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1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말씀의 초대
아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연인으로 묘사한 구약 성경이다. 여인은 연인이 다가오는 소리에 설레며, 지난날 자신에게 와서 사랑을 고백했던 순간을 떠올린다(제1독서).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자 기쁨에 넘쳐 친척 엘리사벳을 서둘러 찾아간다. 성령으로 가득 찬 두 여인은 서로 축복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느 수녀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수녀님의 가정은 오래된 천주교 집안이었는데, 아침이면 언제나 어머니가 그녀 방에 들어와서 깨우며 이렇게 인사하였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체칠리아와 함께!” 그러면 그녀는 “주님께서 엄마와 함께!” 하고 대답하며 일어났답니다. 수녀님은 그 경험을 떠올리면서, 이 인사말이 수도 생활을 하는 데에 크나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인사말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사벳이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우리 삶에는 같은 인사말이라도 겉치레처럼 느껴지는 말이 있고, 체칠리아 수녀님의 체험처럼 기쁨과 힘을 주는 인사말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말을 듣고 온몸으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모님의 인사말에 주님의 현존이 강하게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가운데 아기 예수님을 모시게 되었기에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기쁨을 자신의 인사말에 담을 수 있었고, 그것이 엘리사벳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인사말에는 처녀가 아기를 가진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요셉에게서 쫓겨날 것이라는 걱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인사말은 환희의 외침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사말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사말에다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담으면 상대편에게 더욱 큰 기쁨이 전달될 것입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미사를 통하여 우리 몸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명절 때 되면 텔레비전에서 항상 보여 주었던 프로가 있습니다. 바로 서커스입니다. 이 서커스의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그네타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보통 다섯 명이 멋진 묘기를 보여주는데요, 세 명은 ‘나는’ 역할을 그리고 두 명은 ‘잡는’ 역할을 담당하지요. 그런데 이 묘기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분명히 잡아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없다면 과연 자신의 그네 줄을 놓을 수가 있을까요? 그 높은 곳에서 자신의 그네 줄을 놓고 날아갈 수 있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강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이러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 안에서도 자신이 꽉 잡고 있는 것들을 과감히 놓을 수 있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만이 구원될 수 있으며,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내가 놓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아야 하는데, 주님은 항상 뒤로 밀리고 다른 것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 안에서만 맴도는 믿음으로 끝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부족한 우리들과는 달리 강한 믿음을 가지신 성모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이렇게 노래하시지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세상의 것들을 다 놓아버리신 성모님. 그렇기 때문에 구세주 예수님을 잉태하실 수가 있었고 이로써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꽉 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인가요? 아니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로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것들인가요?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먼저 잡는 우리의 손길을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임금이 한 신하에게 진귀한 보석을 보여주며 이것을 이 자리에서 당장 깨뜨리라고 말합니다. 신하는 “임금님, 이렇게 귀한 보석을 깨뜨리면 사람들이 아까운 줄 모르는 임금이라며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판단을 하십시오.”라고 대답하며 깨뜨리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에게도 그 보석을 보여주며 당장 깨뜨리라고 말했지요. 모든 신하가 안 된다며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신하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보석을 망치로 깨뜨려 버렸습니다. 다른 신하들은 저 사람이 미쳤다면서 소리칩니다. 이 모습을 본 임금은 말합니다.
“보석과 왕명 중 어느 쪽이 더 귀한 것이냐? 깨뜨리라는 왕명을 어긴 저자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어라!”
하느님의 명령이 더 귀할까요? 세상의 것들이 더 귀할까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명령은 당연히 지킬 수 없습니다.
시간을 최악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부족하다고 늘 불평하는데 일인자인 법이다.(라 브뤼에르)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양승국신부-
<거품을 빼는 대림 시기>
돌아보니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도생활 초년병 시절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작음’ 때문이었습니다. ‘낮음’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결핍’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지니고 있었던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 딸랑 몸 하나 뿐인 ‘가난한 나’였습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다 보니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었습니다. 가장 쫄병이기에 실수해도 괜찮았습니다. 낮은 곳에 있다 보니 넘어져도 그리 충격이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도 행복했었나 봅니다.
요즘 들어서 자주 드는 생각이 한 가지 있습니다. 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높이 올라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큰 사람이 될수록, 높이 올라갈수록 섭섭함도 비례해서 커져갑니다.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상처도 커져갑니다. 내려올 때의 충격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이 대림시기 우리는 복음서를 장식하는 인물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세례자 요한...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한 가지 덕이 있었습니다. 겸손의 덕입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낮음을 추구했습니다. 자주 자신의 내면을 비워냈습니다. 그 빈자리를 주님의 성령으로 가득 채워나갔습니다. 그 결과 죽기까지 지속적으로 겸손의 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 안에 잔뜩 들어있는 거품을 빼는 시기입니다. 우리를 부풀려보이게 만드는 헛바람을 빼는 시기입니다.
언젠가 낚시 갔다가 복어 새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육지로 딸려 올라오자마자 그녀석이 보여준 행동은 참으로 특별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부풀렸습니다. 나름대로 자신의 몸을 크게 보여 상대에게 위협을 주어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몸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있어 녀석의 그런 몸짓은 두려움은커녕 웃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우리들, 곧 내려갈 날이 얼마 남은지도 모르고 높은 곳에서 기고만장해있는 사람들, 영혼을 위한 투자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겉멋만 잔뜩 든 사람들, 엄청나게 자신을 부풀린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바라보시고 쓴웃음을 짓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때로 안쓰럽고, 때로 대견스런 수련자 형제들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젊은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수련소 입소 때 개인 소유 물품은 모두 압수당했습니다. 휴대폰도 없습니다. 하루의 일과는 팍팍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더 이상 행복할 없다는 표정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는 아무런 거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히 빈손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남아있는 대림시기 우리 안에 들어있는 거품을 빼내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는 힘을 좀 빼면 좋겠습니다. 본래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나, 모든 측면에서 결핍된 나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낮아진 우리, 비워낸 우리, 바닥으로 내려 선 우리를 기쁜 얼굴로 찾아오실 것입니다.
