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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휘어진 가지☆]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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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도 제3회 신석초문학상 수상 시집
[휘어진 가지]
구재기 시집 / 황금알시인선 178 / 도서출판 황금알(2018.07.30)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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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진 가지
구재기
열매가
가득 차면
가지는 절로 휘어진다
열매를
다 쏟아내고서야
휘어진
가지는 비로소
똑바로 돌아간다
일 년 전
하던 짓 그대로이다
뒤늦은 깨달음에 대하여
구재기
나이 68살이 되는
햇볕 좋은 봄날
어제 만났던 초등학교 동창을
또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이로 8살에
초등학교 들어갔고
그래서 친구가 된지
벌써 60년이 흘러갔다
그 긴 세월을
문득 깨닫고는
초등학교 동창 밴드에 들어가
60년 된 친구임을 두루 알렸더니
또 다른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그걸 바로 깨닫는데
60년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지상에 없는 친구까지
뒤늦게 달려와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높여
눈물로, 60년을 외쳐대기도 했다
존재론
구재기
마디풀 방동사니 여뀌 미나리아제비 애기똥풀 곰보배추 수영 소리쟁이 한삼넝쿨 박주가리… 들을
모조리 뽑아내고 보니
이적지 잊고 지내왔던
너른 땅이 나타났다
개망초 씀바귀 고들빼기 바랭이 쇠뜨기 강아지풀 쇠비름 매듭풀 땅빈대 가막살이… 들로 전혀
구분되어지지 않았던 이 지구의 땅
아무것도 없는
전체로 되돌아왔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지구의 땅 한가운데
나는 나에게로 돌아와
홀로, 우뚝 서 있다
화롯불을 헤치며
구재기
이미
타버린 것들에는
침묵이 있었다
누군들
알았으랴, 애당초
저렇게 타버리면 어둠뿐
어둠을
다독이며
문득 헤쳐보다가
아, 아직도
남아있는 애증愛憎은
열어보지 못한 뜨거운 궁전宮殿
단박에
풀릴 수 없는
침묵은 깊었다
종심從心
구재기
낙엽 한 잎으로 지상에 내려앉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한때의 푸른 시간, 그리도 높았던 새소리들이 졸아들고 대쪽처럼 꼿꼿했던 오만의 입맥[葉脈]도 절로 굽어지는 걸 보면 계절이 마음 안에 깊이 깃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갈대
구재기
말하지 마셔요
마음에도 없는 나의 몸놀림을
비웃지 마셔요
그림자 하나로
바람 앞에서 바람 가는 대로
흔들리는 몸짓을 엿보지 마셔요
흐르는 맑은 물 속
나의 뿌리는 살아있는데
보리밭 깜부기 날리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셔요
세상 헛웃음 사라지고
별 볼 일 있는 날이 오기까지
침묵으로 기다리는 나를
함부로 말하지 마셔요
텅 빈 가슴인 나를
제?멋대로 꾸며
말하지 마셔요
꽃이 별이 되어
구재기
하늘에 별들이
떼 지어 빛나는 걸 보고
지상에 꽃들이
무리지어 핀 것을 보고
별과 꽃 사이
거리가 없음을 알았네
빛과 향기 사이
둘이 하나임을 보았네
이제 남아있는 것은
거리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 순간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
하늘의 별들이
은하수로 끝없이 흐르네
지상의 꽃들이
물결로 한없이 출렁이네
풍선
구재기
사람들은
내 몸 속에
바람만 불어넣어
들떠 오르게 하지만
나는
지상의 꽃밭
가장 낮은 자리에
붉은 채송화 꽃으로 피고 싶다
맥문동
구재기
서슬 같은
푸르름 하나로
무리진 솔 발등 위에
먼바다 잔물결까지
푸르게 불러들여
스스로 해야 할 일은
제 갈 길 만들어 가는 것
언제나 깨어 있나니
―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
밤이나 낮이나
덧없는 시간도 즐겁다
가끔은 홀로
구재기
가끔은 홀로
그림자 속에 들어서도
그림자를 모르면서
살아가고 싶다
하늘빛이
오직 한?빛이라서
너와 나의 그림자는
여전히 제?각각이어니
보이는 것이란 모두
