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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이완용(李完用, 1858년~1926년) 학부대신
구한말~일제강점기의 관료. 현대 대한민국에서 매국노, 민족 반역자의 대명사이자, 끝판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친청, 친미, 친러, 친일 코스를 차례로 거쳐 민족 반역자(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하면서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모두에 분류되었다. 해당 매국노들 중에 누가 있는지는 잘 몰라도 이완용을 모르는 대중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 인지도면에서 다른 매국노들과 궤를 달리한다.
아무리 젊은 시절 명석했던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후술하겠지만, 이완용은 젊은 시절에는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똑똑한 머리로 씻을 수 없는 매국행위를 했다. 이와 같은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친일파,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오죽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세대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다른 네 명의 이름은 몰라도 이완용의 이름만은 대부분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쌍욕으로 통하며, 이는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나치,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 수준의 모욕이다.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 같은 경우도 이러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생전에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인 매국노였는지를 알 수 있다. 후손들은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는 등 조상과 다를 것 없는 뻔뻔함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어서 미국인 선교사 겸 의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후에 이런 평을 남겼다.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
한마디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영민하지만, 영혼이 없는 것 같은 인물이라는 뜻으로 근대 문물에 관심이 있었고 의외로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등과 대화할 때는 영어로 했다고 한다. 처음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도 큰 활약을 못 했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했다고 한다. 때문에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그나마 할 줄 아는 일본인과 일했다. 알고 있는 일본인 인맥도 넓지 않아서, 이토나 데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가 1906년 학부대신(일종의 교육부 장관) 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교육시간이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칭찬했다.
행적과 성격과는 관련 없이 서예에 능해 조선 후기의 명필가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필체에 대해 예술의 전당 학예연구사인 이동국 씨는 "이완용은 행서와 초서가 뛰어났다"고 밝힌 바 있으며, 그 동안 공개된 이완용의 필적을 보면 그는 행서를 즐겨 쓴 편이다. 행서는 정자체인 해서와 흘림체인 초서의 중간 서체로 미적인 감각이 뛰어난 우수한 글씨체라 할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인 <일당기사(一堂紀事)>에 의하면 경북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및 천왕문, 창덕궁 함원전 등에 걸린 현판 10여 종의 글씨를 썼다고 기록했다. 또 독립문 현판의 '獨立門'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친일파 연구가 정운현은 필체는 이완용이 아니라 동농 김가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행적 때문에 글씨의 수준과는 별개로 가격은 바닥을 긴다. 물론 그가 원체 명필이었던 까닭에 가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니고, 인사동 같은 곳에서도 40~50만원에 가끔씩 거래가 된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다면 최소 수백만원에서 천만원은 했을 글씨라는 말도 된다. 서예는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인품도 가격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성품을 반영한다고 믿기 때문 실제로 안중근의 글씨가 명필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것은 그의 올곧은 성정이 글씨에 남성적이고 당당하게 그대로 묻어났기 때문이다. 괜히 일본 순사나 간수들도 글씨 한 점 얻어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안중근의 유묵은 실제로 시장에서 거래될 경우 억대의 가격을 자랑한다. 김구의 글씨도 수천만원이고, 그보다 인지도가 떨어지는 신익희의 작품도 최소 수백만원의 가격에 거래된다. 그러니 이완용의 40~50만원은 그야말로 똥값인 셈이다. 같은 원리로 똑같은 역대 조선 임금임에도 세종대왕의 글씨는 부르는 게 값인 반면 연산군의 글씨는 서예로 쳐주지도 않는 수준이다.
검약한 습관이 있었다지만, 그런 습관과는 별개로 자신과 자신 일가의 치부에 상당히 열심이었다. 민씨 척족 수구파 관료출신인 민영휘가 친일파로 변신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재산이 많은 조선인이었고, 이완용이 2번째였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의 재산은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450억원 가량 된다.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450억 원이 넘으며, 이는 또한 병탄 전의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고 난리법석을 부리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물론 몇몇 개념있는 일부 후손들은 자신의 성을 바꿔가면서까지 이런 땅 찾는 행태에 반대하기도 했다.
