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전라남도 풍속이 화순한 고을
인기멤버
hanjy9713
2023.12.31. 20:38조회 4
댓글 0URL 복사
풍속이 화순한 고을
화순군은 본래 백제의 잉리아현(仍利阿縣)이며, 고려 때 화순으로 고쳤고, 동북과 능주를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세조 때 사람 허종의 시에 “마을 연기 한 가닥 성긴 울타리에 연했는데, 곳곳의 꽃 숲에 콩새가 우네. 동네 길 어둡지 않아 소가 홀로 가고, 강 구름 장차 비가 오려나, 제비가 낮게 나네. 풍속이 소박하고 간략하니 종래부터 후했고, 산이 순수한 정기를 감췄으니 발설하기 더디네”라고 하였던 화순군 능주면은 능성현이었으나,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 능성 구씨의 성향(姓鄕)이라는 이유에서 능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그런 연유로 나주처럼 목사고을로 불리는 능주면 남정리에 조선의 대표적 개혁사상가였던 조광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광자(狂者) 또는 화태(禍胎, 재앙을 낳는 사람)라고 불렀다. 그것은 적당히 머리 조아리고 요령껏 사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원칙에 철저하고 앎과 행함을 일치시키려 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인데, 그러니 조광조의 앞선 실천이 도리어 화를 가져오는 미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천주의자였던 조광조는 평안북도로 귀양을 간 김굉필에게서 17세의 어린 나이에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성리학만이 당시의 만연된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 새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념이라고 확신하였다.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조광조는 30대의 젊은 나이로 사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헌에 오르면서 개혁의 강도를 한층 더 높였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책봉된 공신들 중 하자가 있는 사람들을 공신 명단에서 삭제하는 것이 훈구척신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개혁의 동반자였던 중종의 사림 견제 심리까지 더하여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실패로 돌아갔다.
훗날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자질과 재주가 뛰어났음에도 학문이 부족한 상태에서 정치 일선에 나아가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라고 조광조를 평가하였다. 1519년 11월에 능주로 유배된 조광조는 그해 12월 20일 적소에서 죽음을 예감한 듯 “신하 한두 사람 죽이지 못한대서야 임금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라며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뇌까렸고, 곧바로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조광조는 죽기 전에 “임금을 어버이같이, 나랏일을 내 집 일같이 걱정하였노라. 밝고 밝은 횃불이 세상을 굽어보니 거짓 없는 이 마음을 훤히 또 비추리”라는 시 한 편을 남겼다.
한편 이곳에서 태어난 또 한 사람이 있는데, 세조 때 좌익공신에 뽑혔고 능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던 구치관이다. 성품이 바르고 엄하며 욕심이 없고 신중하여 평생 재산 늘리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에 관한 글이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령부원군 신숙주가 영의정으로, 능성부원군 구치관이 새로 우의정으로 있을 때의 얘기다.
세조가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들였다. 세조가 “오늘 내가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능히 대답을 하면 그만둘 것이요,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인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라고 물었다.
두 정승이 공손히 “삼가 힘을 다해 벌을 받지 않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조금 후에 세조가 “신정승” 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곧 “예” 하고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신정승(新政丞)을 부른 것인데, 그대가 대답을 잘못하였다” 하며 큰 술잔으로 벌주 한 잔을 주었다. 또 “구정승” 하고 부르자 구치관이 “예”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나는 구정승(舊政丞)을 불렀는데 그대가 대답을 잘못하였다” 하고 벌주 한 잔을 주었다. 또 “구정승” 하고 부르니 구치관이 대답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구정승(舊政丞)이라 불렀는데 그대가 대답을 잘못하였다” 하고 벌주 한 잔을 또 주었다.
임금이 또 부르기를 “구 정승”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자 “내가 구(具)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벌주를 준 뒤 또 부르기를 “신 정승” 하니 구치관이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내렸다. 그다음에는 “신정승” 하고 불렀더니 신숙주와 구치관이 다 같이 대답하지 않았다. 또 “구정승” 하고 불렀는데도 둘 다 대답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고서 또 벌주를 주었다. 종일 이와 같이 하여 두 정승이 벌주를 마시고 극도로 취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운주사 © 유철상
[네이버 지식백과]
풍속이 화순한 고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2012. 10. 5., 신정일)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