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밤이
왜 그리 사람들은 기억하는지?
제목은 <잊혀진 계절>인데도 말이지요.
전 잊혀진 계절이 아니라서,
더 잊지 못해서
시월이란 시월을 몽땅 불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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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十月)
【시·묘사】
[1]시월이라 天馬日에 증일월지기하(曾日月之幾何)하오
이상견빙(履霜堅氷)되었세라.
청천에 올라가는 홍안(鴻雁) 행여 소식 바랐더니
창망한 구름 밖에 빈 대 소리뿐이로다.
한월잔등(寒月殘燈) 상대하니 베개 위에 눈물이라
슬프도다 우리 부모
천마일을 모르시나 그 달 그믐 허송하니. 《思親歌》
[2]술 빚고 떡 하여라 강신날 가까왔다
꿀 꺾어 단자 하고 메밀 앗아 국수 하소
소 잡고 돝 잡으니 음식이 풍부하다
들마당에 차일 치고 동네 모아 자리 포진(鋪陳)
노소 차례 틀릴세라 남녀 분별 각각 하소. 《高尙顔/農家月令歌》
[3]내 사랑하리 /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 가는 푸른 모래 /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黃東奎/十月》
[4]내 시월에, 따갑던 칠팔월의 끈끈한 기억들을 넘어서 그 살찐 들녘에
몇 줄기의 바람은, 남쪽도 아니고, 북쪽도 아닌,
누구의 눈부신 꽃밭이 있는 뜨락도 아닌,
그런 곳에서 까닭 없이 일게 하리라.
애초에 내 몇 줄기의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許演/시월달에》
[5]첩첩 낙엽이 짚힌 언덕 아래로 / 초록이 짙은 수양버들이 머리털을 나다리고
단풍 들어 함촉이 난만한 산허리에는 / 희부유스름히 저녁 안개는 깔리어 오는데
너는 누구를 기두리련고 / 자감빛 황혼이 물 밀린 숲 속에 서서……
아스라이 스쳐 가는 찬바람과 참새 소리 사라지고
대낮과 밤을 휘몰아 어지러이 명멸하는 계절의 影繪와 같이
하이얗게 삭은 손등을 저자에 내미는 애달픈 생애와
영영 가슴으로만 파고드는 그리움 움켜쥐고 / 곱디고운 무늬로 아로새긴 이 황혼에 돌아 오려니 나의 소녀는……
《朴洋/十月》
[6]시월의 / 소녀는 / 사과 속에 / 숨어 있다. 《全鳳健/시월의 少女》
그리운 나라
장석주
□ 1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젊은 날의 첫아내가 사는 고향
지금은 모르는 언덕들이 생기고
말없이 해떨어지면 墓碑 비스듬히 기울어
계곡의 가재들도 물그늘로 흉한 몸 숨기는 곳
이미 십년 전부터 임신중인 나의 아내
만삭이 되었어도 그 자태는 요염하게 아름다우리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연기가 토해내는 굴뚝
속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굴뚝 아래
검은 공기 속에서 落果처럼 추락하는
흰새들의 어두운 하루 애꾸눈 개들이
희디흰 대낮의 거리에서 수은을 토한다
―수은을 먹고 흘리는 수은의 눈물,
눈물 방울
절벽 같은 천둥번개 같은
□ 2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달의 엉덩이가 丘陵에 걸리고
너도밤나무 숲 속 위의 하늘에도 그리운
물고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자주 발견된다
아내의 지느러미는 여전히 매끄럽고 그동안
낳은 딸들은 낙엽 밑에 잠들어 있으리 내 아내는
여전히 낮엔 박쥐들을 재우고
밤엔 붉고 검은 땅에 엎드려 알을 낳으리
아내의 삶에 약간의 이끼가 낀 것이
변화의 전부이다 내 앞가슴의
거추장스러운 의문의 단추들이 툭툭 떨어진다
□ 3
나는 밤에 도착한다 지난
여름의 장마로 끊긴 다리의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눈치빠른 새앙쥐들 낯선 침입자를
힐끗거리고 무심한 아내는 자전거만 타고 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흰 종아리가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을 때마다
스커트자락 밑으로 아름답게 드러나곤 한다 아아
너무 늦게 돌아왔구나 내 경솔함 때문에
빠르게 날이 어두워진다 그동안 아내의
입덧은 얼마나 심하였던가 유실수의
성한 열매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최후의 市場에서 인신매매업으로 치부를 할 때
아내는 날개 달린 다람쥐처럼 날아다녔었다
너도밤나무과의 북가시나무 숲 속 위로 열린 하늘엔
죽은 사람의 장례가 나가고 바람을 방목하는
언덕의 숲 속에서 누가 지느러미도 달리지 않은
사람의 아들을 낳는다 그림처럼 누운 아내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기도 전 아내는 힘없이 부서져 내린다
그리움은 그렇게 컸구나
머릿속의 우글거리는 딱정벌레들을 한 마리씩 풀어 주어
내 머릿속은 빈 병실 같다 彼岸橋를 건너서
내일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시 最後의 市場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그리운 나라, 평민사, 1984>
