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이 걸어온 길
올해는 제주 4‧3(이하 4‧3) 75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4‧3은 지나온 세월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억눌리고 숨겨진 채 극심한 트라우마와 연좌제 등을 겪으며 목소리 없는 자처럼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4‧3은 해녀가 숨비소리를 내뱉듯 가쁜 숨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99년과 2000년을 거치며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4‧3특별법)이 제정 및 시행되었으며, 2003년엔 정부 공식 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발간과 대통령의 사과가 이루어졌다. 2005년에는 제주가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고, 2008년에는 ‘제주4‧3평화재단’이 설립되었다. 2014년에 이르러선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특별자치도재향경우회’가 화해를 선언했으며, ‘4‧3추념일’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4‧3 관련 연구도 진전해 왔다. 4‧3을 주제로 한 연구물이 매년 사학, 정치학, 사회학, 행정학, 교육학, 문헌정보학, 문학, 심리학 등 여러 분야와 국내외 다양한 학교, 기관에서 생산되고 있다. 그간 축적된 증언과 기록물들도 국내에서 활용되는 것을 넘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시도하고 있다.
1948년 이후 75년, 1987년 이후 36년.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잠수당해온 이들이 쏟아낸 증언이 모여, 사회의 인식이 달라지게 만들고 교과서의 서술을 바꾸어 놓았다. 민중과 군경, 서북청년회(이하, 서청) 등 평범한 사람들 또는 지시를 받던 이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여 힘없던 이들이나 민간인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던 관점에서 나아가, 미군정, 이승만 정권, 남로당 지도부 등의 역할을 재조명하며 정말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여전히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아가고 있다.
2003년 10월 31일, 제주라마다호텔에서 열린 제주도민과의 대화 자리에서 공식 사과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출처: 제주4‧3아카이브).
2014년 10월 28일, 제95회 전국체전에서 개회식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경우회장 현창하(좌)와 유족회장 정문현(우)(출처: 제이누리).2)
4‧3을 정의하는 엇갈린 시선
4‧3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들은 4‧3을 부르는 용어3), 인명 피해 규모4), 발발의 원인과 주체 등 여러 요소들에 반영되어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4‧3에 대한 다른 정의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정부의 공식 보고서인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4‧3 정의는 “4‧3특별법”의 정의와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정의 중 하나인데, 아래와 같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강조: 필자)
이것은 이전까지 4‧3을 ‘남로당의 선동’, ‘좌익 세력의 폭동’ 등으로 보던 관점을 벗어난 것으로 기존 입장을 지지하던 이들로부터는 많은 공격을 받았다. 정부 보고서 발표 후 이를 비난하며 발행된 여러 책들 중 저자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하며 집필된 책들이 있는데, 이들은 4‧3을 “제주 인민 반란군 350여 명이 총과 철창과 죽창으로 제주 12개 (경찰) 지서를 기습 공격”5)한 “좌익 (남로당) 세력의 무장 폭동”6)으로 정의하고 있다.
4‧3을 ‘항쟁’ 또는 ‘사건’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발발 원인을 1947년 발발한 3‧1절 기념식 경찰 발포 사건 또는 일제 식민지 말기와 해방 직후 제주 내에 산적해 있던 문제로부터 찾는 반면, 4‧3을 ‘폭동’, ‘반란’ 등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1948년 4월 3일 일어난 무장대의 무장봉기 또는 ‘남로당의 무장봉기 지시’를 4‧3의 원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의 4‧3 연구 현황
국가 권력이 4‧3 담론을 독점하고 있던 1987년 이전은 물론, 정부 보고서가 발행된 2003년 이전까지도 개신교계의 4‧3 연구물은 없다시피 하였다. 그나마 출판된 회고록과 단행본 등에서는 4‧3을 ‘폭동’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개신교가 이전과 구별되는 관점의 연구물을 생성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이후인데, 제노사이드와 기독교 윤리 담론(김상기), 서북청년회(양봉철, 윤정란), 기독교 4‧3 담론 형성(고민희), 개신교의 4‧3 인식(김신약) 등을 주제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제주에서 발행된 제주 교회사와 개교회사들에서도 이전과 달리 4‧3을 객관적으로 다루려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과거의 관점을 유지하여 4‧3을 ‘김일성의 적화 통일 야심을 더욱 부채질한 대폭동’(박용규) 또는 ‘제주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속한 해방구로 만들고자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 좌익에 의해 촉발된 참극’(허명섭)으로 보는 연구물도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과제: ‘평화’와 ‘생명’을 향하여
개신교 4‧3 연구의 가장 큰 문제는 자료의 부족과 제한적인 자료들을 무비판적으로 또는 의도를 가지고 인용하는 것에 있다. 대부분의 연구물이 4‧3 당시 제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강문호와 조남수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직접 경험자로서 권위를 갖지만, 시대적인 한계로 인해 제한된 식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특히 반공 의식에서 두드러지는데, 오늘날에도 개신교의 연구가 좌우 대결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앞으로도 개신교의 4‧3 연구가 한정된 자료를 특정한 입장에서 다루게 된다면, 조남수의 ‘선무 활동’, 이도종의 ‘순교’, ‘시련을 이겨낸 부흥’, ‘서청과 교회의 관계’ 같은 특정 주제와 결론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역사 연구의 기초적인 출발점이 사료 비평임을 고려할 때,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다뤄져 왔던 사료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더불어 새로운 자료의 발굴, 특히 더 늦기 전에 생존해 있는 이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일이 시급하다. 오늘날 일반의 4‧3 연구는 개인의 증언들이 모여 집단 기억을 형성하고, 이것에 의해 좌우 대립의 자리에서 화해와 상생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 개신교 내 4‧3 증언의 수집 역시, 여전히 4‧3을 ‘좌파’의 폭동으로 보거나 언급 자체를 금기시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4‧3을 통해 ‘우파’의 특정 교회와 지도자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보다 다양한 개신교의 모습을 비춰줄 수 있을 것이다. 4‧3 당시 제주 내에 12곳 정도의 교회가 존재했었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해당 교회에서 기록물을 발견할 수 있다면, 개신교 4‧3 연구에 큰 진척을 가져올 것이다.
