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48
12월23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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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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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UnS-3YrBjw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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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탄이 아무리 수백 수천 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에 담긴 의미, 특히 성탄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고고 또 묵상해야겠습니다.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우리에게 건네는 짧막한 예화 하나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느님 육화강생의 신비, 예수님 성탄의 신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금슬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내가 큰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해도 왜 계속 그렇게 슬퍼하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여보, 내가 슬퍼하는 것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나를 덜 사랑할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그러자 남편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잠시 외출을 나간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본 아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외눈이라오.”>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예화입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나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탄에 아무리 되풀이 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하고도 장엄한 드라마인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조연들로 엘리사벳, 그리고 즈카르야가 있습니다.
아들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메시지에 즈카르야는 살짝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지요. 즈카르야는 10달 동안이나 말 한 마디 못하는 언어장애자로 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심연의 침묵 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베풀어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고목(枯木)과도 같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였지만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새싹을 틔워내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당하고 부족한 자신들을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의 중요한 도구로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즈카르야의 입을 열어주시자 마자 그의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운 좋게도 ‘침묵의 10개월’을 통해 그토록 고대했던 ‘구원’을 온 몸으로 맛보았습니다.
강렬하고도 짜릿한 구원체험이 즈카르야의 내면 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은혜롭게도 이미 낡은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암흑에서 빛으로 건너오는 파스카 체험을 맛 본 것입니다.
그 행복한 체험으로 인해 즈카르야 삶의 태도는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어두웠던 그의 낯빛은 기쁨과 설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세월은 희망의 나날로 변화되었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웠던 그의 일상은 화사한 봄날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체험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즈카르야가 맛본 구원 체험입니다. 파스카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선물로 주시는 보편적인 구원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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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mJD-GZOX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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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이 누구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 것인지 결정한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마리아처럼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집안에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요한의 집안에서는 요한을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즈카르야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이름은 자신에게서 오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대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제 요한은 즈카르야가 아닌 주님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 66)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이름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것인지 결정하는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개밥그릇을 가져온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사람 먹을 음식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사람 밥그릇을 가져와야 합니다. 밥만이 아니라 밥그릇도 자기 부모님이 주는 것입니다.
노력하면 될까요? 노력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이가 노력하면 어른이 될까요? 노력이 아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모든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일까요?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을 받게 만드는 것이 자녀에게 해로운 일이 아닐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97회에 ‘분노 조절 불가 금쪽이’가 등장했습니다. 하도 불안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데 이 아이의 화풀이 대상, 혹은 자기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대상은 엄마입니다.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으면 아이는 분노를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욕은 물론이요, 폭력까지 쓰기도 합니다. 신호등 대기를 하는 중에 남이 스치기만 해도 나이 불문 화를 냅니다. 화가 통제가 안 되는 아이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일까요? 자기 자신은 자기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그래서 도움을 찾습니다. 그게 엄마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립니다. 그리고 마치 그 처방이 잘 된 것처럼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프로그램에서 하는 처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진짜 문제는 도움을 부모에게서 찾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속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엄마에게 좋은 아이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엄마는 아이 마음을 알고는 자기가 더 열심히 해주지 못한 것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열심히 아이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때 아이가 변했나요? 아이가 불안한 이유는 자기 안전을 부모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안전을 온전히 책임져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아이의 불안은 자기 생명을 책임져줄 수 없는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그것을 책임질 창조자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지 않았고 다시 줄 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는데도 책임지려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망칩니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새로운 도움을 줄 수 있는 창조자가 있음을 알려주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창조자가 주는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 우승은 아르헨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프랑스가 이긴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는 아르헨티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메시는 나이가 많음에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가 비슷한 연령대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것과 대조됩니다.
