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일방 통행로일 수는 없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아시안하이웨이가 본보기로 삼기로 한 고대의 비단길(실크로드)은 동양의 비단과 제지술만 서양으로 전해준 것이 아니었다. 동서간에 다양한 종교와 문화, 상품과 기술이 오고간 왕복 교역로였다. 이에 비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속의 ‘길’은 제국의 수탈을 위한 일방 통행로였다. 일제가 한반도에 놓은 철도와 신작로도 이 로마로 통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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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 재래시장의 활기찬 모습. 호안끼엠 거리의 이 시장은 수도 하노이에서 거래 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김관수 기자 |
한반도 지도에서 서쪽을 지운 채 동쪽만 남북으로 길게 남겨둔 형상을 한 베트남. 탐험대는 지난해 말 중국을 거쳐 아시안하이웨이가 통과할 북부 동당에서 남부 호찌민에 이르는 2,000여㎞를 따라갔다. 베트남전쟁이나 대(對)중국 국경분쟁의 상처는 외견상 찾아볼 수 없었다. 큰 길을 내기 위한 발파음과 관광객들의 행렬은 베트남의 최북단 오지까지 들뜨게 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곳곳에 들어선 서구식 패스트푸드점과 PC방, 교통체증과 매연, 도시 외곽의 신도시 건설과 대규모 토목공사 현장, 슬럼화와 달동네 등의 풍경은 한국이 이미 경험했거나, 겪고 있는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아시안하이웨이의 예정 도로를 따라 동하, 다낭 등의 도시를 거쳐 남쪽으로 갈수록 새로운 길을 내거나 신도시를 짓는 요란한 소리로 우렁찼다.
최남단 호찌민시에 이르자 박자 없는 건설 소음이나 삐걱거리는 기계 소리는 잦아들었다. 그 대신 높이 솟은 고층 빌딩들, 신호체계를 따라 질주하는 차량들, 시민들의 활기찬 표정 등은 패티김과 길옥윤의 ‘서울의 찬가’의 경쾌한 리듬을 떠올렸다. 개혁·개방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궤도에 올랐음을 느꼈다. 세계 최강국을 쫓아낸 민족통일전쟁 혹은 인민해방전쟁을 치른 자긍심은 적어도 거리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호찌민 시내만 둘러보고 베트남을 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호찌민 근교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콩 크팡(23)은 베트남 북서부 고산지대의 소수민족 출신이다. 베트남 인구(약 8천1백50만명)의 87%가량을 차지하는 비엣족을 제외한 50여개 소수민족의 하나인 캉족이다. 그가 2003년 떠나온 고향 뀐 냐이 근처의 마을은 10년 전만 해도 오지였지만 지금은 큰 길이 뚫리면서 교통이 편리해져 도시로 쉽게 나갈 수 있다. 고향 사람들은 전화와 TV, 라디오의 보급 덕분에 대처 생활을 훤히 알고 있다.
콩은 돈을 벌려고 호찌민으로 왔지만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 걱정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콩은 “1995년만 해도 캉족의 인구가 4,000명이 넘었는데 요즘 3,000명가량으로 줄었을 것”이라며 “민족과 언어가 사라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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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고향 사람들이 먹거리를 구하면서 의지해 온 숲은 전쟁에 이은 개발 바람으로 볼썽 사납게 파괴돼 가고 있다. 급격한 산업화는 도시로의 인력 유입을 부채질했고, 대처 생활의 편리함을 널리 알렸다. 너나 할 것 없이 산을 뚫고 새롭게 놓인 넓은 도로를 따라 대처로 나갔다.
베트남 북서부의 소수민족 충차족인 일용직 노동자 뚜 까이(22)도 4년 전 돈을 벌러 호찌민 근교로 왔다. 그의 민족은 1995년에는 1,400명쯤 됐지만 지금은 1,000명도 안 된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뚜의 안내로 탐험대가 충차족의 한 마을에서 만난 촌장 뜨앙 찬(51)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젊은이들을 유혹해 대처로 내몰고 있다”며 “농사는커녕 대를 이을 사람도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 전 개통된 왕복 2차선 도로를 가리키며 “내 아들이 저 길을 따라 떠난 지 2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 저 길을 따라 버스가 올 때마다 이웃의 젊은이들이 바람이 난다”고 걱정했다.