오늘날 4‧3은 평화, 화해, 상생 등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개신교의 정신과도 부합한다. ‘평화’와 ‘생명’이야말로 개신교가 내세우는 대표적인 가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에서는 4‧3 연구는 물론 당시 제주 교회에 대한 연구조차 부족하여, 책임을 묻고 싶어도, 사과를 하고 싶어도 누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가 불분명한 상태다. 개신교가 4‧3 평화 담론에 동참하고 싶다면,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이념 대립의 관점에서 벗어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 제주에서는 군경에게 목숨을 잃은 이들의 후손과 제주에 정착한 군경, 서청의 후손이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4‧3을 바라보는 개신교의 인식과 연구가 좌우 대립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제주의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룰 수 있겠는가.
다행히 4‧3 70주년을 맞이하던 201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제주4‧3평화재단이 MOU를 맺었고, 제주 교계 역사상 처음으로 ‘제주기독교교단협의회’가 4‧3 70주년 연합 예배를 드렸다. 75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는 NCCK가 “제주4‧3과 개신교”를 주제로 제주에서 심포지엄을 열고자 기획 중이다.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평화와 생명에 목적을 두는 다양한 개신교의 연구물들이 발표되기를 희망한다.
2018년 3월 30일, 제주성안교회에서 열린 제주기독교교단협의회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4‧3 70주년연합예배”(출처: 제주의소리)
2018년 3월 30일, 제주성안교회에서 열린 제주기독교교단협의회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4‧3 70주년연합예배”(출처: 양조훈)7)
여담
개신교와 4‧3의 관계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평신도들의 활동이다. 교계가 4‧3에 대해 침묵하고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4‧3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을 때, 4‧3의 진상을 알리고자 노력하였던 평신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4‧3평화재단의 전 이사장이자 감리회 신자인 양조훈, 현 이사장이자 한신대학교에서 공부하였던 고희범이 있다. 이들은 1980년대부터 언론인으로서 4‧3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개신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4‧3의 현장을 뛰어다녔던 평신도들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4‧3의 진상을 알리고자 2000년대 이전부터 목소리를 내었던 일부 목회자들의 수고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1) 연세대학교 교회사 박사과정, NCCK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연구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주노회 전도목사.
2) 두 단체의 화해 선언 기자회견문 및 관련 문서는 제주4‧3평화재단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3) 항쟁, 민중 봉기, 사건, 사태, 폭동, 반란 등. 4‧3의 앞에 ‘제주’를 붙일지도 용어 논쟁에 포함된다.
4) 입장에 따라 1만 5천 명에서 8만 명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 『제주4‧3사건진상조서보고서』에서는 피해자의 수를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로 본다. 당시 제주의 인구가 27만 명에서 28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한다면, 인명 피해를 어떻게 보든 제주 내에서 4‧3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5) 이선교, 『제주4‧3사건의 진상』(서울: 현대사포럼, 2008), 346.
6) 박윤식, 『참혹했던 비극의 역사 1948년 제주4‧3사건–1946년 10월 1일 대구 폭동사건』(부천: 휘선, 2012), 214.
7) 뒷줄 좌측부터 고민호 목사(모슬포성결교회), 박창건 목사(예장합동 서귀포동흥교회), 류정길 목사(예장통합 성안교회), 박명일 목사(서귀포순복음교회), 이상구 목사(서귀포충일감리교회). 앞줄 좌측부터 신관식 목사(예장통합 법환교회), 박종호 목사(중앙감리교회), 양조훈 이사장(4‧3평화재단), 원희룡 제주도지사, 이석문 제주교육감. 이상 2018년 당시 소속과 직책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