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서 한강대교를 폭파하고 고립된 현실에서 서울에 남은 시민들은 엄청난 고통에 빠진다.
어떤 이들은 남으로 간 사람들도 있지만 거꾸로 북쪽의 산이 있는 양주나 지금의 양평부근 시골로 피난을 간다
다음으로 과거의 한강은 지금의 한강처럼 폭이 넓지 않았고 직강화되지 않았으며 수량도 풍부하지 않았다.
지금의 노들섬은 용산과 하나 였으며 고립된 곳이 아니었고 지금 노들섬 북쪽은 강북이었다.
다음으로 한강철교는 길지만 한강 인도교는 짧다 보니 강을 건너기 유리한 장소였고 이곳이 바라다 보이는 노량진의 높은 부분에 후퇴하던 병력들은 배치가 되어 한강 방어선을 설치한다.
넘어 오는 쪽도 쉽지 않았고 한강대교는 끊어 졌으니 왼쪽의 한강철교를 통해 군과 경찰들이 이동을 하였고 이것도 미군 폭격기에 의해 폭격이 시도되지만 완전히 절단이 되지 않았다.
결국 철교에 구조물을 설치하여 북한군 전차가 남쪽으로 넘어 오게 된다.
6.25 당시 서울의 다리 말고 임진강이나 기타 북쪽의 다리를 끊기 위한 시도를 했지만 쉽지 않았다.
북한의 전차가 무섭고 막기 어려운 전력은 맞지만 당시 보병과의 협조가 덜한 전차를 분리 대응을 했던 동부전선의 부대들과 달리 어려운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중화기나 트럭 수많은 군수물자를 유기한채 철수할 수 밖에 없던 빌미를 제공한 한강다리 조기 폭파는 많은 것을 잃는다.
또한 통신망이 원할하지 못하긴 했지만 미공군이 일본에서 날아와 북한 공군을 제압하고 북한지역의 공장지대나 철도망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1사단 7사단 그리고 수도사단 거기에 충남에서 올라온 2사단 그리고 전라도 에서 올라온 5사단 경상도에서 올라온 3사단 한마디로 동부전선의 6사단과 8사단을 제외한 부대가 조기 패배한 것도 큰 충격이었지만 다시 살리고 전력을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수많은 인력이 소모된다.
처 내려온 북한군과 그것을 지시한 김일성 그리고 도움을 준 중국과 소련에게 책임을 물어야 겠지만 북한을 상대하는 우리전력이 약함에도 아래 사람들의 말을 믿고 신성모 같은 무능한 국방장관이 있었다.
아래 경험이 많지 않고 나이도 어린 그리고 군의 선배들에게 신뢰감도 없고 1사단 명태교역사건으로 해임된 채병덕을 군의 수장으로 다시 임명한 책임은 결과적으로 군통수권자로서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며 당시 1사단장 김석원장군은 해임을 당하고 성남학교에서 이사장을 하다 전쟁이 발발하여 사단장으로 복귀하는데 조기 수습은 어려웠지만 진천전투 부터 활약을 하고 훗날 동해안의 철수작전을 안전하게 실시한다.
김홍일장군 같은 경험자를 한직에 배치하고 유재흥 같은 장군을 중부전선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38선을 책임진 1사단장 백선엽은 수색에 있지 않고 시흥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으니 군대의 서열이나 경험을 무시하고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인사들을 써온 것이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함에도 대통령 자리를 그만두기 보다는 정권을 연장하고 법을 바꾸기 위해 후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참모총장을 해임시킨 건 비난 받아 마땅하다.
이 지점이 과거 한강대교의 시작이며 이 부분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소설로 역사를 본다고 할 수 있어 이야기를 해둔다.
김홍일 장군 업적은 이 소설과 차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