뜻밖의 방문
-이병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뜻밖의 방문을 받고 몹시 기뻐하면서 반갑게 맞이하는 엘리사벳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맞이하고 대해야 하는지 엘리사벳의 모습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바로 그들이 나를 찾아오는 주님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그들을 주님으로 맞이하고 있는지요? 우리 주님께서는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뜻밖의 방문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다양한 모습으로, 뜻밖에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이 내게 있어 너무나 큰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었다고 노래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든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손님을 주님처럼 기쁜 마음으로 극진하게 모셔야 하겠습니다. 그들을 주님으로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성사적 시각’, ‘성사적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 김혜경-
오늘 복음에서 나는 마지막 구절에 잠시 멈추었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탓일까 ? 엘리사벳이 마리아께 ‘행복한 사람’ 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믿음’ 에 두고 있는 장면이 새삼스럽기까지 하니 말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행복하다’ 고 하면서 우리에게도 ‘행복하라’ 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I am happy. I ask you to be happy, too.)” 오늘 복음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준다. 유능한 사람들은 알아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지만, 나같이 무능한 사람은 확실한 모델이 있으면 그를 따라 하는 편이 훨씬 쉽다. 옛날에 어느 수도자가 성인으로 불리던 스승이 하는 대로 따라 해 자신도 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스승이 일어나면 자기도 따라 일어나고, 스승이 기도하면 자기도 따라 기도하고, 스승이 밥을 먹으면 자기도 따라 밥 먹고 …. 그런 의미에서 성모님은 오늘도 나의 모델이 되어주신다. 오늘 복음 말씀은 행복의 비결을 ‘믿음’ 에 두며 성모님이 행복을 실천한 사람으로 전한다. 나는 살면서 걱정과 근심으로 잠 못 이루며 고민할 때가 많다. 그런 내게 절친한 수녀님은 ‘걱정하는 것보다 기도하라.’ 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나면 마음이 편안하다는 사실을 극적인 순간에도 잊지 않기까지는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행복은 마음이 편안해야 머무는 까다로운 손님이다. 그 손님을 붙들려면 믿음에 뿌리를 두라는 말이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마음으로
- 김혜림 수녀-
복음묵상을 나누길 청하는 「야곱의 우물」 담당수녀님의 전화와 메일을 받았다. 나름 신비주의(?)가 나의 컨셉트였는데 수녀님은 나를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한 것일까?? 과정이야 어떻든 마감시간의 여유를 챙겨보고는 곧바로 오케이했다. ‘기왕에 쓰는 거 마음에 팍팍 와 닿게 잘 써보자.’ 하는 비장함까지 담고 말이다.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충분히 묵상하면 못할 건 또 뭐 있나??’ 하는 진지함을 위장한 교만이 오케이를 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해당 요일의 복음묵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성경 구절에 표시를 함과 동시에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생전 눈길도 건네지 않던 수녀원 책장에서 말씀의 결정타라도 얻을 수 있을까 눈을 초롱거리며 이른바 ‘참고문헌’?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엘리사벳이 ‘여인 중 가운데 가장 복되신 성모님과 또한 복되신 태중의 아기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결단코 머리가 아니었다. 마음이었다. 기대감이 가득한 마음, 기다림을 전제로 한 떨리는 심정이었으리라.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왕자를 만나기 전부터 들뜨고 그 기다림을 즐기며 신나 하지 않았는가. 대림의 마지막 주간을 시작하면서 나는 세상에 오실 아기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신나 하는지 내 마음을 살펴본다.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모시려 하지 않고 어째서 서둘러 ‘참고문헌’?을 통해 머리를 먼저 움직이려 했는지 스스로의 태도에 난감하다.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 요한은 즐거워 뛰놀았다. 그리고 그도 성모님 태중의 아기 예수님을 마음으로 환영했다. 엄마의 마음이 즐겁고 따뜻하면 태중의 아기는 그대로 영향을 받으니 요한도 기뻐 뛰놀았던 것이다. 구원자와 그분의 길을 미리 닦아놓을 자의 출생 전 만남과 알아봄이 감동이다.
눈을 감고 성모님과 그분 태중의 아기 방문을 기뻐하는 엘리사벳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순간 나도 바로 오실 아기 예수님을 그렇게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리면서 기뻐 뛰놀고 싶다. 엄마의 마음이 기쁘면 함께 기뻐하는 아기처럼 말이다. 마라나타?!