그림자일 수 있는 지금
바람이 불어온다?하여
그림자가 지워질 수 있겠는가
그림자에 들면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
가끔은 홀로, 바람을 잠재워
숨 쉬는 공기도 모르고 싶다
나무들은
구재기
계절에 따라,
나무들은 단 한 번도
제 자리를
바꾼 적이 없다
뿌리로부터
땅속 깊은 어둠에서 건져 올린
물관 속의 물 한 방울에
섬세히 몸짓을 하면서
서로 부딪쳐
파열하는 잎으로
이것인지 저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바람의 길을 열어주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
마음을 일으켜 햇살을 맞으며
나무들은 주어진 시간을 다스린다
밝은 날
구재기
길을 가다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보면
이슬은
흔적 하나 없다
그 이슬을 누가 믿어줄까
바람은
제 존재를 내어
잎새만 자꾸 흔들지만
햇살 곱게
밝은 날에는
믿을 것 전혀 없다
정오正午
구재기
시끄러운
분별은 없다
고요하게 깨어있을 때
새들이 그물 벗어나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가
갑자기 부끄러운지
제 그림자를 잡아
발밑으로 바싹 끌어들인다
소금밭에서
구재기
먼바다 위로
하늘에서 쏟아진 햇살이
푸른 물결을 타고
육지 깊숙이 몰려 들어온다
쉬지 않고
수차를 돌리는
반백 노인 맨발 밑에서
우련, 우련히 우러나오더니
건넛뫼 뻐꾸기 울음이라든가
솔바람까지 한줄기 불러들여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과
함께 이룬 결정結晶 하나
함부로
맛볼 수 없는
방편方便인듯 끈적한
순백의 조복調服을 본다
포식飽食
구재기
먹고 또 먹어도
항상 배가 고파왔다
여전히 배가 고파왔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파왔다
하늘은 물속에
깊이 잠겨 있는데
좀처럼 먹히지 않았다
꿈속에서의 포식
연잎에서
이슬 한 방울 떨어져
물위에 파문이 일었다
금붕어 한 마리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물 위의 파문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왕솔밭에서
구재기
누군가 분명 지났는데
지나간 자리에 발자국이 없다
솔잎에 햇살이 내려앉아
온통 황금빛인데
그 황금빛으로 지상은, 지금
황홀한 궁전인데
하늘에서 발걸음하고 있었구나
그렇구나, 푸르름을 배경으로
하얀 구름 징검징검 걸음하여
지상에 내려온 것이로구나
이곳은 온갖 지극함이
마음을 거울처럼 사용하여
실상은 하늘의 소유도
사람의 소유 하나도 없는 곳
차마 높은 곳을 꿈꾸다가
어리석은 자리에 앉아
함부로 사랑하고 미워하며
슬프고 괴로울 수조차 없구나
비로소 숨을 돌리고
낮은 헛기침도 지워가는데
문틈으로 새어 나가는 티끌을
허공의 꽃처럼이나 멀리하는데
어떠한 발자국 하나 없이
하늘 가득 송향松香으로 넘치고 있다
별일別一이다
구재기
가을들판에서
굶주린 참새떼 쫓다가
들어와 보니
참새 한 마리
안마당에 앉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문득 짠한 마음에
쌀 한 줌 쥐고 나와
뿌려줬더니
참새는
쪼으기는커녕
놀라 날아가 버렸다
혹 시인詩人이 아닐까
구재기
나이가 들고
시력詩歷이 점점
깊어지는 동안
시인의 시詩가
느슨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허리춤이 절로
풀어지는 줄 모르고
급히 발걸음하는
저기
저 노인도
혹, 시인이 아닐까
꽃들의 통성명通姓名
구재기
풀꽃들은 그들 사이
틈 하나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풀꽃들은
서로서로 한몸이 되어
비와 바람을 맞는다
비록 성과 이름을
저마다 가졌다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부르기 위한 것일 뿐
서로간의 구별이 없다
지친 발걸음에
짐짓 흔들던 몸을 뉘어
자리 하나 선뜻 마련해주지만
동굴의 지견智見조차
바라지 않는다
수천수만의 풀꽃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뿌리내린 자리 좁은 것을
서로 탓하지 않는다, 그래서
풀꽃들의 그림자는 무리가 된다
비를 만나 바람과 함께
낯선 이름과 성끼리
풀꽃들은 가슴과 가슴으로
통성명通姓名을 하면서
저마다의 빛과 향을 나눈다
심증론心證論
구재기
데구루루
가랑잎 무리져
잘도 굴러가는데
바람은
머리칼 하나
보이지 않는다
연어
구재기
우리가
얼굴 없는
얼굴을 지켜보고,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연어는
죽음조차
염두에 안 두고