묘지
설정식
새로운 나무토막 碑들이
눈에 밟히는
기척 없는 시월 한낮
멀건 어느 이야기 속 땅 같은 이곳에서
스스로의 숨소리를 두려워할 즈음
여기
하얀 소나무 관 내음새 풍긴다
<鐘, 백양사, 1947>
별
김수복
별들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잠든 집을 빠져나와 뒷산 자작나무 위로
올라가 싸우는 별들의 나라를 쳐다보았습니다 별들은 제각기 깊은 마
음 속 빛나는 칼들을 뽑아 들고 잠든 숲 속의 하늘 위에서 싸우고 있
었습니다
오늘밤 10월의 자작나무 위에서 훔쳐보는 별들의 전쟁이 전쟁이 아니
라 평화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별들은 작은 칼을 들고 서로의 가슴
과 가슴을 열어보이며 무리지어 빛나면서 지상의 전쟁을 내려보고 있
었습니다
나무 아래를 굽어 보니 불 꺼진 마을이 자꾸만 산 아래로 밀려가고
나무는 하늘 속으로 커올랐습니다 커오르는 나무를 옮겨 다니며 별들
이 품고 있는 작은 칼들이 노래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를 기다리며, 민음사, 1988>
北方 10 月
유치환
이곳 시월은 벌써 죽음의 계절의 시초리뇨
까마귀는 城귀에 모여들 근심하고
다시 天日도 볼 수 없는 한 장 납빛 하늘은
황막한 광야를 철책인 양 눌러 막아
아아 북방 이 거대한 鬱暗의 의지는
娼婦인 양 허무를 안고 나누었나니
내 스스로 여기에다 버리려는 고독한 사유도
이렇게 적고 찾을 길 없음이여
호을로 허물어진 城터에 서건대
삭풍에 남은 高梁대만
갈 데 없는 감정인 양 못 견디어 울고
한떼 騎馬의 흙빛 병정 있어
인력이 아닌 듯
묵묵히 서쪽 벌 끝으로 향하여 달려가도다
<생명의 서, 행문사, 1947>
산에서 배우다
10월 일기
이기철
어제는 온돌에서 자고 오늘은 寒氣의 산을 오르다
잎새들이 비워 놓은 길이 너무 넓어
내 몸이 더욱 작아진다
내 신발 소리에도 자주 놀라는 산 길에선
내 마음의 주인이 이미 내가 아니다
10월의 포만한 얼굴에서 나는 연민을 읽지 않는다
누가 다 떼어 갔는지 산의 이불인 초록이 없다
慈藏이면 이곳에 지팡이를 꽂고
대웅전 주춧돌을 놓았으리라
그러나 범연한 눈으로는
햇볕 아래 서까래를 걸 데가 없다
경전의 글자가 흐려서 책장을 덮는 밤에는
스스로 예지를 밝히는 저녁별이 스승이다
겨울을 예감한 나뭇잎들이 나보다 먼저
뿌리 쪽으로 떨어져 내린다
나는 돌을 차며 비로서 산의 無言을
채찍으로 배운다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石榴
정지용
장미꽃처럼 곱게 피어가는 화로에 숯불,
입춘 때 밤은 마른 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개어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여릿여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銀실, 銀실,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 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十月
황동규
□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夕陽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旅程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木琴소리 木琴소리.
□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 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 4
아늬,
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四面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石燈 곁에
밤 물소리.
□ 5
낡은 丹靑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 와서……절 뒷울안
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
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하는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鄕愁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어떤 개인날, 중앙문화사, 1961>
十月의 비 1
정공채
□ 1
날라리 세상에 비가 내린다
그 十月에 찬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늦비가 늦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반갑잖은 찬비에 시월 늦게 찬비다
제기럴, 내리는 비 아무 때면 어떠랴
내려라 내릴 바엔 줄기차게 내려라
세상만사 뜻대로 될 때가 있더냐
내리는 비 어쩌랴 내릴 때면 내려라,
□ 2
날라리 세상에 망둥이가 제 格이다
빗줄기를 가로질러 흙탕물이나 퉁겨라
옷 한번 마음잡고 입고 나선 늦은 철에
通卽道라 어줍잖은 대갈통이 달린다
계집끼고 잘살면 그만이더냐.
