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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정산님이 부산 송도성당에서 3월29일 약 300여명의 불교.개신교,천주교,
천도교,원불교 교인들을 대상으로 연설한 내용입니다.
좋은 내용이어서 허락없이 퍼 왔음니다. 이해를 바라오며....
고통에 대한 소고(小考)
김홍술/ 목사(애빈교회)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등 5대 종단에 소속한 신도여러분, 그리고 특별히 오늘 이곳 송도성당에 참석한 신도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소개받은 바와 같이 저는 개신교 특히 진보적이고 사회참여적인 교단협의체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소속되어 있는 8개 교단의 하나인 기독교대한복음교회의 목사입니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서양선교사로부터 독립적이고도 민족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표방하고 나선 유일한 교단이죠.
여기서 잠시 제가 쓰는 용어정리를 해야겠습니다. 원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종교를 ‘그리스도교’라 하는데, 한자어로 그리스도를 기독이라 하므로 ‘기독교’라고 씁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신, 구교를 포함한 뜻인데 굳이 나누자면 구교는 천주교라는 로만카톨릭과 정교회를 말하고, 신교라 하면 구교에 저항하고 새로이 구축된 이후 모든 ‘개신교’를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경우를 들어 용이하게 구교를 천주교라 신교를 개신교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원래 개신교 중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라는 대(大) 교단에서 장성하고 신학을 하였으나 신학교 4학년 때 잘렸습니다. 데모주동자로 말입니다. 개신교 교회의 부패한 현실과 진리의 목마름으로 20대를 전국을 도보하며 방황했던 날이 어제같이 주마등처럼 새삼 떠오르는군요. 예수의 혼이 저를 견디지 못하게 내 몰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당시 저는 개신교의 울타리를 넘어 불교, 천주교, 신흥종교 등에 많이 기웃거리며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30즈음부터 한 여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스승도 만나고 정착의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원초적 예수의 제자의 길과 새로운 교회 건설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이미 그런 길을 걸었던 기독교대한복음교회로 이어지는 인연이 된 겁니다. 근데 처음 교회를 시작하는 20년 전 첫 빈 예배당에는 술 취한 걸인과 부랑인만 이어 들어오지 뭡니까? 저는 문을 걸어 잠그지도 거절하지도 못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하느님이 저를 그렇게 이끌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렇고 그렇게 어느덧 20을 하루같이 온 겁니다.
지금은 구포 산기슭 허름한 집 한 채에서 11명 식구들과 공동 생활하다가 주말이면 집에 가죠. 알콜 중독과 망가진 몸과 맘으로 세상의 경쟁력에 밀려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형제들과, 눈만 뜨면 부대끼며 사는 게 일이요 사목이라면 사목인 셈입니다. 부산진역 앞에서 지하를 얻어 아침급식과 필요품을 제공하는 일도 그렇지요, 20여년을 가정생계는 뒷전이고 그렇게 살았으니 집사람으로부터 쫓겨나지 않은 게 은총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아차, 오늘 주제의 말씀 나눔을 잊고 제 넋두리만 늘어 놨군요. 죄송합니다. 오늘의 주제가 ‘고통에 대하여’라고만 들었는데, 맞습니까? 주최 측으로부터 오래전에 부탁은 받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의 안내는 없더라고요. 너무 자유롭고 주체적 발표를 기획하셨는가 싶습니다. 이미 여러 종단의 발표자가 발표도 했고 각 종교적 입장이랄까, 아니면 각 종교적 신앙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의 정리라 할까,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신학이나 철학 등을 전공한 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전문적 세미나 발표형식의 강연은 할 수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될 겁니다.