충차족만 존멸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소수민족 오두족은 인구가 100명도 안 된다.
탐험대에게 베트남의 산업화 풍경은 그다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1970년 ‘코리안하이웨이’ 경부고속도로가 놓이고 그 ‘상행선’ 길을 따라 농촌 사람들은 무작정 서울로 왔다. ‘하행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한국이 먼저 겪은 상황을 대입하면 답이 아련히 보이지만 똑 부러지게 제시하기는 어려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왜 소수민족들의 생존 방식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 동·식물의 멸종에 해당하는 사멸의 백척간두에 선 소수민족들에게 산업화와 도시화가 닦아놓은 반듯하고 널찍한 길은 일방 통행로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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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북쪽의 산악지대인 리오카이에서 원주민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다. |
베트남의 오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립된 전원생활을 마냥 낙원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다만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뚫리고 가설된 도로와 통신매체가 이젠 생존을 보장받고 흐트러진 정신을 되찾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왕복 교통로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낭시 중서부의 한 오지에서 만난 주민 응 떠윈(61)은 “1975년 전쟁이 끝난 이후 고엽제 살포 탓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고생하거나 죽은 사람이 여럿 있다”며 의사가 달려와 주기를 기다렸다. 오지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야반도주가 멈추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 대신 새롭게 난 길을 통해 전쟁이 남긴 지뢰를 치우고, 고엽제로 망가진 숲을 되살리고, 질병과 문맹을 다스리고, 조상들이 남긴 무용담과 전설을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마련하는 서비스가 달려오기를 희망했다.
탐험대는 베트남을 떠나면서 이의근 경북도지사 일행이 지난해 봄 이 나라의 초청으로 타이응우엔 지역을 찾아와 새마을운동의 ‘성공 비결’을 전하고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베트남이 산업화를 먼저 겪은 한국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새마을운동의 성과에 못지 않게 일방 통행의 후유증과 부작용에도 귀를 기울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탐험대는 머지 않아 완공될 아시안하이웨이가 특정 국가에 의한 일방 원정길이 되면 곤란하다는 상념에 젖은 채 태국행 여정을 위한 짐을 꾸렸다.
〈호찌민|김판수기자 pansoo@kyunghyang.com〉
월남엔 월남치마가 없다 |
입력: 2006년 01월 11일 17:5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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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는 월남치마도 월남붕어도 없었다. 1960년대 후반~70년대 중반 한국에는 중년 여성들 사이에 ‘월남치마’란 의상이 널리 유행한 적이 있다. 띠를 대신해 허리 부분에 고무줄을 넣었으며, 통이 크고 자락이 발목 부근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였다. 지금도 ‘아줌마’들이 더러 입을 정도로 긴 생명력을 가진 이 치마가 왜 ‘월남’이란 수식어를 달고 다닐까.
‘월남(越南)’은 베트남의 한자어 표기다. 그래서 이 치마가 베트남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탐험대는 베트남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없었다. 인구의 87%를 차지하는 다수민족인 비엣족은 전통의상으로 ‘아오자이’를 즐겨 입으며 이런 모양의 치마는 입지 않았다.
현지 교민 정학수씨(51)는 “이 치마가 한국에서 가장 널리 유행한 시기가 베트남전쟁 당시인 1960~75년과 거의 일치한다”며 “국군이 대거 파병돼 베트남에 대한 관심이 높은 때였으므로 ‘월남’이란 단어가 붙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월남붕어도 마찬가지다. 베트남의 강과 호수에는 이 물고기가 서식하지 않았다. 이 어류의 정식 이름은 ‘블루길’이다. 우리나라는 1969년 일본을 통해 처음 도입해 한강에 방류하면서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월남붕어’란 이름이 붙은 것도 도입 시기가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였고 생김새가 붕어와 비슷하기 때문으로 탐험대는 추정했다.