게다가 호의호식하던 이완용 일가는 당시에는 굉장한 사치품이던 자동차도 타고 다녔다. 그 시절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고종과 순종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 자신이 타고 다닐 차와 조선 왕실용 어차를 들여왔는데 고종과 순종과 왕실을 위한 어차로는 캐딜락과 다임러와 오버랜드를 들여왔고 데라우치 자신은 위슬리 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 외에 이완용과 송병준을 포함한 고관대작들도 뷰익이나 포드나 쉐보레 등등의 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포드나 쉐보레 등은 현재는 그냥 그저 그런 수입차/국내 생산 차량이지만, 이 당시 자동차가 귀할 시절에는 조선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요 고급품이었다. 기록 사진으로 당시 고관들이 탔던 고급 자동차들이 덕수궁 석조전 앞에 세워진 장면들도 있다.
자동차와 관련해서는 이완용 생전인 1912년에 그의 아들 이항구가 술에 취한 채로 사위 홍운표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어린아이의 다리를 부러지게 해 놓고는 배상은커녕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며 큰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
물려받은 금액이나 은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미미하고 거의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벌어들인 것이었다.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의 7.7배 정도 면적의 땅을 보유했으며, 집을 여러 번 옮긴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 이 중 훗날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m2(3천평 남짓)인데, 이는 그의 땅의 0.05% 정도다. 몰수원칙상 그가 받은 은사금과 이자를 고려한 금액만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소송을 걸어 되찾았고 이완용의 후손은 그 씨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소송으로 되찾은 땅을 최대한 빨리 팔아버린 뒤 캐나다로 이민갔다. 땅을 돌려줬다는 이유라는 게 민족정기보다 민사법이 더 앞선다는 논지였다.
5. 각종 논란
•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정작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이었던 광무개혁 시행 당시 파직되어 고향에서 은거하던 상황이었다.
• 평판이 나빠, 아들 이승구가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해서 그걸 안 아들이 남 보기 부끄럽다고 자살한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해당 내용은 매천야록에 나와있으며 흔히 이 에피소드를 사실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실은 본래부터 몸이 허약해서 을사늑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병으로 사망한 것.
• 순종 때인 1908년, 이완용은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중에는 윤원형처럼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 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 때 북인(대북)의 영수로 인조반정 때 처형된 정인홍 등도 있었다. 상당수가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인데, 고종 친정 직후부터 명예회복 운동이 불었으나 최익현 등이 결사 반대했었다.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 정약용, 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행했다. 이완용의 이러한 복권 사업은 그가 매국노라서 그동안의 간신들을 복권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니 명목상의 신원이나 해주자는 정리 작업에 가깝다. 일부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완용이 친일 노론의 수괴라서 조선에 해악을 끼친 간신들을 복원시켰다고 우기기도 하는데 간신, 역적으로 낙인찍힌 것 말고는 아래 명단에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 노론에게 당했던 소론, 남인계 등의 인사들도 적지 않다. 아래는 그 명단과 당파.
좌의정(左議政) 서흥 부원군(西興府院君) 한효순(韓孝純, 대북),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대북),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탁남)&,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영남 남인),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소론),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소론),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소론),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소론),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유봉휘(柳鳳輝, 소론),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소론 준론),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영조 때의 외척),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정조를 모독한 노론),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김삿갓의 할아버지),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남인),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절도사(節度使) 이징옥(李澄玉, 계유정난에 반대한 장군),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감역(監役) 허욱(許煜),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승지 정해(鄭楷),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준론),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소론 준론),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이조 참의 윤연(尹), 훈련 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소론 준론),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지평(持平) 윤지(尹志, 나주 궤서사건의 주모자로 소론),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수원(柳壽垣), 대사헌 심악(沈),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이조 판서 윤휴(尹鑴, 청남),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지평 이동양(李東讓),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승지 이중술(李重述),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승지 이보욱(李普昱), 승지 김호(金浩), 현감 박필현(朴弼顯),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감역(監役) 정권(鄭權),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垣), 승지 이재화(李在華), 정언 이우화(李宇和), 주서(注書) 권숭(權崇),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감사 정사효(鄭思孝,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정언 권집(權䌖),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승지 박홍도(朴弘道).
• 참고로, 같은 을사오적인 박제순도 있다. 덕분에 성균관대는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라고 놀림받는다. 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정계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하였다. 고종 때 와서는 어느 정도 실력만 되면 대사성 직함을 붙여줬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실제 저 페이지로 들어가보면 고종 대의 대사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고종 재위 기간 15,886일 동안 대사성이 344명이었는데, 이는 1인당 평균 46.18일(1달 반 정도) 재직한 셈이다.
