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공적(空寂)하다고 설하여도 영원히 적멸하다 고는 설하지 않습니다.
說身空寂,不說畢竟寂滅。
이 몸은 공(空)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늘 백거이(白居易) 다음의 시를 인용합니다. ‘배부르고 따뜻함이나 배고프고 추움은 말할 것이 못되며[飽暖饑寒何足道]’, 그것은 무아입니다. ‘이 몸은 수명이 길거나 짧거나 결국은 허공이 되네[此身長短是虛空]’, 이 신체는 1백 살을 살든 2백 살을 살든 결국은 떠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승의 관점에 치우쳐 있습니다. 도를 얻은 사람이 공을 증득하면 신체가 사망한 뒤에 그는 어디로 갈까요? 열반은 적멸입니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오지 않을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불과 부처님들은 모두 다시 환생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대자대비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승보살은 필경 적멸을 말하지 않고 영원히 적멸하여 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상의 요 몇 단락은 유마거사가 무상ㆍ고ㆍ공ㆍ무아, 이 네 가지 범위를 설한 것입니다.
과거에 범한 죄를 뉘우치도록 설하여도 과거로 들어가 (사로잡히)라고는 설하지 않습니다.
說悔先罪,而不說入於過去。
부처님을 배우는 첫걸음은 과거의 죄업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과거로 들어가지 않을까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을까요? 중국문화로 해석하면 가장 간단한 것은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하루 새로워진다면, 하루하루 새로워지나니, 또 하루 새로워지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잘못을 범했으면 이후부터는 다시 범하지 않습니다. 즉, 안회의 불이과(不二過)입니다. 육조(六祖)대사는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참회(懺悔)를 말하기를 ‘참’은 과거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요 ‘회’는 미래에 영원이 다시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의 경우는 항상 똑같은 잘못을 거듭 범하고 하는 말마다 참회한다고 말하지만, 모두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있습니다. 정말로 대장부의 사람이라면 참회라는 두 글자조차도 말하지 않고 곧 철저하게 고치고 자신에 대해서 조금도 관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도리들은 모두 큰 도리로서, 병으로 인하여 설법하였는데 문수사리보살만이 물을 수 있고 유마거사만이 답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출세간의 보살을 대표하고 한 사람은 재가 부처님을 대표합니다. 우리 여기에 있는 장(章) 학우가 한 편의 문장을 썼는데, 유마거사는 진정으로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한 것이요 진정한 선종의 전통이라고 강력하게 제기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정지정견(正知正見)이며 저는 그를 지지합니다. 이게 바로 불학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유마거사는 병이 난 것을 빌렸는데, 한 사람은 잘 묻고 한 사람은 잘 답합니다. 방금 말했듯이 중생에게 생명이 있으면 곧 병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바로 병태적인 세계요 우리들의 생명은 병태적인 존재입니다. 이 병태를 해탈하면 성취합니다. 그러나 해탈하면 이 병태는 없어져버렸을까요? 있습니다. 해탈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 병태의 생명은 가장 아름다운 생명으로 바뀝니다. 지극히 참되며 지극히 착하며 지극히 아름다워[至真至善至美], 이 세계는 무슨 유감이 없으며 무상ㆍ고ㆍ공ㆍ무아도 없습니다. 바로 석가모니불의 국토입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당신은 인공위성이 고공에서 찍은 이 세계의 사진을 한번 보십시오. 그래야 당신은 비로소 이 세계의 사랑스러움이 타방 불국토보다도 더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아래에서 이 세계가 몹시 더럽다고 느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먼지 찌꺼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포함한 모두는 이 세계의 먼지 찌꺼기입니다. 여기는 정토보다도 더 좋습니다. 깨끗하고 향기로운 일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냄새나는 일면도 있어서 그 특수한 맛이 있습니다.