□ 3
시골집은 잔잔하게 누웠는다 엎드련다
山川은 조요론데 시월 늦비 내리고
이 세상일 무엔가 아무 생각 없어라
숲을 지나 빠져나온 잔별들이 쏟아져서
시들 무렵 그 풀밭에 남모르게 박혀든다
찬비야 十月 늦비야 쓰린 울음 어쩌랴
愁心도 잔별같아서 너도 나도 소리 없다.
□ 4
도시에 거리에 늦비가 흩뿌린다
자꾸자꾸 내리는 비 시월이 제철인가
날라리 세상이라고 제멋대로 내리긴가
離婚女도 마다하는 비 이리 퉁기고 저리 퉁겨져서
肢體마저 조여들어 다시 옷을 입으랴.
□ 5
여보쇼 잘산다고 문을 꽉 잠그기뇨
마소 마소 그럴랴면 자물쇠도 잠그고랴
사람이 제 언제 잘 산다고 오는 비도 막으리야
시월도 늦旬 비가 내려 온 세상을 적시는데
발가벗고 나지 않은 사람 그 어디메 있으메랴
아리랑 아리랑 잔별 打令이요.
□ 6
시월도 찬비야 그저 내려라
날라리도 마음 가고 마음 오는 세상이다
鍾소리야 제 얼굴 하나 잘 씻으면 무얼 하노
흘러가는 바람도 虛無롭고 虛無하다
잔별도 풀밭을 잃고 내릴 길이 없구랴
刑獄도 마다하는 비 잘도 내리는구나
<사람소리, 1989>
十月의 少女
전봉건
十月의
少女는
사과 속에
숨어 있다.
순이는 달음박질 쳐 가서 숨었고
은하는 사뿐히 걸어가서 숨었다.
선화는 어물어물 새도 몰래 숨었고
춘하는 花甁 곁에 잠자다가 숨었다.
저 사과나무 밭의 울타리
저 가시 돋친 쇠사슬을 넘어서
저 무서운 銃알이 오고 가던
저 사과나무 가지에 오늘 奇蹟 같은 안으로.
―그럼
사과나무 밭으로 가 볼까나.
(제일 빛나게 익은 큰 것을 먹어야지)
내가 사랑하는 少女가 숨은 사과.
한 입 깨물면
나의 少女는 꽃다발 되어 뛰쳐나올 거다.
새까만 사과 씨는 寶石처럼
굴러서 大地에 숨을 거다.
十月의
少女는
사과 속에
숨어 있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신구문화사, 1963>
어떤 伽倻山
홍신선
시월 중순
쉬임없이 등 밟힌 질경이들
관광객들에게
예사롭게 부서진 등 내보이며 웃는다.
藏經閣 板木의 經은 보이지 않고
삭아서 시간이 되어
뚜껑 없는 千間 공간을
이곳에
비워 놓았다
소낙비처럼 날리는 느릅나뭇잎들이 덮고 있다.
혼자서 살아 왔던 일
出勤簿 작은 칸을 해진 살 기워 가며
비집고 다니던 일
오르고 내려가며
새삼 다시 만나서
손 잡고 어깨 안고
이 절 밖에
더러는 지는 잎들의 뒷모습으로 앉아 있기도
더러는
마음 위에 예리한 발소리 그으며
덮고 다니기도…….
가슴 안에 가득히 울린다.
한 획 한 획 새겨놓은 축소된 일생이
나이 들어 큰 손 속에 덮어둔
꿈들이
보이지 않고 읽혀지지 않을 때
눈 비벼 바라보리라,
기댈 것 없는 누가
시력 안 좋은 누가
무료하게 글자 없는 공간을 더듬어 읽던
더듬대던 소리가
더 힘있게 청명한 날씨로
그쳐 있는 것을.
어느 길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 닿게 하고 아직 자기에
이르지 못한 것들로 하여금 우왕좌왕 몸놀려 숨게 하고
어느 길은 피해 가서 등성이로만 올라가 섰고
그 위의 殘光들, 체격 좋은 장정들은
둘러서서 메고 있다,
이 공간에
쉬임없이 침묵으로 와서 부서지고
뒹구는 죽음을
죽음 아닌 더운 삶을.
