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몇 년 전부터 반재경 전도사님이 작성한 글로, 매년 교정 및 첨삭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
'죄'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끊어질 수 있었던 아주 질기고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은 죄를 지을 수는 있으나 그것을 사(제거)하거나 끊을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고 죽으셔야 할 만큼 죄는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죄의 근원은 바로 사단의 교만입니다.
이 교만이 아담과 하와에게는 어떻게 역사했는가?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길 원했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이미 하나님과 같은(same이 아닌 like) 존재이니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단의 말에도 이미 거짓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아지길 원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인 존재로 활동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것도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못 믿겠으니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교만을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만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교만은 '오만과 거만'뿐만 아니라 부끄러움, 내성적인 성격, 낯가림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부끄러움 역시 자신이 타인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기에 그 뿌리도 교만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태어났기에 물 밖의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고 물 안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고 그것이 전부이듯이 우리도 이미 타락한 죄의 세상에 태어났고 그러한 가정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제가 지금 설명하는 것이 너무 극단적으로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마치 죽으러 가는 것 같이 느껴지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은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니까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고, 그분이 위대하지 않고, 그분이 선하지 않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그러한 세상의 이치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렇게 '자기'는 없고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셨으나 그 어떤 이름보다도 높아지셨고(엡 1:21, 빌 2:9) 앞으로 모든 무릎이 그분에게 꿇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롬 14:11).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는 길이라는 말씀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통해 분명하게 성취될 것입니다(마 20:26).
그러면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입니다. 예수님은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나마 오해받을까 봐 나에 대해 설명하고, 방어하고, 변명하고, 조금이라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군지 아셨기에 다른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으셨지만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계속 설명하고, 증명하고, 변명하고, 이해받으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타인들과의 교류와 교제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예수님께는 그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오해하고 중상 모략할 때도 그것을 무시할 수 있으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으셨을까요?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선하다는 것을 아셨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가장 정확한 정의입니다. (겸손 = 하나님을 알기에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
이것의 반대, 교만에는 엄청난 불안이 따라오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분만 의지하는 겸손에는 엄청난 평안이 따라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고방식에는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오늘 제 글의 제목을 다시 한번 음미해 봅시다. "성공적인 인간관계의 열쇠".... 그것은 바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해서 사람들의 의견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적인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