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워싱텉주 셔헤일리스 [2]
가끔 우리는 진지한 철학적 질문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신은 하늘에 있는 님자가 아니야." 학교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던 어느 날 제니는 이런 얘기를 했다. "신은 하늘이야. 그리고 저 구름과 나무, 또 너와 나이기도 해."
다시 정신이 들어 현재로 돌아오자, 테니스 코치는 아버지의 빠른 쾌유를 바란다고 말했다. 코트 반대편에 제니의 금발 곱슬머리가 보이길래, 나는 손을 흔들어 인사 했다.
"가자." 엄마는 한국어로 말하곤, 다시 영어로 말했다. "이제 가야지."
우리는 차를 타고 아버지 병문안을 갔고, 나는 병실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말없이 아버지를 처다보았다.―
아버지는 다시 환자가 되었고 엄마는 간호사 역할을 했다. 둘에게는 이제 익숙한 열할이었다. 엄마는 늘 의사의 지시를 철저히 따랐는데, 아버지는 먹고 싶어하는 음식 위주로 식단을 짰지만, 의사가 나트륨과 포화지방을 줄이고 섬유질을 더 섭취하라고 하면 그 때마다 조리법을 바꿔서 콩으로되 소지나 두부로 된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식물성 단백질이 유행하기 한참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엄마는 항상 아버지의 심장이 잘못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아버지가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가 벌어온 돈을 너무 많이 쓰지 않도록 일을 두 군데너 다녔고, 그러면서 집도 흡잡을 수 없이 깨끗하고 안락하게 관리했다. 마치 퇴근 후에 세 번째 직장 일을 하듯이.
엄마는 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단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줄여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에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두 분의 관계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엄마는 감정노동을 하며 불만과 과로에 시달렸고, 아버지는 엄마가 신경질을 낼 때마다 되받아쳤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상선 선장에서 은퇴하는 것뿐이었는데, 아버지의 은퇴는 새로운 스트레스를 가져왔다. 주로 돈 문제와 엄마 문제였다.
은퇴와 더불어 부모님의 갈등엔 새로운 막이 열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두 분은 석 달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내본 적이 없었다. 남자 선원들만 모아놓은 상선에 올라 지휘을 내리던 선장 자리에서 물러나 집에서 통제할 수 없는 두 여자― 불안한 10대 딸과 성깔 있는 아내―와 지내야 한다는 건 아버지에게 상당히 어려운 변화였음이 틀림없다.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는 늘 모든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아버지에게서 점차 독립해가던 엄마는 관심을 줄 여력이 있다 해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는 점점 더 서운해하며 화를 냈고, 나는 부모님이 그동안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집안에는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끊임 없이 이혼하겠다며 서로를 몰아세웠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서 부모님과 두 분사이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느날 부부 싸움 소리가 들리지 않게 수지 앤드 더 밴시스 밴드의 「Happy House」를 크게 틀어 놓았는데도 엄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가 대학만 들어가면 당신이랑 헤어질 거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달려나가 소리쳤다.
이런 소리 그만 듣게 그냥 당장 이혼해!" 내 성질에 놀란 두 분은 일단 싸움을 멈췄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상황을 바꿀 힘이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둘이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아진 것은 아버지가 일을 그만둔 것뿐 아니라. 엄마가 갑자기 채집하러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다시 바다로 나가고 싶다고, 엄마랑 계속 있다간 죽을 것 같다고 불평하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자 않았다.
부모님의 결혼 생활은 늘 불안정했고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싸움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다리 높이만 했을 때니까 아마 두 살이나 세 살쯤 되었을 것이다,아버지는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할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기실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을 10년 넘게 억눌러오다가, 어느 날 아버지가 엄마 코에 상아가들어 있으니 반코끼라라고 엄마를 놀릴 때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