• 1984년에 동시대를 다룬 KBS 대하사극 독립문에서는 김진해가 이완용으로 열연했다. 후대의 사극 명성황후에서는 충신으로 나오지만, 이건 드라마 시점이 친일로 변절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 억울하게 이완용과의 관계를 오해받은 사람들로는 같은 집안인 것뿐인 역사학자 이병도는 물론이고, 이완용의 고향이 아닌데 고향으로 잘못 알려진 전라도,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등이 있다. 가만 있는 이완용을 가지고 입맛에 맞게 조작하다 보니 누구는 특정 지역을 반역의 땅 운운하고, 다른 편 누구는 특정 기업을 깎아내린다. 이병도는 이완용의 조카가 아니며, 촌수로는 30촌인데 이 정도면 그냥 남이다. 게다가 '병'자 돌림은 '용'자 돌림과 두 항렬 차이가 나 조카는 절대 될 수 없다. 루머의 마지막 피해자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다.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철이란 사람과 삼성그룹의 이병철은 별개의 인물로, 본관도 다르고, 한자 이름이 아예 다르다. 이완용 손자 이병철은 작위를 세습한 이항구의 아들이며, 이병철 명예회장은 경주 이씨 판전공파에 진주 향반 출신인 이찬우의 아들인데, 이완용과 어떻게 엮어보려고 이찬우를 이완용의 늦둥이 아들 정도로 끼워맞추려는 사람까지 보인다. 만약 백보 양보해서 이찬우를 이완용의 늦둥이(?)라고 쳐도 이병철이 이완용의 차남 아들이냐 삼남 아들이냐 결정하는 문제부터 모순이 생긴다. 결론은 아니다.
• 배짱있고 침착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지인과 함께 마당에 나와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지붕 아래로 뛰어가는데 혼자만 태연하게 있으면서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희귀한 일인데 같은 곳에 2번 떨어지는 건 더 드문 일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 이덕일은 이완용이 노론의 최후의 수장으로 노론 세력을 대표해서 나라를 팔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노론이었으면 위의 인물들을 사면복권 시켜줄 리 없다. 사실 조선 말기부터 외척의 세도 정치가 활성화되면서 붕당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서인/동인/남인/북인/대북/소북/노론/소론/벽파/시파 따지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마저도 혁파되고 아예 외세에 놀아나게 된 근대화 시기인데 뭐.
• 이완용은 어렸을 당시에 총명했고 똑똑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에초에 민족을 팔아넘길 정도면 똑똑함을 넘어선 머리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이완용이 만약 자신의 능력을 우리 민족을 위해 사용했다면 모를까... 민족을 팔아넘기는 짓에 사용했으니...
구문공신 이완용은 사후 세계 염라국에 들어갔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된다.
1926년 2월 13일 동아일보, 이완용 사망에 대한 기사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부등켰던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와야지.
- 1926년 동아일보 전면 기사, 이완용의 사망 2일 후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폴란드 같은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해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때는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 넣은 글, 송태조 조광윤에게 바치는 영일시를 인용해 일본을 찬양한 구절
이토 히로부미: 甘雨初來霑萬人(감우초래점만인)
단비가 처음 내려 만사람을 적셔주고
모리 타이라이: 咸寧殿上露華新(함녕전상로화신)
함녕전 위에 이슬 빛이 새로워지니
소네 아라스케: 扶桑槿域何論態(부상근역하론태)
부상과 근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이완용: 兩地一家天下春(양지일가천하춘)
두 땅이 한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
- 190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열린 연회에서 한일합방의 주역들인 통감 이토 히로부미, 궁내대신 모리 타이라이,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기승전결 한 줄씩 돌아가며 지은 합작시
오호, 조선 동포여. 세상 말에 죽음 중에서 삶을 구한다는 말이 있더니 지금에 조선인민은 삶 중에 죽음을 구하니 이 어찌된 일이오. 얼핏 알아듣기 용이하도록 일언을 진하노니 제군은 잠깐 정신을 수습하고 잘 듣기를 바라노라.