‘고통에 대하여’라는, 주제가 무척 무겁고 어둡습니다. 요새 세상에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대개 피하죠. 누가 들으려 하겠습니까? ‘고통을 없애드리겠습니다.’ 뭐 이런 주제라면 좀 솔깃하기도 하겠는데 말이죠. 세상살이가 다 고통이잖아요. 사는 게 엉키고 부딪히고 짓눌리고 휘둘리고 그렇잖아요. 결국 스트레스밖에 남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이야기 보다는 재미나고 웃기고 경쾌한 이야기를 즐기나 봅니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지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간의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기쁨과 행복이 약장수나 코메디언 개그맨처럼 웃겨주고 기분 좋게 해 주는 것으로 해결 될까요? 아스피린 약이나 술이나 마약 같다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생각하면서 그것의 궁극을 질문하는 게 철학이라면, 그것의 궁극을 찾아 온 맘과 몸을 다해 정진하는 게 종교가 아닐까 이렇게 답해봅니다. 우리는 고통이라 할 때 동물적 감각성으로 느끼는 ‘통증’이란 뜻 보단,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아픔’과 ‘괴로움’ 또 ‘육체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고통’ 이런 것을 인간의 고통으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이런 고통으로부터의 본원적인 해방이나 자유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고통’을 죄에서 온 결과로서 ‘하느님께 지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지옥에 비유하면서 이 ‘영원한 벌’로부터 구원의 유일한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지은 죄에 대한 속죄(贖罪) 또는 사죄(赦罪: 죄를 용서받음)의 방법입니다. 이 속죄는 예수 이전의 천주교와 개신교의 뿌리가 되는 유대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다만 천주교는 현세 이후의 고통의 세계인 ‘연옥(煉獄)’을 인정하는 반면, 개신교는 현세가 연옥을 포함한다고 보는 편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의 현세나 연옥에서 ‘영원한 고통’이라는 지옥으로-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한 ‘버림’이나 ‘멸망’으로-부터 구원이 가능하다고, 이른바 유일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겁니다.
오늘 저는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고통의 의미, 그 원인, 그리고 해결방안을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주로 성서적 가르침의 배경을 갖고 풀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서가 말하는 것이 온전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성서적 가르침을 포함한 무한히 열린 자세로 넘어서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같이 종교간 대화와 서로 배움의 기회는 너무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봅니다.
자, 그럼 기독교는 고통의 이해, 고통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볼까요? 아니 정확히 말해 기독교의 이해라기보다 성서적 이해라고 해야겠습니다. 먼저 구약성서부터 살펴보기로 하죠. 구약성서의 흐름은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원칙에 충실합니다. 고통이란 즉 ‘하느님의 말이나 뜻에 엇나가는 자에게 내리는 벌’과 같은 의미를 말합니다. 창세기 설화로 잘 알려져 있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결국 그 곳으로부터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그 최초의 설명입니다. 쫓겨날 뿐 아니라 수고의 고통과 산고를 얻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개인적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이 맨 처음 하느님을 거역하는 원형으로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인간의 연대체인 집단이나 공동체 사회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경우 전쟁이나 기근 또는 역병으로 벌을 내린다고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법에 의한 처벌, 질병, 즉사, 패망 등으로 벌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엄격한 계율적 종교 신앙과 법집행은 궤를 같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기본경전인 신명기 법전과 제사법전인 레위기 민수기가 굳건하게 그 기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스러운 하느님의 절대적 통치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사회는 하느님의 통치가 성전제사와 왕정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이기 때문에, 제사제도와 왕권의 통치는 정당성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백성에게 학습되었으며 보편적이고 불변의 가치체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제도를 통해서 어긋난 죄를 사함 받고, 왕정의 통치에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의로운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정이 공고히 되고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고민이 생겼습니다. 즉 제사제도와 왕정이 서로 결탁하고 기득권화 되어 부패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영화를 계속 누리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더욱 그 체제를 강화해 갔습니다. 이때 양심 있는 지혜 자들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수 권력층이 누리는 영화가 하느님의 뜻을 순종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고, 다수 백성과 천민들이 받는 고통이 하느님의 뜻을 불순종해서가 아니라고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지혜문학이 이른바 욥기서입니다. 기존의 가치질서에 철저히 저항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지혜문학도 기존의 왜곡된 제사권위와 왕권을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끝없이 가난과 노역, 전쟁과 질병에 시달려야하는 백성들은 늘 죄책감에 노예로 그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새롭게 저항하고 나오는 작은 몸부림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예언자들 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제도적으로 예언자 계급은 기득권화 되다시피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자들은 제도적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목을 내놓고 용감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기득권층이나 백성들에게나 가림 없이 또 거침없이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습니다.
