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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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 일제 중추원 참의는 친일파 ‘합헌’
조대현 재판관만 “소급처벌 금지”
조진태(1853~1933)는 일제의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과 감사(1908~25),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1928~33) 등을 지냈다. 2006년 만들어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참의로 활동한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그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는 조진태를 친일파로 결정했다. 이에 조진태의 증손자는 반민규명위에 이의신청을 했고, 신청이 기각되자 서울행정법원에 친일파 결정 취소 소송과 함께 위헌심판제청을 신청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재판장 이승영)는 “참의를 지냈다고 예외 없이 친일반민족행위로 보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헌재는 이에 대해 재판관 8(합헌) 대 1(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고 31일 밝혔다. 헌재는 “중추원은 친일세력의 집합소로, 일제의 조선침략을 합리화하고 식민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반민족적 성격을 지닌다”며 “반민규명위는 참의를 지냈더라도 재직기간이 짧거나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밝혀질 경우에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하지 않는 등 예외를 두었다”고 합헌 이유를 설명했다.
반면 위헌 의견을 낸 조대현 재판관은 “국가기관이 60년 전의 과거 행적을 조사해 친일반민족행위로 낙인찍는 것은 명예형에 의한 처벌로 소급처벌을 금지한 헌법에 어긋난다. 또 ‘반민특위’를 통해 처벌하고도 또다시 처벌하는 것은 이중처벌 금지에 위배된다”며 사실상 현재 진행되는 ‘친일파 청산’ 자체가 위헌이라는 주장을 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한겨레 2010-11-01 오전 10:28:03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46502.html
2010 - [북한단신] 김정일 방중 기념우표 발행
국가우표발행국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을 기념해 우표묶음과 개별우표를 1종씩 발행했다고 조선중앙방송이 31일 밝혔다. 우표에는 '김정일 동지 중화인민공화국 비공식 방문기념 주체99(2010)년 8월 26일부터 8월 30일'이라고 적혀있으며 김 위원장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갔다고 방송은 설명했다
[연합] /중앙일보 2010.10.31 22:42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595781&ctg=1005
2010 - ‘구석기 연구 개척’ 손보기 전 교수 별세
한반도 구석기 시대를 처음 증명한 원로 고고학자 손보기(사진) 전 연세대 교수가 31일 저녁 7시 경기도 용인 효자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8.
고인은 국내 구석기 고고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1964년 충남 공주 석장리에서 찍개, 긁개 등 구석기를 최초로 발굴해 이 땅의 구석기 시대를 먼저 입증했다. 앞서 일제는 ‘일본보다 이른 시기에 한반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내용의 식민사관을 내세워 구석기 시대를 부인했으나, 손 교수는 체계적인 발굴로 이를 뒤집었다. 그 뒤에도 그는 충북 제천 점말동굴 등 다른 구석기 유적들을 계속 조사하면서 한국 고고학의 지평을 넓혔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서울대 사학과·대학원을 마친 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4~1987년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일했으며, 퇴임 뒤 연세대 용재석좌교수, 단국대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옛 인쇄술 연구에도 관심이 남달랐던 그는 세계 최고인 고려 금속활자의 구체적 제작 시기·방식을 밝히는데도 기여했다. 저서로는 <한국 구석기학 연구 길잡이>, <석장리 선사유적> <한국의 고활자>등이 있으며, 외솔상 학술상(1976)과 옥관문화훈장(1990)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김서영씨와 자녀 명세(연세대 보건대학원장), 송이(미국 매사추세츠 대학 교수), 경세(미국 뉴욕 주립대 교수)씨, 며느리 전미선(아주대 교수), 김성은(의사)씨와 사위 길선(미국 매사추세츠 대학 교수)씨가 있다. 발인은 3일 오전 7시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1시부터 석장리 박물관에서 노제가 열린다. (02)2227-7550
김민경 노형석 기자 salmat@hani.co.kr /한겨레 2010-11-01 오전 10:23:19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446497.html
2010 - '한반도 구석기 연구’ 개척한 손보기 교수 별세
ㆍ공주 석장리유적 발굴, 식민사관 뒤집어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을 통해 한반도 구석기 연구를 개척한 원로 고고학자 손보기 전 연세대 교수가 31일 오후 7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고인은 1964년 충남 공주 석장리 유적지를 발굴해 한반도의 역사를 구석기 시대까지 끌어올리며 ‘일본보다 한국이 인류의 정착이 늦었다’는 일제 식민사관의 주장을 뒤집었다.
그는 인쇄문화 연구에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독립운동사를 비롯한 근현대사 분야에서도 연구성과를 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 등 전통 인쇄기술 성과에 대해 많이 연구했고, 95년 일본 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주도해 식민지 역사의 청산에도 힘썼다.
22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문과를 거쳐 서울대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63년부터 87년까지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퇴임후 한국선사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연세대 용재석좌교수, 단국대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구석기 시대 연구가 싹튼 석장리 유적지에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자 지난해 ‘파른 손보기 기념관’이 건립됐다. 파른은 ‘늘 푸름’을 뜻하는 고인의 아호다.
<한국구석기학 연구 길잡이> <석장리 유적과 한국의 구석기 문화> <금속활자와 인쇄술> 등의 저서를 남겼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서영씨와 장남 명세(연세대 의대 교수), 장녀 송이(미국 매사추세츠대학 교수), 차남 경세(미국 뉴욕주립대 교수)씨가 있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졌다. 발인은 3일 오전 7시, 장지는 분당 메모리얼 파크로 정해졌다.
이영경 기자 /경향신문 2010-10-31 22:25:2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10312225245&code=100402&area=nnb2
테드 소렌슨 /한겨레
2010 - ‘존 F. 케네디의 분신’ 테드 소렌슨 별세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최고 보좌관이자 그의 연설문 작성자로서 ‘케네디의 분신’으로까지 평가받았던 시어도어 C. 소렌슨(사진)이 지난 31일(현지시각) 뉴욕의 한 병원에서 뇌졸중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82.
소렌슨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 동생 ‘보비’(로버트 케네디) 바로 다음의 핵심참모였다. 케네디는 생전에 그를 ‘나의 지적 혈액은행’이라고 지칭했다. 70년에는 뉴욕주 상원의원 후보로 직접 정치 현장에 뛰어들기도 했으나 선거에서 패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와 함께 일하기도 했고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한겨레 2010-11-02 오전 10:41:30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446681.html
2009 -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별세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이후락 씨가 향년 85세를 일기로 오늘 별세했습니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지난 5월부터 뇌종양과 노환 등으로 치료를 받아오다 오늘 낮 12시쯤 숨졌다고 밝혔습니다.
이 전 부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 1972년 비밀 방북해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장례식은 다음달 2일 거행되며 장지는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결정됐습니다.
장아영 [jay24@ytn.co.kr] /YTN 뉴스
http://www.ytn.co.kr/_ln/0103_200910311918019885
이후락 /KBS뉴스
2009 -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사망…향년 85세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이후락씨가 85살을 일기로 오늘 숨졌습니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오늘 오전 11시 45분 숨졌다고 밝혔습니다.
병원측은 이 씨가 지난 5월 뇌종양 증세로 입원한 뒤 약물 치료를 받아오다 최근 상태가 갑자기 악화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씨는 지난 1963년부터 69년까지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을, 1970년부터 73년까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던 지난 1972년 5월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해 7.4 남북공동성명을 추진하는데 막후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실세로서 정점에 있던 이 씨는 1973년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박정희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다'라고 말해 파문이 인 이른바 윤필용 사건에 휘말려 정계를 떠났습니다.
이 씨는 지난 1979년 다시 정계에 복귀해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신군부 등장 이후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몰려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 뒤 정치활동을 규제받다가 지난 1985년 해금됐습니다.
유족으로는 3남 1녀가 있으며, 고인은 다음달 2일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회] 장덕수 기자 /KBS뉴스 2009.10.31 (12:59)
http://news.kbs.co.kr/article/society/200910/20091031/1876230.html
2009 - ‘박정희의 남자’ 이후락씨 숨져
중앙정보부장 시절 7·4 남북 공동성명-김대중 납치 주도
한때 유신권력의 제2인자였던 이후락(사진) 전 중앙정보부장이 지난 31일 사망했다. 향년 85.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은 “이 전 부장이 31일 오전 11시45분 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졌다”고 밝혔다.
192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난 그는 울산공립농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한 뒤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 정보국 차장 등을 지내다 5·16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맡았으며, 박정희 장군의 대통령 취임 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권부의 핵심 실세로 떠올랐다.
70년대 초부터 3년 남짓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그는 당시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맞붙었던 제7대 대통령 선거의 막후 공작을 지휘했고, 이어진 유신체제 구축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1972년 5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나 역사적인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1998년 공개된 미국의 비밀 외교문서에서는 그가 1973년 벌어진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고 기록돼 있다.
1973년 12월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다’라고 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됐으며,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자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몰려 정치 활동을 규제받았다. 신군부가 밝힌 그의 부정축재액은 194억원이었는데, 그는 당시 “떡을 주무르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고 항변해, 우리 사회에 ‘떡고물’이란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개발독재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묻는 연구자나 언론의 요청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유족은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 등 3남1녀이며 빈소는 동서신의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지는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결정됐고, 발인은 11월2일 오전 8시30분이다. 02)440-8922.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한겨레 2009-11-01 오후 08:37:24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5259.html
첸쉐썬 박사 /매일경제
2009 - '중국 우주개발의 아버지' 첸쉐썬 박사 98세로 사망
'중국 우주개발의 아버지' '로켓 왕'으로 불려온 중국의 원로 과학자 첸쉐썬(錢學森·98) 박사가 지난달 31일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1911년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서 출생한 첸 박사는 1934년 상하이 자오퉁(交通)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해 MIT와 캘리포니아공대에서 항공공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1939년 캘리포니아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딴 첸 박사는 2차 대전 당시에는 제트추진연구소(JPL), 미국 국방과학위원회 등에서 미사일 분야 핵심 연구인력으로 일하며 미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1950년 중국 귀국길에 나섰다가 스파이로 몰리기도 했던 그는 5년간에 걸친 미·중 양국 간 협상을 거쳐 1955년 미국에서 추방되는 형태로 중국에 돌아갔다. 첸 박사는 귀국 후 중국과학원 역학연구소장, 국방부 제5연구원장을 맡아 중국의 핵미사일 개발을 이끌었으며, 1970년 인공위성 발사 당시에도 위성과 로켓 개발을 책임졌다. 현재 중국의 우주 항공 분야에서 일하는 상당수 인재가 그의 제자이다.
베이징=최유식 특파원 finder@chosun.com /조선닷컴 2009.11.02 03:04
中 미사일 개발 대부, 첸쉐썬 박사 타계
세계적 항공우주 학자로 '중국 미사일 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원로 과학자 첸쉐썬 박사가 지난달 31일 9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항저우 출신인 첸 박사는 1934년 상하이 자오퉁(交通)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매사추세츠공대(MIT)와 캘리포니아공대에서 항공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그 뒤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에서 미사일을 연구하다 1955년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국방부 전략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해 로켓ㆍ미사일 개발을 주도했다.
첸 박사는 중국 원자탄ㆍ수소폭탄ㆍ인공위성 발사계획 등을 이끌어 1964년 첫 핵실험에 성공했고 1970년에는 지구위성, 2003년에는 유인우주선 발사에 기여했다. 첸 박사의 연구를 바탕으로 중국은 핵ㆍ우주항공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지난 8월엔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병상에 누워 있던 그를 찾아 존경을 표했을 정도다.
[베이징=장종회 특파원] /[매일경제] 2009년 11월 01일(일) 오후 08:11
2009 - ‘중국 우주개발의 아버지’ 첸쉐썬 박사 별세
마오쩌둥이 “중국건설 이바지” 당부했던 원로 과학자
중국 미사일과 우주개발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항공우주학자 첸쉐썬(사진) 박사가 지난달 3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8.
<신화통신> 등 중국 언론들은 그의 별세 소식을 주요뉴스로 전했고, 1일 베이징에 내린 폭설 속에서도 첸 박사의 자택에 마련된 빈소에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는 등 추모 물결이 일고 있다.
저장성 항저우에서 태어난 첸 박사는 상하이 자오퉁대와 칭화대를 거쳐 1930년대에 미국에 유학했다. 1939년 28살에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항공우주 및 수학 박사학위를 받고, 2차대전 당시엔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 주임으로 재직하며 미군을 위해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등 미국의 군사과학분야 발전에 큰 몫을 했다.
그러나 50년대에 미국에 매카시 선풍이 몰아치면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체포됐고, 5년 동안 가택연금돼 있다가 55년 중미 비밀협상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56년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과 저우언라이 전 총리가 그를 찾아가 손을 붙잡고 “미국에서 당신은 과학자 5명을 합친 것보다 더 훌륭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며 “연구에 매진해 중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해 달라”고 당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이후 중국 국방부의 전략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중국의 우주, 무기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중국의 미사일 개발과 항공학 연구를 주도해 70년대 중국의 첫 핵탑재 탄도미사일 발사, 지구위성 발사 등 성과를 올렸고 2003년 유인우주선 선저우5호 발사의 토대도 닦았다.
지난해 1월 춘제(설)를 앞두고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건국 60돌을 앞둔 지난 8월에는 원자바오 총리가 첸 박사의 자택을 찾아 존경과 감사를 전할 정도로 현 지도부 역시 그를 원로 과학자로 각별히 대했다. 그의 장례식도 공산당 중앙위원회 차원에서 거행된다.
지난해 노벨화학상을 받은 첸융젠(미국이름 로저 첸)은 첸쉐썬의 5촌 조카다.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한겨레 2009-11-01 오후 07:06:24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385219.html
2009 - 베를린 장벽 붕괴 주역들 한자리에
콜, 고르바초프, 아버지 부시
독일 통일 20주년 기념식 참석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장벽의 붕괴는 독일의 통일과 옛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그 역사적 사건을 이끈 주역 3명이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31일 한자리에 모였다. 헬무트 콜(79) 전 독일 총리(재임기간 1982~1998), 미하일 고르바초프(78) 전 소련 대통령(˝1985~1991), 아버지 조지 부시(85) 전 미국 대통령(˝1989~1993)은 독일 베를린 장벽 터 동쪽에 위치한 프리드리히슈타트팔라스트 극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반갑게 포옹했다.
콜 전 총리는 “우리 독일인들은 역사에서 자랑스러워 할 것이 별로 없지만 통일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질 이유가 충분하다”며 “나에게 고르바초프와 부시 두 사람과의 관계만한 수준에 이른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평범한 일반인들이 영웅이었다”며 “우리 셋은 전 세대의 업적을 가로챌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부시는 “장벽은 여러분의 꿈, 하나 된 독일, 자유로운 독일, 자랑스러운 독일의 꿈을 결코 지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의 만남은 20년이란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했다. 지난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모처럼 공개석상에 나타난 콜 전 총리는 휠체어에 의존했고 발음도 어눌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지팡이를 짚고 기념식장에 도착했다.
독일 통일의 또 다른 주역인 마가렛 대처(84) 전 영국 총리는 알츠하이머병으로 불참했고,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날 기념식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1800여명이 참석했으며, 9일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대규모 기념행사가 계획돼 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 2009-11-01 오후 08:44:25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385266.html
2008 - 동네예보 시행...기대 반·우려 반
[앵커멘트]
읍·면·동 단위의 상세한 예보를 제공하는 기상청의 동네예보 서비스가 오늘부터 시작됐습니다.
국민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지만 예보 정확도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리포트]
5년동안 준비해 온 기상청의 동네예보가 본격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현재 169개 시군지역에 국한돼 제공되는 예보를 전국 3,500개 읍면동 단위까지 확대하는 것입니다.