메시는 ‘메갓’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메시를 응원하는 이들은 거의 그를 신처럼 떠받듭니다. 물론 메시는 골의 영광을 무조건 하느님께 돌립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축구의 신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인정한 것이 호날두와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서명은 ‘전 요셉’을 휘갈겨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십자가 모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삼용’은 죽고 ‘요셉’의 새 이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으로 저의 육체적 부모로부터의 도움을 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그분의 도움을 받는 사람임을 되새기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 이유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분명 자신의 이름이 왜 요한인지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 이후부터는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보살핌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정말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고 인간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큰 인물은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으로 불러줍시다. 그러면 인간의 도움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이름을 지어준 이를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나의 자녀가 누구의 손길 밑에서 자라게 할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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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대림특강이 있어서 필라델피아 한인성당에 갔었습니다. 같은 서울교구라서 하루 전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 강의를 시작하는데 1시간 전에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봉사자들이 왔습니다. 음향을 점검하는 분도 있었고, 제단의 꽃에 물을 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성령기도회 봉사자들이 와서 찬양으로 교우들을 맞이했습니다. 대림특강은 제가 하지만 대림특강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리 와서 봉사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특강이 끝난 뒤에는 여성구역에서 따뜻한 차와 간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교우들은 차와 간식을 드시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매주 미사를 가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도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10시 30분에 미사를 하는데 9시면 성가대에서 와서 연습을 합니다. 비슷한 시간에 성모회는 그날의 친교 음식을 준비합니다. 형제님들은 탁자와 의자를 준비합니다. 전례 봉사자들은 미사 준비를 합니다. 복사들도 미리 와서 연습합니다. 재정 봉사자들은 미사예물을 받고, 교무금도 받습니다. 미사는 제가 주례하지만 미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리 와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곧 주님의 성탄을 맞이합니다. 성서를 보면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500년 전에 이미 임마누엘의 탄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주님이 오시기 전에 길을 닦을 사람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사자는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보라 나의 뒤에 나보다 더 크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 질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사막에 샘이 넘쳐날 ㄱ서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거닐 것입니다.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언덕은 평평해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평등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즈카리야의 아내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마리아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마리아에게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아직 남자를 모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성령의 힘으로 그리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의 꿈에도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있었고,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가 있었고,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순명의 구유 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오십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웃과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며, 이런 이들은 형제의 고통과 절망,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런 자신의 행동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임을 깨닫게 되며, 이런 사람들에게 “임마누엘” 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이 임박해지면서 우리는 엘리사벳의 축복과 마리아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엘리사벳처럼, 마리아처럼 우리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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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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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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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 이야기(루카 1,5-25 참조)에 이어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 1장 57-58절이 전하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사건은 천사를 통한 탄생 예고와 잉태 보도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뒤 아홉 달이 지났음을 알 수 있는 증거들은(1,24.26.36.56 참조)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보도는 짧습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둘러싼 논쟁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이었습니다.(1,61; 1마카 2,1-2 참조) 그러나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과 아버지 즈카르야는 ‘요한’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요한’은 천사가 알려 준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사회 규범 사이의 충돌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풀립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천사에게서 아기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하였고, 이러한 의심으로 즈카르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1,18-20 참조) 즈카르야는 의심과 불순종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고, 뒤늦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분을 찬양합니다.(12월 24일 아침 미사 복음 참조)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을 마주하는 두 가지 태도를 보여 줍니다. 이 상반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저마다 과거에서 현재로 변화하기로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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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재현 베드로 신부님]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얼마 전 초등학생들에게 ‘성탄절은 우리에게 누가 오는 날일까요?’ 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예수님이라고 했지만, 그중 몇몇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상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에 큰 선물 주머니를 들고 손을 흔들고 있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어쩌면 학생들에겐 더 친근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탄절’ 하면 산타크로스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또 연말연시의 분위기에 젖어 성탄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성당에 꾸며진 구유 안에서 태어나셔서 성당에만 계시는 분이고, 성당을 벗어나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우리 가운데 와있는 뭔가 의미가 달라진 듯한 성탄절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림 제4주간에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들 중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여 신약을 여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이스라엘 구원을 위하여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며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 말을 못하게 된 즈카르야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정했을 때 그의 입이 풀렸고, 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들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있었던 요한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복음에 나오는 그의 설교와 삶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을 구세주 오심을 준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이사야 예언서 40장에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라는 내용처럼 요한은 구세주의 앞길을 예비하는 소리로서 하느님께서는 꼭 오시고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참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루카 3장 7절의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로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회개와 온전한 투신을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며,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권고합니다.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투신하고 절제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아온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이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합당한 준비를 하라고 촉구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이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그는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6-28)라고 칭찬을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시고,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며, 그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십니다. 또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우리는 요한처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진리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도 노력하고 기도합시다.
주님 성탄은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요한의 삶을 본받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시간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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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강정용 안토니오 신부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은퇴 후 산에 들어가 조용히 사는 어느 유명한 학자는 사람은 죽은 후에 이름을 남길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름을 남겨야겠다는 욕망이 인간의 삶을 그르치는 원인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묵상해 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핏줄의 인연을 끊음’을 의미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을 때 이웃과 친척들은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지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천사가 알려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요한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한평생 핏줄의 품을 떠나 ‘주님의 손길’ 속에서 자라고 ‘주님을 찾는 이’(루카 7,18-19 참조)로 머물렀던 사람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이름 요한은 세상에 속해 있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름입니다.
