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천재라 생각하는 감독이 몇 명 있습니다.
그 중 한명이 <발키리>를 연출한 브라이언 싱어인데요..
<유주얼 서스펙트>의 강렬함에 매료된 직후 난 브라이언 싱어를 천재라고 나도 모르는 사이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성향에 따라서 <메멘토>, <다크나이트>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천재라 꼽는 사람들도 있던데, 개인적으로 놀란 역시 천재라고 생각하긴 하나 브라이언 싱어가 좀 더 천재적인 영화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히 저처럼 스릴러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교본으로 생각하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싱어 감독을 천재라 생각지 않을 순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작전명 발키리>는 히틀러 암살에 관한 역사적 일화를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입니다.
잠시 엑스맨, 수퍼맨 같은 초인적 영웅에 관한 길로 외유를 했던 브라이언 싱어감독이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간 영화이죠.
그러나 <유주얼 서스펙트>와 달리 <발키리>에는 '절름발이가 범인이다'같은 영화감상의 결정적 키를 가진 스포일러가 소용이 없는 영화입니다. 이미 이 역사적 일화의 결과는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수준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슈타텐버그의 암살모의에 대한 결과는 모른다 할지라도 적어도 히틀러가 이런 식으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지요.
그래서 이런 소재를 가지고 스릴러 영화를 만들어내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스릴러 영화라는 것이 톱니바퀴 끼어 맞추듯 틈새와 틈새에 힌트를 숨기고 그것을 병렬배치하면서 힌트가 풀려나가는 쾌감을 누림과 동시에 그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스릴을 배가시켜 나가다가 결말에 이르러 터트리거나 혹은 예상을 뒤집는 반전으로 관객의 허를 찌르는 것이 묘미일진데...
이 <발키리>라는 영화는 누구나 다 아는 결과 - 정해진 결말을 가지고 시작하는 영화인지라 스릴러라는 영화의 공식에 끼워맞추기가 대단히 어려운 영화입니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 까다로운 소재를 가지고 놀랄만한 긴장감과 스릴을 연출해 냅니다.
독일어로 시작되는 오프닝시퀀스가 열리는 순간부터, 슈타텐버그가 총살당하는 마지막까지...
알면서도 속는 것처럼.... 그가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가슴속으로 애타게 그가 극적인 반전을 일으켜서 살아남기를... 바라게 됩니다.
암살모의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모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총살장의 이슬로 무너질때까지 영화는 리드미컬하게 긴장과 이완의 호흡을 조절해나가며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특이한 것은 영화의 절정이 히틀러 죽음의 키를 쥐고 있는 폭탄테러 장면이 아닌, 모든 작전을 수행한 후 서서히 파멸해 나가는 장면에 있다는 것입니다.
초반부 늑대굴에서 히틀러를 폭탄으로 죽이겠다는 계획을 짤 때부터 영화는 모든 스릴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늑대굴의 폭탄테러가 클라이막스일 것처럼 진행됩니다.
그러나 그 폭탄은 영화의 중반부 일찌감치 터트려버리고 슈타텐버그와 올리비히를 중심으로 베를린을 장악해나가는 과정과 생사의 여부를 알 수 없는 히틀러 - 누구나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묘하게도 관객들은 폭파 장면 이후 단 한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히틀러가 정말 죽은 것이 아닌가 바라게 되기도 합니다.- 를 교차대비시키면서 실패한 작전의 진행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영화의 절반은 바로 이 파멸의 구도가 차지합니다. 그래서 관객은 더 애가 탑니다. 긴장과 스릴을 넘어선 고급의 카타르시스는 바로 거기서 오는 것이지요.
이는 바로 <유주얼 서스펙트>를 통해 관객의 집중력을 어떻게 유지시킬수 있는지 충분히 경험해보았던 싱어감독의 노련한 연출력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톱스타 톰크루즈를 비롯한 캐네스 브레너(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국배우입니다. 특히 세익스피어 원작 영화를 많이 연출하고 출연했었지요), 빌 나이히('러브액츄얼리'의 그 느끼한 가수아저씨이자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징그러운 데비존스), 톰 윌킨슨( 풀몬티의 뚱보를 기억하실려나...) 등 노련한 배우들의 기품있는 연기는 영화가 지향하는 고급스릴러의 면모를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특히 잘생긴 톱스타 톰크루즈의 눈을 빼버리고 한쪽 손을 잘라버리는, 어떻게 보면 이 배우가 지닌 스타성을 과감히 포기하고 오히려 그 배우의 연기력에 촛점을 맞추고 눈알이 없는 눈, 잘려나간 손 등을 스치듯 지나가면서도 극단적 클로즈업을 통해 강인하고도 절박한 의지력을 상징화시킵니다. 프롬이 슈타텐버그에게 경례를 하라고 강요하자 잘려나간 손을 들며 독일식 정례를 하는 장면은 이를 극단적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야욕이 개인의 정의와 어떻게 상충되고 충돌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명장면중의 하나지요.
남과는 다른 능력, 어찌보면 이질감이 강한 이유로 고독하고 소외된 영웅(엑스맨은 인간세계에서 배척대상인 돌연변이이고 수퍼맨은 외계인이다.)의 연장선상에서보면 슈타텐버그 역시 브라이언 싱어의 영웅계보에 포함시킬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 역시 일반인과는 다른 신체의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로 독일, 혹은 유럽, 혹은 세계를 구원하려 노력했으니 말이죠. 그래서 다른 의미로 보면 <발키리>는 엑스맨, 수퍼맨에 이은 브라이언 싱어의 영웅스토리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스릴러 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했으면서도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천재가 만든 잘 빠진 스릴러입니다. 물론 이 영화가 앞서 만든 <유주얼 서스펙트>나 <엑스맨> <수퍼맨> 보다 뛰어나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걸작이라 불리기에도 모자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천재감독이 자신의 준수한 연출력을 여실히 증명해보이는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2009년을 시작하는 달에 만난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 작년을 시작하는 달에 만난 영화의 대표가 프랭크다라본트의 <미스트>였다면 올해는 이 영화가 될 듯합니다. 작년도, 올해도... 출발이 괜찮습니다. 한달에 한편만 건진다면 아주 좋은 성적이므로...ㅎㅎㅎ
** 이 영화가 묘사하는 히틀러는 그간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히틀러와는 아주 다릅니다. 개인적인 야욕에 불타는 파시스트 같은 천편일률적인 묘사가 아닌, 숲속의 별장같은 사옥에서 고관들과 차 한잔의 여유로 담소를 나누듯 회의를 하며 바그너의 음악을 음미하는 매력적인 독재자로 묘사가 됩니다. 바그너는 개인의 열정과 의지를 음율로 표현한 대표적인 음악가이지요. 이런 면에서 히틀러와 슈타텐버그를 영화는 동일선상에 놓습니다. 둘 다 바그너의 음악을 즐기지요. 이는 결국 상반되는 열정과 의지의 충돌이며 추구하는 목표와 방식이 무엇인가에 따라 역사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런 바그너 클래식이라던가 기품있는 히틀러와 독일장교들의 묘사는 영화에 고급스릴러의 색채를 더욱 진하게 매깁니다.
*** 슈타텐버그의 실제사진을 영화가 개봉하기 전 모 영화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데 톰크루즈와는 정말 다르게 생겼더군요. 왜 그가 캐스팅되었을때 주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결코 고급스럽게 생기지도, 미남형으로 생기지도 않은... 약간 투박한 스타일이더군요. 그러나 눈빛만큼은... 그가 얼마나 단호한 의지의 소유자였는지 알 수 있을만큼 빛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