한산한 오후 시간에 저는 어디를 다녀오기 위해서 전철을 탔습니다. 한산했기 때문에 빈자리도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어요. 깜짝 놀라서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어떤 할아버지께서 한 청년을 향해서 마구 욕설을 퍼붓는 것입니다. 저는 저 청년이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을 했기에 할아버지를 화나게 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할아버지와 청년의 대화를 통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청년은 한산한 시간이었고 또한 빈자리가 많았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경로석에 앉은 것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젊은 놈’이 경로석에 앉았다고 하면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지요. 청년이 죄송하다고 하면서 자리를 옮기는데도 할아버지께서는 청년의 뒤를 향해 계속해서 욕을 퍼 부으시는데 왠지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화를 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서, 또한 자신이 손해 보았다면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화내는 그 모습이 절대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이었답니다. 그의 맞은편에는 어떤 부부가 앉아 있었지요. 그런데 아내는 계속해서 모든 일에 불평인 것입니다. 좌석이 불편하다고, 시트가 지저분하다고,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승무원도 불친절하다면서 계속해서 불평을 던집니다. 그러다가 서로 인사를 교환하던 중 남편이 자신들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 형제님은 “부인께서는 어떤 것을 제조하십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남편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불평을 만들어 내는 제조업자입니다.”
우리도 불평을 만들어 내는 제조업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리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지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이런 주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는 조금 힘들고 어렵다는 이유로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힘든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했던 엘리사벳과 성모님. 두 분은 불평의 상황을 간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감사의 상황으로 만들어 하느님은 찬미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탄생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우리도 이러한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즉, 불평을 만들어내는 제조업자가 아닌, 감사와 사랑을 만들어내는 제조업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편안히 우리 곁에 오실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믿음이 꿈을 이루는 최고의 비결이다.(랄프 왈도 에머슨)
참 행복을 얻는 길
-손영순 수녀-
20여 년 전 중동지방의 한 미혼 여성이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가문의 수치로 여긴 그 아버지와 오빠들의 손에 의해 돌팔매질을 당하여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법적인 제재를 받거나 그 사회에서 살인자로 지목되지도 않았습니다. 채 몇십 년 전에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이 미혼모의 임신에 대한 단죄가 이천 년 전 나자렛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태어나리라는 희망과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마을이지만 한 젊은 소녀의 태에 그 일이 시작되었을 때 얼마만큼 환영해주었을까요? 오히려 약혼자 요셉의 오해와 이웃 친지들의 손가락질이 있었을 것이고 돌팔매질 당해 죽을 위험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서둘러 길을 떠나 늦은 임신으로 동병상련의 고독을 견디던 엘리사벳에게 찾아가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이 두 여인의 만남은 믿음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수치와 모욕과 목숨까지 봉헌한 여인들의 만남으로 인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구약을 완성하는 세례자 요한과 신약을 여는 예수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기를 하느님의 선물이 아닌 소유물로 여겨 함부로 낙태하고 버리고 폭력을 저지르는 현대의 우리들과는 얼마나 다른 봉헌행위인지요. 참 행복은 자신을 희생하고 봉헌하였을 때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믿고 또 믿어 행복한 분
-김찬선신부-
오늘은 어제 대림 4주일과 같은 복음입니다. 어제는 마리아나 엘리사벳이 처녀지였다는 묵상을 했는데 오늘은 그들이 나눈 대화를 가지고 묵상했습니다.
임신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할까 궁금합니다. 자신과 아이의 건강 상태를 얘기할 것이고, 임신한 다음의 현상들과 느낌들을 나눌 것이고, 어떻게 출산을 준비해야 되는지 등을 나눌 것이라 추측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도 이런 대화를 나누었겠지만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것은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축하와 축복의 인사뿐입니다.
먼저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축하합니다. 무슨 축하입니까? 단순히 임신한 사실을 축하하는 것이라면 마리아는 축하받을 상황이 못 됩니다. 그런 축하라면 엘리사벳 자신이 받아야지 마리아는 아닙니다. 처녀가 임신한 것을 축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축하받는 이유는 단순한 임신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임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온갖 곤란한 상황 중에서도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기에 복되고 그래서 그 복됨 때문에 축하받을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 또는 주님을 안에 모시는 것, 그것이 진정 복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끼는가?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끼는 사람만 복되고 행복한 것입니다. 토스트예프스키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자기가 행복한 줄을 모르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다.”
이것을 뒤집어 얘기하면 자기가 행복한 줄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혼전 임신의 고통만을 볼 것이고 고통만을 보는 한 주님 모심을 거부할 것이고 그리고 주님 모심의 행복을 맛보지 못할 것이기에 불행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인사의 끝에 마리아의 믿음에 대하여 얘기하며 축하와 더불어 축복을 합니다. 200주년 성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복되어라, 믿으신 분. 주님이 해 주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니!” 믿었기 때문에 행복한 분이라고 축하하고, 믿는 대로 될 것이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 모심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고 믿은 분이며, 믿는 대로 될 것이라고 또 믿은 분이시기에 행복한 분이십니다.
“행복하십니다, 믿으신 분!”
-잔심용신부-
저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한 번은 신학교에서 기도를 마치고 함께 밥을 먹기 위해 내려가고 있는데 저의 목 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휴 촌스러워!”
아마 제 이름까지 말했었는지 저는 그것이 저를 향해 하는 말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제 이름 자체가 촌스러운데다 워낙 촌스럽게 컸기에 그 촌티란 것이 도시에서만 살아온 이들에겐 어렵지 않게 보이나봅니다. 젊은 사제가 뭐 얼마나 시골스럽게 컸을까 생각도 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면 환경이 어땠는지 대충 짐작을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는 유치원이 있는 줄도 몰랐고 우유 먹을 돈도 없었고 신발 살 돈도 없었고 촛불 켜 놓고 공부하였고 겨울엔 따듯한 물이 모자라 형이 씻은 물에 또 씻어야 했고 자동차 배터리를 충전시켜 와서 9인치 흑백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사제가 된 지금 이런 모든 것들이 저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만 어렸을 때의 가난했던 경험들은 밤하늘의 보석처럼 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아직도 좋은 묵상거리와 강론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고 세상을 비관하여 사는 사람이었으면 그 과거를 어떻게 보게 되었을까요?
