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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 큰스님]서암 큰스님의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
서암 큰스님의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70 년대 중반, 겨울 방학을 이용한 저의 운수행각(?)이 문경 봉암사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불교가 뭔지 정말 아무 것도 모를 때라 봉암사가 어떤 절인지도 모르고 정처없던 발길이 그냥 봉암사에 닿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 봉암사는 산골 중의 산골로, 버스가 하루에 두 번 정도 밖에 다니지 않아 근처 가까운 마을에서 내려 20 리 흙 길을 걸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찾아 간 봉암사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때 봉암사에 계신다는 도인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봉암사에는 세상에 얼굴을 들어내지 않고 오로지 수행만 하시는 숨은 도인이 한 분 계시는데, 지금 조실 스님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도인은 세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신다는데, 아! 이 분은 정말 대단하신 분인가 보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와 함께 엉뚱한 궁금증이 하나 솟아났으니, 그것은 진정한 도인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인은 우리와 생긴 것도 다를 것(?)이라는 게 그 때까지 저의 철석같은 믿음 중의 하나라, 진정한 깨달음을 이룬 분의 모습을 꼭 뵙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고 법명도 모른 체 다만 봉암사에 숨어 계신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고 봉암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바로 서암 큰스님이셨습니다.
서암 큰스님의 모습을 뵙게 된 것은 성철 큰스님이 열반하시고 새로이 종정직을 맡게 되셨을 때입니다. 어린 시절의 궁금하던 봉암사 도인을 그 때 사진으로나마 뵙게 되는데, 제게 비친 큰스님은 비범하게 생기신 도인이라기보다는 그냥 평범한 마음씨 좋은 시골 이웃집 할아버지 같으신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큰스님은 참으로 소탈하시며 중생의 고통에 관심이 많고 속정이 깊으신 분이 아닌가 합니다. 법문도 그렇지만 당신이 필요한 곳에는 체면이나 형식에 구애 없이 언제나 자비심으로 현현하시는 모습이 그런 것을 느끼게 합니다.
94 년인가? 조계종이 한참 분규에 휩쓸렸을 때, 그냥 아무 말씀 안 하시고 가만히 계셨더라면 종정에서 쫓겨나는(?) 수모는 겪지 않으셨을 텐데, 한 말씀 내리신 것이 당시의 기득권 층을 보호하는 것으로 개혁파 스님들에 의해 오해받아 종정직에서 쫓겨(?) 나다시피 하신 스님. 그리고 그런 수모에도 아무 말씀 없이 이름 없는 토굴에 내려가셔서 당신의 수행을 이어가시던 스님. 다소 시큰둥하게 보일 정도로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느껴지는 중생에 대한 깊은 자비심은, 봉암사 도인이라는 세간의 말씀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설법을 하실 때면 종종, 어린 중생들을 능히 구제해 줄 만한 법력이 당신께 없음을 안타까워 하시던 스님. 그래서 대중들에게 깊은 자비심으로 더욱 큰 정진 이룰 것을 부탁하시며, 당신보다 더 뛰어난 수행자가 되어 중생들의 아픔을 거두어 주시기를 신신당부하시던 스님. 그런 서암 큰스님이 떠나시니 마치 자애로운 어버이를 잃은 듯한 마음입니다.
최근 나라 안팎 사정이 어려운데, 이런 때 계시기만 해도 힘을 주실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선지식들이 이렇듯 홀연히 사바 세계와의 인연을 거두시니 저 같은 어린 중생은 어찌 하란 말씀인지... 허전한 마음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80 년 이후 얼마나 많은 선지식들이 사바와의 인연을 접으셨습니까. 그리고 몇 분 남지 않은 선지식들도 이제 대부분 연로하시어 인연을 거두실 날이 그리 멀지 않으니, 세상의 무상함이 더욱 아프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세월은 무상하여 잠시도 쉼이 없는 법. 우리 모두 더욱더 큰 정진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普賢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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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떡쇠님이 이전에 올려주신 서암큰스님 대담 기사입니다.