'서울 경기 지역에 비가 오겠습니다'라는 예보 대신 서울 강북의 월계동에는 비가 오겠지만 강남 대치동에는 구름만 많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예보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도에서 원하는 지역을 클릭하면 강수와 기온, 바람 등 12가지 예보 항목을 3시간 단위로 48시간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조주영, 기상청 수치모델관리관]
"강북과 강남의 날씨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 충분히 반영되기 때문에 국민들의 여가생활이나 계획, 산업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동네예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기대도 높습니다.
[인터뷰:유갑종, 서울시 봉천1동]
"내가 자전거를 자주 타는데 아무래도 내 동네의 날씨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좋은거죠."
[인터뷰:김은영, 서울시 구로동]
"서울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상세한 예보를 해 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기상청 예보에 대한 불신이 높은 상태에서 상세 예보가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인터뷰:박소미, 서울시 안암동]
"기상청 예보가 자주 틀려서 잘 안 믿는데, 상세예보라고 해서 얼마나 도움이 되고 얼마나 더 잘 맞겠어요?"
실제로 현재 동네예보의 정확도는 기존 예보와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본격 시행을 조금 늦추더라도 예보 정확도를 더 높여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번째로 서비스되는 기상청의 동네예보 국민들의 큰 호응과 격려를 받을 지, 아니면 예보 정확도에 발목을 잡혀 또다른 비난을 자초할 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사이언스 TV 2008-10-31 17:12:48
http://www.sciencetv.kr/theme/theme_view.php?s_mcd=0101&key=
200810311712469070&tcd1=01&tcd2=07
2007 - T-50 이용 첫 비행교육 훈련 성공
국산 초음속훈련기 T-50을 이용한 첫 비행교육 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공군은 오늘 제1전투비행단에서 김은기 공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올해 2차 고등비행교육과정 수료식을 갖고 새 조종사 65명을 배출했습니다.
특히 이번 교육에서는 국산 초음속훈련기 T-50으로 실시한 첫 비행교육 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나 국산 항공기와 항공기술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수료식에 앞서 김은기 공군 참모총장은 T-50을 타고 지휘 비행을 했습니다.
YTN 2007-10-31 17:54
http://www.ytn.co.kr/news/theme_view.php?tidx=573&key=200710311754270365
2006 - 허블우주망원경, 스페이스 셔틀 수리를 통해 수명 연장 계획 발표 스페이스 셔틀
미국항공우주국(NASA) 마이클 그리핀 장관은 10월 31일 노후되고 있는 버블망원경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2008년 5월에 스페이스 셔틀을 발사하여, 우주공간에서 수리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지와 자세제어장치를 새로운 부품으로 교환하고, 신형카메라 등을 새로 설치한다. 이러한 수리를 통해 2008년이었던 수명을 2013년으로 연장시킨다는 계획이다.
허블망원경은 1990년 4월 스페이스 셔틀인 Discovery호로 우주로 운반되어 설치됐다. 대기에 방해 받지 않고 약 600킬로미터의 궤도를 돌면서 정확도가 높은 관측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주의 연령이 약 137억년임을 증명하는 관측과 지구에서 가장 먼 Ultra deep field에 있는 은하를 발견하는 등 수많은 성과를 올려 왔다.
이미 우주공간에서 4번의 수리를 받았으며, 2005년 이후에 5번째 수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3년 2월 셔틀인 콜롬비아 호의 사고 이후, NASA는 이러한 수리 비행을 중지하기로 결정하였지만, 2008년에 수명이 다한 후에는 폐기하는지, 아니면 다?수리할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이번 수리비행은 국제우주 스테이션(ISS)에 도달하는 통상적인 비행과는 달리, 셔틀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승무원이 ISS에 피난하는 긴급대책을 취할 수 없는 등의 위험이 크다. NASA는 ISS를 2010년에 완성시키기 위해 셔틀을 앞으로 14번 발사할 예정인데, 이러한 과밀한 일정도 버블망원경을 수리하는데 장해요인이 되어 왔다.
수리비행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 그리핀 장관은 최근 3번의 셔틀 비행에서 안전성이 향상된 것을 확인했다고 강조하며, 승무원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수리비행과 향후 운용에 드는 비용은 약 9억 달러로 예상되고 있다.
/해외과학 기술 동향 2006-11-02
출처: http://www.asahi.com/science/news/TKY200611010190.html
http://radar.ndsl.kr/radDetail.do?cn=GTB2006110047
2006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총리, 대통령 P. W. 보타(Botha, P. W.) 사망
보타 [Botha, P(ieter) W(illem), 1916.1.12~2006.10.31]
1970~80년대 남아공의 악명높은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밀어붙였던 P W 보타(90) 전 대통령이 10월31일 오후 노환으로 숨졌다. 부인 바바라 여사는 “남편은 저녁 8시쯤 남부 케이프 해안 윌더니스의 집 침실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보타가 백인 소수정권을 이끈 1978~1989년은 최악의 유혈사태와 인권유린으로 얼룩졌다. 그가 아파르트헤이트의 틀을 고집하며 넬슨 만델라의 석방을 거부하는 동안 남아공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됐고, 미국·유럽 등의 경제 제재를 초래했다. 정치범 3만명이 감옥에 갇혔고, 정보기관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다혈질과 무자비한 성격 탓에 얻은 별명이 ‘늙은 악어(Old Crocodile)’. /조선
2003 - 노무현 대통령, 4ㆍ3사건 국가차원 사과
제주 4·3사건 정부차원 사과
盧무현 대통령 "명예회복 지원"
노무현대통령은 지난 31일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등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1948년 4·3사건이 발생한 지 55년만에 이뤄진 정부 차원의 첫 공식 사과다.
노대통령은 이날 제주 라마다호텔에서 가진 제주도민과의 오찬에서 “정부는 4·3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등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며 이같은 뜻을 표했다.
노대통령은 “이번 제주방문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가 2년여의 조사를 통해 의결한 결과를 보고받았다”면서 “나는 이제야말로 해방 직후 정부 수립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고 생각한다”며 사과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이어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면서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해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데 그 뜻이 있다”고 강조했다.
조용우기자 /문화일보 2003-11-0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110101030223016002
2003 - “4·3 국가 차원 공식 사과”
노 대통령 어제 제주도민과 대화서…희생 영령 추모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으로 제주도민들을 반세기 넘게 이데올로기의 굴레로 짓눌러온 4·3에 대해 31일 마침내 정부의 공식사과가 이뤄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낮 라마다프라자호텔에서 열린 제주도민과의 대화에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며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사과 입장을 밝혔다.
노 대통령은 “55년전 평화로운 섬 제주도에서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중 하나인 4·3사건이 발생,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분단이 몰고온 역사의 수레바퀴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다”며 “정부는 4·3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 등 4·3 위원회의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뤄지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다짐했다.
노 대통령은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해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데 그 뜻이 있다”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따라서 “4·3사건의 소중한 교훈을 승화시켜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확산시키고, 화해와 협력으로 이땅에서 모든 대립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와 세계평화의 길을 열어나가자”고 호소했다.
노 대통령의 사과는 4·3이 지난달 15일 최종 확정된 진상조사보고서를 통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행위’로 진상이 밝혀진데 이어 정부수립이후 처음으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정부를 대표해 대통령이 사과한 ‘역사’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좌익 폭동’이라는 굴레속에 신음해온 제주도민들을 신원(伸寃)하고,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에 대한 국가 책임을 명확히 한 것으로, 추념일 제정과 평화공원 조성을 비롯한 각종 위령사업 등 남은 과제 해결을 앞당기는 계기로 작용할 전망이다.
오석준 webmaster@jemin.com /제민일보 2003년 10월 31일 (금) 22:49:01
2003 - 노 대통령, 제주 4·3 국가차원 사과
노무현 대통령은 31일 제주4·3사건과 관련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국가차원의 사과를 표명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제주 라마다호텔에서 가진 제주도민과 오찬간담회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면서 “정부는 4·3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 등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의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특히 “제주도에서 지난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됐다”며 “제주도민들은 국제적 냉전과 민족분단이 몰고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다”고 제주 4·3사건에 대한 정부 공식입장을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어 “이제야말로 해방직후 정부수립 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면서 “화해와 협력으로 이 땅에서 모든 대립을 종식시키고 한반도 평화와 나아가 동북아와 세계화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오늘 정부의 이 사과가 모든 과거의 매듭은 아닐 것”이라며 “다만 이제 과거를 정리해 나가는 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춘대 pcd@kyeongin.com /경인일보 2003.11.01 00:00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4220
노무현 대통령이 어제(31일) 제주 4·3과 관련“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며 정부 차원의 사과를 표명했다. 마침내 사건 발발 반세기여 만에 제주 4·3에 대해 국가차원의 공식사과가 이뤄졌다. 이는 오랜 세월 제주민의 가슴에 응어리져 맺혔던 한과 아픔을 씻어내고 명예를 회복시킨 역사적이고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노 대통령이 제주4·3에 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고, 진상조사결과에 따라 국가권력이 잘못된 점이 드러날 경우 사과하겠다던 당초의 약속을 지켰다는데 대해 전폭적으로 환영한다. 정부의 사과가 있기까지 제주4·3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그 동안 아낌없는 헌신과 노력을 해온 4·3관련 도민·정부·관련단체·언론 등 모든 이들의 공도 높이 평가한다. 어제 노 대통령의 사과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한 이번 대통령의 결단을 이끌어낸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확정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차원에서 과거 사건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고 이에 관한 보고서를 낸 것도 이번이 유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국가권력이 사건진압과정에서 제주도민을 대량 살상해 인권을 유린한 사실을 적시했고, 그 국가권력이 이승만 정부와 미군으로 상정했다는 점은 중요한 대목이다. 과거 국가권력이 잘못을 저질렀던 비슷한 국내사례를 처리하는데 이번 경우가 본보기가 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이 밝혔듯이 이번 정부의 사과는 4·3에 관한 완전한 매듭이 아니라 얽혀 있는 실타래의 한 가닥을 푼 셈이다. 따라서 정부가 4.3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 등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건의한 7개 사항을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은 확실히 이행돼야 한다.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게 진정한 화해와 협력으로 가는 길이다. 이번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앞으로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다.
[사설] /제민일보2003년 10월 31일 (금) 20:34:12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8904
여군 양성의 산실 역할을 해온 여군
학교가 2002년 10월 31일 오후 2시
서울 용산동 교내 강당에서 해단식
을 갖고 52년 역사를 마감했다.
/조선
2002 - 여군학교 52년 만에 폐지
2002 - 여군학교 52년 만에 폐교. 3사관학교(장교)-부사관학교(부사관)에 통합
한국 여군학교가 창설 52년 만에 문을 닫았다. 반세기동안 여군 장교와 부사관 양성을 전담해 온 이 학교가 폐지된 것은 시대변화에 따른 것이다. 1989년 폐교논의가 처음 거론되면서 1998년 폐지를 최종 결정했다. 여군학교는 이제까지 장교 1550명과 부사관 6300명 등 7850명을 배출했다. 여군학교는 한국전쟁때 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밀려와 있던 1950년 9월 4일 부산에서 여자의용군교육대로 출발했다. 1기 생도는 491명. 1955년 서울 서빙고에서 여군훈련소로 재창설됐다가 1990년 여군학교로 승격돼 국방부 내로 옮겨졌다. 폐교후 여군 지망생은 장교는 제3사관학교에서, 부사관은 육군 부사관학교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조선
2002 - 여군학교 폐교
[역사속의 오늘] 여군학교 폐교
한국 여군장교와 하사관 육성기관인 여군학교가 창설 52주년 만인 2002년 10월 31일 폐교됐다. 육군은 군내 남녀차별을 없애고 여군의 자질 향상을 위해 1998년에 여군학교 해체 방침을 미리 발표하고 여군장교와 부사관 양성과정을 각각 경북 영천의 제3사관학교와 전북 익산의 육군부사관학교에 편입, 통합운영키로 했다.
여군은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0년 9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491명의 지원을 받아 발족된 여자의용군교육대로 출발했다. 당시 여자의용군은 전방사단에 배치돼 정보수집, 수색활동, 선무활동을 주로 했으며 후방에서는 일반 행정요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육군본부의 기구개편에 따라 1954년 2월 여군부로 승격, 개편돼 모병과 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1968년에는 베트남전에도 10여명이 파견되어 대민지원 활동과 섭외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90년 여군부가 여군학교로 승격함과 동시에 여군 병과도 해체, 기존 간호업무 및 비전투 행정분야에서 탈피해 보병, 통신, 정보, 공병 등 야전 및 정책부서에도 진출했다. 여군학교는 장교 1500여명과 부사관 6300여명을 배출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정보관리부 성일권 /매일신문 2008년 10월 3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9716&yy=2008
2002 - 여군학교 52년만에 폐교
[사회] 여군학교 52년만에 폐교
여군 장교와 부사관의 산실인 여군학교가 31일 해단식을 갖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여군학교는 18일 마지막인 부사관 후보생 168기 수료를끝으로 1950년 여군훈련소를 모태로 출발한 지 52년 만에 폐교된 것이다.
여군 장교와 부사관 양성과정은 국방부의 결정에 따라 각각 경북 영천의제3사관학교와 전북 익산의 육군 부사관학교에 편입되며, 내년부터 이곳에서 교육이 실시된다.
여군은 한국전쟁 기간 중인 50년 9월4일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491명의 여성이 지원, 발족된 여자의용군교육대에서 출발했다. 이후 육군본부의 기구개편에 따라 54년 2월 여군부로 승격, 개편돼 모병과 교육을 실시했다. 여군들은 월남전 당시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 배속돼 대민사업과 섭외업무를수행했다.
여군학교는 90년 여군훈련소에서 승격돼 현재의 국방부내로 옮겨졌다.
여군학교의 폐교는 89년 여군병과 폐지 이후 최초 양성교육에서부터 남녀통합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결정됐다. 이 같은 결정이 알려지자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여성계 등이 ‘여성학교 폐지 반대’를 강력히 주장, 사회문제화하기도 했다.
군 관계자는 “사회 일각에서 반발이 있지만, 남녀가 함께 교육을 받는것이 여군의 위상과 기능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 폐교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제3사관학교와 부사관학교는 여군들이 남자들과 함께 교육을 받을수 있도록 내무반과 화장실을 새로 마련하고, 교육 프로그램도 재조정할계획이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한국일보 2002-10-18 16:5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2&oid=038&aid=0000156719
초음속 고등훈련기 겸 경(輕)공격기
T-50/A-50 /조선
2001 - 초음속 경(輕)공격기 한·미 공동개발 - 30일에서~
첨단 디지털 시스템을 갖춘 국내 최초의 초음속 고등훈련기 겸 경(輕)공격기(T-50/A-50)가 국내 기술진과 미 록히드 마틴사에 의해 공동개발됐다. 공군과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2001년 10월 31일 오후 김대중 대통령과 김동신 국방장관, 군 및 업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KAI 사천 1공장에서 T-50 출고식을 가졌다.
이 항공기는 첨단 디지털 시스템을 채택, 라팔, F-22, F-15 같은 최신형 전투기 조종훈련에 활용할 수 있으며, 공대공(空對空) 미사일 2발과 폭탄 등 약 3t의 무장능력을 갖춰 경공격기로도 이용할 수 있다. T-50/A-50 항공기는 최대 속도가 마하 1.4로, 전장 13.13m, 폭 9.17m, 높이 4.91m이며, 최대 이륙중량 1만2000㎏, 실용 상승고도 1만4630m이다.