‘난 태어날 때부터 지지리 복도 없었지. 우유도 못 먹어서 키도 못 컸지, 과외도 한 번 못하고 하숙도 한 번 못해서 몇 시간씩 통학하며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 그렇다고 세상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어? 이놈의 세상!’
어쩌면 그 가난이 지금의 비관적인 삶의 핑계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것은 저에게 커다란 선물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그런 것들을 겪으며 산 것을 하느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저와 같은 연령대에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도 거의 없고 또 강론에서 보시면 아시지만 저의 많은 묵상 자료들이 어렸을 때의 어려운 경험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가난이 너무 자랑스럽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가난이란 것을 조금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족의 가장 따듯한 이미지 중에 하나는 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전기밥솥 주위에 둘러 앉아 자동으로 밥이 되는 것을 보고 온 가족이 놀라고 신기해하던 모습입니다. 잘 살게 되면서 경험하지 못하게 되었던 수많은 것들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셨던 주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믿음이 있다면 모든 것이 은총으로 변합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고통일지라도 믿음의 눈으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입니다. 고통이 믿음을 통해서 그렇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의 싹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의 복되심이 그 분의 믿음 덕이라고 칭송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리아에 비해서 성모님은 믿어서 행복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삶은 일곱 개의 칼로 심장을 찔리는 고통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양심의 위안으로 평안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단 한 시간도 누려보지 못합니다.
성모님이 믿음으로 행복하신 분이시라면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겸손하여 믿을 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버린 겸손한 사람에게만 성령의 은총이 내려와 믿을 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항상 하나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하고 깨끗해집시다. 그러면 믿음과 행복을 저절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깨끗한 마음의 구유에 새로 태어나게 되고 우리와 한 몸이 되실 ‘성체’이십니다.
<내게 큰일을 하신 하느님>
-양승국신부-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신성(神性)을 드러내는 일정한 공간이나 영역을 갖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자신들이 신봉하는 절대자가 현존하며, 신자들은 그곳에서 절대자를 만납니다. 타종교에서는 그런 곳을 교당, 법당, 회당, 예배당, 신전이라고 합니다만 우리 가톨릭에서는 그런 곳을 성당, 교회, 본당, 성전 같은 말로 표현합니다.
암울했던 군부독재 시절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렸던 많은 사람들이 명동성당으로 몰려오곤 했습니다. 천막을 치고, 현수막을 내걸고,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협상이 결렬되고 대치상태가 지속되던 어느 순간 시위대들은 공권력을 피해 성당 안까지 쫓겨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뒤를 쫒던 경찰병력은 성전 문 앞에서 발길을 멈추곤 했었는데, 그게 성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고 예우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목숨과도 같은 대상입니다.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방어해야하는 생명과도 같은 도성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앙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오염과 훼손으로부터 성전을 지켜내려고 목숨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아기 예수님 잉태로 인해 이제 성전의 의미가 크게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라는 한 가난하고 어린 처녀의 몸이 하느님의 현존장소가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육신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자궁이 하느님의 도성이자 새로운 예루살렘이 된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리아라는 어린 처녀의 작은 자궁이 하늘보다 더 높고 바다보다 더 깊고 우주보다 더 큰 ‘그’를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눈, 현실의 눈, 인간의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오직 성령의 눈이라는 새로운 프리즘을 통해서만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특별한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마리아의 인생을 감싸셨습니다. 마리아의 나약함을 덮으셨습니다. 마리아의 어둠을 밝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큰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오늘 우리에게 큰 일을 하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엄청난 하느님의 초대 앞에 마리아가 지녔던 의혹과 망설임을 숨김없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인간적으로 바라봤을 때, 너무나 이해하기 힘들고, 너무나 걱정되고, 너무나 가혹한 하느님의 초대 앞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처녀로서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신앙여정은 한마디로 힘겨웠습니다.
그렇다고 마리아의 신앙이 회의적이거나 폐쇄적인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꼬치꼬치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무서워서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 자신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수용했습니다. 지금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겠지만 일단 인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했습니다. 그 말씀에 대한 평생에 걸친 묵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새벽을 열며
지난주일 우리 성당에서는 성탄을 앞두고 대청소를 했습니다. 성전, 교리실, 복도, 계단, 제단과 제의실, 화장실 등 성당 내의 곳곳을 깨끗이 청소했지요. 먼지를 털어내고 물걸레로 깨끗이 닦아내었습니다. 사실 성당 대청소를 한다고 했을 때, 청소할 것이 뭐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그렇게 지저분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성전만 해도 청소할 것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의자를 뒤로 다 밀고 나니 먼지 덩어리들이 굴러다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깨끗해 보였던 창문 역시 엄청난 먼지로 걸레를 금방 시커멓게 만듭니다. 그리고 거룩해 보이는 성물 역시 결코 깨끗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튼 많은 신자들이 열심히 청소한 끝에 어느 정도 마무리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 청소했을 때와 다른 점을 찾기가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깨끗해지기는 했지만, 눈에 확 띌 정도로 청소했다는 티가 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히 있지요. 전에는 손으로 문질러 보았을 때에는 시커먼 먼지자국이 묻어났지만, 이제는 아무런 자국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차이가 눈에 확 나는 것은 아니지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요. 그런데 어제 판공성사를 주면서 어쩌면 우리들의 뉘우침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 그 차이점이 눈에 확 보일까요? 아닙니다. 그 차이점이 눈에 절대로 보이지 않지요. 고해성사를 보고, 보지 않고의 차이는 분명히 눈으로 구분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태는 어떠할까요? 그 분명한 차이를 고해성사 보신 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꼭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 잉태 소식을 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눈에 보이는 현실이지요. 하지만 믿기 힘든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서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사제 직무를 수행하면서 거룩한 성전에 있으면서도,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면서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성모님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면서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눈에 보이는 똑같은 현실에 따라서 어떤 기준으로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기준인지……. 그 선택의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하느님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합시다.