큰스님 법문을 다시 한번 들어봅니다...*^*^*_()_
[서암 큰스님]
[자기 마음 자기가 찾아 쓰라는게 부처님 가르침인데 밖에서 찾아요]

부처님 법대로 살면 불교도 발전하고 세상도 바로 서요
사회와 유리된, 당대 민중들의 삶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 종교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 한국 불교계가 ‘깨달음의 사회화’ 혹은 ‘생활 불교’라는 화두로 고심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고,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불교는, 세상의 병증(病症)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이를 치유하는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에는 미온적이다. 오히려 조계종단의 잦은 분규로 인한 불교계 전체의 이미지 실추는, 세상으로 하여금 불교를 더 걱정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지난해 말 ‘불교 바로 세우기 범불교 재가연대’가 결성된 것도 그러한 의구심에 대한 불교계 내부의 반성적 자기 점검이라 할 수 있겠다.
‘불교 바로 세우기’란 결코 불교계 내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제8대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서암 큰스님을 뵙고 한국 불교의 혁신을 위한 경책의 말씀을 들었다.
―세상이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불교적 처방부터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불교는 마음 밝히는 종교예요. 그런데 모두들 바깥으로 손을 내저으며 어떤 위대한 힘이나 신비로운 능력을 구해요. 여기에서 모든 착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 노력을 하지 않고 밖으로 기적이나 어떤 힘을 갈구한다는 자체가 근본적인 잘못이에요.
물질 추구도 마찬가지예요. 바깥으로만 돌다보니까 믿을 거라곤 재물밖에 없어 보이고, 그러다 보니 물질에 예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다툼이 생기고 혼란이 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내부 즉 마음을 살피라는 겁니다. 천하에 쉬운 게 불교예요. 세상에 불교보다 쉬운 게 없어요. 자기 마음을 자기가 찾아 쓰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스스로 자기 마음을 속이고 엉뚱하게 바깥으로 헤매니까 세상이 어지러운 겁니다. 자기 마음을 밝히면 세상은 저절로 밝아집니다.
―불교의 사회적 책무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불교는 안타깝게도 사회적 지도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불교 자체가 지금 병들어 있어요. 그러니 어찌 제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말 조계종단 분규 때도 일반 언론으로부터 아수라 조계종이라는 야유를 듣지 않았어요? 이 정도로 사회적 신용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불교 고유의 사회적 책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불교가 바로 서면 나라가 바로 서고, 불교가 병들면 모든 게 병든다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바른 이치가 통하지 않으니 세상이 어지러울 수밖에요. 지금 이 말이 새삼스럽게 상처를 건드리자는 게 아니예요. 좀더 솔직히, 냉철하게 자신의 모습을 살피자는 뜻이지요. 지금 서 있는 지점을 명확히 알아야 가야 할 목표도 세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남을 가르치기 이전에 항상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처님 가르침 한 마디라도 제대로 실천하면 되는 건데, 건성으로, 말로만 불법을 들먹이니까 병이 생기는 겁니다. 한국 불교의 현실을 직시해 보세요. 거기에 문제점도 있고 해결책도 다 들어 있어요. 나 같이 산중에 사는 사람한테 물을 것도 없어요.
―불교계의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데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요.
▲먼저 승려 자신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과연 ‘인천사(人天師)’의 자격이 있는가 하는 자기 반성부터 철저히 해야 합니다. ‘인천사’라는 게 뭡니까. 인간 뿐 아니라 천상 세계에서도 스승이라는 말이예요. 그만큼 고귀한 존재가 바로 승려예요. 따라서 승려는 남을 제도하기에 앞서 자신부터 밝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중생 제도는 저절로 되는 겁니다. 한암 스님 같은 분 보세요. 오대산에 가만 앉아서 설법 한 마디 안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았어요. 한암 스님 얼굴 한 번 못 보고, 음성 한 번 듣지 않았던 사람들도, 입만 벌리면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도 한암 스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를 숙이곤 했어요. 참된 수행자의 덕화는 그런 겁니다. 향기와 같은 것이지요. 향기가 벌을 불러 모으듯이, 여법한 행동만으로도 중생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나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 화상이 법당을 짊어지고 왔습니까. 머슴살이를 하면서 이 땅에 불심의 씨앗을 뿌렸어요. 그러면서도 이 민족의 정신 세계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이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오늘날 승려들은 옛 조사들의 그림자에만 안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하루빨리 인천사로서의 자기 본분을 자각하고, 일거수일투족이 부처님의 제자다워질 때 그 향기가 시방에 두루퍼져 뭇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겁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대형 불사 위주의 외형적 성장이나 행사 위주의 포교도 썩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으로도 들리는데요.