〈호찌민|김판수기자〉
3. ‘황금의 삼각지대’ |
입력: 2006년 01월 18일 17:4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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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자연경관을 접하게 되면 바위나 나무에 자신의 이름 따위를 새겨 다녀간 흔적을 남기려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절경을 혼자서만 즐기고 독점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의 표현일까? 행여 닳아 없어지기라도 할까봐 예리한 도구로 몹시 깊숙하게 상처를 내놓곤 한다. 폭압 세력들은 깊은 산속 고산족 오지마을에도 상처를 깊숙하게 남겨 놓았다. 빈곤, 마약 중독, 질병, 유력자에 의한 초법적 피지배, 심리적 박탈감 등등. 폭압 집단들은 해발 고도 1,000m가 넘는 곳이 많아 접근조차 힘겨운 이 오지에 무슨 볼 일이 있어 찾아들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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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탐험 몰려든 배낭족들 골든 트라잉앵글로 오지탐험을 가려는 사람들의 정보 수집처인 태국 방콕의 카오산 거리. 세계 각국에서 온 배낭족들로 붐비고 있다. |
오랫동안 ‘황금의 삼각지대’(골든 트라이앵글)로 불리면서 마약 생산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태국·미얀마·라오스의 국경지대. 외견상으로는 산 중의 어느 한 곳에 무릉도원이나 지상낙원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신비감과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탐험대는 지난해 말 태국 북부의 도시 치앙마이에서 자동차로 두어시간쯤 더 북쪽으로 달려 치앙라이란 작은 도시에 닿았다. 그 주변 깊숙한 산속에는 라후족, 아카족, 카렌족, 야오족 등 고산족들이 마을을 이룬 채 흩어져 살고 있었다.
트라이앵글은 세계 제일의 마약 제조창이었다. 아편만 하더라도 1980년대 중반 세계 유통량의 80%를 공급했다. 이같은 오명을 떨쳐내기 위해 이들 세 나라의 정부와 원주민들은 안간힘을 쓰고 있다. 탐험대가 들른 태국쪽 변경에서는 이 나라 정부의 마약퇴치 정책 덕분에 적어도 공식적인 통계상으로는 아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의 경작지가 대부분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라오스나 미얀마쪽의 일부 고산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양귀비가 재배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해발 1,000m 고산족들 힘겨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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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 정부는 이 지역에서 아편이나 모르핀의 원료인 양귀비의 경작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으며, 다른 마약의 생산 및 유통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정부는 트라이앵글 지역에 마약박물관을 세워 마약의 해악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면서 마약 근절 의지를 부각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소수 민족들이 과거의 폭압 세력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 완전 치유에는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릴 듯했다.
이곳의 내력에 정통한 현지 향토사학자 빠 랑막(54)의 말을 빌리면, 이 트라이앵글에 아편과 모르핀의 원료인 양귀비가 상업 목적으로 대규모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초 중국의 홍군에 패한 국민당 소속의 군벌 잔당들이 숨어들어오면서부터다. 미국은 공산 세력의 급속한 확장을 경계해온 냉전 상황에서 이들이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해 양귀비를 재배하고 아편과 헤로인 등의 마약을 제조하는 행위를 사실상 방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어 60년대 초 미얀마의 정부군 장교 출신인 쿤사가 이 지역에 들어와 다수의 소수민족들을 자신의 휘하에 편입하면서 국제적 거래를 위한 대규모 마약 제조에 나서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고 전했다.
