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산이 풍부하고 천혜의 지형이 지켜주고 있는 촉(蜀) 땅에서 번영하던 성 왕조는 30년에 걸쳐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태평성대의 꿈을 깨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다.
후계자 문제.
성의 황제 이웅(李雄)은 황후에게 자식을 얻지 못했다. 후궁의 소생으로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웅은 이렇게 여러 아들들은 내버려둔 채 형인 이탕(李蕩)의 아들 이반(李班)을 총애하여 태자로 삼았다. 이탕은 성의 건국 과정에서 전사하였는데, 이웅은 적통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탕의 아들을 차기 황제로 점찍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후에게 이반을 아들로 삼아 기르게 하였다.
이반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다른 여러가지 미덕들은 제쳐두고서라도, 이반은 효성 하나만은 정말 특출났던 것 같다. 334년 6월, 이웅이 머리에 부스럼이 나고 고름이 흐르는 병에 걸렸다. 여러 아들들은 모두 더럽다고 생각하여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 친자식도 아닌 이반은 밤낮으로 시중을 들면서 고름까지 입으로 빨아냈다고 한다. 이런 간호의 보람도 없이 이웅은 정묘일(25일)에 세상을 떠나고 태자 이반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반은 명망이 높았던 종실왕인 건녕왕(建寧王) 이수(李壽)에게 모든 정사를 맡기고 자신은 궁중에서 상례만 치렀다고 한다.
황제가 사망하였으니, 각지에 흩어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여러 아들들이 속속 성도로 귀환하였다. 이들 가운데 이월(李越), 이기(李期) 등은 이반이 자신들의 친형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모반할 것을 모의하였다. 결국 10월 초하루에 이반과 그의 일족을 참살하고 이기가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당시 정사를 전담하고 있던 이수는 이 쿠데타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에도 한왕(漢王)으로 이봉되고 대도독(大都督)의 직책까지 덧붙여 주었다고 하니 적어도 반대를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이수는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모함을 받았으나 이때에도 이기는 참소를 허락하지 않고, 이수를 양주(梁州)의 자사로 삼고 부(涪 : 사천성 금양시)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기는 정책에 일관성이 없고 상벌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점차 쇠퇴해 갔다. 또한 신하들을 죽이고 재산을 갈취하는 일이 잦아서 대신들이 모두 불안해 했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한왕 이수는 본래부터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이기와 이월 등이 그를 위험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이수 자신도 불안함을 느껴 변방의 문제를 핑계로 조회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수는 촉의 재야 명사였던 공장(龔壯)을 찾아가 안전할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공장은 이수에게 반정을 일으켜 성도를 장악하고 진(晉) 왕조의 번신을 자처할 것을 권하였다. 계책의 뒷부분은 조금 꺼림직한 것일지 몰라도, 반정을 일으키도록 하는 계책이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마침내 338년 4월, 이수는 성도를 점령하고 이기를 폐위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계책의 뒷부분이었다. 진 왕조의 밑에 들어갈 것을 권하는 파와 황제에 즉위할 것을 권하는 파가 갈렸다. 이수는 결국 점을 치기로 하였다.
"몇 년은 천자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可數年天子。
황제파(?)는 하루만 해먹어도 충분한데 몇 년이나 해먹을 수 있다고 부추겼고, 항복파(?)는 몇 년 동안 황제노릇 하느니 백 년 동안 제후로 잘 사는 게 더 낫다고 권한다. 결국, 이수의 선택은 다음과 같았다.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夕死可矣。
황제에 즉위한 이수는 국호를 자신의 봉국명인 한(漢)으로 바꿨다. 이 때문에 역사 속에서 이 왕조는 먼저의 국호인 성과 합쳐서 흔히 성한 왕조라고 부른다.
국호까지 바꾸면서 나라를 새롭게 이끄려고 했던 이수는 엉뚱하게도 조(趙)의 석호를 벤치마킹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진 왕조에 포로로 잡혔다가 조로 도망쳐 있던 이굉(李閎) 등이 돌아와 조의 수도 업의 화려함을 자랑(?)하자 이에 마음이 동한 것이다. 또한 이굉 등은 석호가 형벌을 잔인하게 하고 목숨을 빼앗는 방법으로 국가를 통제하여 나라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어이없는 부추김까지 아뢴다. 이수는 이러한 부추김을 그대로 따라 사치스러운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형벌과 사형을 엄하게 집행하였다. 이로 인해 한의 국력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343년에 이수가 죽고 그의 아들 이세(李勢)가 즉위하였다. 이세 역시 이수를 본받아 아첨꾼을 총애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게다가 촉의 산악 지방에서 살던 요족(獠族)이 평지로 이주해 오고 기근이 겹치면서 촉 지역은 점차 황폐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동진의 환온(桓溫)이 한을 멸망시키기 위해 출정하게 된다.
346년 11월 신미일(11일), 환온은 형주에서 촉을 향해 원정을 개시하였다. 이세도 이에 맞서 대군을 동원하여 이복(李福) 등에게 환온을 막게 하였는데, 한의 지휘부는 제장들이 지형을 이용하여 매복·수비하자는 의견을 무시하고 선제 공격을 위해 진격하였다. 반면 촉 땅으로 깊이 진격해온 환온은 결사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3일치의 양식만 가지고 성도를 향해 직진하였다.(347년 3월) 한의 운이 다한 것일까? 환온의 직진 경로와 한군의 반격 경로는 서로 엇갈려 버렸고, 환온은 성도 근방까지 진출하였다. 길이 엇갈린 것을 깨달은 한군은 되돌아오다가 환온군이 성도 근방에 진을 친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여 붕괴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수도인 성도 코앞에까지 적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세는 남은 무리를 모조리 끌어모아 이를 막았다. 전투는 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선봉부대의 참군이 전사하고 환온의 바로 주변까지 화살이 날아와 꽂혔을 정도였다. 이에 환온은 일시 퇴각을 결심하고 퇴각의 북을 울리게 하였는데, 여기서 다시 한 번 한의 운이 다한 것이 증명(?)되었다.
고수(鼓手)가 퇴각의 북을 울린다는 것을 실수하여 진격하는 북을 친 것이다. 이에 동진군은 전체가 진격을 개시하였으며, 이를 놓치지 않고 환온의 장수 원교(袁喬)가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마침내 이세의 마지막 군세는 어이없게 패배하였으며, 동진군은 성도에까지 육박하여 사방에 불을 놓고 성문까지 불태웠다. 이세는 밤을 틈타 성도에서 탈출하였으며, 결국 환온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성한(成漢) 왕조는 5대 44년의 짧은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한을 멸망시킴으로써 명성을 떨친 환온은 마침내 북방을 넘보기 시작한다. 5호16국시대의 분수령이 될 첫번째 북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첫댓글 사천-운남 지역에 근거한 국가들은 무엇보다 국력을 '비축'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런 다음 '상황'에 따라 타 국가를 노려야 하는데 이 수와 이 세 부자는 그 점에서 실패한 듯합니다. 석 호의 방식은 '국력 낭비'의 지름길이건만 지나치게 외식적인 부분에만 신경을 쓴 모양이군요. 여하간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사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에게 두 가지 방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천-운남-청해등의 서부지역으로 후퇴한다. 다른 하나는 본토를 포기하고 대만으로 후퇴한다. 이 중,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사실, 이 선택이 단기적으로는 꼭 실패한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일단 대만은 1949년 기준, 중화민국 전체 공업생산량의 1/3, 전기는 1/4을 쓰는 선진지역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김준수님의 말씀대로 국력비축할 시간적 여건이 없었던게 당시 국민당의 한계였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