▲불교라는 종교의 바탕은 정신입니다. 물질이 아니예요. 근본적으로 물질적 성장추구는 비불교적인 거예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보세요. 맨손으로 설산 고행을 했고 맨손으로 나왔어요. 물질로 세상을 구한 게 아니라는 거지요.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최소한의 물질로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사는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비구를 일컬어 걸사(乞士)라고도 합니다. 얻어 먹는 선비라는 말이지요. 얻어먹음으로써 일체중생을 다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의 스승이기 위해서 얻어먹는 것이고요. 이것만 봐도 불교는 돈 가지고 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있지요.
부처님을 보세요. 부처님도 얻어자셨어요. 탁발의 정신 즉 걸사의 정신이란, 오욕락을 초월해서 사는 출가 수행자의 청빈한 삶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가 아만과 아집을 굴복시키는 하심의 수행이자 보시한 사람에게는 베풂의 공덕을 주는 보살행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듯 수행자는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능히 중생을 제도하는 겁니다. 떳떳이 얻어먹고 얻어먹음으로써 오히려 존경을 받는 것이지요.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흉내라도 내야 해요. 부처님의 행과 동떨어진 것은 불교와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 절 저 절 파당을 짓거나 절집에서 재산을 쌓는 일 같은 건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름만 걸어놓은 종단까지 치면 100개가 넘어요. 이건 무얼 의미하느냐. 그 옛날 구산 선문과 같은 사상적 갈래가 아니라 분란이에요. 이제 불교는 새출발을 해야 합니다. 출세간법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문제 해결도 못해서 세간법에 의지해 재판을 하는 추태는 다시 없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체중생을 구제한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누구 하나 듣지 않습니다. 인천사라는 사람들이 관청 사람한테 찾아가 이 중이 잘했소 저 중이 잘했소 한다면 누가 그를 스승으로 여기겠습니까. 부디 부처님의 정신으로 돌아가 1600여년에 걸친 아름다운 불교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는 데 모두가 일심으로 노력을 기울입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의 한국불교는 자기 구제부터 확실히 하는 각오로 새로이 시작해야 합니다. 썩은 살은 도려내어야 새 살이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좋은 차 타고 다니면서 온갖 호강은 다 하는 자세로는 중생 구제는커녕 자기 구제도 못해요.
―그렇지만 아직도 여법하게 수행하는 스님들도 많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과거도 지금도 대부분의 승려들은 공부 잘해요. 항상 일부가 문제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승려들은 그런 꼴이 보기 싫어서도 공부를 합니다. 그런 사람 많아요. 그런 이들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불교는 발전합니다. 진짜 공부하는 스님들은 그러한 행위만으로도 중생들을 이롭게 합니다.
―큰스님께서 오랫동안 조실로 계셨던 봉암사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것에 얽힌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을 법한데요.
▲사연이 많았지요. 봉암사마저 관광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평생 안 가 본 청와대도 가 보고 건설부도 가 보고 국회도 가 보고 그랬어요. 가서 그랬어요. 천년 고찰을 관광지 만들어서 도인 못 살게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 했지요. 그래서 도립공원인가 뭔가로 지정되기로 결정된 걸 뒤집었어요. 옳은 소리는 총칼로도 누를 수 없는 것이거든요. 물론 사찰은 수행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공간이기도 하고 중생 교화의 공간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찰을 봉암사처럼 할 수는 없지만 상징적인 의미로라도 그러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한국불교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절에 들어가는 데도 극장 가듯이 돈 내고 들어가게 해서는 안되요. 사찰 재정도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돈 없는 사람은 부처님 세상에도 못 찾아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서는 안 되요.