오직 살아가기 위해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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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1978년 2월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한 뒤
2018년 2월을 맞고 보니
벌써 40년 넘어
시와 함께 살아온 셈이 된다
20번째로 시집을 엮는다
그러나 내 시는
아직도 짙은 안개 속에 있다
이제부터
내 시는 싸움이다
햇살 한 줌을 향하여
안개와의 싸움을 즐기면서
내 길을 기꺼이 걷기로 한다
2018년 2월 봄날을 기다리며
산애재蒜艾齋에서
구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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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詩集 [※휘어진 가지※]
[ 해설 ] -
청량 시학과 풀꽃들의 어울림
이경호.문학평론가
1. 정량 음악과 온몸으로 누리는 시
르네상스 시대 음악 양식에 ‘정량 음악(定量音樂, Measured Music)’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16세기 프랑스의 성악곡에 적용되었던 음악 양식인데 이것은 고대 예술에 나타났던 시와 음악의 일체성을 다시 실현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음악 양식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음악에서 음표의 길이가 가사의 시적 운율을 따라가도록 작곡하는 음악 양식이다. 이런 음악은 노랫말이 강조되는 방식으로 작곡이 되었고 따라서 전반부에는 악기 반주가 허용되지 않다가 후반부에 들어서 악기 반주가 허용되기도 했다. 정량 음악의 경우는 음악이 시를 지향하는 양식을 표현해놓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음악을 정량화하는 양식이란 노랫말이 돋보이도록 음악이 전개되는 양식을 절제하거나 규제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은 시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음악에서 시를 지향하는 양식적 특징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프랑스의 가곡인 샹송과 독일의 리트, 이탈리아의 칸초네 등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가곡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시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19세기까지 시는 ‘시가詩歌’의 형태로 존재해 왔다. 그것들은 눈으로만 읽는 시가 아니라 입으로 낭송하고 귀로 듣는 통감각적 시의 양식으로 존재해온 것이다. 아직 책이 널리 보급되지 않은 시절에 문학이 수용되던 양식이라는 사회적 배경이 반영되기도 했으나 그보다 문학과 예술의 어울림을 자연스러운 전통으로 계승해온 영향일 것이다. 시와 음악의 어울림은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이 근원적으로는 온몸으로 참여하고 누리는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준다. 그런 점에서 학문을 비롯한 모든 삶의 분야가 서로 나뉘고 전문화되어버린 20세기에 태어난 현대시가 눈으로만 감상하고 복잡하게 사유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관념시의 형태로 나아간 결과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현대시의 생산자나 수용자가 마치 만화에 등장하는 머리만 발달한 화성인의 기형적인 모습을 연상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 정량 시학-고요함의 절제된 양식
구재기의 이번 시집을 관류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도 시의 음악성을 되살려 시를 온몸으로 누리게 만드는 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점이다. 앞에서 정량 음악이 노랫말이 돋보이도록 음악을 절제하는 양식을 채택했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구재기의 시편에서는 반대로 시의 음악성이 돋보이도록 시의 언어를 절제하고 다듬는 양식이 표현되고 있다. 이런 시의 양식을 ‘정량 시학’이라고 불러볼 수 있을 듯하다.