일명 `골든 이글(Golden Eagle)`로 불리는 이 항공기는 기동성 확보를 위해 디지털 비행제어 및 디지털 엔진제어 시스템을 갖춰 동급의 유사 훈련기 중 최고의 성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됐다. /조선 (10월 30일자)
2001 - 미륵사지 석탑, 보수를 위해 1400년 만에 해체 시작
2000 - 최초의 국제우주정거장 거주자가 될 우주인 3명, 러시아 소유즈 로켓을 타고 출발 /동아사이언스
2000 - 소유즈 로켓 TM-31 발사(2000)
2000년 오늘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최초로 상주하게 될 미국과 러시아 우주 비행사 세 사람을 태운 러시아제 소유즈 로켓TM-31호가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됐다.
미국인 윌리엄 셰퍼드와 러시아인인 유리기젠코,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등 3명은 국제우주정거장에 4개월간 머물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2001년에 폐기된 우주정거장 미르를 대체해 2013년까지 우주인들이 교대로 파견돼 다양한 실험을 벌일 예정이다.
국제우주정거장은 미국과 러시아의 주도로 16개국이 공동 참가한 가운데 약 600억 달러의 예산을 들여 건설중이다.
2003년 국제우주정거장 건설을 위해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컬럼비아호가 공중 폭파되면서 우주왕복선 발사 계획 일체가 중단됐다.
그 후 2년이 지난 2005년 디커버리호가 승무원 7명을 태우고 불안하게 발사됐으나 국제우주정거장에 보급품을 전달하고 우주 유영을 통해 선체를 수리하는 등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YTN
미국인 선장 셰퍼드(가운데),
러시아 우주인 크리칼료프
(위)와 기젠코가 우주선 소
유즈 TM31에 오르기 전 손
을 흔들고 있다. /조선
2000 -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상주할 우주인 태운 '소유즈 TM-31' 발사
미국, 러시아 등 16개국이 건설중인 국제 우주정거장(ISS)에 상주할 3명의 우주인이 2000년 10월 31일 러시아 로켓 '소유즈 TM-31'을 타고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를 출발했다.
미국인 선장 윌리엄 셰퍼드와 러시아인인 유리 기젠코,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등 3명은 11월 2일 지상 368km 궤도에서 ISS와 도킹, 2001년 2월까지 ISS에 117일간 머물면서 임무를 수행한 뒤 후임자들을 싣고 오는 미국의 우주왕복선 편으로 지구에 귀환하기로 했다. 현재 길이 48m, 무게 60t인 ISS가 2005년 완공되면 길이 108m, 무게 450t 규모로 확대될 예정이다.
ISS는 2001년 2월 폐기된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를 대체해 2013년까지 우주인들이 교대로 파견돼 다양한 실험을 벌일 예정이다. ISS 건설계획은 지난 1988년 미국과 유럽 우주청 참여국, 일본, 캐나다 간에 합의됐으며 1993년 뒤늦게 러시아 참여가 합의됐다. 완공까지 총 600억 달러가 투입될 예정이다. /조선
2000 - 싱가포르 항공기 추락, 83명 사망(2000)
2000년 오늘 싱가포르 항공 소속 여객기가 타이완 중정 공항에서 추락해 83명이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승객 159명과 승무원 20명 등 179명을 태우고 중정 공항을 이륙하던 보잉 747-400기는 공중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불과 몇 초 만에 활주로로 추락해 세 동강이 났다.
사고기는 싱가포르를 떠나 타이완 중정공항에 중간 기착한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출발하던 중이었다. 싱가포르 항공은 그동안 단 한 건의 추락사고도 일으키지 않아 아시아에서 가장 안전한 항공사였다. /YTN
대만 장제스국제공항을 이륙하려다
추락한 싱가포르 항공 소속 SQ 006
편의 추락 현장 /조선
2000 - 대만 중정 공항에서 싱가포르항공 여객기 추락, 78명 사망
대만 수도 타이베이 외곽 중정 공항에서 2000년 10월 31일 싱가포르항공 소속 여객기가 추락, 78명이 사망했다. 승객 159명과 승무원 20명 등 179명을 태우고 이날 밤 중정 공항을 이륙하던 SQ 006편 보잉 747-400기는 공중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불과 몇 초 만에 활주로로 추락, 세 동강이 났다.
이 사고로 78명이 죽고 85명이 부상했다. 중정 공항은 사고 직후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을 금지시켰다. 사고기는 싱가포르를 떠나 중정공항에 중간 기착한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출발하던 중이었다. 승객 159명의 국적은 대만 55명, 미국 47명, 싱가포르-인도 각 11명 등이었다.
싱가포르 항공(SIA)은 28년이란 짧은 연조에도 불구하고 세계 톱클라스에 끼어든 아시아 최고의 항공사다. 여행전문지 `트래블 & 레저` 등에 의해 세계 1위 항공사로 선정될 정도며 단 한 건의 추락사고도 일으키지 않아 아시아에서 가장 안전한 항공사로도 주가를 높여왔다. /조선
1999 - 이집트항공 소속 보잉767기 미 동부해안 추락. 탑승자 17명 몰사
1997 - 국민회의-자민련, 김대중씨를 단일후보로 결정
1997 -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 기공식
1996 - 우편 업무 전산망 구성 완료
1996 - 삼성 전자 세계 최초로 1G D램 개발
1993 -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Fellini, Federico) 사망
펠리니 [Fellini, Federico, 1920.1.20~1993.10.31]
1990 - 정부, 새 민방간 TV방송 지배주주로 (주)태영 선정
1990 - 정부, 새 민영방송국 지배주주로 (주)태영 선정 발표
[오늘의 IT소사]10월 31일 정부, 새 민방 TV 지배 주주로 (주)태영 선정
1990년 오늘 정부가 수도권에 새로 설립되는 민영 방송국의 지배주주로 ㈜태영을 선정했다. 정부는 공·민영 혼합 방송 체제로 전환한다는 방침에 따라 새로 민간 방송을 허가키로 하고 9월부터 한달동안 민방 참여 신청접수를 받았으며 참여 의사를 밝힌 60여사 중 태영을 선정했다.
태영을 대주주로 새 민영 방송으로 설립된 ㈜서울방송은 1991년 12월 정식 개국, 방송을 시작했다.
/전자신문 2003-10-31 08:3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5&oid=030&aid=0000048567
터키 대통령에 당선된 투르구
트 오잘 /조선
1989 - 오잘 터키 총리, 국회에서 대통령에 선출
1983년부터 6년간 터키 총리로 재직해 왔던 투르구트 오잘 총리가 1989년 10월 31일 터키 국회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재적의원(4백50명) 과반수를 넘는 2백63표를 얻어 제8대 터키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0년 9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케난 에브렌 현 대통령의 뒤를 이어 1989년 11월 9일 대통령에 취임한 오잘은 터키 말라타 출생으로 이스탄블공과대 전기과를 졸업한 기사 출신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1983년 총리에 취임한 후 전통적 고립노선에서 탈피, 유럽공동체 참여의사를 표명하는 등 적극적인 경제개방과 외자도입 정책으로 터키에 경제붐을 조성했으나 매년 40~60%가 넘는 고인플레로 국민들의 불만을 사왔다. 그래서 그의 대통령 당선을 행운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조선
1986 - AIDS 병원체 국내 첫 검출
현대의 페스트로 불리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는 외국에서 유입된 성전염병이다.
한국에서는 85년 12월 첫 감염자의 발견 이래, 해마다 증가하여 95년 말 2,000명으로 추정된다. 에이즈의 감염력은 강하지 않으나 적절한 치료법이 없어 치사율(致死率)이 높다.
1986 - 미국의 물리화학자 멀리컨(Mulliken, Robert Sanderson) 사망
1984 -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가 자신의 경호원에게 암살당하다. /위키백과
1984 -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 피살(1984)
1984년 오늘 인도의 네 번째 총리인 인디라 간디 여사가 자신의 집무실로 가던 도중 경호원 2명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숨졌다.
인디라 간디는 인도 초대 총리인 네루의 외동딸로 1966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총리를 맡았다.
외교적으로 옛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준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펴왔다.
간디 총리의 암살범은 암리차르 황금 사원를 공격한 것에 불만을 품은 시크교도로 밝혀졌다.
인디라 간디의 죽음으로 뉴델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2,000여 명의 무고한 시크교도들이 사망했다. /YTN
인도 독립의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의 무남독녀였던 인디라
간디 인도 수상 /조선
1984 - 인디라 간디 인도총리 피살
인디라 간디 인도 수상이 1984년 10월 31일 9시30분경 수상실로 출근하기 위해 뉴델리 관저를 나서던 중 자신의 시크교도 경호원 3명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오후 6시경 심한 출혈로 사망했다. 66세였다. 범인 중 2명은 현장에서 사살됐고 1명은 생포됐다.
1917년 인도 독립의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 초대 인도 수상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간디여사는 '리틀 인두(작은 인도인)'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당찬 소녀였다. 인도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뒤 스위스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하고 귀국, 21세때인 1938년 아버지 네루를 따라 반영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64년 네루수상 사망에 따라 집권한 샤스트리 내각에서 공보장관을 지낸 후 1966년 제3대 수상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남인도 지방의 종파 및 인종분리소요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철권정치인으로 이미지가 굳어져 갔고 정권유지를 위한 야당 탄압으로 독재자라는 비판까지 받게 됐다. 장기집권에 싫증을 느낀 인도국민의 反간디 무드로 1977년 총선에서 참패, 권좌에서 물러났다가 1980년 재집권했다. /조선
1984 -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 피살
역사속의 오늘-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 피살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가 1984년 자신의 시크교도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했다. 인도 첫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는 출근하기 위해 뉴델리 관저를 나서던 중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경호원으로부터 집중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그녀는 인도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의 외동딸로 1917년 인도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났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귀국, 아버지 네루를 따라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47년 독립 후에는 아버지로부터 정치수업을 받고, 여당인 인도국민회의파에서 활동하다가 1959년 당수가 되었다. 1966년 제3대 총리가 된 간디는 1977년 총선에서 참패하기까지 인도를 통치했고 1980년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인도의 여러 州(주)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크교도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시크교도들의 분노가 발생했고 결국 암살로 이어졌다. 더구나 인디라 간디의 뒤를 이어 인도 총리가 된 장남 라지브 간디도 테러로 사망해 비극의 가문이 되었다.
인디라 간디가 13세 때인 1930년부터 3년간 아버지 네루가 옥중에서 어린 딸에게 보낸 편지가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게 바로 세계사를 요약 정리한 ‘세계사 편력’으로, 많은 독자에게 인기가 있었다.
정보관리부 /매일신문 2007년 10월 3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7598&yy=2007
1984 - 인디라 간디 총리 피살
[오늘의 경제소사/10월31일] 인디라 간디 총리 피살
최고 권력자는 항상 측근을 조심해야 한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암살당한 권력자들은 대부분 최측근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멀리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며 암살당한 로마의 카이사르에서부터 ‘난 괜찮다’며 숨진 박정희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측근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미 열린우리당에서 불거져나오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반발도 아마 최측근에 의해 절정에 이를 게 분명하다.
굳이 냉혹한 정치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범부들이 사는 세상살이에서도 친하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속된말로 뒤통수를 맞게 마련이다.
1984년 10월31일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이 피살됐다.
이날 오전9시30분께 수상실로 출근하기 위해 뉴델리 관저를 나서던 간디 수상은 그녀의 시크교도 경호원 3명으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6시께 사망했다. 당시 66세였다.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무남독녀로 알라바하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리틀 인두(작은 인도인)’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당찬 소녀였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역사를 전공한 그녀는 21세 때인 1938년 아버지 네루를 따라 반영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독립 후에는 아버지 네루의 호스티스 역할을 하면서 정치가로서 훈련을 쌓았다.
1964년 네루 수상 사망에 따라 집권한 샤스트리 내각에서 공보장관을 지낸 후 1966년 제3대 수상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남인도 지방의 종파 및 인종분리소요를 무력진압하면서 철권정치인으로 이미지가 굳어져갔고 정권유지를 위한 야당 탄압으로 독재자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결국 1977년 총선거에서 야당에게 패배 한때 정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 총리에 복귀했으나 이날 경호원에 의해 암살,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박민수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5/10/30 18:32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510/e2005103018303063820.htm
갈릴레오 갈릴레이 /조선
1983 - 바티칸 교황청, 갈릴레이를 공식적으로 복권시킴
1983 - 로마교황청 350년 만에 갈릴레이(Galilei, Galileo)를 복권
1983 - 로마교황청 350년 만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복권
지동설을 주장해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됐던 17세기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3백50년 만인 1983년 10월 31일 공식 복권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13년전 자신이 발족시킨 특별위원회의 최종보고를 청취한 교황청과학원 공식회의에서 갈릴레오에 대한 교적회복을 공식선언했다.
이로써 신앙과 과학 사이에 벌어졌던 역사적 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단자 심문소로 널리 알려진 교황청 검사성성(檢邪聖省)이 지동설을 지지한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파문키로 결정한 것은 심문에 들어간지 17년 만인 1633년의 일이었다.
당시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며 자전한다는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지지했으나 교황청은 결국 그를 파문했다. 69세의 쇠약한 노인이었던 그는 교황청 심문관들의 기세에 눌려 재판정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과오를 시인했으나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혼자 중얼거린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
1983 - 갈릴레오 359년만에 공식복권
지동설을 주장해 카톨릭교회로부터 파문됐던 17세기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3백50년만에 공식 복권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지난달 31일 13년전 자신이 발족시킨 특별위원회의 최종보고를 청취한 교황청과학원 공식회의에서 갈릴레오에 대한 교적회복을 공식 선언하면서 지난날의 유죄판결은 『고통스런 오해와 다시 되풀이돼선 안될 카톨릭 교회와 과학간의 비극적인 상호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황청은 1633년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며 자전한다는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던 갈릴레오를 파문했다.
이어 69세의 쇠약한 노인이었던 그는 교황청 신문관들의 기세에 눌려 재판정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과오」를 시인했으나 법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혼자 중얼거린 것으로 전해진다.
요한 바오로2세는 갈릴레오를 파문한 신문관들도당시 알려져 있던 일반적 지식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고 옹호하면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확신한 당시 신학자들의 잘못은 물질 세계 구조에 대한 이해를 성서식 해석에만 의존한데 있었다』고 덧붙였다.
박소형 기자 /[동아일보 1992 -11-02]
1983 - 요한 바오로 2세,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를 복권
역사 속 10월 과학사엔 어떤 일이 / 과학향기
1992년 10월 31일 : 요한 바오로 2세,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복권
지동설을 주장해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됐던 17세기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2.15~1642.1.8)가 3백50년 만에 공식 복권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3년 전 자신이 발족시킨 특별위원회의 최종보고를 청취한 교황청과학원 공식회의에서 갈릴레오에 대한 교적회복을 공식선언했다. 이로써 신앙과 과학 사이에 벌어졌던 역사적 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한겨레 2008-10-07 오후 06:13:04
http://www.hani.co.kr/arti/science/kistiscience/314525.html
1983 - 알폰신,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
1981 - (우표수집가 단체) 우표동인 한알 창립
우표동인 한알은 1981년 10월 31일 창립되고 1985년 1월 9일 한국우취연합에 가입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우취단체입니다. (화상)
1980 - 지하철 2호선 (잠실~신설동 14.31km) 준공
1980 - 서울 지하철 2호선 1구간 개통
[오늘의 경제소사/ 10월 31일] <1538> 지하철 2호선
1980년 10월31일, 서울 지하철 2호선 1구간이 뚫렸다. 잠실운동장에서 신설동까지 14.3㎞의 1단계 준공을 시작으로 2호선은 1984년 5월까지 5단계에 걸쳐 48.8㎞의 공사를 마쳤다.
