더불어 두류산(頭流山)의 천왕봉(天王峯)을 오른 것이라든지, 60세 때 봄의 봉황대(鳳凰臺), 그리고 62세 때 봄의 익찬(翊贊) 윤경남(尹景男), 사부(師傅) 임진부(林眞), 상사(上舍) 성진규(成震奎)와 함께 한 안음(安陰)의 삼동(三洞)을 유람하고 시(詩)로써 수창(酬唱)하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저술(著述)로는 17세 때 겨울에 「지려부(紙驢賦)」를 비롯하여, 18세 때 겨울에 주역을 읽은 후 지은「역학설(易學說)」과 19세 때 모부인을 섬김에 있어 지극한 효성을 담은「애일부(愛日賦)」가 있다. 20세 때 봄에「진도음(進道吟)」을 짓고 스스로 경계한 것도 있으며, 48세 때 봄에 지은「진희화성덕시(進熙和聖德詩)」, 49세 때의「진주하씨족보(晋州河氏族譜)」의 서(序), 53세 때 가을에 우연정(友蓮亭)의 기문, 58세 때 승지공(承旨公)의「행장(行狀)」, 59세 때 5월에「타직당기(妥直堂記)」, 60세 때의「탄세사(歎世詞)」, 68세 때의「기우제축문(祈雨祭祝文)」등을 남겼다.

  1592년(35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여름 4월에 왜구가 크게 쳐들어와 동래(東萊), 김해(金海)가 잇달아 함몰되면서 열읍이 무너져 버렸다. 그러자 이를 개탄하면서 판탕(板蕩)의 때를 맞이하여 '신하된 자로써 어찌 손팔짱을 끼고 좌시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임금에게 보답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문위(文緯), 오장(吳長), 노사상(盧士尙), 박사제(朴思齊), 정유명(鄭惟明), 이대기(李大期), 윤경남(尹景男), 박성(朴惺) 등과 더불어 발문(發文)하고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약속하였다. 그리고는 송암(松菴) 김면(金沔) 대장에게 가서 함께 대항하자고 청하니 그가 그들의 뜻을 장하게 여겨 그와 곽준(郭), 문위(文緯), 윤경남(尹景男), 박정번(朴廷번) 등을 참모장서기(參謀掌書記)로 삼아 규합하였다.

  다음해(36세 때)에 대장 김면(金沔)이 진중에서 사망하자 그는 김자(金滋), 김양(金瀁), 김급(金汲), 윤경남(尹景男)과 함께 고령(高靈) 칠등(七嶝)에서 함께 호상고장(護喪藁葬)하였고, 이해 여름에는 아우 계룡(季龍)과 함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진중(陣中)으로 들어가서 토적(討賊)하였다.

  그 후 4년이 지난 40세 때에는 왜구가 재차 침입하자, 그는 망우당(忘憂堂)을 따라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들어가 군사 방략(方略)을 도모하여 2년 후인 42세 때 비로소 난(亂)이 평정되었다. 그는 일찍이 난기(亂記)를 기록하였으나 화변(火變)으로 인해 소실되었으므로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간행(刊行)작업과 관련해서는『진양하씨연고(晋陽河氏聯稿)』를 교간(校刊)하였고, 모헌 하혼이『송헌경재세고(松軒敬齋世稿)』를 간행하는데, 그와 감사(監司) 이상신(李尙信), 정사호(鄭賜湖) 동래백(東萊伯) 이안눌(李安訥) 등에게 청하여 제현이 교간(校刊)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남명학파(南冥學派)로서의 족적으로는 스승에 대한 추존의식을 가지고 26세 때(1583년, 계미) 봄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명 조식선생 사당을 배알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27여년간의 벼슬생활 이후, 70세 때 가을 무렵에 치사(致仕)하고 아림의 옛 집(娥林故第)로 돌아와, 다음해인 71세 때 2월에 어적정(漁適亭: 이정자는 그가 23세 때 가을에 영계(瀯溪) 위에 정사(精舍)를 짓고 편(扁)한 것에서 유래한다.)을 중수(重修)하고 소요상양(逍遙)하면서 노년기를 보내고자 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 그는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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