요한, 그 이름은 ‘광야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명성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구원을 알리는 소리입니다.(루카 3,4-6)
요한은 황량한 광야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구원을 알리는 소리가 되어 따뜻함을 전해줍니다. 하느님의 온기가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1,66 참조) 그분의 소리는 과연 광야의 냉혹함을 깨고 흐르는 따뜻한 기운이었습니다.
그분의 소리는 예언적이었지만 자비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완고한 소리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요한, 그 이름은 ‘주님의 뒤로 물러남’ 혹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끝자리를 마다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메시지입니다. (마르 1,7;마태 3,14 참조)
그의 이름은 자기 과시와 자기 도취에 곧잘 빠지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요한, 그의 이름은 다만 주님의 길을 닦는 소박한 일꾼으로 살다가 마침내 죽어 흔적 없이 사라진 이의 이름입니다. 요한이 죽은 뒤에 남긴 것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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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습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따르면 엘리사벳은 원래 아이를 못낳는 여인이었는데, 나이마저 많았지요.
그런데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즈카르야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반신반의하자, 천사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즈카르야의 입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1,5-20 참조)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처럼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지요. 그러자 그의 혀가 풀려 말하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을 대하며 인간이 생각하는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는 다르다는 점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철저하게 힘 있는 자아 중심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욱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합니다.
권력이나 재물이 있어야만 더 많이 가질 수 있기에 경쟁과 질시, 불화와 다툼이 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 세계에서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세계는 다릅니다.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과 같이 아기를 잉태할 능력이 없는 여인을 택해 생명을 만드신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생각하며,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게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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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날이 올 때까지>
루가 1,57-66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내셨으니
사람을 따름이 곧
하느님을 따름이
될 터인데
스스로
하느님 모습을 버린
사람 때문에
사람을 따름이 곧
하느님을 거스름이
되었지만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당신 모습
새로 부어주시어
사람을 따름이 곧
하느님을 따름이 되는
그날이 꼭 오기에
그날이 올 때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곧게
머뭇거리지 않고 힘차게
지금여기에서
사람을 거슬러
하느님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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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기의 이름은 요한>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야훼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신뢰가 형성되어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쓴 순간 즉시 혀가 풀렸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 실천되었을 때 입이 열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말에는 공수표가 많지만, 하느님께는 공수표가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말씀에 대한 신앙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 주님께서 너그러우시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카 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하느님의 역사에 순종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매여 있던 모든 고리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를 옭아매고 있는 거추장한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입이 열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 세례 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새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탄생이지만 기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성탄이 늦어진답니다. 자가격리를 하고 오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 혼란 속에서 주님의 손길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주님께 내어 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려있는가요?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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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서품을 받으신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의 서간집(1842-1860, 스승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을 읽고 있습니다. 순교하지는 않으셨지만,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셨습니다.
12년 동안 127개나 되는 교우촌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당신을 찾아오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찾아가셨습니다. 매년 7,000리(약 2,749km) 이상을 걸으며 어떤 고난과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신자들을 찾아 나셨습니다. 그 결과 탈진해서 만 40세의 한창나이에 병사하시지요.
이런 사목적 열정이 서간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음을 신자들의 열성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를 만나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석하기를 바라는 신자들을 외면하실 수 없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제는 훌륭한 신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은 과거와 달리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지 고해성사를 볼 수 있고, 미사 참석도 자기 편안한 시간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계속해서 편안한 신앙생활만을 추구합니다. 단적인 예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때, 잠시 방송 미사를 허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계속 신앙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당에 가서 미사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에 아예 나가지 않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어도 주님께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그 시대,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주님께 대한 열정보다 세상 것에 관한 관심이 더 많은 지금 시대 중, 누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실까요? 주님께 대한 열정을 키워야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관점보다 주님을 더 윗 자리에 모실 때 가능합니다.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듣고 세상의 눈으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아이를 갖기에는 자기나 엘리사벳 모두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요.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즈카르야의 입을 닫은 것입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관습대로 아버지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로 부르려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이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으면서, 세상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이 필요한 요즘이 아닐까요? 너무나 편하고 쉬운 신앙생활만 따르다가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게 입이 닫히고 혀가 굳어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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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정련>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주님 성탄을 하루 앞둔 오늘 교회 전례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얘기를 전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제련사와 정련사로 얘기합니다.