빠다킹신부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조명연 신부-
우리는 자기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남과 비교를 하면서, ‘남들은 다 자기 마음먹은 대로 잘 되는데 나는 이게 뭐야?’라며 스스로를 힘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남들과 내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지만, 그 사람 역시 이런 불평 섞인 말을 던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하는 일마다 다 잘 될까? 부럽다….” 남과 똑같아지려는 마음에서 우리들은 힘든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의 차이를 인정할 때 더욱더 빨리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엘리사벳과 성모님을 보십시오. 우선 엘리사벳은 분명히 성모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접받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성모님에 대한 깊은 존경을 표시합니다. 또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메시아를 잉태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교만해질 수도 있으련만, 오히려 엘리사벳을 직접 찾아가시는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타인을 인정하고 받아주는 마음에서 그들은 큰 기쁨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발견합니다. 겸손하지 못한 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행복하십니까?
-허영엽 신부-
거리에서 일을 하는 청소부가 있었다. 그 사람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마치 자기 집 마당을 치우듯 거리에서 열심히 일했다. 궂은일을 성실하게 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다. “일하시는 게 참 행복해 보이십니다. 이렇게 어렵고 궂은일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청소부가 말했다. “전에는 제 일에 대해서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늘 불만이었지요. 그러나 저는 큰 병을 앓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삶은 그대로이지만 저의 생각과 마음이 완전하게 바뀌었습니다. 제가 하는 청소일이 더러운 지구의 한구석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 일에 큰 보람과 행복을 느낍니다. 저의 마음을 이렇게 바꿔주신 분은 하느님이라고 확신합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행복했을까? 아니 그와 반대였을 것이다. 아기를 잉태한 처녀 마리아의 운명은 끔찍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은 어린 처녀 마리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것이었다. 그때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이 생각났다. 마리아는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된 엘리사벳을 찾아갔다.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마리아는 엘리사벳만이 자신의 고통을 공감해 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만나자 성령에 가득 차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행복하다니? 마리아는 처음에 엘리사벳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점점 하느님의 손안에 자신을 맡겼다. 바로 이것이 신앙행위다. 그래서 성령께서 마리아의 마음을 차지하시고 그의 마음은 하느님의 뜻대로 변화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저희의 약한 마음도 성령의 은혜로 견고하게 해주시고 늘 우리 곁에 계셔주세요. 아멘.’
내면이 아름다운 여인들
-양승국신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한말을 곰곰이 되새기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자 노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요청에 기꺼이 "예!"라고 응답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은 점점 심각한 혼돈상태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도대체 내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혹시라도 내가 신경이 쇠약해져 헛것을 본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던 마리아는 "아! 그래! 천사가 사촌 엘리사벳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 그래! 엘리사벳에게 가보자! 그러면 뭔가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릴거야"하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유다 산골에 있는 한 지방"에 아인카림이라는 지방으로 길을 떠납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의 동네였던 나자렛에서 그곳까지 여행하려면 적어도 3일은 걸려야 한다고 합니다. 길고도 험했던 여행 끝에 마침내 즈가리야의 집에 도착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문안인사를 올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대문으로 들어서는 마리아를 바라보는 엘리사벳의 태도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마리아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사흘이나 걸린 도보여행으로 지칠 대로 지친 마리아의 남루한 행색,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한 미혼모의 모습, 난데없이 닥쳐온 "이상한 일" 앞에 뭐가 뭔지 몰라 어쩔 줄 몰라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더 이상 측은할 수 없는 불쌍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 깊이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을 체험했던 엘리사벳이었기에 마리아를 단지 외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영혼의 눈, 내면의 눈, 하느님 자비의 눈으로 마리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엘리사벳은 예언자의 자격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언약들이 참됨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당신은 모든 여인들 가운데 복되십니다. 그 복됨의 원인은 바로 태중에 계신 아드님 때문입니다. 당신의 태중에 계신 그 아드님은 모든 축복의 근원, 모든 기쁨의 근원이며 새로운 예배의 중심이신 메시아입니다."
엘리사벳의 확증을 통해 마리아는 자신의 지녀왔던 의혹에서 점차 벗어납니다. 긴가민가하던 마음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구나!"하고 확신을 가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심합니다. 엘리사벳의 도움에 힘입어 마리아는 다시 한번 힘차게 하느님을 향한 멀고도 먼길을 떠납니다.
연인처럼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의 하느님 - 경규봉 신부-
멀리서 달려오는 연인의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여인은 설레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연인은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담장을 넘어 노루나 사슴처럼 날쌔게 달려와 지극히 다정다감하고 사랑스런 모습으로 사랑을 속삭인다. 연인은 봄의 기운을 맞아 약동하는 자연 속으로 그녀를 불러낸다.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계절인 겨울이 지나가고 지루한 장마도 활짝 걷히고 꽃들이 피는 화사하고 신선한 계절이 왔다. 만물의 소생을 알리는 비둘기의 울음소리, 안정과 번영을 상징하는 무화과 열매,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포도의 꽃향기가 진동한다. 규방 깊숙한 곳에 갇혀 있는 순결하고 온순하며 아름다운 비둘기 같은 이여, 어서 밖으로 나와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 달라고 연인은 사랑을 속삭인다.