(중략)
독립운동이라는 선동이 허설許說이라 망동이라 하는데 대하여는 각 유지인사의 천언만어가 끊이지 않아도 일향자각치 못하니 근자에 여余(=이완용)가 다시 말해도 제군의 귀에 들어가지 아니할 줄 스스로 의심하여 췌언(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거니와
(중략)
처음에 무지몰각한 아동배가 선동하고 그 후에 각 지방에서 역시 소문을 듣고 치안을 방해하는지라 당국에서 즉시에 엄중이 진압하려면 피해가 없겠냐마는 몰각자 부류를 돌아가게 하고 관대한 수단을 사용하여 일차 유고諭告와 이차 유고가 내려와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기자기질其子其姪(어린 것들)이 여전히 몰각한 행동이 있어 일차 효유하고 효유에 따르지 않으면 다음으로 그것을 책責하니 책한 후에 따르지 않으면 필경에 달지초지撻之楚之(매를 들어 때린다)는 어린 것들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어린 것들을 선도코자 함이요, 둘째, 다른 어린 것들에게 오염치 못하게 함이라.
이차 유고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관청을 침범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니 당국에서 엄중이 조치함은 부득이한 것이니라. 근일에 모모처에서 듣기로는 많은 인민이 죽고 다쳤다하니 그 죽고 다친 인민 중에는 혹 주창한 자도 있겠지마는 그 다수는 부창부수한 자로 여余는 믿고 있노라. 농사 때가 임박하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한 즉 안락이 있을 것이요, 망동을 따라하면 즉 죽고 다침이 목전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삶 중에 죽음을 구함이 아닌가. 자신이 삶 중에 죽음을 구할 뿐아니라 망동함으로 인하여 그 부근에서 횡액으로 죽고 다침에 이르는 자가 많이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눈뜨고 못 볼 일이오, 귀로도 듣지 못 할 일이로다.
(이하 생략)
1919년 4월 3.1 운동 당시 발표문.
7. 기타
중국에서도 매국노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중화민국 북경 정부 시절인 1921년, 안직전쟁으로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을 몰락시키며 중국의 패권을 잡은 봉천군벌과 직예군벌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때 봉천군벌의 수장이던 장쭤린은 진윈펑 내각의 사퇴 이후 자신과 친한 교통계의 수장인 량스이를 국무총리에 임명,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게 당시 말 많던 산동반도의 소유권 문제하고도 연결되어 중국 사람들이 내부에서 반발이 심했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 적이던 돤치루이의 안휘파 인물을 대량으로 사면하기까지 하자 직예군벌의 수장이던 우페이푸는 이를 비난하면서 전보를 보내곤 과거 중국의 여러 매국노와 더불어 이완용을 같이 언급하면서 량스이에 대해 욕을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량스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동경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게 했다. 량스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에 따르도록 훈령했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 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
국권이 희생되고 운송권이 중단되는 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량스이는 끼리끼리 무리 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노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
저렇게 전문에서 언급할 정도면 당대 중국인들이나 식자층도 '이완용 = 나라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인식했고 그 이름도 유명했다는 이야기.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충격적인 사실은 이완용도 배향공신이 되어 최소 5년 간 종묘에 모셔진 대참사가 실제 일어났단 거다. 1928년 5월에 대한제국 시기의 고위 관료와 황실 인사들이 후보 추천과 투표를 거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정순 4인을 정한 후, 순종의 후사였던 황태자 이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 그러나 며칠 후 이왕직 장관인 한창수의 주장에 따라 김병시, 이경직이 보류되고 이완용이 추가되었고, 배향공신 논의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 출신과 황실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7월에 이왕직은 배향공신의 종묘 배향을 일단 보류했다. 하지만 1940년 3월 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이를 등재했다. 해방 후에 이완용의 신위는 당연히 출향되었고, 김병시, 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아서 다수 기록물에 순종의 배향공신이 송근수, 서정순 2인만 기재되어 있다.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그냥 이(李)씨 가문(家)의 완용(完用)이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그대로 읽으면 '리가 완용'
이렇게 여러가지 의미로 유명하다보니 다른 동명이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이완용은 나라를 배신하고 팔아먹은 아이콘이며, 이완용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내에서 배신과 매국의 상징이 돼버린 것이다. 다른 매국노들은 몰라도 이완용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매국노?'라고 할 정도로 다른 방향으로 유명해진 사람. 이러한 여파 때문에 이완용이란 이름 가진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다. 심지어 컬투쇼 사연 중에는 친구 이름이 이완용, 그것도 한자까지 똑같아 어릴 때부터 고통을 받다가, 옆 반 친구 이름이 하필 이순신이라 둘이 싸우면 선생님이 항상 이순신 편을 들었던 사연도 유명한 일화. 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성씨와 이름 모두가 일치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이름만 같아도 취급이 좋지 못하다. 결국 이 이완용 후보는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 물론 일부 방송 프로그램에 의하면 이름이 같으니 하도 놀림을 받아 해탈한 것인지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듯 하다(링크의 마지막 이미지).