제련은 광석에서 금속을 빼내는 것이고, 정련을 빼낸 금속을 더욱 순수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이런 정확한 구분없이 비슷한 뜻으로 두 말을 쓰는 것은 둘 다 무엇에서 무엇을 빼냄으로서 순수하게 만드는 공통점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오실 주님을 합당하게 맞이하게 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무엇을 빼내고 무엇을 순수하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당장 생각나는 것은 사랑에서 미움을 빼냄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순수하게 하는 것이지요.
저에게는 인간에 대한 하나의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사랑을 받고도 싶어하지만 더 원하는 것은 주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개나 꽃이라도 사랑하려는 사람이 있고, 그러므로 인간이건 개건 꽃이건 사랑이란 것이 다 귀찮아지면 그런 사람은 죽을 때가 가까운 거라는 얘기가 있지요.
그런데 제게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또다른 믿음도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미움이라는 불순물이 예외 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성인일지라도 그의 사랑에 미움이라는 불순물이 있는데 성인과 속인의 차이는 그 불순물이 얼마나 적고 많으냐의 차이일 뿐이고, 불순물이 적을수록 불순물이 전혀 없으신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간 거지요.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열망과 갈망에서 욕망을 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에서 미움을 빼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왜냐면 하느님 사랑인 열망과 갈망에서
세상 욕망을 빼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욕망이란 우리의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이 빠지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사랑에서 세상에 대한 사랑이 빠지고
하느님 사랑만 남아야 하는 것과 반대지요.
그러므로 이 대림절 막바지에 우리의 사랑에서 미움을 빼내는 것은 물론 세상 욕망을 빼냄으로써 주님과 주님 사랑이 우리에게 오실 평탄한 길을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마련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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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출생>
-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은총이다”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4-5ㄱㄴ)
12월17일부터 시작된 대림 2부의 매일미사 말씀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이 모두 12월25일 탄생하실 구원자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마침내 예수님의 절친이자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전합니다. 새삼 나오는 인물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 오심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현재의 우리들 모두에게도 오시는 우리 주님은 새삼 우리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임을, 즉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오 임마누엘 우리 임금이시요,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하느님!”
대림2부 마지막 날 7일째 12월23일 M후렴 “오! 임마누엘(O Emmanuel)”, 애절한 가사와 곡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신비스런 출생에 앞서 잠시 수도원내의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요즘 근래 보기 드문 겨울 강추위가 더불어 참 많은 흰눈이 내렸습니다. 2000년대 들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예전 어렸을 때의 많은 눈과 강추위를 연상케 합니다. 어제 오후부터 수도관도 꽁꽁 얼어붙어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끝기도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려고 방에 들어가던차 마르코 수사님이 완전 군장한 듯 차림새로 나가기에 어디 가느냐 물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순대를 만들고 들어 온 수사님입니다.
“얼어붙은 수도관 물을 나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밤 12시30분에 기상하여 수도꼭지를 틀으니 지하수 물이 콸콸 나오고 있었고 순간 감동했습니다. 끝기도 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 수사님은 얼어붙은 수돗물이 나오도록 고쳐놨던 것입니다. 새삼 “신의 한 수” 같은 하느님이 부르신 수도성소임을 깨닫습니다.
마르코 수사님만 아니라 공동체 12명 수도가족형제들 모두가 "신의 한수" 같은 보물寶物, 하느님의 귀한 선물膳物같은 수도자들입니다. 마침 어제부터는 수도생활을 해보고자 젊은 성소자 한 형제가 함께 했기에 밖의 강추위와는 달리 저녁식사 공동체 분위기도 화기애애했습니다.
살아갈수록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하느님의 섭리 은총 아니곤 해명할 길이 없는 하느님의 선물, 보물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수도가족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 60대 성모님을 닮은 피정온 어머니들을 위해 미사중 강론시 ‘아침이슬’을 함께 불렀습니다. 웬지 이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완전히 20대 젊은이같은 모습으로 열창했습니다. 역시 70-80년대 민주화 운동당시 애국가와 같은 노래임을 새삼 깨닫고 감동했습니다. 이어 “아침바다 갈매기는”으로 시작되는 바다 동요도 힘차게 불렀습니다.
아마 자매들에게 이 두 노래를 부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넉넉하고 푸근한 모성애 향기 가득한 50-60대의 어머니들을 보면 마리아 성모님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절로 마음 끌리는 모성애 가득한 어머니들 덕분에 나라도 가정도 건재함을 깨닫습니다.
