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범(蔡仁範 : 934~998)은 중국 천주(泉州 : 지금의 중국 福建省 동남부) 출신의 인물로 그 주의 지례사(持禮使)를 따라 970년(광종 21)에 고려로 왔다. 광종을 배알하고는 곧 예빈성낭중(禮賓省郎中)에 임명되고 주택을 비롯하여 노비와 토지를 하사받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고려에 귀부(歸附)할 목적으로 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벼슬은 성종 대에 합문지후 상서예부시랑(閤門祗候 尙書禮部侍郞)을 지냈다. 998년(목종 원년) 65세로 사망하였으며, 사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다가, 현종이 즉위한 해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그는 최씨(崔氏)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의 관직이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內史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監修國史)에 이르렀다고 할 뿐 이름은 적지 않고 있다. 본 묘지명에서는 그의 아들들의 이름은 전혀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그의 사후인 목종대나 본 묘지명이 만들어진 현종 대에 이런 고위직을 가진 채씨 인물은 채충순(蔡忠順) 뿐이다. 채충순은 현종 18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는데, 그의 출신에 대해 『고려사』에는 ‘사실세계(史失世系)’ 라고 하였지만 그가 채인범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묘지명은 고려시대 최고(最古)의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남아 전하는 묘지명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의 묘지명으로는 고구려 사람 천남생(泉男生)·고자(高慈) 등의 묘지명을 비롯하여 7점 정도가 실물로 전하고 있으며, 백제 사람의 것으로도 부여륭(扶餘隆)과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의 묘지명이 남아 있지만, 모두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지금도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이다.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은 흔히 묘지(墓誌)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 형식과 내용은 매지권(買地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김용선씨의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에는 가장 오래된 고려의 묘지명으로 김은설(金殷說)의 것을 들고 있지만 이는 족보에 남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나라에 남아 전하는 최고(最古)의 묘지명은 바로 이 채인범의 묘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묘지명은 중국의 한대(漢代)에 시작되어 당(唐)나라 때에 매우 성행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묘지명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으므로,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야 묘지명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묘지명들은 고려에 귀화한 중국사람들이 처음 만들었음을 본 묘지명이나 아래의 유지성(劉志誠)의 묘지명의 예로 보아 알 수 있다.
본 묘지명은 가로 세로의 정간(井間)을 그은 다음 단정한 글씨로 새긴 우수한 작품이다. 그간 오른쪽 윗부분이 깨어져 나간 채로 판독되었으나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깨어진 조각을 찾아 새로 촬영한 사진을 공개하여 전문(全文)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첫댓글 고거전 17화에서 채충순이 말하길 '자신은 송에서 귀화한 가문이라 왕께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길래 한번 검색해보았슴다.
채충순은 고려의 호족 입장에서는 외국인 2세대 였네요.(아버지대 부터 귀화했지만)
@노스아스터 광종 때 귀화하여 고려에서 채충순을 낳았다고 추정하면 채 평장사는 고려인이 맞긴 합니다. ㅎ 허나 신라말기부터 형성된 호족들에겐 ‘뭐 뭐야, 저거 어디서 근본없는..’ 생각을 할수도 있겠지요. 드라마이자 엔터이니 채충순이 송에서 귀화한 채인범의 아들로 묘사할순 있다고 봅니다. 학문에서는 현종때 평장사를 지낸 채씨는 채충순이라 채인범의 아들의 가능성을 매우 높게 추정할 뿐이죠. 묘비명에 이름이 확실히 나왔다면 100퍼였을텐데. ㅎ
그래도 송나라 출신 메이커라 생각했을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