그들은 잘못되어 부패한 제사권력과 정치권력은 반드시 심판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개입이 고통을 동반한 심판으로 임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외쳤습니다. 그런 예언자 전통은 새로운 질서와 체계를 동반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말씀에 충실함은 왜곡된 제사제도에 충실함이 아니요, 또 왜곡된 왕권에 복종함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반역적이고 혁명적이었습니다. 성전제사보다는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동정심)과 구체적인 선행이 참 제사라고 했습니다. 고통에 짓눌린 백성과 천민은 그들의 죄 값이라고 보지 않고 불의한 세력에 의한 희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왕권은 하느님이 불원간에 메시야를 보내시어 공의로운 통치를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용기 있는 예언자들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처단되고 말았습니다. 소수의 참 예언자들은 조직으로나 체계적으로 운동을 하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피다지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역사 속에 살아 실낱같이 이어졌습니다. 생명의 줄이었습니다. 구약성서로 볼 때 유대의 역사에는 점차 참 예언자들이 나타나지 않았고 깊은 암흑의 역사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빛의 기미도 찾을 수 없는 유대민족은 그리스제국과 로마제국의 세력 하에 더욱이 절망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제는 신약성서로 가 볼까요. 신약성서는 크게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생각과 사도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을 견줘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대놓고 ’고통은 이것이다‘ 한 곳은 없으니, 성서 전체 속에 흐르는 맥락을 잡아볼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고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 본연에 배어있는 고통’으로 보았다면, 예수님은 ‘인간사와 그 관계에서의 인간고통’으로 그 이해를 달리합니다. 그러니까 흔히들 아는바와 같이 불교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4고(苦), 즉 한 인간의 존재 자체가 가지는 고통을 말했다면, 예수는 인간 그 존재가 사회적 관계와 더불어 발생하는 고통에 더욱 관심하였다고 봐야한다 그런 말입니다.
당시 역사적 사회상은 로마제국의 속국이었고 자치왕국은 허울뿐 제국의 앞잡이였습니다. 그리고 전통적 성전체제는 그런 영악한 앞잡이 권력과 결탁하여 유지되었고, 백성은 벅찬 세금과 가난 속에 허덕이며 피 압제로 말미암아 절망적 생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민족주체를 찾고자 결사 항전하는 투사로, 일부는 하느님의 심판만 기다리고 은둔도피로, 또 다른 일부는 기득권에 빌붙어 기회주의 보신주의로, 마지막으로 다수 일부는 좌절과 절망적 생을 연명해야하는 구조적 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무지, 질병, 빈곤, 차별의 바닥에 살 수밖에 없는 민중과 천민의 ‘고통’을 보았고, 그 ‘고통’의 원인과 그것으로부터의 자유해방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복음서로 보는 예수님 생애의 족적은 분명 당시의 저항적인 민족자결 세력에게도 은둔성결 파에게도 기회주의 쪽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체제와 제도의 나락에서 차별받으며 좌절과 절망으로 하루하루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민중과 천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의 고통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고,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했을 것이라 봅니다. 병자의 고통, 장애인의 고통, 굶주림의 고통, 경멸을 받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일체화 하고, 그 고통에 참여하면서도 그 고통을 돌파해 나가는 해법이 무엇일까도 고심했을 겁니다.
조금 전 저는 예수님은 자신의 내적 자아와 한 인간 본원적인 고통을 씹어 내기보다는, 인간질서의 관계적 부조화에서 나타나는 고통을 보았다고 언급했습니다. 고통의 원인과 그 고통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당겨 스스로 짊어지고 함께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구약성서적인 전거에서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과 행복이 보장받고, 그 말씀에 거역하면 저주와 고통에 내 팽개친다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으셨다고 봅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는 점점 그 정신과 내용이 기름 빠지듯 말라버리고, 성전제의와 정결의식 그리고 각종 하부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삶의 정황 속에서 지킬 수도 없는 자들은 죄인시하고, 지키는 자신들은 스스로 의인시하는 구조에 ‘아니오.’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사회구조적으로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죄인으로 낙인찍기에, 예수님은 그 죄인의 친구가 되었으며 아예 죄인의 온 고통을 덮어쓰고자 한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서가 말하는 당시의 죄인이란 지금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을 (자의지적으로) 떠난 인간을 말함이 아닙니다. 당시의 성전 제의적 체제에서 성스럽고 구별되게 제사에 나아가고 그 율례의 자잘한 것에라도 충성되게 지켜야 하는데, 하려해도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이 못하는 민중과 천민들을 죄인이라 한 겁니다. 다시 말해 당시 성전 제의체제는 상황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많은 민중들에게 무거운 짐이요 죄책감만 잔뜩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르다와 마리아, 그녀들의 오라비 나자로, 자캐오, 하혈하는 여인, 38년 된 앉은뱅이 장애인, 문둥이들, 소경들, 중풍병자들, 귀머거리, 벙어리, 간질병자, 귀신에 잡힌 자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고통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안고 사는 그 모든 사람들을 고치고 회복시키려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을 통해서 보는 고통의 문제는 고통 받는 자 스스로가 자신을 고통을 이기기 위해 수행을 한다든지 부단 없는 어떤 노력을 기울인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고통을 발생시키는 원인을 규명하고 그 원인이 성립하지 못하게 미연에 방지하던지, 그 원인을 제거하던지, 그 원인이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어떤 방도를 취하던지 해야 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이런 공식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으나 사실은 기계론적인 논리일 뿐입니다. 오늘날의 사회과학적 영역은 대체 이런 경로를 선호하고 연구의 폭이 넓어지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해결방안은 각도를 달리합니다. 사회과학적 원인규명과 해결방안으로 본다면, 사회구조나 체제를 바꾸는 노력(운동)을 해야 합니다. 이는 정치적 방법, 교육론 적 방법, 혁명론 적 방법, 문화론 적 방법 등 다양한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이미 우리는 무수한 실험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통의 문제를...