성탄절을 눈앞에 둔 교회는 아가서의 사랑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과 주님을 맞이하는 삶의 자세에 대해 묵상한다. 연인의 사랑을 노래한 구약의 아가는 비유적으로 하느님과 당신 백성,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영적 성장과 풍요로움을 위해서 교회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은총 가운데 임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고난과 역경을 뚫고 교회에 임하신다. 때때로 죄의 장벽이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를 가로막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사랑과 인내로서 교회를 돌보시며 회개에로 인도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시련과 박해, 고통과 어려움이 지나갔으므로 더욱더 친밀하고 성숙한 관계를 맺기 위해 함께 나가자고 부르신다. 교회는 고통과 박해를 뚫고 나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다(로마 6,4-5.8).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어 사람에게 오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고, 하느님께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달려오신다. 하느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해주셨고, 먼저 모세를 부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셨으며, 마리아에게 먼저 찾아가셔서 예수님의 잉태를 전하셨다.
사랑을 앞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생각, 판단, 논리 그 모든 것도 사랑을 앞서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은 무엇보다도 빠르고, 사랑이 큰 만큼 빨리 간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 그래서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아오신다. “언덕 너머 노루같이, 날랜 사슴같이 껑충껑충 뛰면서” 먼저 오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주님께서 강생하셨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9-10)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실”(필립 2,7) 정도로 크다. 사랑은 비천함도, 낮춤도, 희생과 죽음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처럼 크다.
성탄은 그 크신 사랑으로 비천함과 육을 취하여 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 크신 사랑으로 “바위틈에 숨은 나의 비둘기여! 벼랑에 몸을 숨긴 비둘기여, 모습 좀 보여줘요, 목소리 좀 들려줘요,” 하고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간절히 찾으시며 부르신다.
대림의 삶, 그것은 숨어있던 바위틈에서 빠져나와 주님 앞에 서는 것이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라고 응답하는 사무엘처럼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마리아의 힘찬 믿음의 고백 -최재현 신부-
대림 시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대림 첫 주부터 전반부는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준비하는 기간이고, 후반부는 임박한 구세주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대림시기 각 주일의 주제도 이와 같은 전례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림 제1주일은 오실 구세주를 깨어서 기다려야 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자세를 강조하였고, 제2주일은 구세주의 오심에 대비하여 우리 자신이 회개하도록 촉구합니다. 제3주일은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기뻐하라고 권고하며, 제4주일은 예수 탄생의 예고와 그분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탄생의 예고와 그분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는 대림 제4주간(금년은 대림 제3주간) 매일 미사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사람들, 특별히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그들을 통해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드러나고 있고, 다음으로는 전 생애를 다하여 주님을 선포하고 오롯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했던 요한과 마리아는 오늘날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임신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내용입니다. 마리아가 나이 많은 엘리사벳의 임신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방문하게 된 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의 잉태를 전달할 때 했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고을로 가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습니다.
히브리 여인에게 있어서 아기를 임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큰 수치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해주신 하느님의 축복, 즉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주겠다(창세 22,17)라는 그 축복에서 제외되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못낳는 여자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엘리사벳에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한 임신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돌아보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이 상상하기 힘들만큼 크지만 단번에 그것을 믿기엔 인간의 믿음은 너무 부족합니다. 마리아도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렇게 될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고민 속에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엘리사벳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늙은 나이의 그녀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들려줌으로써 천사의 말이 진실하며, 하느님께서는 원하기만 하신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은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밑거름으로 작용합니다. 마리아의 힘찬 믿음의 고백이 있었기에 주님은 마리아를 통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 오늘 마리아를 보고 행복하다고 찬양한 이유도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르겠다고 했던 마리아의 믿음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이 땅에 오셨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분을 진정 나의 하느님으로 또 나의 구세주로 믿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이십니다. 과학, 재물, 세상 등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오직 그분에게만 희망을 두고 하느님만을 믿으며 주님이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시고 구세주이심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여인을 통하여 이 땅에 내려오심을 믿음으로 고백했던 마리아처럼, 우리도 곧 오실 예수님이 내 생명의 주인이시며 영원한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참된 기쁨
-노우진신부
우리는 오늘 복음 안에서 마리아의 태중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뵙고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기뻐 뛰노는 요한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구세주를 만난 기쁨에 뛰노는 기쁨!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참된 기쁨이란 무엇일까?
좋은 글이 있어서 소개해본다.
참 기쁨이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낙관주의가 아니다.
또한 참 기쁨이란 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나 어떤 확실성 때문에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참 기쁨이란
우리의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에 달려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기뻐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한 16,33)"라고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이다.
참 기쁨이란,
어떤 상황이 예기치 않게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기쁨이요 놀라움이란,
모든 어두움보다도 하느님의 빛이 좀더 현실적인 것이 되는 것이고,
인간적인 온갖 거짓말보다도
하느님의 진리가 좀더 힘이 있는 것되는 것이며,
죽음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이 좀더 강해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마지막 말씀이신 그 분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매번 기쁨으로 놀란다.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그래서 충만한 하느님의 선하심으로 악마를 대면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몫이다.
우리는 더 이상 얄팍한 낙관주의로 살지는 않는다.
