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19일(목)■
(누가복음 17장)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묵상/눅 17:3-4)
◆ 책망하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주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라고 하셨다. '경고'에 해당하는 에피티마오(επιτιμαω)는 '경계'로 번역되기도 했지만, 주로 '꾸짖다'라고 번역되었다. 귀신을 꾸짖어서 내쫓거나(마 17:18), 베드로를 꾸짖으실 때 사용한 단어이기도 하다(막 8:33). 영어 성경에서는 모두 책망(rebuke)으로 번역했다.
요즘 교회에서 '책망'이 사라졌다. 버젓이 죄를 범하고 천연덕스럽게 그것을 말하는데도 모두 침묵하고 있다. 그저 교인이 교회를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사주팔자 보고 온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웃으면서 들어주거나, 거짓말과 불륜과 횡령 등을 별 문제 삼지 않는다면 도대체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성도라는 사람이 종일 헛된 동영상이나 보고 있고, 성경은 뒷전이고 매일 연예인 기사나 탐독하고, 술에 취하거나 오락에만 빠져 있는 등 온통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한데도 아무도 책망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사람의 영혼은 결국 죽는다. 그리고 자기만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교회까지 오염시킬 것이다.
교회에는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책망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로마서 12장에서 언급한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곱 가지 은사 중에서 예언의 은사(롬 12:6)는 미래를 예언하는 어떤 초능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죄에 빠진 형제를 제대로 책망함으로써 잠든 영혼을 깨우는 사역이라고 본다.
그러나 섬김이 꼭 섬김의 은사를 가진 사람만이 해야할 일이 아니듯, 책망도 꼭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만이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해야 할 일이다. 책망하면 자신도 돌아보게 되고, 교회도, 세상도 밝아진다.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13). 아멘!
책망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지적질과 비난을 책망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잘못 책망하면, 그 영혼을 돌이키지도 못하면서 상처만 주고 관계만 서먹서먹해진다.
많은 경우에 실패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나의 권면 속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지적질로만 느끼고, 잘난 채로만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망하는 목적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를 공격하거나 내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그 영혼을 보호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책망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때를 놓치면 안 된다. 그럴 때 우리는 형제를 얻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책망은 예술이다. 때에 맞는 책망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잠 15:23)
◆ 용서하라
(3)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이제 책망과 대조되는 아주 중요한 성도의 덕목이 있다. '용서'다.
용서는 책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사실 비난하고 책망하기는 쉽다. 용서가 정말로 어렵다.
주님께서는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신다.
회개는 다름이 아니다. 그가 자기 죄를 인정하고 돌이킨다면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젊은 시절에 학생들과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할 연극을 준비했다. 나름대로 꽤 연습했는데, 공연하는 날, 음향을 맡은 학생이 결정적인 순간에 음악을 틀지 않았다. 그래도 그럭저럭 끝났지만, 나는 무척 화가 났다. 음향을 맡은 학생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이미 회개한 것이다. 나는 용서하고 위로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화를 내고 책망했다. 그 학생은 그다음 주부터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 영혼을 잃은 것이다.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지만, 돌이킬 방도가 없었다. 이제 회개해야 할 사람은 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수개월 후에 그 학생이 다시 교회에 나왔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책망해야 할 때는 용서하고, 용서해야 할 때는 책망하는 어리석은 짓을 얼마나 많이 범했는지.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이런 말이 참 어렵다.
꼭 회개해야만 용서하고 그렇지 않으면 야단쳐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상처 나는 말들을 들으며 살고 있다. 세상에는 무례하게 말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많다. 일일이 발끈하고 일일이 대항해야 하는가?
주님은 자기를 못박은 자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우리는 그러한 분을 주님으로 믿는 자들이다.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 말은 내가 육체가 못박혔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그렇게 툭하면 학교를 빠지는 딸을 위해 말도 못하게 마음 고생한 어느 학부모가 있었다. 그런데 그 딸이 기껏한다는 소리가 아빠가 내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에 상처받고 낙심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내, 남편, 자식 들에게서 받는 말 상처도 무시 못한다. 정말 내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주님께서는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일곱이란 숫자가 완전수라는 의미로서 실제로는 일곱을 넘는다는 의미를 배제하고 문자 그대로 일곱 번일지라도 그조차 인간의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경지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 절대로 올라갈 수 없는 경지다.
상대방이 내 성질을 긁는 상황 속에서 내가 죽었소라고 하며 힘 빼고 있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극기에 불과하다. 그런 삶은 자아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만심의 부활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며 용서하신 것을 바라보는 믿음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진짜 용서와 죽음을 체험해야 한다.
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믿어야 십자가의 죽음이 현실이 된다.
믿어야 내 속에 그리스도 영이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며,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주님,
매일 주님의 관용을 체험합니다.
주님의 관용을 저도 실천하게 해주십시오.
가지된 제가 주님께 붙어서 이 놀라운 믿음의 비밀을 체험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