시끄러운
분별은 없다
고요하게 깨어있을 때
새들이 그물 벗어나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가
갑자기 부끄러운지
제 그림자를 잡아
발밑으로 바싹 끌어들인다
-「정오正午」 전문
거의 동요나 시조에 가까운 리듬감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절제된 서술 양식은 자연의 사물이 환기하는 속성들끼리 대비되고 호응하는 효과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시의 화자가 주목하는 자연의 사물은 “새”와 “나무”이다. 보다 상세하게 규정하면 “새”와 “그물”, 그리고 “나무”와 “그림자”의 대비 관계이다. 이런 대비 관계가 일깨우는 자연의 속성은 고요함인데, 그것 역시 시끄러움과 대비되고 있다. 시의 화자가 주목하는 자연의 사물들 역시 시행들만큼이나 절제된 대비 효과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절제된 서술 양식이 사물의 절제된 속성과 어울리는 풍경은 2연에서 보다 참신한 심미적 효과를 이끌어낸다. 고요함의 절제된 속성을 자각한 시적 화자가 “바람에/흔들리던 나무[가지]”의 소란스러움을 부끄러워하면서 정오에 가장 짧아진 나무 “그림자”를 주목하는 시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제 그림자를 잡아/발밑으로 바싹 끌어들”이는 풍경을 관찰하는 시선이 바로 고요함과 어울리는 절제의 미학을 구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3. 소리의 경이로운 리듬
그런데 고요함을 절제의 양식과 어울리게 만드는 시선은 고요함과 길항하는 자연의 다른 속성들을 주목하고 있기도 해서 주목을 요한다.
비바람 거센
한여름 날 밤이면
홈통 속 물소리에 놀라고
한겨울 대낮이라도
문 닫고 홀로 있으면
고드름 떨어지던 소리에 놀라던
어린 시절처럼
그렇게 놀란 가슴으로
살아왔다 하더라도
별 많은 밤이 너무 그립다고
아파트 숲을 빠져나와
구렁목 고개를 넘어 온
바람소리, 속삭이듯 들려왔다
-「별 많은 밤에」 전문
이 작품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얼핏 고요함을 깨뜨리는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고요함이 자연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 데 반하여 그 소리들은 문명생활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생활의 공간 속에서 생겨난 소리들이 경이로움을 일깨우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경이로움이 유년시절의 마음속에 생에 대한 리듬감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시의 화자는 그런 경이로움을 제공한 삶의 환경을 벗어날 수 있는 자연의 고요한 환경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소리와 대비되는 별의 존재감 또한 경이로움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별은 무수히 많은 존재감으로 고요한 상태를 위반하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 별들은 와글와글한 형상으로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요함과 소란스러움은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서고 겨루면서 경이로운 생의 리듬감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리듬감이야말로 구재기 시집의 절제된 시 양식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4. 고요함의 불씨
고요함은 소란스러움과 드러내놓고 맞서기도 하지만 은밀하게 맞서기도 한다. 아니 은밀하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고요함이 소란스러움을 품거나 내장한 존재 조건으로 절제된 양식의 리듬감을 구현할 때도 있다.
