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9;10 ]
오늘날 찬란한 전기 문명의 시대를 일궈낸 진정한 공로자라고 평가되는 패러데이의 이야기입니다.
생전 아인슈타인의 연구실 벽에는 패러데이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아인슈타인은 “전기의 아버지.”, “역사상 가장 실험을 중시한 과학자.”라는 칭호를 받는 마이클 패러데이를 존경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전문적으로 공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가난하여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신문 배달원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신문 배달이란 한 집에서 다 읽으면 얼마 후 도로 찾아다가 또 다른 집으로 그 신문을 배달하는 그런 식이었답니다.
그러다 열세 살이 되던 해 마이클은 좀 더 돈벌이가 되는 조지 리바우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책을 만드는 제본소에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본소에서 7년은 그가 수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곳에서 <대영 백과사전>을 탐독했고 제인 마세트의 <화학이야기>를 읽고 과학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당시 험프리 데이비가 유명한 과학자였는데 어느 날 한 손님이 왕립협회 교수였던 데이비의 공개 강연 4회분 입장권을 그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는 데이비의 강의를 듣고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 제본소에서 386페이지나 되는 책을 만들어 데이비 경에게 편지와 함께 선물했습니다.
“존경하는 데이비 선생님, 선생님의 강의에 큰 감명을 받고 여기 그 내용을 정리한 책을 보내드립니다.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선생님께서 원하신다면 선생님의 일을 도와드리며 과학을 좀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강연을 이렇게 세밀히 듣고 정리하여 책을 만들어냈다는 데 대하여 데이비는 크게 감동했고, 1813년 겨울, 마침 실험실 사환과 실험 기구 제작상이 사소한 다툼으로 사환이 파면되는 일이 발생하자 데이비는 곧바로 패러데이를 채용했습니다.
적은 보수에다가 패러데이가 하는 일이란, 데이비가 강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실험 기구를 장치하고, 실험 일지를 적고 청소를 하는 등 온갖 궂은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실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점점 더 중요하고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1823년, 염소의 산화에 대한 연구로 마침내 그는 왕립협회의 회원이 되었었는데 그가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는 것을 반대한 사람은 스승이었던 험프리 데이비였습니다.
패러데이의 가입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반대표는 단 1표가 나왔는데 제자를 시기한 의장이었던 그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패러데이가 자신의 모터를 훔쳐 갔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패러데이의 논문에 손을 대 자신이 기여했다는 문구를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패러데이는 교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과학 연구에 정진하여 패러데이 법칙을 발견하고 전자장론의 기초를 확립하였습니다.
그는 당대나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인격적인 과학자였습니다.
찰스 길리스피는 패러데이를 "최고의 질서정연한 과학연구자"였다고 칭송했고 "이 사람만큼 명성을 좇는 야심과 어울리지 않고, 상냥한 성품과 온화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극찬하였습니다.
패러데이의 후임이었던 존 틴들은 무신론적 불가지론자로 "패러데이가 기도실 문을 열 때, 그는 실험실의 문을 닫는다."라고 했지만, 그의 인품에는 감복이 되었습니다.
만일 특허를 냈다면 패러데이는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지적인 노력에 대해 상을 준다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한평생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1858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보다 못해 일흔 살이 다 된 이 노 과학자를 위해 런던에 한 저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사람입니다. 그럴 만한 자격이 제게는 없습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이 위대한 과학자에게 여러 가지 학위와 상을 주려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겸손히 사양하였습니다.
1867년 8월 25일, 세상을 떠날 때에도 패러데이는 영국의 위대한 인물들이 묻힌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굳이 사양하고, 하이게이트라는 작은 묘지에 묻히기를 소망했습니다.
영국은 많은 과학자들 가운데 대영제국의 20파운드 지폐에 그의 초상을 넣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산 원동력은 신앙에 있었습니다.
어린 그에게 가장 신나는 일은 성경을 철저히 믿는 작은 교회에 온 가족과 함께 나가는 일이었답니다.
무엇인가 조그만 가지게 되면 교만해지고, 하나님이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는 과학자였지만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성경의 내용은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람들에 의해 더해지거나 보태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모든 시대와 환경 가운데 사람들에게 유일하면서도 충분한 안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하신 일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요.
예수님을 믿은 증거란 예수님이 명하신 일들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유명해져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1840년에는 자신이 섬겼던 교회에 50세 때부터 그 교회 정규적인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그의 연구 성과에 관하여 자만하거나 교만해 하지 않았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가난한 하층민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자수성가하여 기회를 잡고, 견제와 지병의 고통 속에서도 온화한 인품을 지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갔습니다.
기사 작위도 사양하며 그는 "그냥 패러데이로 남고 싶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을 급히 알현하러 가는데 교회 주일 예배 복장을 갈아입지 않고 그냥 그대로 알현했는데 옷을 갈아입으려면 교회 예배에서 먼저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답니다.
왕보다 하나님을 더 존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는 과학자였지만 과학주의에 빠져 교만하거나 경거망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은 한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두려움이나 희망 또는 미래의 생활에 관하여 골똘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믿기로는 인간의 정신력이 아무리 강하고 고상하더라도 그것으로 미래에 관한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에 관한 진리는 인간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에 의해 인간에게 알려지며, 인간은 이 주어진 증거를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지식이 있다고, 조그마한 권력과 부와 명예가 있다고 머리를 치켜드는 인간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합니다.
곡식을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든 삶의 진리로 삼고 성경대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사는 것이 지혜 중 지혜요 복 중에 복이랍니다.
진정한 겸손은 성경대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1;1)
할렐루야 ~!!!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권 능력으로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일에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한 행복한 한 주간 되시길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은혜로운 찬양 >
https://youtu.be/9783bj7mRFI?si=gcFNrQ2OAF0Lr5la
첫댓글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