쿤사의 세력은 96년 미얀마 정부에 투항하기까지 30여년간 마약 제조와 유통을 기반으로 한 개인 왕국을 세운 채 이 지역을 다스렸다. 당시 미얀마 정부가 이 지역의 게릴라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쿤사의 사조직을 비호하면서 이용해 먹었고 쿤사의 마약 범죄행위에는 눈을 감았다. 미얀마 게릴라들도 이 지역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아편 제조를 위한 양귀비 재배에 나섰는데, 당시 미 CIA는 이에 개입해 얻은 돈으로 60년대 베트남·라오스 등에 주둔하고 있던 자국 군대의 작전 자금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약 산업이 쇠락하면서 태국쪽의 고산족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부 지원을 받아 대체 산업으로 꽃을 재배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트라이앵글의 젖줄인 ‘꼭’강 줄기를 따라 외국인 트레킹 관광객들을 맞으면서 관광산업도 태동하고 있었다. 치앙라이 서쪽의 ‘뜨오락’이란 아카족 마을에서는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멀리 콘도미니엄이나 골프장 건설현장으로 떠나가는 바람에 청년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트라이앵글의 마을에도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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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강의 관광객 트라이앵글의 젖줄인 ‘꼭’ 강에서 원주민들이 외국 여행객들을 상대로 코끼리 관광에 나서고 있다. |
-양귀비 대신 꽃재배로 전환-
주민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마약 중독과 금단 현상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쿤사 조직과 반군 단체 등으로부터 받은 폭행이나 노동력 갈취의 상처가 깊어보였다. 이들 세력은 원주민들을 양귀비 농장으로 내몰아 고된 일을 시켰다. 한 아카족 주민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양귀비 농장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골병을 얻어 죽었다”고 신세타령을 했다. 주민 뜨앙 쁘(50)는 “이곳이 마약 중심지가 되기 이전에는 척박하긴 해도 평화롭고, 순박한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아름다운 땅”이라며 “깊숙한 오지 탓인지 우리가 물리적 폭압에 신음하고 있어도 바깥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원망 섞인 말을 쏟아냈다. 트라이앵글의 마약창은 마약 마피아, 강대국의 패권주의, 냉전 등이 빚어낸 산물이었고 이곳 주민들의 상당수는 그 희생양으로 전락했던 셈이다.
카렌족이 사는 한 마을 어귀에 핀 야생 양귀비 몇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탐험대는 문득 어릴 적 할머니가 양귀비 열매에 흠집을 낸 뒤 하얀 액체가 흘러나오면 이를 받아 말린 다음 가정상비약으로 준비해두곤 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가족들이 배앓이를 할 때마다 “너무 많이 먹으면 아편쟁이가 된다”는 말을 곁들여 이 ‘약’을 끓는 물에 조금씩 타서 먹이곤 했다. 물론 그는 붉은 빛깔의 이 고운 꽃이 돈벌이가 되는 줄을, 머나먼 이곳 트라이앵글의 주민들이 심한 혹사를 당할 정도로 값어치가 있는 줄을 알았을 리가 없다. 일제 치하 한반도에서도 양귀비가 아편과 모르핀 생산을 위해 대규모로 재배됐다지만, 할머니가 가정상비약으로 쓴 양귀비는 트라이앵글의 그것과 같은 심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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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강에서 물고기 낚시를 하고 있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소수민족들. | 트라이앵글의 태국쪽 주민들 가운데 대다수는 자신들이 더 이상 양귀비를 재배하기 이전의 평화로운 원시적인 공동체, 자급자족 시대로 되돌아가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다시 낯선 사람들로부터 폭압적인 지배를 당한다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은 일이다.
탐험대는 태국의 수도 방콕에 있는 유엔 아·태경제사회이사회로부터 구한 ‘아시안하이웨이 통과 예정 코스’ 지도를 꺼내들었다. 예정대로라면 하이웨이가 이 트라이앵글의 중심부를 꿰뚫고 지나게 된다. 오지에 산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불행이 문명사회에 알려지기는커녕 도리어 문명 세상의 침입자로부터 노략질을 당한 사람들. 하이웨이가 이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기 위해 아시아인의 양심을 모아 전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탐험대는 기원했다.
〈방콕|김판수기자 pansoo@kyunghyang.com〉 |
6. 아프가니스탄 |
입력: 2006년 02월 15일 17:3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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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은 재건 중이다. 비록 총성은 멎지 않았지만 새 도로가 뚫리고, 병원과 학교가 들어서고 있다. 그들도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시안 하이웨이의 주요 구간인 카불~칸다하르 구간(450㎞)은 지난해 말 완공됐다. 왕복 2차선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고속도로처럼 시원스럽다. 현지인들은 일본이 놓은 도로라고 했지만 유엔의 자료에는 미국이 2억5백만달러를 들여 포장한 곳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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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가즈니 고속도로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칸다하르의 관문 가즈니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시원스레 뚫린 이 도로는 미국의 원조로 완성됐다. | 고속도로가 놓인 이 일대는 해발 2,000m 안팎의 고원. 몽골초원처럼 차로 달릴 수도 있을 텐데 왜 서둘러 도로까지 놓았을까? 전쟁통에 지뢰를 많이 뿌려 사람도 차량도 발을 들여놓기 힘든 곳이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은 미국정부가 전쟁물자를 더 수월하게 수송하기 위해 도로를 새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다.
