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 마음 가지치기
송순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나보다 어느 새 20년이 되었다.
밭 가장자리에 울타리 겸 게 두릅나무를 심었다. 게 두릅은 참 두릅에 없는 가시가 탱자나무처럼 많다. 마치 압정 같은 가시가 사람을 위협한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나무이다.
새순이 나면 쌈으로 먹거나 나물로 무침해서 먹는데 쌉싸로운 맛이 난다. 참 두릅은 쓴맛도 없고 가시도 없어 맛이 부드럽다 지역별로 보면 강릉지역 사람들이 게 두릅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쓴 것이 몸에 좋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한 두 번 먹고 나면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은데 남편이 따오면 나는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모르겠다.
울타리 겸 심어놓은 나무가 울타리 역할도 훌륭하다. 가시를 뚫고 들어온다는 것은 철망을 뚫고 지뢰밭을 걷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마다 새순이 돋아나면 남편은 조금씩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고정적으로 주문하는 지인들이 있는 것으로 볼때 게 두릅나물을 좋아하나 보다.
우리부부는 게 두릅나무 가지치기를 하기로 했다.
고무장화에 속에 두꺼운 양말을 신고 단단히 준비하지만, 압정 같은 가시가 신발 바닥에 박혀있는 경우가 있다.
손이나 발에 찔려도 아프고 붓기까지 한다.
20년동안 자란 나무는 단단해졌고 우리가 다가가기에 위험할 정도가 되었다.
남편과 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왕이면 과감하게 쳐냈으면 좋겠는데 남편의 소심함인지 아까운 것인지 내 성에 차지 않게 가지치기를 하였다.
언제 또 이 어려운 가지치기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과감히 쳐내기를 원했지만 남편은 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 야속한 마음이 들어 말 다툼이 되었다.
함께 일을 하면 종종 마음의 가시로 서로를 찌른다. 일도 힘든데 필요 없는 감정 소모를 한다.
짧은 사다리와 긴 사다리를 이용해서 전기톱으로 가지치기를 하는데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마치 탱자나무 같다. 내 어릴 때 이웃집에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한 집이 있었다.그 집은 견고한 성처럼 보였었다. 도둑을 막아내는 큰 역할을 해냈을 것이다. 우리 밭 주변에 심어놓은 게 두릅나무도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할 것 같다.
덕지덕지 붙은 가시나무가 사람에게 덤치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기에 조수 역할을 제대로 해주어야 했다. 나 역시도 위험에 놓인 입장이었다.
남편에게 덮치지 않도록 긴 장대로 나무가 쓰러질 방향으로 잡아주었다. 잘린 가지는 옮겨야 하는데 이것 또한 작업이 수월하지 않았다. 불편한 나무를 심어놓은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사막에서 자라는 선인장은 잎이 가시로 변했다고 한다.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는 최대한의 수분을 막기 위해서 잎이 가시가 되었다 하지만, 우기량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게 두릅나무는 잎도, 가시도 자라면 크다. 잎은 어린아이 손바닥만 하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일까?
가시를 주의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가시 돋친 것은 무엇일까? 나와 다른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 중용을 걸어가지 못하는 것, 꼭 한마디 해주고 상처 주기, 원하지 않는 조언 하는 것... 내 안에 가시가 참 많다.
오늘 잘려 나간 가지들처럼 내 안에 있는 가시는 버려져야 할 것이다.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자란 나무가 우리를 위협하듯 내 마음의 모순을 그대로 두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뾰족한 내 안의 가시를 뽑아내야 부드러운 대인관계를 만들 수 있겠지,
우리 부부는 가지치기를 하면서 손과 발에 찔리는 아픔을 겪었지만 자신 안에 가시가 있음을 발견한 성찰의 시간도 되었다.
끝
첫댓글 제 마음에도 가시가 참 많습니다.
감추면 삐쳐 나오는 가시
잘라내면 또 나오는 가시
나의 가시로는 남을 찌르고
누군가의 가시에 나도 찔리고
세상이
온통 가시밭길입니다.
모두가 상처투성입니다.
카페에 읽을 작품을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