어떤 伽倻山.
<우리 이웃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984>
律 3
立冬
임보
洗耳泉 오르는
牛耳洞 골짝
시끄럽게
시끄럽게
오리나무 숲,
十月 첫서리
피 진달래
산까치
산까치
뚫린 하늘.
<목마일기, 동천사, 1987>
저무는 10月 뜰에
홍윤숙
저무는 10月 뜰에
장미는 아직 붉고
담쟁이는 물들고 벽을 덮었다
사랑은 이미
立秋의 언덕길을 저 혼자 돌아가고
추억을 줍는 금빛 落日은
마지막 창을 닫으며 일어선다
바람은 금잔화 누른 잎에
잠이 들고
悲哀도 그 곁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이제 곧 눈부신 겨울이
하얀 크레용을
작은 窓마다 문지르고
잠자던 바람이
전나무 가지 끝에
咆哮할 것이다
장미의 목은 부러지고
추억은 흙 속에 묻힐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아무도
軟綠의 숲길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제, 1978>
철새
황동규
고통, 덜 차가운 슬픔
원고의 번역을 밤새 따라다니는
합창 같은 자유
모든 나무의 線 그 흔들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이 시월
無事無事의 이 침묵
아침, 거품 물고 도망하는 옆집 개소리
하늘을 들여다보면
무슨 符號처럼
떠나는 새들
자 떠나자
무서운 複數로 떼지어 말없이
이 地上의 모든 濕地
모든 기억이 캄캄한 곳으로
기억이 캄캄한 곳
야만스레 입벌린 태양
그 입 속으로 입 속으로
날아드는 형제들
모래 위에 깃 무수히 남기고
피 한방울 없이
一族이 물구나무서 우는 곳으로
물구나무선 우리들
이 시월
눈 비비고 놀라 다시
들여다보는
들여다보는 하늘에 나타나는 符號
새들이 떠나고 있다.
<평균율 2, 현대문학사, 1972>
秋果三題
신석정
□ 1.밤
명랑한 이 가을 고요한 석양에
저 밤나무숲으로 나아가지 않으렵니까?
숲속엔 낙엽의 구으는 餘韻이 맑고
투욱 툭 여문 밤알이 무심히 떨어지노니
언덕에 밤알이 고이 져 안기우듯이
저 숲에 우리의 조그만 이야기도 간직하고
때가 먼 항해를 하여오는 날 속삭이기 위한
아름다운 과거를 남기지 않으려니?
□ 2.감
하―얀 감꽃 뀌미뀌미 뀌이던 것은
오월이란 시절이 남기고 간 빛나는 이야기거니
물밀듯 다가오는 따뜻한 이 가을에
붉은 감빛 유달리 짙어만지네
오늘은 저 감을 또옥 똑 따며 푸른 하늘 밑에서 살고 싶어라
감은 푸른 하늘 밑에서 사는 붉은 열매이어니
시월의 바닷가에 찍히는 물새떼의 어지러운 발자국,
얼마나 하염 없는 것인가.
유리창에 와 꺾어지는 저 한 자락 햇빛에도
죽음의 기미는 숨어 있다.
시월의 식은 해가 지고
자꾸 죽음을 말하던 젊은 친구가 죽는다.
제목 없는 한낮의 짧은 꿈 위로
몇 날은 또 덧없는 그림자를 던지고,
서역의 모래바람 속을 가는 낙타들의 짐이 무거워진다.
낙타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후생이 무거워진다.
길을 잃고, 또 길을 찾는 것은
산 자의 할 일.
그들이 당도할 마을에서 먹는 국밥이 따뜻하기를,
그 마을에서 자는 잠이 편안하기를.
□ 2
시월에 길은 있고, 또 길은 없다.
금생은 미혹이다, 미혹의 삶을 허물어
길을 만든다. 길은 어둠 속에서 수천 갈래의 길이 된다.
허공에서 우는 봉두난발의 한 넋이 있어
이천년 후에나 올 애인을 기다리며
흙이 되어, 바람이 되어, 강물이 되어
길을 헤매이리라.
낮게 웅크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대가 남긴 것은
무르팍에 몇 개의 아문 흉터,
부디 다음 생에서는 만나지 말자.
더 이상 덧날 상처는 만들지 말자.
흐르는 물 위에 쓴 편지를
몇 겁 뒤에 읽을 애인이여,
나는 벌써 끊은 한 모금의 담배를 빨고,
남은 생을 주저 없이 어둠 속에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