2호선의 최대 특징은 국내 유일의 순환선이라는 점. 성수지선(5.4㎞)과 신정지선(6.0㎞)을 제외하고는 서울 강북과 영등포ㆍ관악ㆍ강남을 도는 노선이다. 도심을 중심으로 방사선 교통망을 먼저 건설한 뒤 순환망에 착수했던 선진국의 도시계획과 달리 유신정부는 순환선부터 시공했다. 왜 그랬을까. '강북 개발 억제와 강남 우선 개발'이라는 정책목표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의 밑그림이 처음 그려진 1960년대 중반 2호선 노선도는 서소문~성동역 구간. 계획은 왕십리~을지로~마포~여의도 구간으로의 변경을 거쳐 1976년 순환선으로 바뀌었다. 당시 서울시장이 20분 만에 빨간 사인펜으로 구간을 정했다는 설도 전해지는 2호선은 순환구간이 준공될 때마다 주변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강북의 도심권을 통과한 1호선과 달리 2호선은 부도심권을 연결해 역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역세권 개발'이 본격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지하철 2호선의 최대 수혜지역은 강남. 2단계인 강남 구간이 개통된 1982년 말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삼성ㆍ선릉ㆍ역삼ㆍ강남 일대가 번화가로 바뀌었다. 유사시를 대비해 강북에 집중된 인구를 강남으로 옮겨야 한다며 강남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해 세금까지 면제해줬던 정부 정책이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다.
2호선이 등장한 지 29년, 정부의 정책목표는 과거와 정반대다. 역으로 벌어진 강남북 간 격차를 어떻게 줄이느냐가 과제다. 오늘날 하루 150만명의 승객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 2호선에는 편중개발의 역사가 담겨 있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0/30 17:18:48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0/e2009103017184669890.htm
1980 - 중국, 사회주의경제와 자유주의경제 혼합
1978 - 인천 화력발전소 제4호기 준공
1975 - 인도의 가수 작곡가 부르만(Burman, S. D.) 사망
부르만 [Burman, Sachin Dev(S. D.), 1906.10.1~1975.10.31]
1973 - 러시아의 작가, 민속학자 보리스 셰르긴(Shergin, Boris) 사망
셰르긴 [Shergin, Boris Viktorovich, 1896(93).7.28(16)~1973.10.31]
1970 - 국토종합개발 10개년계획 확정
1968 - 쌍용시멘트 동해공장 준공
1967 - 월남 군사정권, 선거 통해 형식상 민정으로. 티우 대통령(중장) 취임
1966 - 제12차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총회 서울 개최
제12차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총회 서울 개최, 한국의 주도로 세계반공연맹(WACL) 헌장 제정 및 WACL 창설 결정 /Google
1966 -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1966)
1996년 오늘 존슨 미국 제36대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녹취]
"존슨 대통령은 역사적인 마닐라 정상회담과 17일 간에 근 5만 킬로미터에 걸친 7개국 순방 여행의 절정으로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해 45시간 머물게 될 것인데 박정희 대통령은 온 국민과 더불어 존슨 대통령을 반가이 맞이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 참전으로 미국과 유래 없는 우호관계를 갖게 됐다.
서울 시청 앞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존슨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자유수호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녹취]
"올해 예순 다섯 살인 최시종 옹은 수 놓은 액자를 대통령에게 드렸습니다....... 최옹을 자기와 같이 헬리콥터에 태워 어리둥절한 대접을 베풀어 주기도 했습니다."
존슨 미국 대통령은 11월 2일 한미공동성명을 발표해 우리나라와 미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재확인했다. /YTN
존슨 미국 대통령(오른쪽에서 세번
째)이 한 노인으로부터 한복을 선물
받고 즉석에서 입어보이고 있다. /조선
1966 -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이 1966년 10월 31일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방한했다. 동남아6개국 순방을 마치고 말레이시아에서 전용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존슨 대통령은 공항에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영접을 받고 3군 및 해병대의장대를 사열했다.
부인 버드여사와 러스크 국무장관을 비롯한 81명의 공식 수행원을 대동하고 방한한 존슨 대통령은 시청앞 광장에서 벌어진 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숙소인 워커힐로 향했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2일 박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은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이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담은 약3천자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2개항으로 된 이 공동성명은 한국의 경제, 사회 및 과학분야발전을 위해 미국이 계속 지원할 것과 주한미군을 현재선 이하로 줄이지 않으며 한국에 대한 무력공격이 있을 때는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원조를 하겠다는 미국의 결의를 천명했다. 이번 방한을 통해 한미관계의 전통적인 우호를 재확인했다. /조선
1966 -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역사속의 오늘-린든 존슨 美대통령 방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어도 이런 환영은 처음”.
1966년 10월 31일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신을 환영한 인파를 보고 감격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날 오후 3시 존슨 대통령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 이들을 맞이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관계자들과 시민 등 1만여 명.
서울 시내로 들어오기까지 길가에 늘어선 환영 인파는 180만이 훨씬 넘었다고 당시의 기사는 전한다. 이날 밤 열린 환영 리셉션에서 미국 기자들은 “다른 나라처럼 반미 시위도 없고 ‘존슨 고 홈’ 구호소리도 들리지 않아 이상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공보차관의 대답은 “한국엔 반미주의자가 한 명도 없어 그렇다.”였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외국에서 귀빈이 방문하면 항상 길가에는 환영 인파가 물결쳤다. 손에는 모두 태극기와 방문국 국기를 들고서 말이다.
물론 이들 군중 대부분은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 때부터 시작됐다는 이 ‘전통’은 불과 10여 년 전까지도 계속됐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10월 3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8109&yy=2006
1966.10.31-11.2 존슨 대통령 방한,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 공동성명 발표(11.2)
http://www.agendanet.co.kr/zb41pl7/bbs/view.php?id=dip_sub1&no=29
1964 - 국군파월에 관한 한월(韓越)협정 체결
1962 - 인도-중국군 아샘지역에서 접전
1961 - 한국-호주 국교 수립
1959 - 한국-브라질 국교 수립
1959년 10월 31일 한국 정부는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연방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브라질은 에콰도르와 칠레를 제외한 남아메리카의 모든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수도는 브라질리아이다. 1962년 7월 브라질 상주대사관을 설치하고 1970년 10월 상파울루 총영사관을 설치했으며 1965년 5월 주한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90년대 들어 한국 정부와 과학기술협력협정, 이중과세방지협정, 외교관·관용여권에 대한 사증면제협정, 범죄인인도조약 및 투자보장협정 등을 체결함으로써 관계가 진전되었다. 1998년 현재 한국의 대(對) 브라질 직접투자액은 2억 660만 달러에 이르며, 포항제철·대한항공·삼성전자 등 약 30개 한국 기업이 직접 또는 합작투자 형태로 진출해 있다. 한국은 전기·전자제품, 기계류, 자동차 등을 주로 수출하고 철광석, 커피, 사료, 펄프, 알루미늄 등을 수입한다. 브라질 이민은 1950년대에 시작되어 1997년 6월 현재 교민 4만 3,741명, 체류자 460명이 있다. /브리태니커
1958 - 미국-소련, 과학교류협정에 조인
1958 - 미국-영국-소련 제네바 핵실험 정지회담 개최
1957 - 토요타 자동차 미국 진출
[책갈피 속의 오늘]1957년 토요타 자동차 美 진출
도요타자동차의 이사였던 도요다 에이지(豊田英二)가 미국 포드사를 방문한 건 1950년 7월이었다. 당시 포드의 하루 생산량은 8000대, 도요타는 겨우 40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꾸라지 양식업까지 검토했을 정도로 경영난을 겪던 도요타로선 세계 자동차 업계 2위였던 포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미국의 자동차 시장에 충격을 받은 도요다 씨는 일본에서도 승용차 시대가 열릴 것을 확신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55년 ‘크라운’을 내놓았다. 훗날 도요타자동차의 회장이 된 그는 자서전에서 “승용차라고 이름 붙이기에 어울리는 첫 작품”이라고 밝혔다.
그는 내친 김에 “미국에서도 팔아보자”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크라운의 품질을 자신해서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 시장은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전시(戰時)경제에 익숙해 있던 도요타자동차로선 조만간 미국에서 수입쿼터제가 실시될 것이라는 조바심이 일었다.
1957년 10월 31일 드디어 도요타자동차 미국 판매지사(도요타모터 세일즈 USA)가 설립됐다. 선적부터 하고 봤지만 결과는 대참패였다. 크라운의 유일한 장점은 GM의 동급(1500cc) 차량보다 값이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뿐이었다. 1900달러짜리 크라운은 걸핏하면 고속도로에서 멈춰 섰다. 1958년까지 도요타가 미국에 판 크라운은 287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때마침 1973년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배기량이 낮은 저가(低價)의 일본차를 찾는 미국인들이 늘기 시작했다. 판매가 호조를 보이면서 연구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세계 최대 자동차 메이커인 GM도 도요타에 손을 내밀었다. 1984년 GM과 현지 합작사를 차렸고, 5년 뒤에는 고급형 브랜드인 ‘렉서스’를 출시했다. ‘싸구려 일본차’가 유럽차에 견줄 수 있는 고급 승용차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도요타는 올해 판매 목표치를 940만 대 이상으로 잡았다. 계획대로라면 GM의 목표치 928만5000대를 추월한다. 도요타가 미국에 진출한 지 50년 만에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로 등극하는 셈이다.
1995년 회장직에서 물러나 최고고문으로 있는 도요다 씨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앞을 향해 걸어가지 못하는 순간 그때가 마지막이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동아닷컴 2007-10-31 0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20071031/8506326/1
1956 - 미국 해군기 처음으로 남극 극점 착륙 성공
1956 - 영국-프랑스군, 이집트 폭격 개시
1953 - 대한상공회의소 개편 발족
1950 - NBA 첫 흑인선수 출전
[책갈피 속의 오늘]1950년 NBA 첫 흑인선수 출전
‘백인과 흑인은 같은 거리를 걷는다. 하지만 거리와 상수도와 하수도만이 그들이 공유하는 공공시설이다. 야구장과 택시는 분리돼 있다.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검은 토끼와 흰 토끼가 함께 나오는 책도 금지됐다.’
뉴욕타임스 1960년 4월 12일자 1면 기사가 전하는 앨라배마 주 버밍햄의 분위기이다. 정부와 민권단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음을 보여준다.
얼 로이드는 이보다 10년 전인 1950년 10월 31일 워싱턴 캐피털스의 시즌 개막전에 나섰다.
장내 아나운서가 선수 명단을 소개하자 맨 앞줄에 앉은 백인 관중이 “이런 깜둥이가 농구라는 걸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로이드의 어머니는 그 관중에게 걱정 말라면서 말했다. “깜둥이도 경기를 할 수 있거든요.”
로이드는 이처럼 흑인이 모든 분야에서 무시 또는 외면당하던 시대에 미국프로농구(NBA) 무대에 올랐다.
그는 1928년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웨스트버지니아주립대 농구팀의 스타가 됐는데 1947∼48 시즌에 이 팀은 미국 대학 중에서 유일하게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NBA에서는 로이드 외에 2명의 흑인선수를 더 지명했다. 보스턴 셀틱스의 척 쿠퍼와 뉴욕 닉스의 냇 클리프턴. 두 팀이 11월까지 개막전을 시작하지 않아 로이드가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NBA 코트에 나섰다.
로이드는 캐피털스에서 7경기를 뛰고 군에 소집돼 한국에서 2년간 근무했다. 미국에 돌아왔을 때 팀이 해체돼 시러큐스 내셔널스(나중에 필라델피아 76ers)로 옮겼다.
내셔널스 선수이던 1955년이 전성기였다. 게임당 평균 득점 10.2, 평균 리바운드 7.7을 기록하며 NBA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에서 1960년 은퇴할 때까지 9개 시즌, 560여 경기를 뛰었다.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1970년 피스턴스의 수석코치로 임용됐다.
2003년에 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다. 지난해 12월 1일에는 고향인 알렉산드리아의 고등학교가 그의 이름을 붙인 농구코트를 만들었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 /동아닷컴 2008-10-31 02:58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81031/8651257/1
1943 - 오스트리아의 연출가, 제작자 라인하르트(Reinhardt, Max) 사망
러시모어 산에 있는 대통령 조각상. (왼쪽부터)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
햄 링컨. /위키백과
1941 - 거츠 보글럼과 400 명의 일꾼이 러슈모어 산에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두상 조각을 완성하다. /위키백과
1941 - 러슈모어산 대통령 얼굴 조각 완성
[이 주일의 역사] 러시모어산 대통령 얼굴 조각 완성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러시모어 산(Mount Rushmore)은 역대 대통령 네 사람의 얼굴 조각으로 유명하다. 일명 '큰 바위 얼굴'로 알려진 이 조각의 인물은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이들은 각각 미국의 건국, 성장, 보존, 발전을 상징한다.
조각 작업은 조각가 거츤 보글럼이 설계하고 지휘했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덮인 해발 1745m 산에서 높이 18m, 너비 9m나 되는 4개의 조각상을 만드는 대규모 역사(役事)였다. 1927년 10월 10일에 시작해 1941년 10월 31일까지 14년 동안 산을 깎고 다듬었다. 400여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고 약 100만 달러의 경비가 소요됐다. 그러나 거츤은 조각상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41년 3월 숨졌다. 뒤를 이어 아들 링컨이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링컨 또한 제막식은 보지 못했다. 2차대전 중이라 제막식이 연기되어 50년이 지난 1991년에야 행사가 치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모어산이 위치한 블랙힐스 산악지대는 인디언 수족의 성지이다. 거츤 보글럼은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단 출신이었다. 인디언 성지에 백인 영웅의 얼굴. 의도가 있었을까…. 어쨌든 인디언들에게는 모욕이었다. 수족은 조각가 코작 지올코브스키에게 인디언 영웅의 조각을 의뢰했다. 백인 부대를 물리쳤던 전사 '크레이지 호스'. 높이 169m, 길이 201m의 거대한 전신상 조각은 1948년부터 시작되었다. 얼굴을 만드는 데만 50년이 걸렸으며, 지금도 코작의 아들들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27㎞ 거리를 두고 새겨진 두 조각상… 미국 역사의 이면을 곱씹어 보게 한다.