재건 작업은 거의 100% 외국의 원조로 이뤄지고 있다. 하기야 27년 가까운 전쟁으로 국토 전체가 파괴됐으니 복구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카불은 물론 근교에서도 공장 하나 볼 수 없었고, 현지에서 생산되는 것은 포도와 호두 등 농산품과 양, 염소 등 육류가 전부다. 유엔의 자료에는 1차 산업이 70%, 2차 산업과 3차 산업이 각 15% 정도로 나와있지만 2차 산업이라는 것도 카펫 공장이나 모자공장 등 수공업 수준이다.
그래서 전쟁 후 2002년 도쿄에 모인 세계 각국 정상들은 아프간에 45억달러를 지원하기로 했으며 한국도 2006년까지 4천5백만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한국의 경우 이라크 전쟁경비 부담을 제외하면 사상 최대 원조사업 규모다. 카불시내에 이브시나 병원을 건립했으며 직업훈련원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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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설사가 짓고 있는 연수원 한국 삼미건설이 세우고 있는 아프간 카불의 공무원연수원. 아프간 현지엔 간단한 목공 기술을 가진 이도 없어 터키에서 노동자를 데려오는 실정이다. | 현재 이스탈리프에 수력발전소를 세우고 있고, 공무원 훈련원도 건축 중이다. 직업훈련원의 경우 자동차, 의상디자인, 컴퓨터, 전기 등 모두 6개 과목에 각 30명씩 180명이 연수 중이었다. 현지에 파견된 한국인 자문단 6명. 대단한 기술이 아니라 초보적인 기술을 전수하는 게 고작이다. 이정훈 수석자문관(52)은 “아프간은 전기나 배관 같은 기초적인 기술조차 없는 나라”라며 “아프간의 산업발전을 위해서는 기능인력이 절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원조 사업장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카불 공무원연수원 건설사업장의 문병훈씨(41)는 현장에 미사일이 떨어진 적도 있을 정도로 불안한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술집하나 없는 아프간에서 스트레스를 풀 곳조차 마땅치 않다. 2004년 10월 13년을 사귄 애인과 결혼했다는 김정규씨(31)는 결혼 2주 만에 다시 돌아와 근무하고 있는데 일을 마치고 혼자 숙소로 들어갈 때 가족들이 가장 보고싶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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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연수 받는 현지인들 한국의 원조로 세워진 직업훈련원. 전기·자동차·컴퓨터·의상 등 모두 6개 과목에 180명이 기술연수를 받고 있다 |
아프간 재건의 또 다른 축은 세계각국의 NGO다. 아프간에서 만난 외국인들은 대개 세 부류다. 외국군인, 원조기관 종사자, NGO 활동가다. 현재 300개 현지인 NGO와 세계각국에서 모인 180개의 국제 NGO가 활동 중이다. 171명이나 되는 한국 NGO의 활동도 활발하다.
요즘 아프간에선 한국을 본받자는 운동이 퍼져나오고 있다. 6·25라는 끔찍한 전쟁을 겪었지만 불과 50년 만에 세계 10위의 무역국으로 일어선 한국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영방 주 아프간 한국대사는 “미국과 유럽, 일본이 200년에 걸쳐 이룬 부를 한국이 불과 50년 만에 압축성장을 했다는 것이 아프간 사람들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며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증오심이 덜한 아시아국가에 대한 호기심도 들어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산업현장을 둘러보고 온 일부 관리들은 처음엔 한국의 생활수준을 인근의 파키스탄 정도로 생각했다가 막상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깜짝 놀란다고 했다. 이들의 한국방문 경험담이 현지 TV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일반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현지 외국 NGO 사이에서도 한국에 대한 평가는 좋다. 미국에 본부를 둔 월드비전이란 구호단체가 원조한 나라 중 유일하게 원조 대상국에서 원조국으로 성장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휴전보다 익숙한 아프간. 그들이 다시 일어서야 아시안 하이웨이도 뚫릴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글·사진 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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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서 맹활약 한국인 NGO |
입력: 2006년 02월 15일 17:3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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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네이버스 인터내셔널 오은주씨 | 한국 NGO의 활동도 활발하다. 굿네이버스 인터내셔널(GNI)의 오은주씨(29)는 아프간 여성을 위한 자활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각국 대사관과 NGO, 다국적 치안유지군을 돌며 모금활동을 벌여 지난해 11월 아프간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센터를 만들었다.