요즘 또 산책중 즐겨 부르는 노래가 70년대 후반부터 널리 불려졌던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입니다. 몇 번 소개했지만 1절의 가사와 곡을 부르며 주님의 평생 전사로서 신원을 확인하는 참 감동적인 노래입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수도원)’에 ‘군인이(수도자)’ 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30년(4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꽃다운 내청춘, 푸른옷(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말마디는 반복하곤 합니다. 흡사 군가같아 주님의 전사, 수도자로서 영적전의(靈的戰意)를 새롭게 하는 참 제가 뒤늦게 사랑하게 된 노래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두루두루 우리의 성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제게 다시 살라해도 이렇게 뿐이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수도자로 불림받지 않았다면 가정법의 질문도 참 부지없는 질문처럼 생각됩니다. 이렇게뿐이 살 수 없는 수도성소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분들 역시 잘 깊이 들여다보면 최상, 최선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섭리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하느님의 절대적 섭리 은총에 참 신기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불림 받은 이름을 쓰는 순간,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요한 이름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입니다.
새삼 아무도 하느님의 섭리 은총을 막지 못함을 봅니다. 막혔던 둑이 터지듯 저절로 흘러나오는 즈카르야의 하느님 찬미는 내일 복음에서 나올 것입니다. 즈카르야에게 생긴 기적같은 사건으로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였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말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물음은 대림시기 우리 자신에 대한 물음이 됩니다. “나는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끊임없이 물으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보살필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시고 한결같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제1독서 말라기 예언서 말씀대로 엘리야의 재림같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그 약속을 지켜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는 제련사의 불같고, 염색공의 잿물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 세례자 요한과 함께 주님의 길을 닦으며, 회개의 삶으로 주님께 돌아와 본연의 참나를 살게 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 2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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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57.63)
<즈카르야의 불순종과 순종!>
오늘 복음(루카 1,57-66)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오기로 되어 있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는 오늘 독서(말라3,1-4.23-24)가 전하고 있는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을 지니고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3,23-24)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처음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전하는 하느님의 뜻, 곧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의 탄생과 함께 혀가 풀려 다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가득 차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루카 1,67-79)를 불러드립니다.
신약성경 필사를 마치고, 지금은 구약성경 창세기를 필사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야곱이 형 에사우를 다시 만나는 말씀'(창세 33,11)까지 필사했습니다. 구약성경이 전하는 내용은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 메시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사우의 복을 가로채는 말씀'(창세 27,1-29)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전체, 곧 하느님의 인간 구원 역사 전체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으로 쉽게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힘인 성령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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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_AM5dMVlR6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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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 66)
아기는
새로운 가족이
됩니다.
어루만져 주어야 할
생명은 아기로
시작됩니다.
어린 목숨은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품어주어야 할
우리들의
보살핌입니다.
보살핌을 통해
무엇부터
껴안아야 될지를
알게 됩니다.
아기와 함께
자라나는
부모님들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기처럼
환상이 아닌
실체입니다.
성탄은
사랑이라는
실체(實體)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사랑의 실체는
사랑의 선물이
됩니다.
무엇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오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방치하지
않습니다.
사랑같은 아기의
새날이 펼쳐집니다.
몸과 마음이
자라나는
새날이
축복입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오늘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아기는 축복이 되고
기도가 되고
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아기 안에
모든 긍정적인
희망이 다 담겨
있습니다.
희망은 이렇게
우리들 곁으로
오고야
말았습니다.
희망을 만날
기쁜 날입니다.
++++++++++++++++++
(2)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 66)
자비 가득한
대림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하느님 자비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느님 자비를 떠나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세례자 요한이
탄생합니다.
하느님께서
소중한 이름을
새로이 선물하십니다.
모든 탄생에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음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쁨으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기쁨이란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안에 살아가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간절한 바램을
세례자 요한의 탄생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의 손길로
이어지는 보살핌의
본질적인 이름입니다.
본질적인 이름이
본질적인 힘입니다.
자비는
자비의 때를 알고
기다리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기쁨입니다.
아기 요한을 통해
하느님께서 하실
구원의 손길을 믿듯
우리의 여정 또한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미리 소중한
성탄의 기쁨을
보여주시듯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보여주십니다.
보살피고 이끄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삶은 정녕 축복이
됨을 믿습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탄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이
생명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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