정광용기자 kyjeong@ /부산일보 2007. 10.29. 10:29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1029/047020071029.1030102947.html
1940 - 영국을 구한 엔지니어 레지널드 미첼
[역사 속의 인물] 영국을 구한 엔지니어 레지널드 미첼
1940년 7월 9일 독일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시작된 영국본토항공전이 두 달여 뒤인 오늘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절대적인 열세에도 영국공군(RAF)은 불굴의 투지로 맞서 히틀러의 영국침공 야욕을 꺾어버렸다. 이러한 빛나는 승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투기’ 스피트파이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이를 설계한 사람이 레지널드 미첼(1895~1937)이다.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20세에 항공기 제작회사 수퍼마린에 들어가 2년 만에 수석 설계자가 됐고, 비커스사(社)가 수퍼마린을 합병할 때 그가 향후 5년간 회사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 정도였다. 총 24종의 항공기를 설계했는데 대표작이 스피트파이어다. 이 전투기는 그가 설계해 1931년 슈나이더컵에서 시속 606㎞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수퍼마린 S.6B를 모체로 개발돼 총 2만2천 대 넘게 제작됐다. 이 전투기의 뛰어난 성능은 독일 파일럿도 인정했다. 독일공군 총사령관 괴링이 영국의 저항을 저지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묻자 독일공군의 에이스 아돌프 갈란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스피트파이어입니다.” 하지만 미첼은 자신의 걸작이 펼치는 활약을 보지 못하고 1937년 42세의 아까운 나이에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10월 3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1935&yy=2011
1939 - 친일문학단체 조선문인협회 결성
1930 - 미국의 우주비행사 마이클 콜린스(Collins, Michael) 출생 콜린스 [Collins, Michael, 1930.10.31~ ]
1929 - 조선어연구회, 조선어사전 편찬회 조직
큰사전
1957년 10월 9일 한글학회에서 엮은 <큰사전>이 완간되었다. 총 6권, 3,804쪽(본문 3,672쪽)에 2단 가로짜기 구성으로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했다. 각 분야 16만 4,125개 어휘들을 총망라했다. 1929년 10월 31일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해 사전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이 1936년 4월 조선어학회로 넘겨져 진행되다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에 원고를 몰수당했다. 8·15해방으로 원고를 되찾아 1947년 10월 을유문화사에서 첫 권이 간행된 데 이어 1949년 5월 5일 2권, 1950년 6월 1일 3권, 1957년 8월 30일 4권, 1957년 6월 30일 5권, 1957년 10월 9일에 마지막 6권이 각각 간행되었다.
<큰사전>은 일상어뿐만 아니라 전문어·고유명사·옛말·이두 등까지 포괄한 확장형 사전으로 백과사전의 기능까지 수행했다. 편찬작업을 위해서는 우리말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했고, 사전편찬 이후에는 더 넓은 지평의 확대가 가능했다. 뒤에 나온 거의 모든 사전이 <큰사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어학회 사건 이후로 조선은 꿈꾸던 해방을 맞이 하게 됩니다.
다만 약간의 큰 문제가 있었는데, 사전 편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원고의 행방이 묘연 해져 버린겁니다.
사건때 증거물로 함흥 재판소로 넘어간 250매짜리 원고가 증간에 증발했다. 이런 말이죠.
함흥 검찰청에 물어보기도 하고, 서울 검찰청을 뒤져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행방은 묘연. 결국은 경성제국대학 학생들은 동원해서(뭔가 같은 계열의 선배님 파워라는걸까요..)경성역 운송부 창고를 뒤져 겨우 찾아 내게되죠.
내용인 즉슨 사건의 증거물로 함흥 법원에서 서울고등법원으로 이송되던 도중 광복 크리를 맞아 경성역에 그대로 방치. 그렇게 점차 기억속에 잊혀져 버린 거죠. 다행이 원고는 찾았지만 아/야 줄이 소실되서 후에 '큰사전'에서는 가장 미흡한 부분으로 굴욕아닌 굴욕을..
이렇게 저렇게 첫째권 둘째권 셋째권 넷째권 까지 찍어나가지만 (총 6권) 이번에는 6.25 크리를 맞게 됩니다.
뭐 할만하면 사건이 터지니,
서울은 인민군이 점령 해버리고 미군 폭격으로 인쇄에 필요한 기기들도 개박살 크리. 비록 서울은 수복 되었지만 이미 두번 놀란 어학회 사람들은 큰사전 원고를 손으로 복사해서 원본과 필사본은 따로 보관하게 됩니다. 필사본은 최현배 선생의 집에 묻어두고, 원본은 유제한 선생의 고향땅 천안의 땅속에...
1952년 즈음해서 상황이 어느정도 개선되자 한글학회로 개명한 조선어학회는 잘 키핑해놓은 원고를 가져다 작업을 재개하게 됩니다.
앞서 한글학회는 미국 록펠러 재단의 도움으로 인쇄기기등을 원조받아 3권까지 제본했던 적이 있습니다. 인쇄기기가 미쿡 폭격으로 먼지가 되버린걸 알게된 록펠러 재단은 재원조해주는 천조국의 기상을 보여주고
1957년 '큰사전' 6권 전질이 완성되게 됩니다.
/한국컴퓨터선교회 2008-10-09
http://kcm.kr/dic_view.php?nid=40095
1927 - 광통신 기술 개척한 인도 출신 미국 과학자 나린더 싱 카파니 출생
1922 - 무솔리니,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 수립
1922 - 베니토 무솔리니가 39세의 나이로 이탈리아의 최연소 총리에 오르다. /위키백과
1922 - 캄보디아의 정치가,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Sihanouk, Norodom) 출생
시아누크 [Sihanouk, Norodom, 1922.10.31~]
1920 - 전인도 노동조합회의, 봄베이에 사무국 설치
1919 - 중국 남북평화통일 선언
- 'Wife of the Artist' - 'Self-portrait'
- 'Selfportrait' - 'Row of Houses'
1918 -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곤 실레(Schiele, Egon) 사망
실레 [Schiele, Egon, 1890.6.12~1918.10.31]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도안가·판화가.
에로틱한 구상작품으로 유명하다. 빈 미술학교의 학생시절(1907~09)에 아르 누보의 일환인 독일의 유겐트스틸 운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무렵 빈 분리파의 지도자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으며, 작품의 곡선미와 정교함은 클림트의 우아한 장식적 요소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그러나 그는 장식보다 표현을 강조했으며 열정적인 긴장감으로 선의 감성적 호소력을 높였다. 그는 처음부터 인물 표현에 몰두했고, 성적인 주제를 솔직하고 자극적으로 처리한 점이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09년 빈에서 신예술가협회의 창립에 한몫 했으며, 1911년부터 유럽 곳곳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1918년 빈에서 열린 분리파 전시회 때에는 실레의 작품을 위한 특별 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주요작품으로 〈자기 성찰자 The Self Seer〉(1911)·〈추기경과 수녀 The Cardinal and Nun〉(1912)·〈포옹 Embrace〉(1917) 등이 있다. 그의 풍경화에서도 열정적인 색과 선의 표현을 볼 수 있다. /브리태니커
1908 - 한일 어업협정 조인
1906 - 토지건물증명규칙 반포
1903 - 미국 북장로회선교사 모펫, 평양에 숭의여학교 설립
새뮤얼 모펫[Samuel Austin Moffet,1864.1.25~1939.10.24 ]
미국의 선교사로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 근대교육에 힘을 쏟았다. 평안도에 많은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썼다.
한국명 마포삼열(麻浦三烈 또는 馬布三悅). 인디애나주(州) 매디슨 출생. 1884년 하노빌대학을 졸업하고, 1889년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한국 선교를 자원하여 1890년 내한한 후 1893년까지 서울에서 활동하고, 1893년 이후에는 평양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190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 근대교육에 힘을 쏟았다.
또 1918∼1928년은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고, 평안도에 많은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매큔[한국명 尹山溫] ·에비슨 선교사등과 함께 이 사건이 사실무근의 날조사건이며 고문 등 비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다 하여 당시의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항의하고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썼다.
1936년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일단 귀국하였는데, 1939년 본국에서 사망하였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 중 둘은 한국에서 선교사업에 종신하였다.
http://doopedia.co.kr/m/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45929
1903 - 경제학자 로빈슨(Joan Robinson) 태어남
[오늘의 경제소사/10월31일] 로빈슨(Joan Robinson)
1975년 10월 중순, 비즈니스뉴스위크지에 비명이 울렸다. ‘조앤 로빈슨, 여성 최초 노벨경제학상 수상’이라는 특집기사를 마련해 인쇄까지 마쳤으나 다른 사람들이 상을 받았으니까.
단골 후보였던 로빈슨이 ‘여성의 해’에도 상을 받지 못한 지 32년이 지나도록 경제학상은 남성의 전유물이다. 로빈슨은 왜 사망(1983년ㆍ80세)할 때까지 노벨상에서 제외됐을까. 여성이기에? 아니면 적이 많았던 좌파라서?
논쟁 속에서 살았던 그의 기질은 출생(1903년 10월31일)부터 갖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사회개혁가였던 증조부와 병사들의 비참한 환경을 외면하는 총리를 대놓고 비판한 부친(육군소장 모리스경)의 피를 받았기 때문일까. 갤브레이스가 ‘경제학의 명저 중 로빈슨의 공격을 받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고 평할 정도로 그는 광범위한 분야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로빈슨의 업적은 헤아리기도 어렵다. 미시경제학의 신지평을 열었다는 ‘불완전 경쟁의 경제학(1933년)’과 케인스의 단기이론을 장기화한 ‘자본축적론(1956년)’의 저자이자 1950~60년대 영국과 미국을 달군 ‘자본논쟁’을 촉발하고 승리한 주역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최고의 분석가로도 꼽힌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웃에 손해를 끼치며 발전했다는 ‘근린 궁핍화 이론’도 만들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경제학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도 남겼다.
한국에서 그는 생소하다. 이름조차 꺼내기 어려웠던 억압의 시대 탓이다. 논문 ‘코리아 미러클(1965년)’에서 북한의 경제기적을 극찬했었으니까. 로빈슨은 더욱 잊혀질 것 같다. 케인스 경제학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날을 내다보고 한 말일까. 35년 전 그가 처음 사용한 용어가 여전히 회자된다. ‘경제학의 위기.’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7/10/30 17:35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710/e2007103017354563820.htm
1902 -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전신케이블 완공 /동아사이언스
1902 -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전신 케이블이 완공됨
브리즈번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제3의 항구도시로써 퀸즐랜드주의 동쪽 해안의 중심부에 위치 하였다. 테일러 산맥의 남부 경사면에 접한 브리즈번강의 하구로부터 약 22km 상류에 자리잡고 있다. 시가지는 강으로 양분되나, 스토리교를 비롯하여 4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모턴만 연안은 1824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탈옥수를 수용하는 정벌 식민지로 지정되었으며, 브리즈번은 그 중심지로서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도시 이름은 당시의 총독 'T.브리즈번경'의 이름을 딴 것으로 1834년 명명되었다.
1959년 새로이 설립된 귄즐랜드주의 주도로 정해진 후부터 차츰 발전하였으며, 1902년 캐나다 밴쿠버와의 사이에 태평양 횡단 해저전선이 부설되었다. 브리즈번 남쪽에는 남태평양을 접한 '골드 코스트'와 동쪽에는 매년 낚시대회가 열리는 '모톤 베이'가 있다. 또한, 북쪽에는 브리즈번의 중심지인 '선샤인 코스트'가 자리잡고 있다. 시가지에는 다양한 종류의 열대성 식물과 꽃들이 피어 있어 매년 세계 여러 곳곳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브리즈번을 방문한다. 브리즈번강을 중심으로 근교에는 아름다운 섬과 해변이 펼쳐져 있어서 파도타기나 수상 스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브리즈번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제3의 항구도시로써 퀸즐랜드주의 동쪽 해안의 중심부에 위치 하였다. 테일러 산맥의 남부 경사면에 접한 브리즈번강의 하구로부터 약 22km 상류에 자리잡고 있다. 시가지는 강으로 양분되나, 스토리교를 비롯하여 4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모턴만 연안은 1824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탈옥수를 수용하는 정벌 식민지로 지정되었으며, 브리즈번은 그 중심지로서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도시 이름은 당시의 총독 'T.브리즈번경'의 이름을 딴 것으로 1834년 명명되었다.
1959년 새로이 설립된 귄즐랜드주의 주도로 정해진 후부터 차츰 발전하였으며, 1902년 캐나다 밴쿠버와의 사이에 태평양 횡단 해저전선이 부설되었다. 브리즈번 남쪽에는 남태평양을 접한 '골드 코스트'와 동쪽에는 매년 낚시대회가 열리는 '모톤 베이'가 있다. 또한, 북쪽에는 브리즈번의 중심지인 '선샤인 코스트'가 자리잡고 있다. 시가지에는 다양한 종류의 열대성 식물과 꽃들이 피어 있어 매년 세계 여러 곳곳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브리즈번을 방문한다. 브리즈번강을 중심으로 근교에는 아름다운 섬과 해변이 펼쳐져 있어서 파도타기나 수상 스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림 4]는 영국이 1891년에 구축했던 전신시스템(telegraphy system)의 전세계 배치도를 보여준다. 전세계에 있는 식민지와 원활한 정보교환을 위해서는 영국에게 전신시스템 개발은 필연적이다. 1885년에 완전한 전송선 이론을 개발한 헤비사이드(Oliver Heaviside)가 영국인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영국은 약 11년 후인 1902년에 태평양을 횡단하는 전신선을 완성하여 최초로 전세계를 아우르는 통신시스템을 확보하게 된다. (발췌)
/조금은 느리게 살자 by EM turtle 2011년 7월 29일 금요일
http://ghebook.blogspot.com/2011_07_01_archive.html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거 아십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인터넷 이메일이, 불과 100년전에는 최강대국인 영국국왕조차도 받지 못하던 서비스 였다는 것을.
그것 아십니까? 여러분의 쇼핑카트에 담기는 인스탄트 식품을 그가격에 조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연이 소비되는줄을.
그래도 인간은 자신만의 뛰어난 과학기술로 이루어낸 것이라 생각하는 거대한 착각에 빠집니다.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열역학이라는 학문중에 가장 기본적인 법칙인 엔트로피라는것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자연적인 현상이란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이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담배연기를 방안에서 내뿜으면 방안에 연기가 가득차죠?
연기가 다시 모여 담배 꽁초가 피우기 전의 한가치의 담배가 되지는 못한다는 거죠.
담배연기가 퍼지는 것은 한가치의 담배보다 무질서도가 엄청나게 증가한다는 거죠. 그것을 다시 되돌린다는것은 그만큼 힘들거나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것처럼 우리가 지금 해택이라고 생각하는 과학기술은 현재에 미래에 사용해야할 후손들의 몫까지 끌어다 쓰는 기술일수있고 그것은 언젠가는 댓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는거죠.
비약이 심했나요?
최근들어 읽은 책중 아주 명쾌하게 이러한 변화를 지적한 글을 옮깁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멍청할지도 모르지만, 왜 전통과 소중한 유산이 필요한지도 생각해 봅시다.
그것들은 깡그리 무시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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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뱀필드에서는 매우 성대한 기념행사가 치러졌다.
캐나다 체신부 관리와 함께 1930, 40년대에 뱀필드에서 살았던 옛 주민들이 찾아 왔다.
바로 태평양 횡단 케이블 설치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이메일이나 인터넷이 통신기술을 대표하고 있지만 100년 전만 해도 전신케이블이 최첨단 통신수단이였다.
요즘에는 공중파 방송에 대해 유선tv방송을 케이블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점과 대시를 사용한 모르스 부호를 전송해 주던 철선이나 동선을 케이블이라고 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은 전 세계를 전신 케이블로 연결시키려는 거대한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1857년 이미 대서양을 가로질러 북아메리카와 영국을 잇는 해저 케이블 설치를 완료하고, 영국에서 중동과 인도를 거쳐 호주 뉴질랜드까지도 연결된 상태였다.
뉴질랜드 동쪽의 패닝섬에서 캐나다까지 약7천 킬로미터 구간을 이으면 전세계가 케이블로 연결될 참이었다.
이는 당시 영국의 식민제국주의 확대를 뒷받침해주는 거대 사업으로 몇년전 미국 모토로라 사가 통신위성을 이용해 전 세계어디서나 쓸 수 있는 무선전화 시스템을 개발하려다가 포기했던 이리디움 프로젝트에 필적할 만했다.
그러나 이 구간을 케이블로 연결시키려면 막대한 비용과 기술적 문제가 뒤따랐다.
한쪽에서 보낸 전신부호가 해저 케이블을 타고 7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다른 쪽에 이르면 힘이 약해져서 신호를 분간할 수 없으리라는 기술상의 문제때문에 설치여부를 놓고 논란이 분분했다.