여성을 공개처형했던 아프간은 세계 최악의 여성인권국가. 독일 TV와 여성인권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는 이유로 아프간의 한 여성은 어느날 갑자기 실종돼 감금됐으며, 여성 비디오자키 1명은 살해됐다. 이런 아프간에서 TV에 출연, 여성센터를 만든 그는 테러의 타깃이 돼 아프간 체재 2년반 동안 시장 한 번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다.
“여성이란 이유로 사람 대접을 못받는 곳이 아프간입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구타하는 게 정당화되거든요. 거창하게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여자도 똑같은 인간이며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아프간 정부 교육부로부터 2년간 무상임대한 땅에 세미나실, 사진관, 영화관, 카페, 컴퓨터실 등 8개 룸을 갖춘 여성센터는 문서작성, 영어 등 간단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외국기관에서 일할 여성들이 턱없이 부족한 아프간에서 여성들도 사회활동을 하며 사회인으로 당당히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그녀는 NGO로 일했다. UC버클리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제3세계국가에 문화·기술을 전해주는 NGO SFIP의 샌프란시스코 책임자로 일하다 9·11 테러 이후 유난히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미국내 아프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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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아프리카 윤주홍씨 | ‘서브 아프리카’라는 다국적 NGO(현지에서 ‘세종대왕’으로 불린다)의 윤주홍씨(43)는 세계 각국의 NGO들이 인정하는 활동가다. 파키스탄과의 국경도시 잘랄라바드에 사는 그는 1999년에 아프간에 왔다. 탈레반 정권이 장악한 후에도 외국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아프간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현지인에게 소를 빌려준 뒤 새끼를 낳으면 소 한마리만 돌려받는 사업을 했고, 지금은 파샤이족을 위한 문자와 사전을 만들고 있다. 파샤이족 문자는 그의 노력으로 세계 언어학회에 공식등록 될 예정이다.
“집앞에 지뢰가 설치되기도 했고, 로켓포가 마당에 떨어진 적도 있죠. 우리 아이들을 향해 침을 뱉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내는 돌에 맞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친구가 됐어요.”
미군의 정보에 따르면 탈레반의 테러 대상 주요 인물이라는 그는 지금은 현지인들이 오히려 보호를 해주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
〈최병준기자〉 |
4. 인도…‘IT 大國’물류혁명 |
입력: 2006년 01월 25일 17:4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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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잡한 거리 델리의 자마마스지드 사원앞거리. 릭셔와 자전거, 자동차가 함께 몰리는 거리의 모습에서 역동하는 인도 경제의 힘을 느낄 수 있다. | 세상이 발전하는 속도는 길을 보면 안다. 지금 인도에선 아시안 하이웨이는 물론 인도의 주요 도시인 콜카타와 델리, 뭄바이, 첸라이를 잇는 5,846㎞의 링로드(순환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인도 사람들은 이 도로가 완성될 경우 인도의 주요 도시와 산업도시들이 하나로 연결돼 물류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도로가 완성되면 다시 한 번 인도 경제가 도약할 것이란 얘기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고속성장을 이루었던 우리와 비슷하다.
아시안 하이웨이는 베트남과 태국, 미얀마를 지나 인도에 들어오게 된다. 인도의 A1구간은 국경도시 모레~임파르~코히마~나가온~조라바트~실롱~다키반가온~콜카타~바리~칸푸르~아그라~뉴델리~아타리로 넘어간다. 전체 구간은 2,648㎞.