우리는 참 희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 "어릿광대(Henry Nouwen)" 중에서-
나의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상지종 신부-
숨가쁘게 돌아갔던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밤늦은 고요한 시간, 촛불을 밝히고 주님 안에서 하루를 돌아봅니다. 기쁨과 슬픔, 보람과 아쉬움이 뒤섞여 있기는 매일이 마찬가지이지만,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 주님과 내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내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이 작은 행복에 젖고 싶지만, 사실 그렇지 못합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벗들의 아픔에 함께 쓰러지기도 하고, 때로는 기쁨에 때로는 지친 몸과 마음을 풀기 위해 벗들과 함께 들이킨 소주 몇 잔 때문에 그냥 잠자리에 들기도 합니다.
어제 모처럼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밤 12시가 넘어가지만 정신은 맑아지고, 성무일도 독서기도의 시편과 독서의 말씀이 또렷하게 내 안으로 파고들어옵니다. 행복했습니다. 언제까지나 이 행복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예전에 함께 했던 사람들, 언젠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에게 달려가고 싶어졌습니다. 기쁨에 넘쳐 내 작은 행복을 나누기 위해 무작정 달려가고 싶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행복, 이 기쁨, 아무래도 내 안에만 담아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행복, 이 기쁨, 내가 억지로 힘을 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누군가에게 향하게 합니다. 내 안에만 담아놓기에는 이 행복과 기쁨이 너무나 크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행복과 기쁨을 담아놓기에는 나라는 그릇이 너무나도 작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써 누리게 된 나의 행복과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고픈 마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주신 행복과 기쁨,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과 기쁨은 내 안에만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넘쳐 흘러나는 것'이라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기쁨과 행복을 퍼서 나누면 나눌수록 내 안에서 더욱 풍성해지고 다른 이들도 이 기쁨과 행복에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유다 산골로 한걸음에 달려갔던 것처럼, 저 역시 한 걸음에 주님께서 주신 행복과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기 위해 달려가고 싶습니다.
오늘, 성탄을 며칠 앞두고 환자분들께 고해성사를 주고 성체를 나누어드리기 위해, 조금 있다가 길을 나설 것입니다. 이분들께 주님의 기쁜 소식을 나누어드리고 싶습니다. 입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행복 가득한 얼굴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들께서도 오늘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행복,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나누시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신앙의 동반자
-민경철 신부-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듣고 곧바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여행을 떠납니다. 아기를 가지지 못해 치욕 속에 살아왔던 삶을 깨끗이 씻어준 임신을 축하하러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석녀에게 아기를 가지게 해준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아기를 가진 본인…. 동료 의식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이라면 둘만이 통할 수 있기에 한시라도 빨리 가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겠지요. 가끔씩 힘든 일이 있거나, 행복한 일이라도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 들어준 이가 비슷한 체험이나 혹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료라는 것이, 친구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주님의 뜻이니까 따르겠다며 즉시 응답했지만 자신이 당하게 될 운명이 걱정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시겠지 하고 생각했겠지만 인간적인 두려움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소식을 들었을 때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신앙의 여행길에 동반자가 내 곁에 있는지요? 혹은 동반자가 되어주고는 있는지요?
- 이영준 신부-
살다 보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잘 모르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때가 기쁠 때이든 슬플 때이든, 즐거울 때이든 괴로울 때이든,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남들은 알지 못하는 우리들만의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편하게 생각하게 되고, 함께 지내면서 기쁨은 두배로, 슬픔은 반으로 나누고 싶어합니다.
오늘 복음은 두 믿음의 여인의 만남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여인과 아이를 가지면 안되는 여인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가진 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경험해 보지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는 둘만의 공통점이 친척이라는 관계를 훨씬 뛰어 넘는 그들만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굳이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또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넘치는 은총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감사의 마음을 나누고 그 기쁨을 만끽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기쁨의 표현이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먼저 나오게 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고, 흉내낼 수 없는 마리아의 임신이었습니다. 또 어느 누구도 따라하기 싫은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가장 복된 여인이라고 칭송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받아들인 마리아의 믿음이 어느 누구도 따라하거나 흉내낼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볼 수 있는 눈을 엘리사벳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모님과 함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그 탄생을 통해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엘리사벳처럼 성모님의 믿음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만 합니다. 엘리사벳처럼 성모님께서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따르고자 하는 열망이 타올라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고통과 슬픔의 삶을 사신 성모님이셨지만, 그 모습 속에 있는 복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모님과 같은 처지에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과 같은 마음으로, 성모님과 같은 생각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처하더라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성모님처럼 이제 곧 오실 아기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셨고 비우셨습니다. 그런 겸손과 비움이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할 때입니다.
