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프카즈 일기 14 / 셰키 칸 여름궁전Sheki Khan's Palace
나무의 깊이
천 년의 거목 한 그루 여기 있다 나는 거목의 무릎에 내 손을 얹어보지만 나무의 계절은 너무 먼 곳에 있어 내 손으로는 나무의 지문을 읽을 수가 없다 거목의 옷자락에 내 손을 얹고 아무리 빨리 읽어도 안 읽히는 나무의 문장 참다못해 나무의 가슴에 나는 내 영혼의 두레박을 내려보내지만 나의 두레박은 나무의 심연에 가서 닿지 않는다 저 우람한 침묵의 살결에 손을 얹고 당신의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이 뜨느냐고 물어보지만 나무는 천 년의 침묵을 깔고 앉아 종시 말 한 마디 없다 |
14. 셰키 칸 여름궁전Sheki Khan's Palace
중앙아시아 민족이든
카프카즈 족속의 국가든 이들의 땅은
지상에 일어난 가장 강대한 제국들
예컨대 로마제국, 페르시아제국, 몽골제국,
티무르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
그 후의 러시아제국 등
수많은 제국들이 저마다 한 차례씩은
모두 휩쓸고 지나갔거니와
저들은 그 전쟁의 폭풍 속에서도 의연히 살아남았다
지리적으로 동서양의 중간에 위치한 탓으로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했었기에
그 같은 문명의 간섭과
문명전이의 틈바구니에 끼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카프카즈 족속들은 누구나 말한다
역사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더 잘 안다
그럴 것이다
제국의 충돌과 정복자의 야망 사이에서 시달리는 동안
어느 틈엔가 일상이 된 전쟁에 단련되고
저들 스스로도 강인한 기질을 지닌 민족성을 지녀
멸망의 위험과 부활의 끈기를
속성처럼 지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끊임없이 정복당했으나 역설적이게도
정작 쓰러진 것은 정복자였던 제국들이었으며
일어선 것은 수모를 당한 자신들이었다
유럽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교역로
카프카즈적 기후를 닮아 있는 강인한 기질적 특성
정복자에 맞서려는 전투적 성향
그리하여 러시아의 오랜 지배로 인한 피로와
그로 인해 생겨난 모호한 국경선으로 인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군사적 충돌의 위험성
이를 테면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분쟁이 보여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사이에 일어난
1988년부터 1994년까지의 6년 전쟁은
그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그로 인해 평화의 도래를 희구하는 지속적인 열망과
유럽과 아메리카에 대한 동경의 역사라는
뿌리칠 수 없는 두 욕망 사이에서
오늘도 카프카즈의 족속들은 갈등하고 있다
세키 칸의 여름 궁전의 규모는 작다
그러나 그 안에 장식된 왕의 영광은 작지 않다
외관으로 보면 목재로 건축된
낡은 왕조의 유적 같은 인상
이런 한적한 오지에 이런 왕궁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을 듯한 범상한 건물
그러나 그 내부는 화려하다
옛적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는 셰키
카라반사라이의 규모가 옛 명성을 대변해 준다
왕국의 운명은 고작 76년
그나마도 러시아에 합병된 후로
왕국은 폐허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무스타크 왕이 지었다는 마흔 개의 궁전은
지금은 단 하나만 남고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1797년에 지었다는 여름궁전
그러나 외관은 너무도 초라해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만 같다
왕궁의 겉은 오지의 모습
왕궁의 안쪽은 영화의 자취
궁전의 방은 모두 6개
그 방을 방답게 만드는 것은 스테인드글라스인 세베케Sebeke
5천 개에 이르는 베네치아 무라노 산産
색유리조각들이 연출하는
빛의 프리즘은 놀랍도록 아름답다
4~5센티미터의 크기의 호두나무 조각으로 창틀을 만들고
못이나 접착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은 채로
거기에 색유리를 끼운 섬세한 수공예술의 극치
바라보는 자의 눈은 즐거우나
만든 자의 눈은 노역에 시달렸으리라
궁전의 뜰에서 바라볼 땐
창문은 한갓 찌든 갈색의 어둠이었으되
빛이 들어오는 내부에서 바라보면
현란을 초극하는 빛의 연출이 경이롭다
인간의 영화는 어디까지라야 멈추어 설까
나는 왕의 영광보다는
세베케를 만든 세공인의 땀방울을 먼저 떠올린다
이른바 템페라 기법으로 그렸다는
궁전의 천정벽화는 설화적 세계를 연출한다
안료에 달걀노른자를 섞어 색이 쉬이 변색하지 않는단다
천정화는 시인 나짜미Nazami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여 그린 것
전쟁에서의 승리의 기원
신이 내리신 신성한 영감
집무실 천정화로 그려진
두 마리 사자가 받드는 왕관의 문양
몽골과의 전쟁 장면의 그림들은 섬세하다
‘몬테크리스토백작’을 쓴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이 궁전을 둘러보고 외쳤었다
신이시여, 이 아름다운 자취를
인간의 손이 훼손하지 말게 하소서
그러나 왕국의 역사는 오늘도 바람에 흔들린다
민생에 쫓기고
궁핍에 휘둘리고
전쟁의 위험에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전설은 언제 흩어질지 모르는 형국
그러나 나의 눈길은 어느덧 궁전 뜰을 지키는
거수에게로 이끌린다
궁전은 작고
플라타너스나무는 장대하다
왕국의 탄생과 몰락을
한 자리에 서서 모두 지켜본 거수 두 그루
지금은 사라진 왕국의 수호신 같은 모습
궁전을 좌우에서 옹위하는
두 그루의 거대한 플라타너스나무여 신성하여라
높이 42미터
둘레 14미터
수령樹齡 5백년
왕국은 바람에 흩어졌으되
거수는 홀로 남아 옛 왕성을 지금도 수호하는가
신령스러운 나무의 영혼이여
셰키 칸의 마당은 좁고
플라타너스나무가 가리키는 하늘은 멀다
짧은 왕조의 운명은 안개 속에 흩어졌고
덧없는 영광은 이슬에 묻혔다
플라타너스나무에 내 귀를 대어본다
아직도 사직社稷의 소리가 나무의 뿌리 쪽에 고여 있고
필부의 음성은 잎새처럼 나부낀다
아라즈 강Araz River은 오늘도 흘러와서 무심을 노래하리라
셰키 칸을 다스리던 카프카즈의 바람은 와서
오늘을 살아가는 여염의 발자국소리를 보살피리니
영광은 짧고 마당은 좁다
거목이 가리키는 하늘은 너무도 먼데
나무는 오늘도 왕조를 보살피던 그 눈길로
나를 보고 있다
모두가 보이는 곳에 서서
아무도 안 보이게 머무시는 이가
영겁의 침묵으로 인간의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이어짐)
첫댓글 깔끔하고 단조로운 멋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