이미
타버린 것들에는
침묵이 있었다
누군들
알았으랴, 애당초
저렇게 타버리면 어둠뿐
어둠을
다독이며
문득 헤쳐보다가
아, 아직도
남아있는 애증愛憎은
열어보지 못한 뜨거운 궁전宮殿
단박에
풀릴 수 없는
침묵은 깊었다
-「화톳불을 헤치며」 전문
“화톳불”에서 고요함은 “침묵”으로 변주되고 있다. 이 침묵의 상태를 주목해야만 하는 까닭은 생의 연륜이 침묵의 상태를 죽음의 세계와 연계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의 화자가 “이미/타버린 것들에는/침묵이 있었다”라고 규정할 때 고요함은 고갈되고 소진되어버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고요함은 그렇게 텅 빈 존재의 상태를 환기해준다. 그래서 침묵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말이 부재하는 상태. 그런데 침묵은 죽음이나 부재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침묵은 죽음이나 부재를 넘어서는 존재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상태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한 탐문의 작업이 수직이 방향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침묵의 상태로 존재하는 “타버린 것들”을 파헤쳐 “열어보지 못한 뜨거운 궁전”을 찾아내는 결실이 아래로 하강하는 작업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 인용한 작품에서 고요함은 소란스러움과 맞서는 수평적 관계 속에서 생의 리듬감과 절제된 언어 양식을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직의 관계 속에서 고요함과 소란스러움이 어울리면서 생의 에너지와 절제된 언어 양식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4. 소리의 뿌리
구재기는 고요함뿐만 아니라 소란스러움의 세계에서도 하강하는 작업의 성과를 탐문해 보인다.
말하지 마셔요
마음에도 없는 나의 몸놀림을
비웃지 마셔요
그림자 하나로
바람 앞에서 바람 가는 대로
흔들리는 몸짓을 엿보지 마셔요
흐르는 맑은 물 속
나의 뿌리는 살아있는데
보리밭 깜부기 날리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셔요
세상 헛웃음 사라지고
별 볼 일 있는 날이 오기까지
침묵으로 기다리는 나를
함부로 말하지 마셔요
텅 빈 가슴인 나를
제 멋대로 꾸며
말하지 마셔요
-「갈대」 전문
이 작품에서 갈대의 “몸놀림”은 “흔들리는 몸짓”과 “침묵으로 기다리는 나”와 “텅 빈 가슴인 나”로 표현되고 있는데, “흔들리는 몸짓”은 소란스러움을 대변하는 데 반하여 “침묵으로 기다리는 나”와 “텅 빈 가슴인 나”는 오히려 고요함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니까 갈대는 소란스러움과 고요함을 동시에 구현하는 자연의 존재인 셈이다. 이때 참고해야만 할 사항은 소란스러움이나 고요함이 모두 온전한 존재의 상태나 속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란스러움이나 고요함은 “비웃음”이나 “착각”의 대상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그에 반해서 갈대의 진정한 존재 가치는 텅 빈 줄기가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가 아니라 “뿌리”에 간직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갈대 뿌리의 존재 조건이 “흐르는 맑은 물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한다. 그 조건이 화톳불의 불씨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강의 탐문작업에서만 찾아낼 수 있는 존재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5. 수평과 수직을 공유하는 풀꽃들의 노래
구재기의 이번 시집에서 소란스러움의 세계가 고요함의 세계를 압도해버리는 풍경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소란스러움의 세계가 수평과 수직의 방향을 모두 포괄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풀꽃들은 그들 사이
틈 하나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풀꽃들은
서로서로 한 몸이 되어
비와 바람을 맞는다
---(중략)---
수천수만의 풀꽃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뿌리내린 자리 좁은 것을
서로 탓하지 않는다, 그래서
풀꽃들의 그림자는 무리가 된다
비를 만나 바람과 함께
낯선 이름과 성끼리
풀꽃들은 가슴과 가슴으로
통성명을 하면서
저마다의 빛과 향을 나눈다
- 「풀꽃들의 통성명通姓名」 부분
수평과 수직을 공유하는 소란스러움의 세계를 대표하는 자연의 대상은 “풀꽃들”이다. 그것들끼리 어울려 소통하는 관계가 수평과 수직의 방향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수평의 관계는 지상에서 “틈 하나 만들지 않”고 “서로서로 한몸이 되어/비와 바람을 맞는” 풀꽃들의 관계로 구현되고 있다. “비와 바람을 맞는” 조건을 고요한 상태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소란스러운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소란스러운 상태 속에서 풀꽃들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고 역동적인 관계로 구현되는 효과가 생겨난다. 그런가 하면 수직의 관계는 “뿌리 내린 자리 좁은” 풀꽃들의 관계로 구현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지하의 공간에서도 서로 긴밀하게 소통하는 관계를 이룩하는 모습을 “풀꽃들의 그림자는 무리가 된다”고 표현해 보인다.