메시아와 선구자의 내적 상봉
-박상대신부-
루가복음 전사(前史)의 세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오늘의 복음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상봉 장면을 전해준다. 두 어머니의 상봉은 동시에 예수와 요한의 첫 번째 내적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때는 가브리엘 천사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가 예수의 탄생을 예고한 후 며칠이 지났고,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지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마리아가 먼저 유다 산골에 살고 있던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이다. 루가복음은 엘리사벳과 즈가리야가 살던 장소를 유다 산골이라 하지만, 통상 예루살렘 서쪽 6Km 지점에 있는 ‘에인카림’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이곳에 제관들이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나자렛이 예루살렘 북쪽으로 1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을 감안한다면 나자렛에서 에인카림까지의 여정은 족히 3-4일 걸릴 길이었을 것이다. 마리아가 이 먼 길을 서둘러 간 이유는 석녀(石女)였던 친척 엘리사벳이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천사로부터 전해 들었기에(1,36) 문안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오늘 두 어머니의 상봉에서 중요한 점 두 가지만 짚어 보도록 하자. 첫째는 마리아가 먼저 엘리사벳을 찾아 나선 것이며, 둘째는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드린 칭송의 내용이다. 마리아가 메시아탄생의 예고를 전적으로 수용한 과정에는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는 석녀(石女)였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1,37)는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었다. 언뜻 보기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이유를 사실 확인의 차원이나, 연하(年下)의 위치에서 웃어른을 찾아뵈어야 한다는 당위성이나,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기쁨을 공유(共有)하고 같은 처지를 나누려는 차원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방문의 동기나 이유라기보다 마리아가 먼저 엘리사벳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이다. 이는 예수의 탄생예고(1,26-38)에서 보았듯이 하느님께서 먼저 마리아를 찾아갔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느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먼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이다. 이는 곧 메시아가 선구자를 찾아간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법이다. 그래서 마르코도 나중에 “그 무렵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마르 1,9)고 했다.
마리아의 문안을 받은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도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미리 알았을 리는 없다. 문안의 순간에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알아보고 칭송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뱃속에 있던 아기 요한이 뛰놀았기 때문이고 성령을 가득히 받았기 때문이다.(41절) 약간의 억측을 부린다면, 마리아가 문안을 드리는 순간에 성령 하느님께서 뱃속의 요한을 시켜 이를 알려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외적인 만남은 곧 두 뱃속의 아기들끼리의 만남이며, 엘리사벳의 찬가는 예수께 대한 요한의 칭송인 셈이다. 마태오도 나중에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온 예수께 요한이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십니까?”(마태 3,14) 하고 말했다고 기록한다. 따라서 오늘 엘리사벳의 칭송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도 같은 효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 마리아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의 상봉! 이는 두 여인이 하느님으로부터 입은 자비와 은혜, 놀라움과 기쁨의 상봉이기도하다. 예수님의 성탄은 어디 바깥 마구간의 구유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사건이며, 바로 내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상봉이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오늘 네 개의 촛불이 모두 밝혀진 대림환을 보면서 내 안에 구유를 마련하고, 오시는 하느님께 엘리사벳처럼 인사드릴 준비를 해야겠다.
<믿으신 분>(루가 1, 39-45)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대표적인 믿음의 두 여인의 만남을 본다. 두 여인은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하였는가?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통해서 알게 된 주님의 계획을 받아들인 후 급히 서두러 유다 산골에 있는 사촌 언니를 찾아갔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먼저 마리아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아보고 축하의 인사를 하였다.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표정만 보아도 그리고 무슨 말을 한 마디만 하여도 상대방은 즉시 알아본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술 술 이야기가 나오고 또 서로 통하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으로 기쁘다. 그래서 자주 만나게 되고 만나서 이야기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리고 꼭 만나지 않아도 멀리 떨어져 살아도 늘 함께 있는 것 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만나면 더욱 더 기뻐진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로 엘리사벳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지만 그 다음에 이어서 이어지는 말씀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듣고 마리아의 답가인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갓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차"서 외치고 있는 영적인 소리이다. 그들이 주고 받은 이야기의 내용들은 모두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주님께서 자기들 안에 이루신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엘리사벳은 엘리사벳 안에서 주님이 이루신 일들을 그리고 마리아는 마리아 안에서 이루신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오직 자기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건들 그리고 함께 공감대를 느끼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내용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억지로 만들어 낸 이야기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아닌 오직 자기들만이 느끼고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며 말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이들이 나눈 대화를 영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이야기는 영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들끼리만 이해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영적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 기쁨을 나눌 수 없다.
오늘 날 우리들에게는 이런 영적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이 필요하다. 만났다 하면 남을 흉보는 이야기나 세상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생활 안에서 체험된 주님에 관한 이야기들 즉 영적으로 일어난 일들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상대자가 필요하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런 영적 대화를 나눌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아니 영적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비웃고 알아듣지 못한다. 왜 그럴까? 영적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하신 일들이 많이 있으면서도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라는 의식이 없다. 모든 것을 내가 했고 내가 잘 나서 한 것이지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일들이 하나도 없다. 전혀 영적인 체험이 없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기쁘지도 않고 신앙에 대해 할 말도 없다.
영적인 대화에도 다양한 수준이 있다.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에 따라서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내용과 질이 다양할 것이다. 자기 수준에 맞는 영적 대화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이 세상에 진실한 친구가 한 두 사람이라도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다. 이 말은 친구는 많아도 자기의 속 마음까지 다 털어 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는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하물며 자기 수준에 맞는 영적인 파트너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만일 그런 영적 대화자를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영적 체험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믿음의 이야기인데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말씀에 대한 체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영적 체험을 하려면 무엇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워지리라는" 말씀이 있어야 한다.
내 안에서 이루워 지리라고 믿고 있는 말씀이 무엇인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보라. 이제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었고, 엘리사벳은 천사가 즈가리야를 통해서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는 말씀을 믿었다.
영적인 대화는 어떤 신비스런 체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이해 못하고 상대방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나누어야할 영적인 이야기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내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지, 말씀대로 생활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을 묵상하고 생활하면서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등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 안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난 일들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고 믿고 있는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주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믿는 말씀을 통하여 내 안에서 주님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도 아니고 외부에서 오는 기쁨도 아니다. 오직 믿음을 통하여 내 안에서 느껴지고 보게 되고 듣게 되는 주님의 역사 하심에서 오는 기쁨이다. 이런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주님의 역사 하심을 체험하게 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