저는 예수님의 방법을 이렇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즉 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또 우리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고 그 고통을 덮어쓰는 겁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 비법입니다. 고통을 가하는 자를 제거하려 투쟁하려 할 때 고통을 가하려하는 자는 제하려 하는 자와 맞서 항전합니다. 원래가 그렇지 않습니까? 싸움을 이긴 자가 무서운 게 아니라 이기고 지고에 관계없이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무섭지 않습니까? 고통을 가하는 자는 자신을 제거하러 대드는 자보다 고통 받는 자 편에 서서 저 자신도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만큼 두려운 게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죽는 게 사는 것이요,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 했잖습니까?
그런데 이상하죠.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고통해결 방법을 묘하게 비켜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구약 성서적 전거를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은 고통의 바다를 살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을 떠났기 때문에 죄의 벌이 고통이다.’ 이 기초에다가 새로운 제의적 전거로 ‘그 죄를 용서받으면 벌이 상으로 변하고 고통이 기쁨으로 변한다.’고 하는 후속을 잇습니다. 다시 말해 그 죄의 용서는 ‘십자가 위에서 고난과 죽음으로 대속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적용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있어서 영원한 죄로 인한 고통의 벌은 이렇게 유일회적으로 해결된다는 게 복음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고통은 더 이상 죄에 대한 벌의 고통이 아니라 더 큰 상급을 위한 시련(시험)이라고 하고, 믿지 않는 자는 아직도 죄로 인한 고통의 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지금의 기독교의 고통해방의 원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관념적이고 심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역사적이고 관계적이며 영적인 고통해방 원리가 왜 이렇게 왜곡되었을까요? 그것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 이름으로 성립된 신약성서의 전거가 그를 뒷받침 해 주었고 기독교 교리의 주춧돌을 놓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유대교의 제의적 죄 사함이 예수님에게서 유일회적 제의로 완성되었다는 해석으로, 원래 ‘하느님 나라의 도래(到來)’라는 복음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삶을 본받아야 할 기독교가 예수님에 관한(대한) 생각과 그에 따른 종교생활로 바꾸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이 생각하는 ‘고통’의 의미보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통’의 의미에만 집중하고 해석하는 겁니다.
이쯤에서 저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덧붙이고자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지금 사순절 기간을 정하고 신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절정에는 예수님의 운명 일까지 7일간을 ‘고난의 주간’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기독교에 있어서는 ‘고통’과 ‘고난’의 극치에 가신 예수님을 상기하고 교회에서는 기도와 성례로 생활로서는 절제와 금욕으로 영성에 참여하려합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죄와 그 죄로 인한 벌(고통)의 심연까지 내려가셔서 남김없이 짊어지고 제물로 산화하신 예수님에 집중하는 겁니다.
저는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받으신 고뇌와 고통(난)에만 왜 집중해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유대교적 제의적 유비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해석하는 의도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고뇌와 고통(난)은 일생을 통해서 있어왔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고통의 구조에 대하여 끊임없는 질문과 해법을 고민하였을 거라 봅니다. 일생을 통해 고통 받는 자, 압박받는 자, 천대받는 자에게는 관심과 깊은 동정심으로 대하시고, 건너편에서 풍요로운 삶과 반듯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는 왜 그렇지 않았을까요? 또 굶주린 자, 헐벗은 자, 목마른 자, 떠도는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저는 예수님이 세계의 구조를 모두 고통 받고 있는 자를 밟고, 그 위에 또 밟고 있는 자가 있어 피라밋처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바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가장 많은 고통과 압박을 받는 거죠. 결국 위로 갈수록 밟고 있는 극소수만 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구조를 반대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예수님은 역 삼각형의 가장 아래 꼭지 점에서 모든 무게(고통)를 받겠다는 삶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생각과 삶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아래로 내려가 더 많이 압박받고 고통 받는 대로 자신의 삶의 위치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말은 바꾸어서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며, 나의 것을 비우고 남을 채우며, 나를 부려서 남을 섬기는 삶일 겁니다. 모두가 예수님처럼 가장 아래 꼭지 점으로 가려 할 때 고통은 사라질 겁니다. 그러면 있어도 없는 겁니다.