결국 25년간에 걸친 논쟁 끝에 1902년 11월 그때까지 미연결 구간으로 남아 있던 태평양 구간이 마침내 연결 되었다.
당시 정보통신 기술 수준으로 볼때 이는 역사적 사견이었다.
설치 공사가 완료된 뒤 케이블로 인해 좁아진 세계를 제일 먼저 체험한 이들은 당시 영국의 에드워드 국왕과 호주 뉴질랜드의 총독들이었다.
이 역사적 사건에 감격한 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설치 공사를 주도한 캐나다의 플레밍이라는 엔지니어에게 막 설치가 끝난 태평양 구간의 해저 케이블을 통해 축전을 보냈다.
뱀필드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태평양을 건넌 케이블이 캐나다와 연결되는 첫번째 지점이 되었다.
캐나다에서 태평양의 호주나 뉴질랜드로 가는 메시지를 송신하거나 그쪽에서 오는 메시지를 받아 캐나다 국내로 전달하기 위해 뱀필드에 케이블 중계소가 세워졌다. 뱀필드는 태평양 횡단 통신의 중심이 되었다.
중계소에는 전신 중계 업무와 케이블 보수를 담당하는 3,40여 명의 미혼 남성 엔지니어들이 근무 했고, 이들을 위해 취사 및 세탁을 하던 20여명의 중국인 하인도 있었다.
케이블 중계소는 고립된 뱀필드 마을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태평양을 오가던 수많은 메시지를 중계했던 뱀필드 케이블 중계소는 새로 등장한 전화에 밀려 1959년 문을 닫으면서 57년간의 케이블 시대를 마감했다. 케이블 중계소가 있던 건물은 1965년 서부 케나다 5개 대학이 공동으로 구입하여 현재 해양수산연구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5개 대학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해양과 수산에 관한 과목을 수강하거나 대학원생들의 논문 연구 및 실험을 위한 교육 및 연구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점과 대시의 조합으로 알파벳과 숫자를 표현한 모르스 부호로 교신하던 당시에는 좀더 빠른 교신을 위해 가능하면 모든 단어를 축약해서 사용했다. 예를 들면LONDON은 LN, VANCOUVER는 VR로 썼다.
당시의 교신 속도는 분당 120자(약24단어), 하루 태평양 횡단 양 방향 교신 건수는 2,300건으로 교신량은 6만 9,120단어 였지만, A4용지로치면 70여쪽에 불과 했다.
송신이나 수신 중 하나만 따지면 한쪽에서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35쪽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메일로 같은 분량의 정보를 뱀필드에서 한국까지 보내는 데는 수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과거 케이블 시대에 3,40여명과 하인 20여명을 합쳐 놓은 것 이상으로 크게 확대 되었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뱀필드에서도 한국의 정치뿐만 아니라 스포츠, 연예계 소식까지 상세히 알수 있다.
처음 이 오지에서 인터넷으로 우리나라의 신문을 읽고 고국 소식을 접했을 때의 그 묘한 기분이란!
겨우 한시간 전에 편집된 한국의 일간신문 기사를 읽노라면 한국과 뱀필드 사이의 9천여 킬로미터라는 공간적 장벽이 일시에 무너지는 듯 했다.
물리적 공간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축소되는 경험은 100년전의 애드워드 국왕도 결코 꿈꿔 보지 못했을 일이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과거 대영제국의 국왕도 감히 누려보지 못한 편리를 이제는 누구라도 인터넷을 통해 누릴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은 이처럼 지리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정보를 얻을수 있는 접근성을 거의 무한대로 확대 시켰다. 인터넷은 이 외에도 접할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 및 종류도 혁신적으로 향상시켰다.
오늘날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접근 할수 있는 정보는 일상 생활에 필요한 생활정보는 물론 연구를 위해 필요한 과학 기술적 정보까지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정보의 종류도 문자정보에서 그림, 음악, 동영상까지 크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통신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양식을 달리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것만 해도 옛날 에드워드 국왕의 호사를 능가할 정도로 그 종류가 엄청나게 다양해졌고 양도 늘어났다.
캐나다 산 밀로 만든 빵과 라면, 호주산 쇠고기, 미국산 오렌지, 남미에서 생산된 바나나와 피인애플, 알래스카 산 연어와 게, 중국산 농산물 등은 이제 우리 식단의 단골 재료가 된 지 오래다. 옛날 어느 나라의 국왕도 이처럼 다양한 세계 각국의 특산물을 맛보지는 못했으리라.
오늘날 개인이 평생동안 여행하는 거리는 어떠한가. 초등학교 때부터 해외여행을 하는 요즘 일인당 생애 총 여행거리는 세계적 여행가였던 마르코 폴로나 칭기즈 칸을 무색케 한다.
옛날 왕이나 소수의 특권 계측만이 누리던 호사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개인의 소비량이 늘어나고 소비 속도도 빨라졌으며 그만큼 자원고갈을 가속화 시켰다.
100년 전에는 70여쪽에 불과한 케이블의 정보처리 속도로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에는 그 보다 수천배, 수만배 빠른 인터넷 속도로 자행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생태계의 성장 속도는 인간 세계의 개발 속도만큼 빠르지 못하다는 데 있다.
100년 사이 인간세계는 전신 케이블 시대에서 인터넷 시대로 바뀌면서 모든 사람을 소비면에서 왕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숲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속도로 자라므로 새로 생긴 왕들을 모두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옛날 왕처럼 먹고 마시며 여행 다닐 수 있는 것은 단지 미래 세대들의 몫까지 끌어다 쓸수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일시적으로 가능해진 현상일 뿐 그 같은 현상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탁광일, 숲은연어를 키우고 연어는 숲을 만든다 중에서.
사장님 /사장님 아침인사 2004/03/02
http://www.zookeeper.co.kr/zboard/view.php?id=diary&page=22&sn1=&divpage=
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17
뱀필드에서 느끼는 통신혁명
100년 전 자연파괴가 하루에 70여 페이지에 불과했던 전신케이블의 통신속도로 진행되었던 것에 비해, 오늘날 자연파괴는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자행되고 있다. 더욱더 큰 문제는 우리의 삶을 지탱시켜 주는 생태계는 인간세계처럼 빠르게 성장하지 못하는데 있다.
문명세계와 고립된 마을
필자는 뱀필드라는 조그만 마을에 산다. 이 마을은 여러 면에서 독특한 점을 지니고 있다. 이 마을의 인구는 여름엔 약 400명 가량 되지만, 비가 많이 오는 겨울엔 계절 인구들이 빠져나가 상주인구는 200명 가량으로 줄어든다. 인구가 적다 보니 동네 사람 이름은 물론 동네 개 이름까지 자연히 알게 된다. 지리적으로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 위치해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민이나 관광차 많이 오는 벤쿠버에서 오려면 6시간 이상 걸린다. 마을이 위치한 벤쿠버 섬의 다른 지역에 비해 도시화나 산업화와 같은 개발로부터 비켜나 있어 아직도 원시 고목림이 주된 경관을 차지하고 있다. 제일 가까이 위치한 도시인 포트 알버니까지 나가려면 숲으로 덮인 산 속으로 난 비포장길을 2시간 가량 운전해야 한다. 2시간 동안 달리면서 볼 수 있는 인공 구조물이란 개울을 가로 지르는 교량뿐이다. 그나마 이 비포장길도 1960년대 말 인근 지역 벌채를 위해 만들어 졌다. 그 이전까지는 배나 수상비행기로 밖에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어족 자원이 많이 남아 있던 1900년대 초반에는 어업과 수산물 가공업, 인근 지역에서 대대적인 벌목이 이루어졌고 1960년대 이후엔 임업이 주산업이었으나, 지금은 마을 경제의 대부분이 생태관광에 의존해 있다. 고층건물, 도로, 상점, 극장, 은행 같은 문명세계를 상징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뱀필드는 문명세계와 철저히 고립된 마을이다.
시간이 멈춘 마을
문명세계와 고립된 뱀필드에서 압도하는 야생자연이 있다. 도시에는 나무와 숲을 왜소하게 만드는 고층 빌딩들이 스카이라인을 만들고 있지만, 이곳의 스카이라인은 고목들이 장식하고 있다.
마을의 모든 건물들은 나무의 키를 넘지 않아 자연 속에 잘 조화된 모습을 보인다. 마을 주위를 덮고 있는 고목림 숲에는 17세기 처음으로 이 지역을 찾아왔던 유럽 탐험대들의 방문을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시다 나무들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또한 가지만 남은 일부 고목 위에 홰를 치고 앉아 있는 흰머리 독수리, 마을 뒷길을 걷다 심심찮게 마주치는 검은곰, 인근 해상에서 봄과 여름이면 알래스카로 이동 중에 있는 회색고래, 바다사자 등은 고목림 숲과 더불어 이 마을의 원시성과 야생성을 더해 준다.
케이블 시대의 통신 요충지
아이러니 하게도 시간이 멈춘 듯 천년 전 자연의 모습이 남아 있는 이 조그만 마을이 한때 캐나다 내 최첨단 통신기술의 중심지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E-mail이나 인터넷이 통신기술을 대표하고 있지만, 100년 전만 해도 전신케이블이 주요 통신수단이었다. 요즘은 공중파 방송에 대해 유선 TV방송을 케이블이라고 하지만, 100여 년 전엔 점과 대시를 이용한 모르스 부호를 전송해 주던 철선이나 동선을 케이블이라고 했다. 당시 세계의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은 전세계를 이같은 전신케이블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거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미 1857년 대서양을 가로질러 북아메리카와 영국을 잇는 해저케이블이 설치되었고, 영국에서 중동과 인도를 거쳐 호주, 뉴질랜드까지도 연결된 상태였다. 뉴질랜드 동쪽의 패닝 섬에서 캐나다까지 약 7,000km 구간을 이으면 전세계가 케이블로 하나가 될 참이었다. 이 사업은 아마도 몇 년 전 미국 모토로라사가 통신위성을 이용해 전세계 어디서나 쓸 수 있는 무선전화 시스템을 개발하려다 포기했던 이리디움 프로젝트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영국의 식민제국주의 건설을 뒤받침할 수 있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 구간을 케이블로 연결 시키려면 막대한 비용과 기술적 문제가 뒤따랐다. 한쪽에서 보낸 전신부호가 7,000km에 이르는 해저케이블을 타고 다른 쪽에서 이를 때면, 힘이 약해져 신호를 분간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기술자들의 경고 때문에 설치여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결국 25년에 걸친 논의 끝에 1902년 11월 해저케이블 설치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8,000t급의 콜로니아호가 수천 km에 달하는 케이블을 싣고 뱀필드를 출발한지 2개월 남짓 후 지구상에서 그동안 미연결 구간으로 남아 있던 태평양 구간이 마침내 케이블로 연결되었다. 당시 정보 통신기술 수준으로 볼 때 이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설치공사가 완료된 후 케이블로 인해 좁아진 세계를 제일 먼저 체험했던 사람은 당시 영국의 에드워드 국왕과 호주와 뉴질랜드의 총독들이었다. 이 역사적인 사건에 감격한 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설치공사를 주도한 캐나다의 플레밍이라는 엔지니어에게 이제 막 설치가 끝난 태평양 구간의 케이블을 통해 축전을 보내왔던 것이다.
뱀필드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지리적 이유 때문에 태평양을 건넌 케이블이 캐나다와 연결되는 첫번째 지점이었다. 캐나다에서 태평양의 호주나 뉴질랜드로 가는 메시지를 송신하거나 그쪽에서 오는 메시지를 받아 캐나다 국내로 전달하기 위해 뱀필드에는 전신 중계소가 생겼다. 뱀필드는 태평양 횡단 통신을 담당하는 통신면으로 캐나다 내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로 부상하게 되었다. 중계소에는 전신중계 업무와 케이블 보수를 담당하던 20여명의 미혼 남성 엔지니어들이 근무했으며, 10여 명의 중국인 하인들이 엔지니어를 위해 취사 및 세탁 등을 담당했다. 케이블 중계소는 뱀필드라는 조그만 마을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태평양 사이의 수많은 메시지를 중계해오던 뱀필드 케이블 중계소는 새로 등장한 전화에 밀려 1959년 문을 닫았으면서 57년간의 케이블 시대를 마감하였다. 케이블 중계소가 있었던 건물은 1965년 서부캐나다 5개 대학이 공동으로 구입하여 지금까지 해양수산연구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5개 대학 학생들이 와서 한 학기 동안 해양과 수산에 관한 과목을 수강하거나 대학원생들의 논문 연구 및 실험을 위한 교육 및 연구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케이블과 인터넷
점과 대시의 조합으로 알파벳과 숫자를 표현한 모르스 부호를 타전하며 교신하던 당시 좀더 빠른 교신을 위해 가능하면 모든 단어를 축약시켜 사용했다. 예를 들어 London의 경우는 LN, Vancouver의 경우는 VR로 사용하였다. 당시 교신속도는 분당 120자(약 24단어), 하루 양방향 교신건수는 2,300건에 달했다. 하루 태평양을 횡단하는 양방향 교신량은 6만9,120 단어였는데, 이를 A4용지로 치면 70여 페이지에 불과한 양이었다. 따라서 송신이나 수신 한가지만 따지면 한쪽에서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35페이지에 불과했던 셈이다.
지금 이 글이 완성되면 E-mail 편으로 서울의 산림조합중앙회 홍보실에 보낼 예정이다. 완성된 글은 200자 원고지 30장 분량이 될 것이다. E-mail 편으로 보내면 한국까지 불과 수초 밖에 걸리지 않는 이 글을 옛날처럼 케이블을 이용해 보낸다면 아마도 반나절 이상이 걸렸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 케이블 시대에 20여 명의 기술자들이 10명의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반나절에 걸쳐 처리하던 통신업무를 이제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혼자서 수초 내에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통신면에서 오늘날 개인의 능력은 100년 전 기술자 20명과 하인 10명 이상으로 크게 확대된 셈이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이 오지마을엔 아직도 전신케이블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지금도 나무가 많지만 지금보다 나무들이 더 많았던 100년 전엔 따로 전신주를 세우지 않고 살아 서 있는 나무들을 전신주로 이용했다. 아직도 당시 전신주로 쓰였던 일부 나무에는 녹슨 케이블이 남아 있고, 끊어진 케이블 보수를 위해 설치했던 나무 사다리도 여전히 붙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 캐나다와 태평양 사이를 주름잡았던 통신기술의 영광을 머릿 속에 떠오르게 만든다. 아직도 케이블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고 생활의 변화 속도도 전신케이블 만큼이나 느린 이곳에서 인터넷을 켜고 세계 곳곳의 소식을 접하는 기분은 인터넷 사용이 당연시되는 도시화한 환경에서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인터넷을 켜면 한국의 정치 뿐만 아니라 스포츠, 연예계 소식까지 이곳에 불러들일 수 있다. 처음 이 오지에서 한국신문을 통해 고국소식을 접했을 때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것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불과 1시간 전에 편집된 한국의 일간 신문기사를 읽으면 우리 나라와 이곳 사이에 존재하는 9,000km 이상의 공간적 장벽이 일시에 무너지는 황홀한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같이 공간이 극단적으로 축소되는 경험은 아마도 100년 전 에드워드 국왕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과거 대영제국의 국왕도 감히 할 수 없었던 경험을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터넷은 이같이 지리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필요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접근성을 거의 무한대로 확대시켰다. 인터넷은 이 이외에도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 질, 종류까지도 혁신적으로 향상시켰다. 오늘날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활 정보는 물론, 연구를 위해 필요한 과학 기술적 정보까지도 이제는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고도 인터넷을 통해 상당부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정보의 종류도 문자 정보 뿐만 아니라, 그림·음악까지도 인터넷을 통해 거의 무한한 접근이 가능해 지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단지 통신분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것만 해도 그 양과 질면에서 옛날 한나라의 왕을 능가할 정도로 늘어났다. 캐나다산 밀로 만든 빵이나 라면, 호주산 쇠고기, 미국산 오렌지, 남미에서 생산된 바나나나 파인애플, 연어나 게 같은 알래스카산 수산물, 중국산 농산물들은 이제 우리 식단의 단골 재료가 된지 오래다. 어느 나라의 왕도 세계 각국의 특산물을 이처럼 다양하게 맛보지 못했으리라. 오늘날 개인이 평생동안 여행하는 거리는 어떠한가. 초등학교 때부터 해외 여행을 시작하는 요즘 1인당 생애 총 여행거리는 세계적인 여행가였던 마르코 폴로나 징기스칸을 무색케 할 정도가 되어가고 있다.