#거리엔 현대등 한국車 씽씽
불과 7~8년 전만 해도 고속도로는 엉망이었다. 수도 뉴델리도 마찬가지. 말만 고속도로이지 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길이었다. 게다가 화물차, 자동차, 자전거, 낙타까지 뒤엉켜서 달리거나 중앙분리대에 쇠똥을 말리는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핵무기를 보유한 강국인지조차 의심스러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아직까지 고속도로에 낙타가 다니고, 공사가 한창인 구간도 있지만 잘 포장된 도로엔 수출용 화물을 실은 트레일러가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유난히 한국 차가 많다는 점. 현대에서 나온 산트로(아토즈), 액센트(베르나)가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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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의 국민차가 타타이지만 지금 가장 많이 타는 차는 산트로다. 산트로의 연간 생산량은 20만대나 되며 현대 자동차의 시장 점유율은 20%를 넘는다.
도로변 공사장에는 굴착기와 크레인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특히 뉴델리의 경우 공항 옆에는 신도시가 한창 건설 중이었고, 한국의 도로공사격인 NHAI(National Highway Authority of India)는 신도시 옆에 다시 새 고속도로도 만들고 있었다. 언제 완공될지 공사관계자에게 물었더니 인도인들도 정확한 완공시기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재정능력에 따라 공사가 진척되기도 하고, 중단되기도 한단다. 하지만 늦어도 2~3년 내에는 발전된 인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델리 시내에도 지하철 공사가 한창. 현재 지하철 2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2년 뒤에는 공사 중인 7호선까지 개통된다. 현지인들은 삼성·현대 같은 한국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인도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정보기술(IT) 산업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도가 세계적인 IT 강국으로 떠오른 것은 불과 10년 사이다. 지난해 IT 부분 수출액은 1백73억달러. 고용인원은 90만명이나 됐다. 특히 소프트웨어 수출은 미국에 이어 2위이다. 지난해 인도를 방문한 빌게이츠 MS 회장은 4년 동안 17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인텔은 5년 동안 10억달러, 시스코스시스템스 11억달러, 셈인디아는 30억달러 투자계획을 밝힌 상태다. 실리콘 밸리 해외 연구진 중 30%는 인도인이라고 한다. 해외자본의 투자액이 2003년 42억달러, 2004년 53억달러에 달했다. 도이체 방크는 2020년이면 인도가 세계 3대 경제강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최고직업
인도인들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을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18개의 언어와 800여개의 방언이 쓰이는 나라이다보니 힌디어와 영어는 공용.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힌두어를 쓰지만 3학년 이상이면 대부분의 교과가 영어로 진행된다. 초등학교만 나와도 영어로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이며 어학 실력이 갖춰져 있는 것도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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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르탄 인근 수메르 마을 입구. 불과 수년 전만해도 흙길이었던 이곳에 새 도로가 뚫렸다. |
인도의 교육열을 확인하기 위해 델리의 학교를 찾았다. 델리에서 중산층 아이들이 다니는 뉴델리의 성마가렛 학교는 가톨릭계 학교이지만 힌두교도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지인 교사 아니카 차오란(35)은 교육프로그램만 좋다면 지금은 종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학비는 1년에 우리돈으로 2백만원 정도. 이곳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들은 상위 20%에 속하며 연 소득이 2만달러 이상이라고 한다. 하루 10달러도 못버는 빈곤층도 5억명을 헤아리는 인도지만 이런 중산층도 약 3억명에 달한다. 중학교 1학년 커쉬시 셀마(13)는 “수학과 과학을 잘해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며 “컴퓨터 엔지니어는 인도에서 가장 유망한 직업”이라고 했다. 우리가 판·검사나 의사를 꿈꾸듯이 인도인들은 컴퓨터 엔지니어가 소망이다. 이 때문에 컴퓨터는 과외 수업을 따로 받을 정도. 집집마다 LAN이 깔려 있지 않아 인근의 인터넷 카페를 이용한다. 숙제나 공부하기 위해 인터넷 카페를 찾기도 한다. 아버지가 엔지니어인 초등학교 4학년 바이밥(10)은 1주일에 2차례 정도 인터넷 카페를 찾으며 컴퓨터 과외도 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했다.