성서에서는 곳곳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고통을 허락하는 하느님과 고통을 들고 인간에게 그 역할을 하는 악마(영)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 천사에 의해서 심판과 벌로 고통을 가하기 위해 재앙의 대접을 쏟는가 하면, 영원한 형벌로 지옥의 고통을 그려 놓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 예수님은 죽은 후 영으로 그 지옥까지 내려가셔서 고통 중에 있는 영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했다고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보는데 있어서 신화적이고도 묵시적 문학양식에 대해 옳으냐 그르냐가 문제 삼을게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고통을 이해하려했으며 또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가를 고민하고 풀어내려 했는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 이젠 정리하고 결론을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고통’을 어떻게 보는가? 그 고통의 원인이 어디로 부터인가? 그리고 고통을 해결하는 방안은 어떠한가? 저는 아무리 성서를 보아도 예수님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명상이나 마음수행 등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얻었다고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고통을 주관하는 신이나 그 부리는 영과 타협하거나 싸워서 자신과 인류를 고통으로부터 구출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또 한편 예수님은 고통을 가하는(만들어 내는) 자로부터 고통 받는 자를 구하기 위하여 그 가하는 자를 제거하려 하는 행동도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을 내면적이고 유심론적 관점에 고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신화론은 더욱이 아닐 것 같고요, 좀 더 존재론적이고 구조론 적이라고 저는 접근하여 보았습니다. 곧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우리의 모든 고통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관계 구조적 체계로 구축되기에, 결국 풀어내는 것은 욕망을 끊어내는 내면적 작업이 아니라 고통을 뒤집어쓰는 작업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뒤집어쓰고 짊어져주며 나아가 예수님처럼 가장 무게를 많이 받는 바닥의 꼭지 점 그 정점에 내려가려하는 마음과 행동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영원한 외톨이가 되어 떠다니는 부랑인 형제들과 공동체로 15년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야 어떻든 가족관계로부터 버림받고 절망의 나락에서 그 영혼이 신음하면서 몸부림하며 사는 모습을 보고 삽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사지 멀쩡하고 아직 젊은데 얼마든지 일어서려는 의지만 있으면 최소한의 삶을 살 수 있지 않느냐 합니다. 그리고 그 추한 모습과 냄새하며 술에 빠져 비틀거리는 모습에 동정의 눈길을 주려하지 않습니다. 애써 눈길을 돌리거나 경멸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어떤 동정이나 도움도 그들을 살려내기보다 더욱 고착시키는 데 일조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표피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역겹고 싫어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도 얼마나 부담이고 거추장스런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정말 인격과 인권을 존중해야 할 것인지조차도 의문을 갖습니다.
이런 부랑인, 거지, 노숙자는 물론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버림받은 아이들, 미혼모, 성 매춘자, 무의탁노인, 절대빈곤자 등과, 아예 사회적으로 격리된 수형자, 정신질환자들을 상기해 봅시다. 이 모든 분들이 나와 아니 우리사회의 구조적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욕망과 경쟁이 무한대하게 펼쳐지는 자유 시장체제에서 무능력하게 아래로 추락하는 그들과 무관하게 우리 또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밟고 딛고 서있고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의 아래로 내리 누르는 압박과 압제 구조에서 그 누가 자유롭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이 구조의 고통 역(逆)정점을 보시고 그 곳으로 내려가셨다고 봅니다.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고 찬미하는 것이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신앙이 아니라, 그 예수님처럼 오늘의 분신예수가 되어 그 짐을 함께 지러 그 곳으로 내려 가야하는 것이 고난주간의 신앙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참, 결론짓는다는 게 그만 설교조로 되었군요. 죄송합니다. 그냥 이상으로 맺을까 합니다. 기회 있으면 차후 더 나누기로 하죠. 감사합니다.
2009년 3월 29일 송도성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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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삼각형 꼭지점의 정점이 되는 자리...고마운 글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진 모습이 꼭 포청천 같에요.^^)
우~와 도사 목사님이다...(울 4학년 아들 표현임당) 목사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추한모습과 역겨운 냄새의 부랑인 노숙자를 어떻게 15년씩이나 같이 사실 수 있는지... 보통사람인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언제 가까운 자리에서 뵙고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
하늘 뜻 펴기.......감사합니다.......피차간에 그런 초심을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강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