―큰스님 말씀대로 조계종단의 잦은 내홍으로 인한 불교의 이미지 실추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안정을 회복하고 있고 대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찰이 환경 보호에 적극 나서는 한 예이고 말입니다. 이러한 활동이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사부대중이 힘을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한 당부 말씀 한 마디 일러 주십시오.
▲거듭 말하지만 불교 만큼 간명한 진리는 없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이 우주 만물을 창출해 낸 근본자리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사세요. 그래야만 똑바로 살 수 있습니다. 조물주니 신이니 하는 넋빠진 소리 하지 말고,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밝게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우주의 주인공이에요. 만물만생이 절대 평등한 존재인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부처님 한분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라 일체 중생이 절대 평등해서 다 본래 부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도리를 제대로 알아야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없어요. 천하의 사람이 다 칭찬을 한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에 터럭 하나 보탤 게 없고, 천하의 사람이 다 자신을 욕한다고 해도 터럭 하나 뽑혀 나가는 게 아니예요.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도 자신의 인생을 간섭할 제3자는 없어요. 이걸 모르고 정신 없이 살면 중생이고 똑똑히 알면 부처예요. 결코 저 금물 칠한 불상이 부처가 아니예요. 그런데 바깥으로 헤매고 찾고 하면 어지러워집니다. 자기 마음 찾으면 성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뭘 구제하겠다는 둥, 광고 문구 같은 도인 흉내 같은 건 내지 마시고, 부처님 법대로 살면 불교도 발전하고 세상도 바로 서는 겁니다. 오늘의 인류 문명 자체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입자니 원자니 소립자니 하는 현대 물리학이 찾아낸 물질의 근본 또한, 만유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공의 의미를 확인시켜 주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어찌 부처님의 근본 사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문 밖에서 얼찐거릴 겁니까. 부처님 법대로 사세요. 부처님 법대로 포교도 하고 불사도 하면 다 잘 될 겁니다.
―잘 새겨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곧 물러 나려고 하니까 큰스님의 근황이나 일과가 궁금해지는데요.
▲늙은 사람이 무슨 일과가 있겠어요. 먹고 싶으면 먹고 졸리면 자지요. 그야말로 천하태평이요.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은 없습니까.
▲조금 모자라는 사람들이나 가끔 찾아와요.
-교통이 불편해서 거동하시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조금만 걸어 나가면 버스가 다녀요. 손만 들면 세워 주는데 얼마나 편해요. 불편할 거 하나도 없어요.
―무위정사(無爲精舍)라는 당호처럼 그렇게 걸림없이 사시는 것 같습니다.
▲세간 법을 떠나서 사니까 무위는 무위인 셈이지. 하지만 몸을 가지고 사는 한 걸리지 앓을 수야 없지요. 소변 마려우면 눠 줘야 하고, 갈증이 난다면 물도 먹어 줘야지요. 몸 벗기 전에는 이놈 말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어요. 버릴 땐 미련 없이 버려야 할 몸뚱이지만. 자 그럼 이런 너절한 얘기는 치우고 죽이든 밥이든 먹을 것은 있으니까 하루 푹 쉬었다 가세요.
하룻밤 묵어 가라는 스님의 말씀을 뒤로 하고 마당으로 내려 서니, 바람 한 점 없는 6월 한낮은 물 속처럼 가라 앉아 있는데, 간간이 새 울음 소리는 오히려 산중의 고요를 더하고 있었다. 서암 큰스님 또한 그러한 고요의 일부가 되어 산처럼 살고 계셨다.
---- 현대불교신문 2000-06-21 【큰스님과의 대화】서암당 홍근 큰스님 (前 조계종 종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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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스님 극락왕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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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