#美대학 유학생 8만 세계최다
중산층 학교뿐 아니라 극빈층도 교육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올드델리에 있는 아쉴람은 인도 자인교가 운영하는 일종의 고아원. 103년 역사를 지닌 곳으로 100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부모가 생존해있지만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극빈층 자녀들도 이곳을 찾는다. 비록 시설은 허름하지만 아이들의 의욕은 대단하다. 신분의 틀이 아직 강하기는 하지만 컴퓨터 전문가가 되면 카스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해외로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에서는 구걸을 하면서 사는 게 오히려 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을 받게 되면 가난에서 탈피할 수가 있지요. 그게 아쉴람의 교육 목표입니다.” 전직 교사인 자원봉사자 마두 베제르(50)는 극빈층의 의식도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교육열은 유학생 증가수치만 봐도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올해 미국 대학에 등록한 인도 학생은 8만명으로 외국 유학생 중 가장 많다. 중국은 6만2천명, 한국은 5만3천명, 일본은 4만2천명이다.
인도가 웅비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급속히 떠오르고 있는 한국, 세계의 공장 중국, IT 선진국으로 떠오른 인도. 아시아의 주요 도시를 잇게 될 하이웨이는 아시아의 물류지도를 바꿔놓을 게 분명하다.
〈인도|글·사진 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세계명문 부상 인도공과대학 |
입력: 2006년 01월 25일 17:4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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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사드 IIT 사무처장 | 마이크로 소프트(MS), 인텔, 제너럴 일렉트릭(GE), 필립스, 노키아…. 이런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졸업생 스카우트를 위해 눈독을 들이는 대학이 바로 인도공과대학(IIT·India Institute of Technology)이다. 영국의 더 타임스가 발표한 세계 공과대학 순위에 따르면 IIT는 MIT, UC버클리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델리의 IIT를 찾았을 때는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학교란 자부심 때문인지 외부인들은 철저하게 통제됐다. 캠퍼스 사진 촬영도 허가를 받아야 할 정도. 교실은 아예 촬영이 불가능했다. 10여번의 요청 끝에 어렵게 수랜드르 프라사드 IIT 사무처장을 만났다. 그는 “인도 전역에서 가장 많은 수재들이 몰려드는 대학”이라고 설명했다. 경쟁률이 수십, 수백 대 1에 달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라사드 사무처장은 IIT가 단숨에 명문이 된 것은 아니라고 말문을 열었다. 1951년 네루 총리가 MIT를 모델로 삼아 IIT를 만들었을 때부터 장기 비전을 가지고 투자를 해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MIT 등 세계적인 대학과의 끊임 없는 교류를 통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왔다. 교수와 학생 비율은 10 대 1. 수업은 철저하게 토론 위주로 진행된다. 교수가 수업, 시험, 논문 등 모든 권한을 가지고 평가를 하며, 산업체와 연계한 프로젝트를 하면서 현장감각을 늘리는 것도 장점이다. 정부의 지원도 전폭적이다. 예산의 75%는 정부에서 지원한다. 정부 지원금만 1년에 2천5백만 US달러에 달한다. MS나 인텔 같은 대기업에서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경우도 많다. 삼성 로고가 보이는 것을 보면 삼성 같은 기업들도 지원을 하는 게 분명하다.
이런 철저한 교육 덕분에 IIT 졸업장은 학생들에겐 ‘출세 증명서’나 다름없다. IIT를 졸업할 경우 일자리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세계적인 대기업이 잇달아 러브콜을 보내기 때문이다.
선마이크로 시스템의 비뇨트 호슬러, 임스리스의 나냐모티를 비롯해 파타붓티 출판사 사장, 매킨지 컨설턴트의 CEO도 IIT 출신이다. 프라사드 처장은 “한국 유학생도 있지만 언어 문제 등 어려움 때문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한국도 IT 강국인 것으로 안다는 그는 “지금도 세계적인 대학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앞으로 수년 내에 세계 최고의 대학이 될 것을 확신한다”한다고 했다. 앞으로는 하드웨어에서도 한국을 잡고 세계 최강이 될 것이란 자신감을 나타냈다.
〈최병준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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