구재기의 이번 시집에 담긴 시편들은 서로 다르거나 상반된 요소들이 어울리거나 부딪치는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리듬감을 표현해내고 있다. 그것들은 고요함과 소란스러움의 관계이며, 수평과 수직의 방향 속에서 어울리는 관계이기도 하고, 자연과 문명의 맞서는 관계로 표현되는 요소들이기도 하다. 그것들의 관계는 서로 다른 풀꽃들의 어울림을 닮아서 “가슴과 가슴으로/통성명을 하면서/저마다의 빛과 향을 나눈다”. 노래가 시를 지향해온 정량 음악의 양식을 이제는 시가 노래를 지향하는 정량 시학의 양식으로 전환하는 구재기의 작업도 그러한 풀꽃들의 어울림을 표현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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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구재기의 이번 시집에서 소란스러움의 세계가 고요함의 세계를 압도해버리는 풍경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란스러움의 세계가 수평과 수직의 방향을 모두 포괄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관계는 서로 다른 풀꽃들의 어울림을 닮아서 “가슴과 가슴으로/ 통성명을 하면서/ 저마다의 빛과 향을 나눈다” 노래가 시를 지향해온 정량음악의 양식을 이제는 노래가 시를 지향하는 정량 시학의 양식으로 전환하는 구재기의 작업도 그러한 풀꽃들의 어울림을 표현해내고 있다.
― 이경호.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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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
• 1950년 충남 서천 출생
•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 :
•3인 시집『母音(구재기. 나태주, 권선옥. 1979, 대전:창학사) 』
•제1시집『자갈 田畓(1983.서울:명지사)』 제2시집『농업시편(1985. 서울:도서출판 청하)』제3시집『바람꽃(1987. 서울:문학세계사)』 제4시집『아직도 머언 사람아(1990. 대전:대교출판사)』 제5시집『삼십리 둑길(1992. 대전:대교출판사)』 제6시집『둑길行(1992. 문예진흥기금 수혜 시집, 서울:시와 시학사)』 제7시집『빈손으로 부는 바람(1993. 서울:현음사)』 제8시집『들녘에 부는 바람(장시집.1995. 대전:대교출판사)』 제9시집『정말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 가슴속의 날 지우는 일이다(1996. 서울:혜진서관)』 제10시집『콩밭 빈 자리(1999. 대전:대교출판사)』제11시집『千房山에 오르다가(2002. 대전:대교출판사)』 제12시집『살아갈 이유에 대하여(2004. 제6회 시예술상본상 수상시집. 서울:영언문화사)』 제13시집 연작시『강물(2006. 대전:대교출판사)』 제14시집『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2009. 서울:천년의 시작)』 제15시집『편안한 흔들림(2011. 서울:문학의전당)』 제16시집『추가 서면 시계도 선다(2014. <2014.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 시집.대전:도서출판 지혜)』제17시집『흔적痕迹(2014. 대전:대교출판사)』 제18시집『공존共存(2016. 춘천:시와소금)』제19시집『갈대밭에 갔었네(2018. 대전:도서출판 詩芽) 』제20시집『휘어진 가지(2018. 서울:도서출판 황금알)』
•CD시집 『겨울은 옷을 벗지 않는다(1998. 서울:한국문연) 』
•제1시선집 『구름은 무게를 버리며 간다(2009. 서울:한국문연)』
•詩畵 詩集 『주목된 시간(2013. 대전 : 대교출판사)』
• 충남도문화상, 시예술상본상, 충남시협본상, 한남문인상. 대한민국향토문학상, 정훈문학상, 신석초문학상 등 수상.