왕과 자연
옛날 왕이나 소수의 특권자들만이 누렸던 호사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개인의 소비량과 소비속도는 급속도로 늘고 있다. 늘어난 소비량과 빨라진 소비속도는 그만큼 자원고갈의 가속화를 가져오고, 따라서 그만큼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시킨다. 100년 전 자연파괴가 하루에 70여 페이지에 불과했던 전신케이블의 통신속도로 진행되었던 것에 비해, 오늘날 자연파괴는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자행되고 있다. 더욱더 큰 문제는 우리의 삶을 지탱시켜 주는 생태계는 인간세계처럼 빠르게 성장하지 못하는데 있다. 100년 사이 인간세계는 전신케이블 시대에서 인터넷 시대로 바뀌면서 소비면에서 모든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숲은 100년 전과 다를 바 없이 한사람의 왕 밖에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글/탁광일(School For Field Studies)
숲과 환경을 가꾸는 산림조합 山林 /산림 2002년 2월호
http://www.sanrimji.com/contents.jsp?webzine_id=414&item_id=10002&year=2002&month=02
1892 - 러시아 태생의 체스 대가 알렉산드르 알레힌(Alekhine, Alexander) 출생
알레힌(알레킨) [Alekhine, Alexander, 1892.10.31~1946.3.24]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알레힌(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ле́хин, 영어: Alexander Alekhine, 1892년 10월 31일 ~ 1946년 3월 24일)은 제 4대 세계 체스 챔피언이다.
저서
/위키백과
알렉산더 알레킨
알레킨은 1938년 살로 플로와 체크슬로바키아에서 챔피언십을 치르기로 합의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해 모든 계획이 무산된다. 대신 같은해 말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 국영 전화회사인 AVRO사의 후원으로 세계 최강들이 한자리에 모인 대회가 열린다.
알레킨은 라이벌 카파블랑카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것에 만족하며 공동 4위로 중위권에 머물렀다. 이 대국 승리로 알레킨과 카파블랑카 간의 통산 전적은 승수에서 7대 7이 된다.
폴 케레스가 1938년 네덜란드 AVRO대회를 우승하며 차기 도전자로 떠올랐으나 대회 종료 직후 알레킨은 3위에 입상한 보트비닉과 차기 챔피언전 계약을 한다. 무엇보다도 알레킨은 고향 모스크바를 방문해 형과 누이를 만나보기를 바랐으므로 모스크바에서 챔피언전이 열리는 조건으로 선뜻 보트비닉과 합의한 것이다. 소련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보트비닉이었기에 후원금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비록 보트비닉이 소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는 있었지만 '인민의 적' 알레킨을 모스크바로 초청하는 데 필요한 허가는 받아내기 어려웠다. 그렇게 시일을 끌던 중 1939년 8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제8회 체스올림피아드가 열린다. 알레킨과 카파블랑카는 각기 프랑스와 쿠바 팀 대표이자 주장으로 참가한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프랑스와 쿠바가 맞붙었으나 알레킨의 기대와 달리 카파블랑카가 출전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알레킨은 대신 나온 쿠바 선수를 20수만에 물리치고 대회장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올림피아드가 한참이던 9월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알레킨이 이끄는 프랑스 팀을 비롯해 폴란드, 영국, 미국, 팔레스타인 등은 주최측에 독일의 보이콧을 요구했다.
[송진우의 체스 A to Z-알렉산더 알레킨]
/파이낸셜뉴스 2006-05-28 15:12
http://www.fnnews.com/view?ra=Sent1301m_View&corp=fnnews&arcid=
0920737100&cDateYear=2006&cDateMonth=05&cDateDay=28
1888 -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의 영국 극지 탐험가 허버트 윌킨스(Wilkins, Hubert) 출생
윌킨스 [Wilkins, (George) Hubert, 1888.10.31~1958.12.1]
타이완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을 영접하는 장제스 총통(1953)
/브리태니커
1887 - 중국의 정치가 장제스[蔣介石] 출생
장제스[蔣介石, 1887.10.31~1975.4.5]
장제스는 1928~49년 중국국민당 정부 주석을 지냈고, 1949년 이후 타이완[臺灣]의 국민정부 주석을 지낸 정치가이다. 저장 성의 비교적 유복한 농상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 국민당의 지도자 쑨원[孫文]의 휘하에 들어가 세력기반을 다졌고 1925년 쑨원이 죽자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27년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국민당에서 몰아내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0년 10월 유수한 권문세도가이며 친(親)서방세력인 쑹가[宋家]의 권유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고 쑹가의 막내딸인 메이링[美齡]과 결혼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 섬멸작전을 중단하고 국공합작으로 일본에 항전해서 승전국이 되었다. 그러나 1949년 부패해가던 그의 정부는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고 타이완으로 밀려났다. 시련을 겪은 그는 한때 부패했던 국민당 조직을 개편했고,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그후 20년 동안 타이완의 경제발전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1975년 그가 죽자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국민당 주석 및 타이완 정부 수반으로 그 뒤를 이었다. /브리태니커
"하늘은 두 개의 해를 가질 수 없다."
- 장제스
1883 - 조선 고종 20년, 한국의 첫 신문인 한성순보가 발행되다. (음력 10월 1일) /위키백과
1883 -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 발간
31일에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 `한성
순보` /조선
1883 -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발간
수신사로 일본 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박영효가 고종에게 신문발간을 진언하면서 조선에도 비로소 신문발간 바람이 불었다.
고종이 발간을 허락하자 박영효는 실무를 유길준에 맡겼다. 유길준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천거한 3명의 일본인과 함께 귀국, 신문발간을 준비했으나 곧 박영효와 그 자신이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발간작업은 자연스럽게 연기됐다. 얼마후 김윤식ㆍ김만식 등 온건 개화파가 바통을 이어받았고 집권층 역시 자신들의 홍보수단으로 신문발간을 지원했다. 8월에는 신문을 발간할 박문국이 설치됐다.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첫 호를 냈다. 관보(官報)와 신문이 혼합된 형태였다. 한성순보가 일본과의 긴밀한 유대속에 발행되자 청나라로부터 견제가 들어왔다. 이때문에 혼자 조선에 남아 발간을 도왔던 이노우에는 결국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순한문이었던 탓에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이듬해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에 탈때까지 열흘에 한번씩 꾸준히 발간됐다. /조선
1883 -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 창간
[오늘의 역사 10월 30일]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 창간
1883년 오늘 우리 나라 신문의 최초인 한성순보가 창간됐다.
한성순보는 박영효 일행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열흘에 한 번씩 발간한 것이다.
한글과 한문체로 펴내려 했으나, 한글 활자 준비 미흡과 수구파의 반대로 인해 한문으로만 발 행됐다. 1884년 12월 수구파 군중의 습격을 받아 결국 폐간됐다.
/소년한국일보 2009/10/29 15:49:23
http://kids.hankooki.com/lpage/edu/200910/kd20091029154931103370.htm
1883 - 조선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발간
[오늘의 역사]조선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발간
수신사로 일본 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박영효가 고종에게 신문발간을 진언하면서 조선에도 신문발간 바람이 불었다.
고종이 발간을 허락하자 박영효는 신문발간 실무를 유길준에 맡겼다. 유길준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천거한 3명의 일본인과 함께 귀국, 신문발간을 준비했으나 곧 박영효와 그 자신이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발간작업은 연기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김윤식·김만식 등 온건 개화파가 바통을 이어받았고 집권층 역시 자신들의 홍보수단으로 신문발간을 지원, 1883년 8월에 신문을 발간할 박문국이 설치됐다.
마침내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첫 호를 냈다.
한성순보는 집권층의 홍보수단으로 발간돼 관보(官報)와 신문이 혼합된 형태였다. 한성순보가 일본과의 긴밀한 유대속에 발행되자 청나라로부터 견제가 들어왔다.
이때문에 혼자 조선에 남아 발간을 도왔던 이노우에는 결국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순한문이었던 탓에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이듬해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에 탈때까지 열흘에 한번씩 꾸준히 발간됐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8.10.30 18:00
1883 - 한성순보의 창간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는 ‘조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조보는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주로 조정의 소식을 필사하여 양반관료들에게 반포한 것으로 조선조 초기에서 1895년까지 발행된 일조의 관보이다. 그러나 조보는 오늘날의 신문과는 큰 거리가 있어 현대적 의미의 신문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으로 알려진 ‘한성순보’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돼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발생이 중단되기까지 총 41호가 발간된 신문이다. ’한성순보‘는 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영효가 일본의 신문을 보고 돌아와 만든 것으로 신문발행에 필요한 모든 요건이 일본에 의해 공급되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귀국하는 길에 편집 기술자 3명과 인쇄공 2명을 데려오기까지 했다.
‘한성순보’는 정부가 아닌 박문국에서 발행하는 관보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전문직으로서 기자가 존재했던 게 아니라 박문국의 관리가 기사를 쓰고 신문을 만들었으며,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관청에서 의무적으로 구독한 신문이었다. 이 신문이 순한문으로 씌어진 것도 관리와 귀족 계급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국.한문 을 섞어서 신문을 내고자 하였으나, 한글 활자를 갖추지 못한 데다 수구파들의 완강한 반대로 순환문으로 발행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한성순보’는 과거의 관보가 다루지 않았던 시사성 있는 보도와 새로운 서양 문화의 소개에 치중함으로써 과거의 관보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었다.
‘한성순보’는 개화파 진영의 관점에서 유용한 지식을 풍부하게 제공했는데, 일본보다는 중국에 관한 기사가 더 많았다. 이와 관련, 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은 “신문 발간의 계기가 된 자극을 준 것은 일본이었지만, 순보의 뉴스원이나 그 내용은 오히려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국내 보도의 경우 ‘한성순보’는 정부의 보도자료에 의존하고 사회 실정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회피하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부국강병의 사상을 역설하고 반침략적 입장과 사대주의를 반대하면서도, 국내 문제와 구체적으로 결부된 측면은 취약했다. 또 자본주의 제도의 선진성과 봉건제도의 낙후성을 집중적으로 선전하면서도 봉건 제도를 구체적으로 반대하는 논조는 미약했다.
유길준(1856-1914)은 ‘한성순보’의 창간에 참여했고 창간사까지 썼는데, 이를 근거로 유길준을 우리 나라 최초의 기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정진석은 유길준이 구체적인 준비 작업은 했지만 신문이 창간되기 전에 박영효가 한성판윤의 자리를 물러나 광주유수로 좌천되자 따라서 신문발간 준비에서 손을 뗐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후 1895년 4월에 발간한 ‘서유견문’ 에서 처음으로 외국의 신문 현황을 상세히 소개하기로 했고, 이듬해인 1896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려 할 때에는 내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신문 창간에 필요한 경비를 정부에서 보조하고 신문사 건물을 빌려 주도록 주선하는 등의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유길준 자신이 직접 신문 제작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초창기 우리나라 신문과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 /이정환닷컴 2001/12/26(수)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reading&y_number=100
1883 - 프랑스의 화가 마리 로랑생(Laurencin, Marie) 출생
로랑생 [Laurencin, Marie, 1883.10.31~1956.6.8]
조지프 후커 /매일신문
1879 - '파이팅 조' 조지프 후커 사망
[역사 속의 인물] '파이팅 조' 조지프 후커
영어사전을 찾으면 ‘hooker’는 ‘갈고리를 거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보다는 속어로 ‘매춘부’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과도한 음주’라는 뜻도 있다. 이 단어가 매춘부(prostitute) 혹은 주정뱅이(heavy drinker)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 때다. 당시 유명한 북부군 장군 조지프 후커(1814~1879)의 방종한 생활에서 비롯됐다.
그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직업군인이었다. 중령으로 퇴임했다가 남북전쟁 개전과 함께 1861년 사단장에 임명됐고 군단장, 북부방면군 사령관으로 용맹을 떨쳤다. 별명도 ‘파이팅 조’(Fighting Joe)였다. 젊을 때부터 잘생긴 외모를 앞세워 여자 사냥에 몰두했고 전쟁 중에도 늘 술에 취해 있었다. 병사들은 그의 사령부를 ‘주점 & 매춘굴’로 불렀다.
‘후커’의 유래는 여러 가지다. 1845년 인쇄물에 ‘후커’가 이미 매춘부 의미로 사용됐다고 하고, 후커 부대를 따라다니던 매춘부 무리에게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후커의 유명세로 인해 생긴 말이다. 전쟁 후 소장으로 퇴임했고 1879년 오늘, 사망했다. 고향인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 멋진 모습의 기마상이 있다.
박병선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0월 3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7330&yy=2009
1875 - 인도의 변호사, 정치가 파텔(Patel, Sardar Vallabhai) 출생
파텔 [Patel, Vallabhbhai Jhaverbhai, 1875.10.31∼1950.12.15]
1874 - 청, 타이완 출병을 둘러싼 베이징조약 체결
1864 - 네바다주가 미국의 36번째 주가 됨
1864 - 아이슬란드의 시인 에이나르 베네딕트손(Benediktsson, Einar) 출생
베네딕트손 [Benediktsson, Einar, 1864.10.31~1940.1.14]
1847 - 이탈리아의 전기공학자 갈릴레오 페라리스(Ferraris, Galileo) 출생
페라리스 [Ferraris, Galileo, 1847.10.31~1897.2.7]
1846 -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아미치스 출생
1846 - 이탈리아의 신문기자, 소설가 데아미치스(De Amicis, Edmondo) 출생
오네글리아 출생. 모데나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받은 뒤 포병대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독립전쟁에 참가하였다. 1868년 《군대생활 La vita militare》을 출판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1870년 작가로 전향하여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많은 여행기(旅行記)를 썼다. 1886년 교육적 내용의 작품 《쿠오레 Cuore》를 출판하여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오늘날까지도 온 세계 어린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1906년 《고상한 말》을 써서, 언어에 관한 견해를 나타냄으로써 크게 평가를 받았다.
1835 - 남색물감 발명으로 물리학상을 수상한 독일 화학자 J.폰 베이에르 출생 /동아사이언스
1835 - 독일의 유기화학자 아돌프 폰 바이어(Baeyer, Adolf von) 출생
바이어 [Baeyer, (Johann Friedrich Wilhelm) Adolf von, 1835.10.31∼1917.8.20]
1828 - 전기램프를 발명한 영국의 발명가 조셉 윌슨 스완 출생 /동아사이언스
1795 - 영국의 시인 존 키츠(Keats, John) 출생
키츠 [Keats, John, 1795.10.31~1821.2.23]
1795 - 영국 시인 존 키츠 출생
[책갈피 속의 오늘]1795년 존 키츠 출생
바이런과 셸리, 그리고 키츠.