모든 기타 불교 경전들은 이 세계에 대하여 모두 염세적이고 비관적이어서 인생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봅니다. 화엄경은 그렇지 않아서 주장하기를, 이 우주 온갖 모든 것은 다 지극히 참되며 지극히 선하며 지극히 아름답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오직 한 생각 명심견성 하면 그렇게 되어 당신은 곧 진실한 일면을 보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들이 현재 보는 이 세계의 생로병사ㆍ무상ㆍ고ㆍ공ㆍ무아는 하나의 그림자입니다. 당신은 이런 현상들의 이면이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이란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유마경 중 이 단락에서 그들 두 분은 서로 짜고 연극을 하면서 불법의 지고무상한 철학적 도리를 하나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병의 고통을 미루어 남의 병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어 동정하며,
以己之疾,愍於彼疾。
이것은 부처님을 배우는 정신입니다. 나의 신체가 좋지 않기 때문에 몸이 좋지 않은 다른 사람을 동정합니다. 이 일생에 병이 많고 고통이 많은 사람은 더욱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저 여기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밖으로 많이 나가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부처님을 배우는 여러분 거사들은 돈 좀 내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더러 병원에 가거나 장애아동들을 수용한 곳에 가라고 하면 결코 가려하지 않고 결코 자비롭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병원에서나 혹은 가난하고 고통스런 곳에서 수녀나 신부가 가서 봉사하는 것만 볼 뿐 불교도는 거의 보지 못합니다. 많은 불교도들은 자비의 도리를 누구보다도 많이 얘기하지만 오직 자신에 대해서만이 진짜 자비롭습니다. 인생에서 누가 병의 고통이 없고 고뇌가 없을까요? 만약 자기 눈이 근시인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어 근시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병이 있기 때문에 병자를 많이 돌봐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보듯이 자기에게 병이 있는 사람은 병자를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먼저 자기를 돌봅니다. 나가 제일입니다.
과거세 무수겁(無數劫)을 지나오며 병의 고통이 있었음을 마땅히 알고서 온갖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려고 생각해야 합니다.
當識宿世無數劫苦,當念饒益一切眾生。
자기에게 병이 있기 때문에, 전생에 심은 원인이 좋지 않고 다생루겁(多生累劫)에 병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가련히 여기지 않고 약을 보시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일수록 타생내세(他生來世)에 갈수록 병이 많고 재난이 많습니다. 이 일생에 보시를 많이 하면 타생내세에 수명이 백세 장수하며 병이 없고 고통이 없습니다. 불법은 곳곳마다 인과(因果)입니다. 당신의 이 일생이 줄곧 병(病) 속에 있다면 우선 원인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앞선 원인으로부터 참회하지 않고 병이 났는데도 자기만 더욱 돌본다면, 이 현행(現行)이 또 타생내세의 종자로 변하여 더욱 좋지 않게 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병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병이 많아 두보(杜甫)의 다음의 시에 들어맞습니다. ‘병이 많으니 필요한 것은 오직 약물이라, 미천한 몸이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요[多病所需唯藥物, 微軀此外更何求].’ 그런데 제가 병이 났을 때마다 고명한 사람이 약방을 보내주고 명약 명의가 찾아왔습니다. 아마 자기가 병이 많아 착한 인연을 맺으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남에게 약 주기를 좋아합니다. 당신에게 병이 있으면 내가 약을 주는데, 당신은 저를 호의(好意)로 생각합니까? 호의가 아닙니다. 내생에 병이 있으면 곧 저에게 약을 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고 싶어서입니다. 그렇지요? 역시 장사하는 방법입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 당신이 만약 이와 같이 발심하여 의약을 많이 보시하면, 내생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당신은 이생에서 전환되어 바뀌어서 병이 적고 고뇌가 적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 가운데는 남에게 의약을 기꺼이 보시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남의 보시를 받는 사람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항상 여기서 약을 가져가는데, 몇 가지 약을 먹었는지 자신이 기억도 못합니다. 병이 나면 또 다시 저를 찾아오는데, 저는 몹시 바빠서 당신더러 스스로 약을 가져다 먹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또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야겠지요!
유마거사는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일러줍니다. ‘자기가 왜 병이 났을까? 당신이 과거세의 헤아릴 수 없는 겁의 세월 동안 고통이 누적되어 온 것임을 마땅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은 현재에 마땅히 중생의 고통도 생각하고 온갖 중생을 도와주겠다고 발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입니다. 제가 다시 말하는데, 경전은 바로 계율입니다. 우리는 한 번 대조해봅시다. 그렇게 했습니까? 때로는 학우들이 저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몇 년 전에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말합니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도 그렇게 합니까?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의 뺨을 때리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당신은 왜 영원히 그렇게 발심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첫댓글 "도를 얻은 사람이 공을 증득하면 신체가 사망한 뒤에 그는 어디로 갈까요? 열반은 적멸입니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오지 않을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불과 부처님들은 모두 다시 환생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대자대비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승보살은 필경 적멸을 말하지 않고 영원히 적멸하여 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원행 염불법문도 부처님 대자비의 극치의 방편이다. 일향전념 아미타불()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