• 한국문인협회 충남지부장 및 충남시인협회 회장 역임
• 대전에서의 만 6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충남 홍성과 서천의 농촌에서 살아오면서, 40여년의 교직을 2010년 고등학교 교감으로 명예퇴직을 한 이후 지금은 충남 서천의 고향집을 리모델링한『蒜艾齋산애재』에서 주로 야생화를 가꾸며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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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8-14 06:56:00 | 수정 2018-08-16 14:26:49 | 2018-9-10 (월)
【서울=뉴시스】 신효령 기자 >문화 > 문화일반
◇휘어진 가지 / 구재기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구재기 시인이 썼다.
'아침 햇살이/ 너무 고와서// 큰 소리로/ 노래하며/ 하루를 지내다가도// 어둠이 몰려오는 건/ 어이하리오// 저녁 이슬/ 몇 방울에/ 두 눈을 적시고는// 노래하던 입마저/ 꼬옥 다물고 있네요'('나팔꽃' 전문)
'데구루루/ 가랑잎 무리져/ 잘도 굴러가는데// 바람은/ 머리칼 하나/ 보이지 않는다'('심증론' 전문)
구 시인은 "벌써 40년 넘어 시와 함께 살아온 셈이 된다"며 "문득 시집을 보내주신 한 원로 시인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더니 오히려 '너무 시집이 흔해서 시집 받았다고 인사하는 이들이 귀한 시대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씀으로 보내주신 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 순간 가슴이 찡, 저려왔다. 울컥, 뜨거운 덩어리가 깊은 곳으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또 시집을 펴내고, 그 속의 내 시는 아직도 짙은 안개 속에 싸여있다. 이제부터 내 시는 어떠한 대상도 없는 싸움이다. 햇살 한 줌을 향하여 내 스스로 싸움을 즐기면서 종심의 오기와 함께 걷기로 한다." 124쪽, 황금알, 9000원
- < snow@newsi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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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번 시집 ‘휘어진 가지’에 담은 시편들은 서로 다르거나 상반된 요소들이 어울리거나 부딪치는 관계속에서 생겨나는 리듬감을 표현해내고 있다.
노래가 시를 지향해온 정량음악의 양식을 이제는 시가 노래를 지향하는 정량 시학의 양식으로 전환하는 구재기의 작업이 이곳에 담겨있다.
구재기의 이번 시집에서 소란스러움의 세계가 고요함의 세계를 압도해버리는 풍경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평과 수직을 공유하는 소란스러움의 세계를 대표하는 자연의 대상은 ‘풀꽃들’이다. 그것들끼리 어울려 소통하는 관계가 수평과 수직의 방향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고요함과 소란스러움의 관계이며, 수평과 수직의 방향속에서 어울리는 관계이기도 하다. 또 자연과 문명의 맞서는 관계로 표현되는 요소들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지하의 공간에서도 서로 긴밀하게 소통하는 관계를 이룩하는 모습을 ‘풀꽃들의 그림자는 무리가 된다’고 표현해 보인다. 값 9천원. <백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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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연합뉴스) 조성민 기자 = 제3회 신석초문학상에 구재기 시인의 시집 '휘어진 가지'가 선정됐다.
신석초문학상은 서천 출신인 신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등단 10년 이상의 기성 시인을 대상으로 최근 2년 이내 출간된 창작시집을 공모해 심의를 거쳐 확정한다.
이번 심사는 신웅순(문학평론가), 이재무(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씨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시상식은 19일 오후 2시 서천문화원 2층 강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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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아우님! 즐거운 봄맞이로 하루하루 멋지게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