19세기 초반 낭만주의 시대에 별처럼 빛나는 이들 시인은 모두 요절한 천재의 운명을 타고났다.
바이런과 셸리가 낭만주의의 시발점이 된 ‘슈트롬 운트 드랑(질풍과 노도)’의 세월을 살았다면 키츠의 삶은 좀 더 은밀하고 영적(靈的)인 향기로 채워졌다.
바이런이 ‘시단(詩壇)의 나폴레옹’이었다면,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던 셸리가 사회개혁과 인류개조의 이상을 꿈꾸었다면,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후계자였던 키츠는 고전에 뿌리를 두고 지극히 미학적인 예술세계를 지향했다.
바이런의 뜨거운 정열이나 셸리의 웅변에 비해 키츠의 정서는 섬세하면서도 단아했다. 그의 내면은 ‘희랍의 옛 항아리’에서 읊은 것처럼 ‘들리는 멜로디는 달콤하다/그러나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 달콤하다’고나 할까.
마차 대여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키츠.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그의 생전은 불우했다.
키츠가 폐결핵으로 숨지기 이태 전에 만난 생애 유일한 사랑 패니 브라운조차 ‘시인의 진정한 뮤즈’는 아니었다.
바람을 맞으면 저절로 울린다는 에올리언 하프처럼 섬세한 감정을 지닌 시인에게 ‘방종(放縱)에 들뜬’ 연인은 지옥이었다. 그는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패니 때문에 괴로워했다. “사랑의 촉감(觸感)은 기억을 품고 있네/오! 사랑이여/그것을 죽여버리고 자유를 되찾으려면/어떻게 해야 하느냐.”
패니는 생기발랄했다. 진지한 대화를 싫어했으나 재기 넘친 수다와 요염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는 그에게 문학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과도한 열정(熱情)은 치명적이었다.
마침내 ‘당신의 아름다움과 나의 죽음의 시간/아, 그 둘을 동시에 소유할 수 있다면…’이라고 노래하는 시인. 그는 1821년 이국땅에서 그녀가 선물로 준 흰색 조약돌을 손에 꼭 쥔 채 쓸쓸히 숨을 거둔다.
키츠의 묘비는 그의 유언에 따라 이렇게 씌어졌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쓴 자 잠들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일보 2003-10-30 18:0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2&oid=020&aid=0000212205
1795 - 영국 시인 존 키츠 출생
[오늘속으로(10월31일)] 키츠
1795년 10월31일 영국 시인 존 키츠가 런던에서 태어났다. 1821년 로마에서 몰(沒). 키츠의 생애에는 ‘낭만주의 시인’과 관련해 상상할 수 있는온갖 상투적 이미지들이 버무려져 있다. 키츠는 우선 가난하게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런던의 마부였다. 키츠는 열네 살에 고아가 되었다.
뒷날 그의 추억을 ‘애도네이스’라는 작품에 담은 퍼시 비슈 셸리를 비롯해 윌리엄 해즐릿, 윌리엄 워즈워스 등 당대 영국의 대표적 문인들과 교분이 있었지만, 키츠는 그들에 비해 너무 초라한 자신의 출신 성분을 평생괴로워했다. 그는 유일한 사랑이었던 약혼녀 패니 브론과 결국 결혼하지못하고, 25세를 막 넘긴 뒤 이국 땅에서 요절했다.
요컨대 키츠의 생애는 그리 유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생애는 19세기 영국 시문학의 순금 부분을 대표한다. 키츠의 생애와 작품들은, 일찍 절필해버린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경우와 더불어, 예술적 역량이 나이와 함께 무르익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예일 것이다. 키츠가 유언으로 남긴 자신의 묘비명은 “여기, 이름을 물위에 새긴 사람이 잠들다”였다.
영국 낭만주의 시의 가장 높은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오오 아티카의 형체여! 아름다운 자태여!/ 대리석의 남자와 여자를 섞어 조각한/ 숲의 나뭇가지들과 짓밟힌 잡초로 장식한/ 말 없는 형상이여, 너는 영원이 그런 것처럼/ 우리를생각이 미칠 수 없게 괴롭히는구나, 차가운 목가여/ 노년이 이 세대를 황폐케 할 때/ 너는 우리의 고통과는 다른 괴로움의 한 가운데/ 인간의 친구로 남아 인간에게 말하리/ ‘아름다움은 진리요, 진리가 아름다움’이라고, 이것이/ 너희들이 세상에서 아는 전부고 알아야 할 전부니라.”
고종석 /한국일보 2003-10-30 17:4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3&oid=038&aid=0000205104
1705 - 로마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 출생
클레멘스 14세 [Clement XIV, 1705.10.31~1774.9.22]
1638 -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마인데르트 호베마(Hobbema, Meindert) 출생
호베마 [Hobbema, Meindert, 1638.10.31~1709.12.7]
1632 - 네덜란드의 화가 얀 베르메르(Vermeer, Jan) 출생
베르메르 [Vermeer, Jan, 1632.10.31~1675.12.15]
95개조 반박문 /위키백과
1517 - 독일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의 교회 정문에 붙이면서 종교 개혁이 시작되다. /위키백과
마르틴 루터 /위키백과
1517 - 루터, 면죄부 비판… 종교개혁 점화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붙였다. 돈에 대한 교회의 무절제와 면죄부 판매행위를 격렬히 비난하는 공개 반박문이었다. 인쇄업자 손에 들어간 반박문이 단 2주 만에 독일 구석구석까지 퍼지면서 루터는 당대 최고의 종교개혁가로 부상했다.
1521년 4월 21일 그의 죄를 신문하기 위해 보름스 독일 의회가 열린 이날,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5세가 물었다.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겠느냐?” 이튿날 루터가 “저는 제가 인용해 온 성서와 제 양심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며 황제의 요구를 거부하자 일부 광신도들이 그를 “불속에 넣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카를5세는 루터의 후원자인 프리드리히 선제후(選帝侯)와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그를 화형에 처할 수 없었다.
며칠후 루터가 보름스를 벗어났을 때 갑자기 복면의 한 무리가 그를 낚아채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도착한 곳은 선제후의 성이었고 그는 그곳에서 1년을 지내며 성서 번역에 매달렸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일어 성서야말로 진정한 종교개혁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구원은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했고 권위는 ‘오직 성서’에만 주어질 뿐이었다. /조선
1517 - 루터, 95개 조항 발표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에 대한 95개 조항을 작성해 비텐베르크의 교회 정문에 붙였다. 이 사건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본다. 루터는 당시 논쟁과 토론을 유도하는 관행을 따라 이 조항을 교회 문에 못박아놓았다. 반박문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교리로서 규정된 면죄부의 남용에서 비롯되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재정난을 이기기 위해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까지 면죄부를 판매하자 신학자들 사이에서 큰 반발이 일었다. 게다가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행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비리들이 생겨나자 루터는 신학상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95개 조항을 발표했다. 루터는 자신이 제기한 문제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을 알고 95개 조항에 대한 설명을 실은 장문의 라틴어 문서를 1518년 가을에 출판했다. 이로 인해 루터는 교황권과 충돌하게 되었고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파문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시작으로 독일의 종교개혁 운동은 다양하게 분화·발전되어 개신교의 기초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1517 - 마르틴 루터의 면죄부 비판
[어제의 오늘]1517년 마르틴 루터의 면죄부 비판
ㆍ교회 세속화에 반기 종교개혁 불씨
1999년 10월의 마지막날, 루터교회 세계연맹과 로마가톨릭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촉구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한다. 신성로마제국(지금의 독일) 변방의 한 수도사가 종교개혁의 선봉에 선 지 482년 만의 일이다.
1517년 10월31일 정오,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건다. 교회가 연옥에 있는 영혼까지 들먹이며 면죄부를 파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전임자의 저금, 자신의 수입, 그리고 다음 교황이 지불할 부채’까지 세 교황의 재산을 탕진할 정도로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에 열을 올렸다. 독일 마인츠 대주교는 교구 두 곳을 갖기 위해 교황청에 엄청난 상납금을 내야 했다. 설교자 테첼은 “금화를 면죄부 헌금함에 넣어 딸랑 하는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영혼은 천국으로 향한다”는 말로 신자들을 현혹하면서 윗분들의 뜻에 부응하고 있었다.
1483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고향 집에 다녀오던 길에 번개가 바로 옆 수풀에 떨어지자 큰 충격을 받고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에 들어간다. 면죄부 발행은 십자군 전쟁 때부터 행해지던 관습이었지만 비텐베르크 지역에서는 금지돼 있었다. 대학의 성서학 교수이기도 했던 루터가 면죄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자신에게 고해할 신자들이 이웃 마을에서 면죄부를 사고 그를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의 세속화를 비판하는 논제를 교회 정문에 게시한 것도 학계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소도시의 학문적 토론을 위해 던진 조그만 불씨는 의도와 달리 거대한 개혁운동으로 유럽 전체를 활활 태우게 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도 루터의 글을 순식간에 퍼뜨리는 데 한몫을 했다.
이단으로 기소된 루터는 1521년 1월3일 공식 파문된다. 교황청의 추방명령 이후 루터는 그를 후원하는 지방 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 지내면서 독일어판 신약성서를 펴낸다. 이후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 제네바에서는 칼뱅이 일어나 각각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한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에서는 그러나 신교도 구교도 승리하지 못했다. 증오와 분열을 뛰어넘는 것도 종교개혁운동이 남긴 하나의 과제인 셈이다.
임소정기자 /경향신문 2009-10-30 17:58:5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301758535
1517 - 마틴 루터 종교 개혁 의견서 발표
[오늘의 역사]마틴 루터 종교개혁 의견서 발표
독일 종교개혁운동의 횃불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면서 신학교수인 마틴 루터가 <면죄부(免罪符) 에 관한 95개조 논제>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대학의 성(城)교회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올려졌다.
이 항의문은 마인츠의 대주교(大主敎) 교회의 알브레히트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판 면죄부에 대해 루터가 그 성사적(聖事的) 효과를 신학적으로 문제삼은 것이었다.
이것이 루터 자신의 예상을 넘어 유럽 전체에 파급되는 대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루터가 이와 같이 가톨릭교회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4·5년 전 그가 수도원 생활의 악전고투 속에서 바울의 '하나님의 뜻'이라는 복음을 재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인간의 영혼 구원이란 인간의 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가장 깊은 근원은 구원문의 정확성을 둘러싼 루터의 내적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8.10.30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5633
1517 - 루터의 면죄부 비판 대자보, 종교개혁 신호탄 되다
[그때 오늘] 루터의 면죄부 비판 대자보, 종교개혁 신호탄 되다
매년 10월 31일은 종교개혁 기념일이다. 1517년 이날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반박하는 95개 조 논제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대문에 내걺으로써 종교개혁을 출발시켰기 때문이다. 중세 가톨릭에서 사제는 미사 집전 시 신의 권능을 빌려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 누구도 사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이에 반해 루터의 종교개혁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만인(萬人)사제주의는 영적인 지위에서 사제와 평신도가 대등하다고 주장했다.
만인사제주의는 ‘인식론적 개인주의’를 천명했다. 신의 음성을 듣고 영감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의 뜻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다른 사람보다 옳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 모두 다 제각기 성경을 독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루터에서 비롯된 이 개인주의는 그 후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자유란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루터의 만인사제주의는 모든 참된 기독교 신자들의 영적 평등을 급진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유럽 사회의 존립 기반이 되었던 기존 계급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는 자신의 사상이 그런 의미를 갖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루터는 종교개혁 메시지를 확산시키기 위해 사회적·정치적 지도자들의 지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고, 이로 인해 종교개혁 운동은 급속히 보수화되었다. 실제로 루터는 1525년 이후 만인사제주의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루터가 마무리하지 못한 만인사제주의를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시인 존 밀턴이 완결지었다. 밀턴은 각 개인이 사제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목사를 ‘종교’로 삼는 개신교 신자들을 ‘가톨릭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신랄하게 규탄했다. 밀턴은 만인사제주의의 실현을 위해 제2, 3의 종교개혁을 촉구했다.
종교개혁의 후예를 자처하는 한국의 개신교 목사 중 상당수가 가톨릭의 사제주의로 환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도 등장하면서 가톨릭의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을 연상케 만든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는 교황이 한 명뿐이지만 개신교는 교회마다 교황이 한 명씩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고 있다. ‘정체성 상실’이 빚어낸 씁쓸한 풍경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중앙일보 2009.11.03 00:11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2002&Total_ID=3855386
1512 -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 완성되어 교황의 미사 후에 일반에게 공개
1512 -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프레스코화를 완성하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1508-1512)
미켈란젤로는 1508년 5월 10일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4년 동안 천장벽화의 프로그램을 짜고 설계하여 그 계획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다. 일반인은 물론 교황까지출입을 통제시키고 천장 밑에 받침대를 세워 직접 그렸다. 얼굴에는 온갖 물감이 흘러내려 피부병이 생기고 몸은 하프악기처럼 휘어지고 항상 고개를 뒤로 제치고 그렸기 때문에 고개가 굳어 목이 잘 굽혀지지 않는 고통스럽고도 고된 작업이었다.
1512년 10월 31일 시스티나 성당이 교황의 미사 후에 마침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바사리의 기록에 의하면 작업이 공개되었을 때 온 세상 사람들이 미켈란젤로가 무슨 그림을 그렸는가를 보려고 달려왔고 그것을 보고는 너무도 경탄하여 할말을 잊은 채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관람객의 머리 위로 수천 피트 넓이의 천장에는 300명이 넘는 인물들이 어떤사람은 실물보다 3.4배나 더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창세기의 여러 장면들을 연출해 다양한 위치에서 본 것 같이 그렸다. 찬란한 색채로 그려진 천장은 이제까지 본일이 없는 거의 압도적인 거대한 스케일로 제시된 가장 거창하고 야심찬 화려한 장식이었다.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45962&logId=1432917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벽화는 10월 31일 완성되어, 11월 1일 교황의 축성미사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Sistine Chapel-Ceiling
Julius II's decision to completely renovate the decoration of the Ceiling was probably due to the serious problems of a static nature that affected the Sistine Chapel from the earliest years of his pontificate (1503-1513). They must have been the result of the excavations carried out both to the north and to the south of the building for the construction of the Borgia Tower and for the new St Peter's. After a long crack had opened in the Ceiling in May 1504, Bramante, then the Palace architect, was charged with finding a solution and he fixed some tie rods in the area above the Chapel. However, the damage suffered by the old painting must have been such as to convince the pontiff to entrust Michelangelo with a new pictorial decoration. On 8 May 1508, the artist signed the contract which foresaw the painting of twelve apostles in the pendentives and ornamental motifs in the rest. Subsequently, at the request of Buonarotti himself, who considered the project to be a "poor thing", the Pope gave him a new commission in which he left the full planning of the programme to the artist. It is however quite likely that for his creation the artist availed of the cooperation of the theologians of the papal court. Michelangelo placed nine Central stories illustrating episodes of the Genesis within a powerful painted architecture, with at their sides figures of Nudes, holding medallions with texts taken from the Book of Kings. At the base of the architectural structure twelve Prophets and Sibyls seated on monumental thrones are countered lower down by Christ's forefathers, portrayed in the Webs and in the Lunettes (north wall, south wall, entrance wall). Finally, in the four corner Pendentives, the artist illustrated some episodes of the miraculous salvation of the people of Israel. Michelangelo completed the first half of the Ceiling, that is from the entrance wall to the Creation of Eve, in August 1510. The work must have been completed by 31 October 1512, as the Pope celebrated Mass in the Chapel on 1 November.
/Vatican Museums
http://mv.vatican.va/3_EN/pages/CSN/CSN_Volt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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