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과제를 처음 받고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위해 노력했었다. 지나가는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풍경을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그 상상은 모두 보이는 풍경만 상상하여 변한다는 것이 한계였다. 이러한 한계 속 익숙한 낯설음이란 무엇일까 한참 생각하다가 모든 것의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낯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내가 ‘익숙하다’라고 인지하는 것들도 처음 접했을 순간에는 낯설은 것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의 일상이 떠올랐다. 나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 제주도에 내려와 홀로 살고 있는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버스를 타러가는 곳도 쓰레기를 버리는 곳도 몰라 난감한 경험이 있었고 대충의 지리도 몰라 어디에 뭐가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 대체 어디를 가야할지 막막했다. 학교에 다닌 지 반년 조금 넘은 시간이 흘렀지만 내게 등교하는 버스는 너무 익숙한 장소가 되었다. 사실 아직 가보지 않은 등굣길이 아닌 지역은 생소하고 이름만 들으면 어디에 위치하여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수도 없이 다닌 등굣길은 나에게 너무 익숙한 장소가 되어있었다. 근데 또 이 새로운 곳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당연한 회로에 갇혀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똑같은 등교와 수업 체계 그리고 시험까지 조금씩 변하긴 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현대 교육체계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학습 방법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잦은 시험들은 우리에게 좌절 또는 기쁨을 준다. 이러한 좌절 혹은 기쁨 또는 이로 인해 생겨난 다른 감정들이 사라지기 전에 이 과정이 계속하여 반복된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이 순환에 중독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마냥 부정정인 감정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이 체계에 익숙해진 만큼만 고개를 돌리면 새로운 감정이 들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아닌 ‘삶’ 그 자체를 인식하는 데에 있어 낯설음을 인식한다는 것이 일상적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좋아하던 노래를 정말 오랜만에 들었을 때의 느낌은 낯설음보다는 작은 익숙함, 반가움이 클테니 만약 그래도 낯설음이 떠오른다면 나는 그것은 그것을 처음 느꼈던, 인식했던 상황을 떠올렸다고 생각한다. 내게 모든 것의 처음은 낯설고 그것이 주는 감정은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는 그러기에 낯설음을 찾기위해서 새로운 경험 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의 처음을 떠올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리면 정말 새롭고 상쾌한 기분도 조금 외로운 기분도 지금은 익숙해져서 느낄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그런 날들을 다시금 떠올리면 그 기분에 잠시 빠지기도, 너무 익숙해진 지금의 상태의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그 당시 한동안 나는 이곳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정말 비효율적일 정도로 바쁘게 살아봤었다. 매일 쓰레기를 버리고 매일 산책을 하고 안 가본 장소들을 찾아 떠났다. 빠른 시일 안에 익숙해졌지만 한편으론 조금 지쳤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익숙해지는 법을 택했다.
그러며 나는 우리가 익숙해지는 것에 익숙할 수 밖에 없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사랑을 해야 사랑이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했던 일들이 결국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니 사람이 그 일에 얼마나 마음을 꾸준히 쏟게되는 것인지가 그것을 더욱이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사랑뿐만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본인의 관심과 노력에 의해 대상이 더욱 견고해진다고 생각한다. 또한 무언가에 대해서 노력하면 그 노력이 쌓여 관심을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이 된다고 생각한다. 익숙해지기 위해 견디는 시간과 노력을 사회에선 교육한다. 한 체계로 만들어나가는 ‘그 시대의 삶’을 교육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그런 교육을 받아 온 나에게는 낯선 환경을 언제든 빨리 적응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견고해지며 만들어진 익숙함의 유의어가 무뎌짐인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무뎌져가는 세상 속에 어디서 힘을 얻고 살아가는지 이 무뎌진 감정들을 어떻게 환기 시킬 것인지도 생각하며 살아가는지가 내가 생각하며 살아가야하는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자신의 삶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삶을 환기시킨다고 생각한다. 순간순간 내게 영감을 주는 무언가는 내게 의도하지 않은 낯설음을 가져다준다.
학교 도서관에서 ‘내가 책을 읽을 때 눈으로만 읽는 것 같지만 가끔씩 나에게 의미가 있는 대목 어쩌면 한 구절만이라도 우연히 발견하면 책은 나의 일부가 된다.’라는 문구가 적힌 벽을 본 적 있다. 내게 최근 삶의 일부가 된 문장이 있는데 ‘내가 죽으면 이 넓은 우주가 의미 없어진다.’라고 불교 철학 수업에서 지나가면서 해주신 말씀이었다.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살아갈까 고민하며 살아가는 삶이 대부분인 것 같다. 많은 좌절들을 만날 때에는 무심코 내일 이 세상이 사라지거나 잠시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근데 나의 입장에서 이 넓은 우주가 내가 죽으면 내게는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갔던 것 같다. 사실 인지하여도, 비슷한 말을 많이 들었어도 상황에 의해 나의 상태에 의해 이만큼 다가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사실 한동안 시간의 유효성에 대해 그리고 내 삶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할 수 있었다. 오래오래 사랑하는 것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삶이 무한하다고 무심결에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말을 듣고 우주를 아무 의미 없게 만들 수 있는 나의 존재에 대해 정말 크게 느껴지기도 그럼에도 이 삶에서 유한성을 갖고있는 삶에 대해 정말 작은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내 인생이 멀리서 보였던 것 같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유한한 삶에서의 이루어낼 수 있는 노력과 결과, 많은 감정들과 성취에서 고민하고 또 계획해 나가는 것 같다. 내 삶이 낯설게 느껴지며 나 또한 앞으로의 나의 삶을 내 기준으로 계획할 수 있었다.
여름의 더운 날씨가 계속되면 선선한 바람을 그리워하고 추운 바람이 불어올 때 겨울에서의 사람들은 따듯한 햇살로 가득찬 계절을 그리워하듯 나의 인생도 가깝게 혹은 멀리 보일테지만 익숙하고 낯설은 계절을 반복하며 결국은 순간을 행복하게 살았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서를 준비하며 나를 인식하게 되고 낯설은 생각회로의 빠진 나에게 약간의 슬픔을 느끼기도, 많이 위로받기도 했던 것 같다. 또한 내가 삶의 주체이지만 가장 나를 잘 알고 지지해주는 사람 또한 나임을 느꼈다.
첨부하는 사진은 인문대학 2호관 계단에서 보인 풍경이다. 항상 보며 내려오는 풍경이지만 뭔가 어느날 다른 의미로 내게 인상깊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는 것 같다. 말 뿐만 아니라 그냥 환경에서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는 이럴 때 순간에서 살아가는 내가 재정의 되는 느낌을 받게된다는 것도 알았다.
앞으로도 이런 순간들을 많이 간직하고 내게는 익숙했던 무언가가 내게 새롭게 다가오는 그런 일들을 경험하며 더 다양한 감정을 느끼면서 살아가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너무 익숙해서 제가 찍은 사진인 줄로 알았습니다. 항상 보며 내려오는 풍경인데 뭔가 어느 날 다른 의미로 내게 인상깊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기 악기편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똑같은 음률이라고 하더라도 우울할 때와 기뻐할 때 다르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이 우주도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겠지요. "나'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