2011년 5월 20일 이완용에 대한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출판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을 위해 용기를 내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하면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황제와 황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 이로 인해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이완용을 옹호하고 재평가한 매국행위 변론 서적이라는 낭설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윤희가 이 책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의 이성을 비판 없이 충실히 따라갔을 때 얼마나 가증스런 역적이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바로 이완용과 근대에 대한 진짜 비판을 가하려고 한 것."이라고는 하는데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듯 하다.
2013년 1월 중순경 위키피디아 한국어 버전 이완용 문서에 이완용을 매국노로 평가한 부분을 삭제하고 조선을 근대화시킨 위인이라는 류의 내용을 추가한 지속적인 반달이 행해졌다. (정보없음 부분) 이후로도 잊혀질 때마다 특정인들에 의해 문서가 훼손되고 있으며, 이는 본 문서도 마찬가지다.
전라북도 부안군에는 이완용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있었다. 다만 이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기 전에 세워진 거라... 대략 1898년 부안군 줄포면에 큰 해일이 밀어닥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였던 이완용은 직접 부안으로 내려와 참상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줄포 시가지가 생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는데, 이후 이완용이 천하의 개쌍놈이 됨으로서 이러한 공덕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자연스럽게 광복 후 이 공덕비는 수차례 수난을 당했으며 본래 서 있던 자리가 아닌 줄포면사무소 뒤편에 반파된 채로 보관되고 있다고.
의외로 관료로서의 이완용과 지식인으로서의 이완용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고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완용의 업무 스타일은 해당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실사구시를 내세우며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만약 이완용이 대한제국에 대한 애국심만 투철했더라면 꺼져가는 조선의 명운을 되살릴 만한 유능한 인재였음에는 부정할 수 없다. 사실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에게 진심으로 증오받고 욕먹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을사늑약이다. 그 이전에 죽었거나 중립적인 침묵만 지키고 국권피탈에 협력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역적으로 낙인찍힐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럭저럭한 일생을 보냈고 을사늑약 참여를 거부하거나 자결로 항거하였다면 을사의인이라 존경받고 훌륭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또한 조선 통감이 되지 않고 을사늑약 그 이전에 정계를 은퇴하여 장기적으로 일본의 초대 수상이 되었고 성공한 인생으로 자국인에게 존경받고 유유자적하게 보냈으면 유신 동지인 기도 다카요시, 사카모토 료마, 오쿠보 도시미치의 유신지사로서 일본을 근대화시킨 중립적인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었고 안중근 의사나 이재명 의사에게 칼부림과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그리고 조선 민중에게 욕먹거나 증오받지 않고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잘못된 외세의존적 심리와 부귀영화라는 탐욕, 잘못된 선택이 자신에게 '최악의 가증스런 역적'이라는 더러운 오명과 함께 후세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고 죽은 후 부관참시와 함께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화장실 낙서에는 이완용 욕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고 한다. 당시 화장실 낙서들 또한 이완용의 식당/요리옥/요리점이라는 낙서가 꽤 많이 보이는데, 변소가 이완용의 식당이라는 의미인 듯 하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이름이 비슷한 이완영 국회의원이 갑자기 유명해졌다. 이름이 비슷하기도 하고, 국정조사 방해 등 하는 짓까지 비슷해서 네티즌들에게 대놓고 '이완용'이라고 까이고 있다.
의외로 효자였다고 한다. 공무로 바빴음에도 10리가 넘는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며 양아버지 이호준을 문안하였고, 이복형이윤용이 서자였음에도 서로 우애가 돈독했다고. 가문 시조묘를 찾아 복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